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큰일이다, 큰일이다, 허리를 삐끗 했다. 난 지금까지 허리 같은 거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아프지 않다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됐다. 아프지 않다는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였다. 지금 나는 나한테도 허리가 있었구나 하고 깊이 느끼고, 납작 엎드려서 계단 오를 때는 열네 살 아들의 등에 달라붙어 고려장 놀이를 한다. 그런데 축 늘어져 가슴이 두근두근 기쁜 건 망측한 어머니일까나.
그러나 아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만 고려장을 해 주고, 관객이 없으면 "으응, 업어 줘"하고 말해도 못 들은 척한다. 그 정도면 그나마 괜찮은데, "좋겠어, 허리 삐끗해서,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고. 어떻게 하면 허리 삐끗할 수 있어? 나도 좀 해 보게" 하고 퉁퉁댄다. 그럴 때는 정말 허리를 꺾어 주고 싶다. 효도도 남이 볼 때만 하는 놈.
입원했더니 동생은 "언니 팔자 좋네, 나도 입원하고 싶어. 요즘 전혀 사건이 없네. 생활의 변화가 필요해"하며 내 침대로 올라와 낮잠을 자고 돌아갔다.
가을다워졌다.
우리 집 개 모모코가 강아지를 낳았다. 얼굴은 시바견이고 몸은 닥스훈트인 모모코는 그 짧은 다리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하는 표정 탓에, 모든 사람에게 줄곧 조롱당해 왔는데, 강아지를 낳은 것만으로 또다시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들조차 "모모코를 좋아할 개가 있을까"하고 비관적이었기 때문에, 배가 커진 기색도 보이지 않던 모모코가 비 오는 날 강아지를 낳은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두더지 같은 세 마리의 강아지에게 젖을 물리고, 별안간 어머니의 눈초리가 된 모모코. 모모코를 보러 온 친구는 그 모습을 보더니 큰 입을 벌리고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게 15년 전, 아들을 낳고 젖을 물리고 있는 나를 보고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거리던 옛 친구를 생각나게 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강아지를 데려갈 사람에게는 모모코 보이지 마."라고 다들 말해서, 나는 또다시 상처 입었다.
그 어미의 추함을 알면서도 강아지를 데려가 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다섯 살 때 소꿉장난을 하기 위해 절의 스님이 정성들여 키운 국화꽃을 훔치러 갔다고 한다.
아이의 얼굴 크기만 한 꽃을 꺾어든 순간 스님에게 목덜미를 눌린 다섯 살의 어머니는 "쉬가 나와요."라고 외쳤고 스님이 놀라서 손을 놓은 틈에 도망쳤다고 한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 봐도 다섯 살 어머니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른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와 아들은 서른 살 차이가 나고 그 삼십 년의 역사가 아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나는 긴타로아메같이 그 삼십 년 중의 어디를 잘라도 아들에게는 한결같은 얼굴로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다섯 살 아들을 보는 것으로 다섯 살의 나를 한 번 더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열세 살의 아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열세 살의 삶을 살 수 없다. 그가 남자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들이 사십 대 여자인 어머니를 이해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리라. 나는 아들에게 몹시 거치적거리는 존재일 뿐.
요전에 심리학 책을 읽다가 '세상에 어른 따위는 없다. 단지 어른인 척하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접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아들이 "뭔데? 뭔데?" 하고 다가왔다.
나는 소리 내어 읽워 줬다.
아들은 "맞는 말이야. 뭐 뭐인 척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나쁜 사람이야"하고 말했다.
"예를 들면?" 하고 재촉했더니 "권력자. 그런 사람은 척하는 연기를 잘 할 뿐이야."라고 했다.
음, 제법 괜찮은데.
그러나 열세 살의 남자는 뭐 뭐인 척하는 것을 나보다 훨씬 더 잘한다.
공부하는 척하기,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하기, 불쌍한 척해서 동정심 유발하기.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아이 따위는 없다. 아이인 척하는 어른이 있을 뿐이다. 아이인 척하며아이의 권력을 휘두르지 마라. 나도 어머니인 척하는 거 힘드니까 말이야.
나도 열세 살의 소녀였던 적이 있으니까 말이야.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의 곡』을 반납하지 않고 탐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눈을 치켜뜨고 화냈다.
어머니는 내가 연애에 흥미를 갖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이것은 딸을 가진 인류의 어머니 모두가 한결같이 갖고 있는 공포다.
아버지는 "눈이 찌부러진다"며 겁을 줬는데 그 말이 맞았다. 내 눈은 난시와 근시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장녀인 나는, 내 뒤로 줄줄이 태어난 여동생을 돌보거나, 강으로 기거쥐를 빨러 가거나, 강에서 물을 떠오거나 하는, 가난한 집 아이라면 누구라도 하는 일을 똑같이 해야 했다.
기저귀의 응가를 물에 흘려보낼 때만큼은 왠지 상쾌하니 속이 후련했다. 응가는 둥실둥실 뜨거나 가루로 녹아서 흘러갔다.
나는 그렇게 가난한 집 아이의 노동을 하고 있자면, 한시라도 빨리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책을 읽고 싶었다.
어머니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게을러 빠져서"하고 소리쳤다.
책을 읽는 것이 나에게는 그처럼 나태한 쾌락이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책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책에 굶주렸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이 많은 집에는 새 책 살 돈이 모일 일이 없으므로, 나는 산길에서 근시와 난시를 입수한 후, 중학생이 되어서는 도서관에 틀어박였다. 중학생이 되자 아스팔트 길이 있는 중소 도시에 살면서 전철로 통학했고, 전철의 진동이 산길의 진동을 대신했다.
전철에서 책을 읽다 졸다 하면 꿈과 현실 사이로 활자가 흘러갔다. 일본 문학 전집도 세계 문학 전집도 연애 이야기로 가득했지만, 그렇게 훌륭한 전집을 읽고 있으면, 모파상이든, 안나 카레니나든 부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독서를 '게을러빠진 거'가 아니라 학력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될 만큼 세상이 편안해져 갔던 거다. 동생들도 자라서 기저귀 안에 응가를 하는 일도 없어졌고, 손을 안 잡아 줘도 혼자서 종종거리며 걸었고, 물은 길러가지 않아도 수도꼭지를 비틀면 물이 나오게 됐고, 밭에서 김을 매지 않아도 채소 가게에서 당근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도 나는 도서관을 내 집 삼아 들락거렸다. 나에게 특별한 지적 향상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고, 뜀박질 같은 거는 하기 싫었을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마음을 합하여 경기를 하는 것이 서툴렀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연애에 '가만히' 앉아서 포옥 몰입할 수 있는 것만큼 편한 것은 없다.
사실, 현실에서 연애를 거행하는 사람들은 책 같은 거 읽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확실하게 인생이란 것을 배운다.
책 속에서,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미지의 나라의 아가씨들과 메이지 시대의 꽁한 남자들이 나를 지나쳐 갔지만, 나는 그저 홀로, 나와 상대할 현실의 인간을 갖지 못한 채, 활자만을 눈 안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난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 아이도 낳고, 분주해지기는 했지만, 분주해도 나태한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뒹굴거리며 책을 읽고 싶다. 책 같은 거 읽지 않아도 할 만한 일이 산처럼 많은데도 벌렁 드러누워 책을 읽고 싶다. 나태한 쾌락이 몸에 배어 버렸다.

나의 독서는 그저 심심풀이다. 나는 따분함을 못 참는다. 하지만 타고난 게으름뱅이라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마음이 분주한 쪽을 선택하고 만다.
심심풀이로 읽기 때문에 활자는 그저 배경 음악처럼 흘러갈 뿐, 교양으로도 지성으로도 남지 않는다. 오락이니까 그냥 시간을 떄우면 되는 거다. 내 안에 축적되어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는 일 같은 건 없다.
읽고 싶은 책만 골라 읽는 편식쟁이어서 씹어 삼키는 데 시간이 걸리는 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가까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기 쉬운 일본어를 써라,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쓰다니 자기가 모르는 거 눙치기 위한 거 아니냐'하고 비아냥거리기 십상이고, 때떄로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난해한 책을 찾아와서 '잠깐 잠깐 여기 이 부분을 내가 알기 쉽게 번역해 줄게'하고 난해한 말씀을 인정머리 없게 요약하고는 '인텔리는 역시 밥맛이야'하며 웃는 것으로 나 자신을 눙치고 기뻐하는 비열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달리 낙이 없다.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웃과 잘 사귀는 편도 아니고, PTA는 질색이다. 집을 꾸미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식가입네 하고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다.
현실 생활을 덮치는 것들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차례차례 쓰러뜨리고, 쓰러뜨리지 못하는 아들은 나를 쓰러뜨리고, 그러면 나는 휘청휘청 잠자리에 쓰러져서, 활자를 계속 삼키며, 오로지,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기분이 좋을 때는, 활자로부터 심원한 철학을 쬐끔 빌려와서 잠시 심원한 기분이 되어 보다가도 다음 날에는, 웃기고 있네 하며 그야말로 변덕을 부린다.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 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고,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속에서 꺄아 꺄아 기뻐하고 싶은 거다.
꺄아 꺄아 기뻐할 수 있다면, 연애소설이든  『책의 잡지』든 헤밍웨이든 아무 차별도 구별도 두지 않는다.
눈물이 흐를 떄도 꺄아 꺄아 기뻐하고 있다. 도저히 동조할 수 없는 생각을 논하는 사람에게도 꺄아 꺄아 기뻐하면서 화를 낸다.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그러나 몇 년 전, 흠칫한 적이 있다. '다치'라는 야생마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일이다. 야생의 몽골말이 영국에서 고향인 몽골까지, 바다까지 건너서 오로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실로 감동적이 이야기였다. 나는 쉽게 우는 사람이므로, 벌써 눈물범벅이다. 
그리고 나는 그 몽골말이 되어 살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기보다 정말로 몽골말이 되어 살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니 독서라는 게 참으로 공허하게 느껴졌다.

페치카에 등을 밀어붙인, 콧물의 안데르센 아버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안데르센을 읽어 주는 것 말고는 달리 재주가 없었던 혼란기의 일본 남자.
현실에는 없는 아름다운 세계의 문을 열고, 붉은 수수밥의 확보는 아내에게 맡긴 인간.
당신의 처는 아름답게 빛나며 러시아인과 빈틈없이 싸워서, 붉은 수수도 구하고 콩깻묵도 손에 넣으며 살아왔다.
마치 몽골말 같지 아니한가.

나는 자잘하게 그림이랑 글자를 조합해서 인쇄물을 만들고 그 대가를 받아서 먹고 산다. 내가 만든 책을 누가 사 줄지 전혀 짐작도 못한다.
책방에 가면 실로 엄청난 양의 책들이 있고, 내 책은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아동물 코너만 해도 나날이 새로운 책이 만들어진다. 게다가 출간된 지 몇 십 년이 넘는 롱셀러가 줄을 서고, 외국 그림책도 썩을 정도로 쌓여 있다. 이것들을 헤치고 또 헤쳐 나가며 밥을 먹고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하니,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마치 10킬로그램들이 쌀 봉지를 쏟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인 속에서, 어떻게들 내가 생산한 한 알의 쌀을 골라내 주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두려워서 그림책 코너에 못 간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은 비상시가 되면 불필요한 일이다.
그것 없이도 인간은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런데 그것으로 O십 년이나 밥 먹고 살 수 있었다니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그런데도 나는 때때로 라기 보다 거의 매일 웃으며 지낸다. 때론 울기도 한다. 당연히 내일도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저금 같은 건 한 푼도 없다. 아니 있다. 슈퍼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1엔짜리 동전을 유리병에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치마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어"같은 겁나는 생각을 한다.
식은땀이 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뭐랄까, 한없이 유년으로 돌아가는 거다. 나도 자란 어릴 적 경험이 차차 거대해져서 이빨을 드러내는 거다.

10년 만에 만난 친구는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려 줬다. 마당 끝에 만들어 놓은 유리 공예 작업장의 오렌지색 끈적거리는 불꽃, 그리고 유리로 만들어 놓은 친구의 작품이 내가 몰랐던 세월을 나에게 가르쳐 줬다. 나의 10년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이처럼 돌연 모습을 나타내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나의 아들과 동갑인 친구 아들이 10년의 공백을 등 뒤로 하고 당당히 나타났다.
친구 남편이 돌아왔다.
"야아, 나이 먹는구나, 늙었네."하며 그는 웃었다.
유리의 불 상태를 살피면서 식사를 했다. 아들은 젓가락을 왼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섯 살 때 그 아이가 왼손잡이였지 하고 기억을 떠올렸다. 열다섯 살이 된 그의 왼손잡이는 이제 인격의 일부로서 자리가 잡혀 있었다. 나는 넋을 잃고 왼손으로 별빙어를 집어 올리는 그를 바라보았따.
"요코 씨 담배가 지나쳐, 끊지 그래." 친구가 말했다.
"참, 거기 바구니 안에 담배가 싫어지는 엿이 있었는데." 친구 남편은 창가의 바구니를 찾았다.
"아하하하, 녹아서 전부 들러붙었어."
"아하하, 그거 일 년 전 거예요."
"일 년이나 지났군."
부부는 녹아서 들러붙은 엿을 보고 같이 웃었다. 나는 가슴으로 따뜻한 바다가 흘러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나의 엿이 녹은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행복.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니라, 스물네 살의 자만에 찬 젊은 시절부터 이미 서서히 할머니가 되기 시작하는 거다. 아니 다섯 살 여자아이도 보고 있으면 팔십 먹은 그 아이의 영락한 말로가 비쳐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할머니는 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나인 채로 할머니가 되는 거다.
어려서는 부모의 안색을 살피고(꽤나 말을 안 듣는 아이였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상대의 기분에 맞추고(별로 맞추지 않았지만), 애 낳고는 머리 가꿀 새도 없이 어머니 노릇을 하고(그랬다고 아이가 수재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해 왔다. 몇 십 년이다. 이제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아이가 성인이 되면, 평생에 딱 한 번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

내 그림에 대한 주문도 없어졌을 테니 서툰 그림이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내 맘대로 그리고, 마음 내키면 SF 소설도 쓸 거다. SF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해서 어려울 것 같으면, 살인물이라도 써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차례차례 등장시켜 닥치는 대로 산산조각을 내 주는 거다. 나이 먹으면 먹을 것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게 된다고 하니, 하루가 걸리더라도 감자죽을 만들어 후우 후우 먹겠다. 돈이 없을 게 분명하니, 미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나 자신을 설득하면서. 입이 험한 것은 나의 숙달된 무기니까 험한 입으로 "저 할망구 예쁜 데가 없어"하고 젊은 녀석들이 나를 싫어하게 만들 거다. 이런 것을 일러 깊은 배려심이라고 하는 거다. 내가 죽으면 '아,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줬으면 좋았을 걸'하고 주위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노망이 들면 어떠한 결의도 계획도 물거품, 유효하지 않다. 그래서 딱 하나 내가 지금부터 유념할 것은, 물욕을 갖지 않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남기는 것은 그것이 아주 적은 돈이든, 사소한 일용품이든 처리하기가 성가시다. 내가 죽으면 동시에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작은 종잇조각 하나, 팬티 하나 남기지 않고 '슈욱 하고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면 조옿겠다'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책 만드는 일이 좋으므로 앞으로 죽을 떄까지 몇 권쯤 더 만들고 싶다. 과감 무쌍하고 뻔뻔스럽게도, 아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를 넘어서고야 말리라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야심을 불태우다가 잠 못 드는 밤도 있다. 나와 나의 재능에 절망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생활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말이다. 범인凡人이란 그런 거다.
고양이가 뒷다리의 털이 훌러덩 벗겨진 채 힘없이 돌아왔다. 11년이나 살면서 처음으로 싸움에 진 고양이는 초라한 꼴로 살금살금 들어와 방구석에서 붉게 부어오른 뒷다리를 핥았다.

의사는 비정한 리얼리스트의 눈으로 상처 부위를 가위로 자르며 "싸움에 약한 고양이는요, 뒷다리를 당해요."라고 했다.
"지금까지 싸워서 진 적 없어요. 벌써 11년이나 살았어요. 나이 탓일 거예요." 고양이의 세월 11년, 시즌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갓난 아기가 밤에 울어 대는 것 같은 으스스한 소리를 내고, 고작 암컷 한 마리 때문에 털을 곤두세우고, 고작 암컷 한 마리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며 살아온 고양이다. 평소에는 고양이를 걷어차고 돌아다니는 나지만, 남이 내 고양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면 화가 난다.

이렇게 범인의 삶은 계속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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