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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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고 있던 하루키의 한 단면을 본 느낌이다. 가족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는 작가도 있고, 잘 이야기하는 작가도 있고, 특정 가족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면서 어떤 가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작가도 있고. 사생활에 대해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구나 싶으면서도 또 어떤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입을 다무는 작가도 있다.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궁금하다. 왜 분명히 있을 법한 이야기인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왜 이 시점에서야 이야기를 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관조적으로 느껴졌던 하루키의 소설과 수필과는 이 책은 많이 다르다. 아마 독자 개개인의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루키의 수필 중에서 가장 여운이 남았다.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며 트라우마를-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거쇼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와 아들의 이 같은 갈등의 구체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 이글에서는 아주 간단하게만 언급한다.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상당히 길고 그리고 처절한 얘기가 될 테니까. 결론만 말하면, 내가 젊었을 때 결혼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완전히 소원해지고 말았다. 특히 내가 직업작가가 된 후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생겨 관계는 더욱 비틀렸고, 끝내는 절연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이십 년 이상 전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고,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대화도 연락도 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나와 아버지는 성장한 시대도 환경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세계를 보는 시각도 다르다. 당연한 일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관계의 재편성을 시도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접점을 찾기 위해 시간과 품을 들이기보다는, 아무튼 눈앞에 있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힘과 의식을 집중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 젊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내가 지향하는 목표가 아주 명확하게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혈연의 굴레보다는 그쪽이 내게는 한층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물론, 내가 지켜야 하는 나의 조촐한 가정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나의 핏줄을 더듬는 식으로 아버지와 관계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조금씩 듣게 되었다.

 

이렇게 개인적인 문장이 일반 독자의 관심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로 문장을 쓰는 것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태생이 추상적,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에 서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조망하고, 그걸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환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리고 그걸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나자신이 투명해지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 손을 허공으로 내밀면, 그 너머가아른하게 비쳐 보일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 만약 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 나라는 개체가 지닌 의미가, 점차 모호해진다. 손바닥이 비쳐 보인다 한들 이상할게 없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나는 지금도 때로 슈쿠가와 집의 마당에 서있던 높은 소나무를 생각한다. 그 가지 위에서 백골이 되어가면서도, 사라지지 못한 기억처럼 아직도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 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저 먼 아래,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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