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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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목적이 있는 예를 들면 여행에세이라거나 감성에세이가 아닌 어떠한 작가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그 책의 저자에 대한 호감을 짙게 혹은 옅게 만드는 산문집이라는 것을 실로 오랜만에 접해보는 것 같음에 무당개구리같은 이 책을 끌어안고는 미묘한 떨림을 느꼈다. 산문집이라고 한다면 왠지 그 자가 펴낸 책을 적어도 한 권쯤은 읽어보았어야 하고, 그 자에 대한 애증없이 읽지 못할, 그러니까 어떤 작가의 애독자 정도는 되어야 그것을 즐길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박혀있어 쉽사리 손을 뻗지 못했던 이유가 그 곳에 있다. 그래서 그가 나의 두 손에 안겨주었을 때에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실없이 허허 웃곤 했지,싶다. 그 후에도 읽어야지, 언젠가. 하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으나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산문집도 읽을 만 하다, 라는 것을 안겨준 책은 단연 고 장영희 님의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라는 책이 있었기에 전처럼 산문집이라면 정말 싫다며 손사레를 치고 고개를 돌려가며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리기엔 자신이 없었다. 실은 일전에 그녀가 써 낸 「친절한 복희씨」를 세 번이나 손에 집었다가 놓은 것도 박완서,라는 작가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기에 알맞은 온도를 갖고 있기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 그 까닭이다. 그 소설은 관찰자 혹은 2,30대 시점에만 익숙해져 있는 나를 보기좋게 깔아뭉개고 50대의 여인을 주체로 그 시선을 따라간다. 사실, 부끄럽지만 단편 중 고집스럽게 첫번 째 단편만을 세 번 모두 쉬이 읽은 적 없이 힘겹게 마무리를 하고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고는 다시는 그녀의 책을 찾지 않으리라, 혼자 다짐했었더랬다. 그러다가 그녀의 에세이가 그러니까, 80세인 박완서 작가의 시선으로 본 이 책이 나에게 넝쿨째 굴러들어왔으니, 내가 지레 겁먹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p25) 이 글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니 바꿔 말해, 이 글을 몇 번이나 되돌려 읽으며 맞아, 맞아를 연거푸 되뇌었던 이는 비단 나뿐이었을까.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회한이 담긴 문장들은 어느 노작가의 슬픈 독백으로 귓가에 스며들었고, 그것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로 다가왔다. 나는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해 끈덕지게 미련을 두고 자꾸만 뒤돌아보며 잘 가던 길에 의구심을 드러내며 주춤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에 대해 얼마만큼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이게 진정 내 길이 맞긴 한건지 (…) 하지만 이 물음엔 언제나 그렇듯 답이 없다. 인생의 주체인 내가 내 삶을 살아가며 배워야하고, 감당내야하며, 풀어나가야 할 나만의 과제인 셈이다.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내가 만드는, 나의 길.

 

 

 

책을 다 읽어내리고 덮고 난 후 작가가 만들어낸 정갈한 문장들이 고요하다,라는 동사 말고 어떤 말이 어울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쁜 순간도 슬픈 순간도 요동치지 않는 바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돛단배처럼 흔들림이 없고 잔잔하여 그것은 이윽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하기에 충분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작가는 우리를 심연의 고요 속에 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 그득한 문장으로 다시 손을 내밀어 어잇차! 하며 일으켜 세워주기도 하고, 지금 나와 같은 세대가 살지 못한, 허나 그녀는 숨쉬던 그 시대 - 한국전쟁 - 에 대해 우리 귓가를 살랑살랑 간지럽히며 그 때가 있었음을 잊지말고 기억해달라, 당부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라고 주관적인 판단 아래에 그녀의 글에 녹아들었다. 혹자는 먹먹함을 맛보았다 하였는데, 나에게 다가온 것은 먹먹함보다는 텃밭을 가꾸는 모습에서 아기자기함이 더욱 돋보였다 말하면 여든이 된 노작가에게 실례가 될까. 사실 한국전쟁을 언급하며 내 나이 때의 작가 삶을 이야기할 때에서야 그 먹먹함의 의미를 어렴풋 느낄 수 있었으나 어떤 면이? 라고 다른 이의 서평에 혼잣말로 반문했다. 물론 한국전쟁에 얼룩진 겨우 이십대를 태동하던 그녀의 삶 자체에 마음 아픈 이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보다 작가의 너무도 무덤덤한 듯 말하는 말투가, 또 그 문장이, 당시에 내가 마시고 있는 식어버린 커피와도 같아서 초콜렛을 하나 넣고는 휘휘 저었다. 식어버린 커피에서 풍기는 진한 초콜렛 향이 시린 코 끝을 달콤하게 만들었다.

 

 

 

이 산문집의 1부는 온전히 그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내「 생애의 밑줄」로 시작해서, 2부엔 그녀가 다른 책을 읽으며 자신의 느낌을 쓰다 다른 길로 새어버렸다며 「책들의 오솔길」이라는 엉뚱하지만 재치있는 문구가 독자를 향해 손짓하며 그 안에 들어있는 책을 함께 교감하려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고 해야할까. 나는 이랬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 라며 나에게 되물어오는 것 같음에 기가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또한, 그 뒤를 이어 3부인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곳엔 이미 황천길을 가고 있을터, 하지만 그녀의 손길로 살아숨쉬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과 박경리 선생과 박수근 화백을 볼 수 있다. 그녀의 책을 덮음으로서 아무래도 이 산문집 역시 책장에 고이 꽂아두고 한 두 해가 지난 후에 다시 한번 꺼내어 먼지를 탈탈 털어 다시 곱씹어야겠다고,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울림을 느낀다. 또한 그녀의 신작이 나오면 그 땐 주저하지 않고 읽어보겠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녀의 「친절한 복희씨」를 읽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고, 손에 잡고 읽을 날이 있을지 또한 의문이다. 그러나 훗날, 언젠가는 내게도 그 나이가 오리니, 지금보다는 그 때에야 손에 붙들고 한 자, 한 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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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 청춘의 밤을 꿈을 사랑을 이야기하다
강세형 지음 / 김영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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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여고생이었을 땐 얼른 스무 살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돈을 벌고 싶은데, 소위 괜찮은, 눈에 차는 '알바'라는 것에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스무 살이 되지 않았어도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고작 2,3살 어리다고 하여 내가 못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번번히 퇴짜를 맞곤 했었더랬다. 게다가 야간자율학습이라는 틀 안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은 잡았던 일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기에, '내가 스무 살만 되봐라' 라며 입을 앙 물고 스무 살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어느덧 꿈꿔왔던 스무 살이라는 나이를 지나쳐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에 이른 지금에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라고는, '아 - 다시 고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라는 마음 뿐이걸. 스물세 살이라는 나이를 먹고도 아직 내 앞에 주어진 삶이 마냥 불만스러워 투덜거리기를 밥 먹듯 하고, 힘들다며 찡찡거리는 것도 단연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는 나의 지인들이 있고, 누가 날 미워하면 눈물부터 나는 아직도 마냥 어린 애 티를 못벗은 채로 어른이라는 가면을 억지로 씌워 쓰고 있는 꼴이다. 그런 나에게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라며 거부할 수 없는, 유혹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이 품 안에 스며들었다.

 


 

 

다 읽고 나서 말이지만 이 책을 한 자리에서 휘리릭 읽을 수도 있었고, 밤을 꼬박 새서라도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손에 착 감겨 떨어질 줄을 몰랐던 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 자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던 이유, 아마 읽은 사람이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 나도 이런 때가 있었지' 라며 공감도 하고, 내가 미처 발을 들여놓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옆집 언니가 '앞으로 세상은 너에게 이럴지도 몰라' 라며, 조언해주는 듯 하여 활자를 읽으면서도 고분고분 옆에서 듣는 시늉을 내기도 했다. 실은 책에서 '그'와 '그녀'를 지칭하는 주어가 분명하게 나와있기에, 뭐를 중심으로 쓰는 것인지도 몰랐던 나는 작가가 여자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았더랬다. 나의 그가 작가가 여자니까 그렇지, 라고 내뱉었는데 난 당연하다는 듯 '아니야, 남자작가야' 라고 반문하면서도 의아해서 급기야 책을 덮고는 강세형 이라는 작가의 이름 세자를 검색창에 재빨리 써넣고는 검색을 망설였더랬다. 내 예상대로 하마터면 작가가 남자였더라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불만이 응어리져 터져나오며 그간 읽었던 활자에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누구에게나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실망' 중 하나는 이것일 테니까. 나 자신에 대한 실망. (p119) 실망이라는 것엔 여러 종류가 있고, 그것을 느끼는 주체는 항상 내가 된다.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내 자신에 대해 극도의 자괴감에 빠져 허덕거릴 때가 있었다. '왜 난 이 모양, 이꼴인거야? 그렇지, 그동안 허투루 했으니까, 충분한 노력이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라며 자책하다가 급기야는 '이것 하나 해내지도 못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라며 나 자신에 대해 회의감이 넘쳐흘러 더는 주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으로도 붙잡지 못했던 그것을 붙잡아준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마음가짐이었다. '까짓것 다시 해보면 되는거지, 못하는게 어딨다고' 라며 다이어리에 '난 나를 믿어'를 몇 번이나 끄적여 놓았는지 모른다. 아무리 옆에서 '넌 그것밖에 안 돼, 그냥 포기해'라고 말한다 한들 반대로 '이대로 포기하지 마.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한들 내 자신의 한계는 나만 알고 있다. '난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여기까진 건가?' 나 조차도 이런 생각이 들 때 그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건 결국 믿음, 나에 대한 믿음, 자신감이다. 실패. 좌절. 이런 것들이 한두 번도 없는 삶은 아마 없을 거다. 자신감을 잃지 않고 그것들을 넘어서느냐, 넘어서지 못하느냐. 어쩌면 꿈을 이뤄내는 사람과 이뤄내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p334,335) 어떻게 그것으로 빠른 회복을 거머쥐었는지 나조차도 의아해하던 찰나, 이 글귀가 눈에 와 닿았다. 그래, 내 자신에 대한 믿음. 아마 나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글귀를 발췌하여 그에게 보내주었다. 나에게 닿은 이 글귀가 그에게도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가 이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끌어안을 수 있다고 감히 내뱉진 못하겠다. 이 책은 그녀가 말하고 싶어하는 그 많은 사연들 중 '아니아니-' 라며 고개를 저으며 회피해버리고 싶은 것도 있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분명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쉬운 것만은 아닐테지만, 그것을 같이 공유하고 위로해줄 이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또 한번 각인시켜준 셈이다. 언젠가 삶의 무게에 깔려 버티기 힘들어 누군가의 손길조차 마음의 짐처럼 느껴질 때에, 다시 한번 펼쳐들고 싶은 책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책,이라며 책을 마무리했다. 강세형 작가, 마침표만 보고 세상을 살아가느라 쉴 틈조차 쉽사리 허용하지 못했던 나에게 쉼표,를 내밀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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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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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라는 이유로 내가 기피해왔던 책들이 한 두권 일까, 하지만 단편임에도 그 이야기 속에 생명력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작년 즈음 김영하 님의 단편집을 「오빠가 돌아왔다」 이후로 매우 오랜만에 접했는데, 항상 마음에 드는 책을 읽을 때에 느끼는 감흥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고 그대로 멈춰서 꼼짝도 안했었다. 그러고보면 그 때에도 역시 단편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이야기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했구나, 라는 아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든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혹여나, 이 책도?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주변 지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고, 그 중 한 지인에게 선물받은 책임에도 좀처럼 손에 잡고 읽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 까닭임을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내 눈이 그가 써놓은 문장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책을 읽어내렸다. 그렇게 그의 작품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고 나서 숨을 고른다. 그러나 사실은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인 곳이 단 한 장도 없을 만큼 문장은 간결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 또한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 다른 이가 발췌해놓은 문장을 보아도 마음은 좀처럼 일렁이지 못하고 이게 왜? 라고만 반문하고 있는 꼴이다. 그는 호흡을 절대 길게 가져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독자가 호흡을 할 시간을 벌어 주는 작가의 세심함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에 갑갑증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 사실 내가 그랬다 - 조금은 길게 끌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사이 이미 끊어져있다. 그가 내놓은 이야기가 이미 끝났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단편의 치명적인 점은 결말을 명료하게 지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다. 결말이 완전한 이야기는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한낱 이야기에 불과할테고, 그것은 이미 죽어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지, 더 이상 살아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렇기에 그것은 그것의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충분히 순화시킬 수 있지만, 미안하게도 단편이라는 자체를 내 안에서 품을 수가 없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끌어안는다는 것엔 - 적어도 - 나에겐 무리가 뒤따른다. 책을 덮고 나서 13개의 단편 중 생각나는 것은 서너개밖에 없을 뿐더러, 그 후의 것은 책을 들춰봐야 그제서야 아, 맞다! 라며 바보처럼 실실 쪼개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또한 무척이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편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이름을 달아준다는 것은 부질없다고 생각하기에 읽는 내내 내가 이들을 다 기억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었다. 물론 지금 제대로 된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현주, 마코토 뿐이다. 그러나 정작 1인칭이었던 그녀가 생각나지 않는 바람에 책을 다시 한번 들춰 그녀에게 지영이라는 고유명사가 붙어있었구나,라며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장편을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이름을 잊기 마련인데, 하물며 이처럼 짧은 이야기 속에 있는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한번에 기억하기엔 나의 뇌 용량이 수용하지 못하는 까닭에 쉽사리 그들을 머릿 속에서 게워내고 마는 것이다. 그의 책 중 「오빠가 돌아왔다」를 처음으로 읽었었다 위에 고백했는데, 그 책에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단편에서 생각나는 것을 꼽자면 「오빠가 돌아왔다」로 시작해서 「오빠가 돌아왔다」로 끝낼 수 있다. 그것이 단편이라는 이름으로 되어있는 책의 치명적인 단점이고, 나는 아직도 그것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낼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이 책에서는 「로봇」「여행」「악어」「밀회」「명예살인」「마코토」「아이스크림」「조」「바다이야기1」「바다이야기2」「퀴즈쇼」「오늘의 커피」「약속」이렇게 열 세 가지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만약 나에게 가장 기억하고 싶은 단편이 무어냐고 얘기한다면,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내 대답이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만만한 「로봇」에 대해 이야기를 깨작깨작 거리자면, 수경은 자신이 로봇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아마 작가와 같은 언변가일테지. 얼굴도 모르는 자신이 로봇이라는 그 남자를 상상하며 연신 낄낄,거리며 이야기를 읽어 내린다. 요즘 로봇의 에너지원은 다양합니다. 저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을 주 에너지원으로 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입니다. 가장 효율이 높은 것은 옥수수고요. 적당한 알코올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들어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p28) 가관이다 정말, 아무리 세상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이성과 잠자리까지 할 수 있는 로봇이 어디 있겠느냐 말이다. 아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순간, 내 머릿속의 프로그램이 이제 당신을 떠나야 할 때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열정적 사랑은 인간인 당신을 해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기 전에 내가 먼저 가야합니다. (p30) 낄낄거리며 읽는 사이 벌써 막바지로 치달았다. 읽고 나니 현실에 깔린 거짓들을 이야기에 몸서리가 쳐지며 씁쓸함이 전해져오더라, 이거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단편이라는 이유로 이 책을 편파적으로 적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단편집을 꺼려하는 나에게도 그 중 단연 최고라 꼽을 수 있는 단편이 있는데 그것은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그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단편임에도 책이 아닌 작가를 읽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을 때도 이 작가인 김영하 작가를 읽을 수 있을까, 하며 내심 기대를 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은 내 손에 채 들어오지 못하고 그대로 녹아내리고 그를 대변하는 책만이 남았다. 아마 처음부터 '이것도 그것처럼'이라는 무서운 생각이 새로운 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미처 떨궈내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 그만의 매력이 있는 것이니 더 이상 무어라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 주는 별 네 개 중 책의 내용은 세 개뿐이고, 나머지 한 개는 김영하 작가에게 거는 기대감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타고난 언변꾼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그 빛이 단편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볼 수 없다는 것이 원통할 뿐. 하지만 그 속에서도 혹자는 그의 언변 수준을 척척 잘도 찾아내더라, 그 말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두 가지, 그의 책이 나에게 맞지 않다거나 혹은 내가 너무 갇힌 채로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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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의 집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시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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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미스터리물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종전에 읽은 미스터리라고는 기분좋게 읽은 '새의 살인'이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을 책과 확연히 다른 점은 '밀실사건'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실이라하면 내용이라던가 구성에서 조금 아쉽게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과 후'를 생각해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아쉬움을 이 책에서 찾고자 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평을 쓰는 지금, 햇빛이 가을이 오는 것을 원치 않는지 맹렬하게 압박하여 다시 여름이 억지로 찾아온 것만 같은 기분마저 감도는 오늘은 9월의 어느 날이다. 오늘같은 날 읽었더라면 조금 다른 느낌이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지만 금세 마음을 바꿔먹고는 하긴, 날씨에 책의 느낌이 달라진다니 그보다 억지는 없을 것이다,라며 이 책을 읽은 그 때를 떠올린다. 실은 나에게 '기시 유스케'라는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럼에도 낯설지 않음이 원래 다니던 길을 지나가는 것과 같이 익숙하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알고 있는 '검은 집'을 원작이 아닌 영화로 먼저 접했던 나에게 그 작품은 '광란' 이라는 단어로 자리매김하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작이 더욱 괜찮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영화의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 원작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검은 집을 쓴 작가는 머릿 속에 각인되기도 전에 그렇게 잊혀져갔다. 한참 후에야 그의 작품인 이 책을 들었을 때에 검은 집을 떠올리며 좋은 영화는 좋은 원작이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기대감을 한껏 안고 시작했다. 오 마이 갓, 책을 펼친지 두장만에 소녀가 죽었다. 장소는 밀실이다.

 

 

 

 

아, 제기랄. 방심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넌더리가 났다. 단편이었던 것을 하나의 단편이 끝난 뒤에야 알아차렸다는 점과 또 하나는 기시 유스케라는 작가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안았다는 점이다. 기시 유스케의 책이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이 책을 끌어안기엔 상당히 큰 무리수가 있음에 분명하다. 이 책은 「도깨비불의 집」「검은 이빨」「장기판의 미궁」「개는 알고 있다」라는 총 네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챕터 하나하나가 어째서, 왜? 라는 말만 되풀이되게 만드는 이 책을 도무지 정성어린 손끝으로 애무할 수 없음이 그 까닭이다.

 

 

 

특히나 「장기판의 미궁」에서는 "잠시만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어요." 라고 말하며 범인의 입을 막으려 들지만 도리어 범인이 "아니에요, 증거는 이미 충분해요." 라고 뇌까리는 밀실의 도대체 어느 부분이 흥미롭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음에 가슴이 꽉 막히며, 이보다 해괴망측한 일도 없을거라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개는 알고 있다」를 다 읽고 난 뒤에는 추리 한번 저질…스럽다,라는 말이 제 멋대로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와 나조차도 화들짝 놀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케이 씨가 풀지 못하는 밀실도 있군요. 저도 반성해야겠어요. 케이 씨에게 물으면 뭐든지 답이 나온다고 안이하게 생각했거든요……. 하긴 이번에는 조사를 엉성하게 하더군요. 그러니까 수수께끼도 풀지 못하죠." (…) "그쪽은 쉽게 포기하면 되지만, 전 밀실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큰소리 뻥뻥 쳤다고요!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되지요?" (p300) 준코의 말을 눈으로 훑으며 '뭐 이딴 여자가 다 있어'라고 생각했다면 내가 망언을 한 셈이 되는가? 어째서 전직 도둑에게 자신의 권리를 모조리 떠넘기고자 안이한 변호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준코의 저 말은 어린 아이가 사탕을 달라며 보채는 꼴이지 뭐냔 말이다.

 

 

 

 

이 책에 나는 도무지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없고, 주고 싶지도 않기에 다른 분의 서평에 있는 달려있는 별 다섯개 또한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은 소감이라고 할 것 없이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뒤 느낌은 '밥을 먹기 위해 반찬을 다 차려놓았는데 정작 밥이 없을 때' 처럼 허망하기 그지없기에 그처럼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으로 기시 유스케에게 실망을 했다거나 다시는 그의 책을 들여다보지 않아! 라고 할 망언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책이 나에겐 그의 첫 작품이고 다른 책을 읽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으리란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의 다른 작품에 거는 기대가 꽤 크기에 이 책으로는 덮어버릴 수 없다,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아직도 그의 작품이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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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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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맨스 소설이라는 이 책을 손에 집기 전에 그 장르의 작가로 정평난 이미강 작가의 '푸른 수염의 아내'를 접했었는데, 그 속에서 실로 오랜만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가슴이 콩콩뛰는 두근거림을 맛봤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로맨스 소설의 작가는 여자였기에 여성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그것을 빌미로 감수성을 최대화로 끌어올리는 역할들을 너무나도 충실히 잘해주어서,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늘상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듯이 현실이란 놈이 내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느끼는 허망함이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내가 그 책들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것이 겨우 이런 허망함뿐이냐며, 다시는 틀에 갇힌 비현실적 로맨스 소설은 읽지 않겠다, 남몰래 다짐하기도 수차례였다. 그런데 남성작가가 로맨스 소설을 쓰겠다고? 글쎄,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감성을 실감나고 맛깔스럽게 표현하는 작가는 단연 요시다 슈이치만한 작가를 보지 못했던지라, 한껏 부푼 기대를 조금은 사그라뜨리고 오랜만에 읽는 그의 책에 빠졌다. 그런데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동화처럼'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과 같이 속이 훤히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풍선이 방울방울 날아다니는 예쁜 romance를 상상했나보다. 그러나 막상 접한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현실감이 밑바탕이 되어있어 이상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괴리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뭐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그동안의 로맨스는 비현실적이라며 손을 휙휙 내저을 정도로 거부감을 드러내왔었는데, 막상 현실적인 로맨스에는 도무지 정이 안가더란 말이다. 특히 연애의 끝을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직 미혼인 나를 미칠듯한 깊은 심연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멍한 표정으로 책을 덮으면서 머릿 속까지 새하얘졌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장미와 명제, 흔하디 흔한 로맨스의 시작, 노래패라는 동호회에서 만났지만 서로 좋아하게 되겠지, 라는 내 생각을 벗어나 서로에게 호감을 내비치기는커녕 그들은 시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우와 서영이라는 다른 인물에 닿아 있다. 그들이 만나면 서로 할 말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무관심 그 자체였다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나게 된다. 글쎄, 그저 책으로 보이는 약간 짧은 듯 보이던 연애에는 내가 꿈꾸던 것 - 서로를 사랑하는 열정 - 은 이미 휘발된 상태인 듯 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나라면 명제와 애당초 결혼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니까. 어찌됐든 책 속의 그녀는 내가 아니라 장미였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결혼이라는 타이틀 아래, 과연 그들이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 틈이라도 있을지 그게 의문이었다. 역시나 - 라고 낮은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신혼 여행에서부터 엇나간 그들의 현실적인 그들의 결혼생활은 보는 나로 하여금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읽는 도중에 손을 떼고 싶은 충동까지 일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생활을 활자로라도 읽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였던 것은 나에겐 결혼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로망이 아직까지는 내 속에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 그 까닭이다. 그렇기에 난 당장이라도 그 책을 내동댕이 쳐버리고 내 멋대로 장미와 명제를 잇기만 하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갔던 것은 로맨스 소설은 항상 해피엔딩이라는 고정관념때문이었다.

 

 

 

-우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아. (p294)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과 결부시킨다하여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서로의 언어를 조합시키는데에 있어서 서로의 이해와 배려, 양보가 필요하거늘 그들은 그것을 무시해버린 채 자신의 언어만이 옳다고 고집한 꼴이 되어버린 셈인 것이다. 실은 나 또한 지금 그 사람에게 나의 언어를 이해해달라고 온갖 투정과 짜증을 있는 그대로 다 내어버리고 그 사람의 언어는 듣지 못한다는 식의 무관심으로 일관해버리기 일쑤다. 그것때문에 이따금 서로에게 본의 아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솔직히 다 내려놓고 말한다면 외면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이를 좁혀갈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살아온 환경 방식에 대한 존중이었고, 그것에 따른 이해였다. - 나는 여전히 황소처럼 내 고집만 부리고 있지만 - .. 어찌됐건간에 장미와 명제의 두 번의 헤어짐과 세 번의 만남이 나에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가와 여느 드라마의 뻔한 스토리를 보는 것과 같이 진부했고, 그들의 공백기는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지쳐있는 사이 그들은 성장하고 있었고 그 성장의 결과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라고 생각했다. 헤어짐과 만남이 그들에게 남긴 것은 결코 만신창이가 된 사랑이 아닌 내 속의 또 다른 자아와 자신을 마주보게 만들어준 시간이라고 해석해도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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