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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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사카 코타로.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책을 쉽사리 손에 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언의 거부감때문이었다. 다른 이가 칭찬을 한다한들 내 마음에 차지 않으면 누구도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레 내 손에 감기게 되었다. 무언의 거부감은 공포스럽게도 표지에 나와있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떤 이의 눈물까지 내게 있어 아무런 의미없이 말살시켜버린다. 책을 읽기로 작정하고도 3일 동안은 읽을까 말까, 손에 잡았다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음에 놓았다가, 결국은 손에 잡고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에 슥슥 읽어갔다. 맙소사, 너무 경거망동 했을까, 내 속독에 그리도 자신이 있었던가. 처음부터 집중할 수 없었던 탓에 이해는커녕, 활자 또한 낯설게 다가왔고, 결국 책의 5장 중 1장을 십분만에 내리 읽어가다가 앞으로 되돌아와서는 호흡을 가다듬고 읽어내려갔다.

 

 

 

 

어느날, 낯선 여자가 취미를 물어왔다. 8년 만에 녀석이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보낸 이를 알 수 없는 우편물이 반복해서 도착했다. 난데 없이 치한으로 몰려 지하철을 내려야 했다. 문득, 그녀와 헤어진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지나치게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이상하다. 경찰이 이토록 쉽게 발포하고, 더구나 전혀 관계없는 술집 주인을 다치게 하고도 신경 쓰지 않으며 그의 뒤만 쫓는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p134) 일본 센다이에서 일어난 총리암살사건. 아오야기 마사하루는 계획된 함정에 질퍽하니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빠져버렸고, 언제나 그렇듯 잘 짜여진 프레임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기대에 순순히 응해주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뿐이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하지만 아오야기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그들이 진실에 관심이 없는데, 무죄를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 진범을 찾아내고 그들 앞에 내밀어봤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현기증이 난다. 무력함에 등짝의 털이 모조리 곤두설 지경이다. (p260) 그들은 애초에 진실따위엔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도망친다. 끝도 없이.

 

 

 

 

성실한 스토리와 성실하게 짜여진 구성은 작가의 문체마저 무미건조할 정도로 감정이 실리지 않아서 감흥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버리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에는 탁 차고 나오 듯 '나는 범인이 아니야. 아오야기 마사하루.' '그럴 줄 알았어.' 메마른 대지에 물을 주듯 마음을 적신다. 책을 읽는 중에 한가지 눈 여겨보아야 할 점은 단연 소설의 구성이다. 오롯이 1인칭 입장에서 쓰여지고 있는 것 같지만, 완벽한 1인칭 문장이 아닌 주변인물의 시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으로 표면에 떠올려서 아오야기의 입장만이 아닌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자칫하면 독자로 하여금 내용의 이해보다는 혼돈을 가져다줄 수 있는 공황상태로 밀어넣기로 제격이다. 내가 읽은 책 중 루스 엔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가 그랬었다. 명확하지 않은 애매모호한 시점들은 읽는 독자에게 있어 불쾌감의 연속이고 그것들을 이해하며 읽어야할 과제이지만, 책을 읽을 때 독자가 그것까지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골든 슬럼버를 읽는 동안에 명확하게 지어진 경계선을 보며 작가의 역량에 감탄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평화의 시대에는 누구나 정론을 뱉어낸다. 인권을 주장하고 정공법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폭풍이 일면 이성을 잃는다.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소동에 휩싸인다. 다 그런 법이리라. (p69) 또한, 2장에 나왔던 매스컴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그 사건을 접하게 되는 시청자들의 관점까지 개별적인 하나의 초점으로 맞추어 세세하게 표현한 그곳에서 그가 전해주고자 했던 것이 권력이라는 총칭 앞에서 쉬이 일그러지는 한 사람의 인생인 듯하여 갑갑해져 오는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어서 답답함이 또 다른 답답함을 낳는 현상을 경험했다. "잘난 놈들이 만든 거대한 부조리에 쫓기게 되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도망치는 것뿐이지 (…) 거대한 부조리의 사냥감이 되면 어딘가 몸을 숨긴 채 달아나는 수밖에 없어." (p380) 하지만 그에 따른 결말은 끝도 없는 실망감에 감출 수 없을 정도의 일정한 선을 넘어 가슴 가득한 불만을 안겨줬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를 이해하고 감싸안아줄 수밖에 없다. 이사카 코타로의 문체가 그려놓은 아오야기의 행보를 따라가다보면 어떤 이의 말마따나 어느 새 일본 전지역을 한바퀴 돈 것 같은 기분마저 감돌아서 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지막까지 쫓기는 서스펜스는 별 다섯개를 주어도 아깝지 않았지만, 영문도 모른 채로 쫓기기만 하는 아오야기의 행보에 대한 물음표를 작가가 끝까지 손아귀에 움켜지고 내비쳐주지 않음에 이내 옥죄어옴을 고스란히 안겨준다. 책을 덮을 즈음엔 가지런히 호흡을 정리하고 아오야기의 새로운 행보를 응원하며 골든 슬럼버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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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 의열단, 경성의 심장을 쏘다! 삼성언론재단총서
김동진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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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는 오늘은 의도하지 않은 광복절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 , 지금도 매스컴에서는 줄기차게 광복절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저 자신의 밥줄을 채우기 위한 요깃거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무심하리만큼 정갈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속이 매스껍다 못해 토악질이 절로 날 지경이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해대는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를 허공으로 보내버리고 컴퓨터를 켰는데, 메인기사에 뜬 몇 개의 그저 손가락만 까딱까딱거린 인터넷의 기삿거리 또한 날려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에 무시해버리는 것이 최대의 선택인 지금. 그들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보일만큼 예민해져있는 까닭은 새삼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광복절을 맞이해서 감동이나 해방감을 느껴서라기 보다는 책을 읽고 난 후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의열단 열사들의 위험하리만큼 무모한 행동들이 뇌리에서 떠나지않고 머물러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는 역사가 궁극적으로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찬란한 역사적 사건도 후손들이 망각하면 사라지지만 아무리 쓰라린 경험이라도 후손들이 잊지 않고 되새기면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열단의 처절한 투쟁사를 기억한다면 결코 100년 전의 쓰라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p8)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다. 작가보다는 세계일보 도쿄 특파원이라는 타이틀이 더 잘 어울리는 김동진 작가는 이 책을 써내기 위해 3년동안 해방 전 신문, 문서, 각종 서적 등 수많은 자료를 검색하고 취합했다 하였는데 과연 이 책에 실린 그 때의 자료들은 우리가 쉬이 접할 수 없는 더 없이 소중하고 값진 것들이었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3년간의 노고가 그대로 느껴져 새삼 고개가 절로 숙여졌더랬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를 잊지 말자며 아팠던 그 날을 되새김질하는 이도 있는데, 그에 반해 어느 순간 나에게 있어 광복절은 내가 학교다닐 때도, 직장을 다니는 지금에도 쉬는 날인 공휴일로 굳어버렸다는 생각에 개탄스러움과 함께 오는 자괴감을 감출 길이 없다.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 책에서 내가 아는 이라고는 김상옥뿐이었다. 하지만 안다한들 두어번 들어본 적 있다하여 아는 척 하는 것일 뿐, 그들이 그 시대를 살면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조차 모르기에 알면서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저 의열단인 것을 알고 있기에 아마 이랬을 것이다 라며 지레짐작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 거의 백지상태로 책을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책의 시작은 #1. 누가 종로서에 폭탄을 던졌나로 시작하여 #14. 김상옥 최후의 순간으로 김상옥 열사의 거침없는 독립운동기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는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라고 말할 만큼 진취적이었던 사람임에 분명한데, 내가 그의 업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이유는 그 거사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었으리라. #15. 풀리지 않은 의혹에서는 종로에 폭탄을 던진 사람이 김상옥 열사냐, 아니냐를 근거를 따지며 규명하고 있다. 그 결과로 당시 <조선일보>는 3월 16일자 신문에서 "(경무국의 발표내용과 김상옥 동지들의 재판정 진술) 이런 사실 내용을 볼 것 같으면 김상옥은 정녕 폭탄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에 종로경찰서 서편 동일당이라는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사람은 김상옥 열사였다고 이 책이 아닌 외의 정보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총독부와 경찰의 눈이 김상옥 열사에게 쏠려있던 그 시기에 또 다른 곳에서 폭탄거사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것은 #16. 또 다른 의열투쟁의 전조로 시작해 #30. 믿을 수 없는 실패로 끝나게 된다. 이는 2차 폭탄암살투쟁을 위한 폭탄 반입 작전에서 저자의 애정어린 시선이 가닿는 곳엔 황옥이 있다. 황옥의 별칭은 황만동으로서 일제 고등계 형사이지만, "비록 지금은 일제의 주구로 일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조선 독립운동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고 있었다."며 앞으로 약산과 의열단을 도와 독립운동에 '분골쇄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p205) 하지만 나는 그가 일제 고등계 형사라는 이유만으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지만, 점점 나 역시 그에게 호기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현재 '황옥경부사건'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난 거사이기에 우리들의 머릿 속 한 구석에 자리메김을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던 듯 싶다.

 

 

 

이렇듯 우리는 잊고 살면 안되는 고마운 분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레 잊고 산다. 그 분들을 한분,한분 거론할 만큼 모두 알지 못하지만, 이 나라를 위해 싸워온 그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시대와는 상반되는 편안한 세상 속에서 햇빛이 말려주어 그에 따른 냄새가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내가 살지 못한 시대의 책을 읽으며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당시의 상황들을 머리 한 쪽 구석에 내 멋대로 그릴 수 있는 것이리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를 비추고 있는 햇빛 속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암흑만이 가득했던 그 시대에서 흘렸을 그들의 눈물들을 닦아주어야만 할 것이다.

 

오탈자 p
183 첫번째줄, 그와의 약속만큼은 꼭 지키기 싶어 → 지키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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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or of Water: A Black Man's Tribute to His White Mother (Paperback, 10, Anniversary)
McBride, James / Riverhead Books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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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lor of Water : A Black Man's Tribute to His White Mother'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뒷길 쪽으로는 유난히 공장이 많은데,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눈에 많이 띈다. 나는 그들이 나와 다른 피부와 다른 언어로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불쾌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왠지 모를 심리적 부담감이 작용하게 된다. 한번쯤 악의없는 눈길이 그들에게 닿을 때에는 그것이 변질되서 조금 다르게 가닿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쳐다보는 것조차 꺼려지게 되는 것이 그 이유다. 그래서 한번은 서툰 한국말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는데 처음엔 나에게 물어보는 것인줄을 몰라서 대꾸도 안하고 뒤늦게야 알아챘더랬다. -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끝끝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를 못해서 베트남 사람인 것 같음에도 sorry를 연발했다 - 그러나 내가 그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는 건줄 몰랐다는 것을 그들은 알 턱이 없으니 그런 악의없는 행동에서 마저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 공장은 학벌이 높아지며 공업의 3D(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직종은 꺼려하고 있기에 노동력 부족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공장 오너가 한국인보다 외국인 노동자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선적으로 인건비가 싸고 그만큼 부려먹을 수 있는 이유에 있다 그들은 그런 이유에도 한국인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내고 - 간혹 그러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있을지언정 -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들 중 불법체류라는 이유로 묶여 일했으니 마땅히 받아야할 최소임금마저도 받아내지 못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제대로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음에 그들은 또 오늘 하루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루스 맥브라이드 조던에게는 이미 두 차례의 이름이 거쳐갔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지극히 유대인의 느낌이 강한 루첼 드와즈라 질스카라는 이름과 미국으로 이민갈 때 불렸던 레이첼 데보리 실스키. 하지만 이름을 바꿔서 부른다 한들 그녀에겐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인종차별이 만연한 시대에서 그녀가 받았을 상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 나는 사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못해서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못하고, 또 그래서도 안됨을 알고 있다 - 또한, 아버지의 성적학대와 노동착취는 그녀의 숨동을 조여왔고, 결국은 집을 떠나 백인이자 유대인인 그녀는 당시에는 몰매를 맞을 법한 -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는 - 흑인 남성과 사랑에 빠져 두 차례 흑인 남성들을 남편으로 맞이하지만, 그들 모두 그녀와 아이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한 줌의 가루가 된다. 그리하여 첫 남편 맥브라이드의 성을 가진 아이 여덞과 두번째 남편 조던의 성을 가진 아이 넷을 키워야하는 그녀의 신세는 딱하기가 이를 데 없다. 차별이라는 것이 수면 위로 올라와 내려가지 않고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자 눈에 띄기만을 기다렸던 그 시대에 그녀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아이들에게 울타리를 쳐놓고는 그 안에서 자유로이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러나 그 울타리에서 빠져나가 밖에 나가 놀고 싶어하는 아이가 있다면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해가 지기 전까지 들어오라는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어길 시에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에게만큼은 다른 곳에서 받는 악의 넘치는 끈적거리는 혀의 놀림으로 받는 상처들로부터 보호격리시키고, 또한 자신이 받았던 상처들을 되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어미의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나마 지켜주고 싶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갈 수록 까만 자신들의 피부와 하얀 엄마의 피부를 비교하며 묻기 시작한다. 하지만 루스는 어디 출신이냐고 물어보면 어머니는 "신이 날 만드셨지."라며 말을 돌렸다. 백인이냐고 하면 "아니. 피부색이 옅은 편이지."라며 또 말을 돌렸다. (p29) 라며 자신의 뿌리를 완강히 거부하고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그것에 관해서는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난 흑인이에요, 백인이에요?" "넌 인간이야." (p106)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루스의 마음이 전해져 더욱 짜르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편이 살아있었더라면 그 모든 짐을 루스 혼자 감당해내진 않았어도 됐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가 감당해내야 할 짐들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엄마는 이러이러했었단다, 라고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상세히 이야기를 해주었더라면 그녀 못지않게 아이들 또한 정체성 혼란을 덜 겪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혼자 뒤늦은 한숨만 폭폭, 내쉬어본다. - 나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 독자들이 꽤나 많겠지만 - 우리가 자라 십대와 대학생이 되어 바깥 세계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엄마가 그토록 애써 만들었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p110) 결국에 무너진 루스가 만든 성을 다시 만들기엔 몸과 마음이 커버린 아이들에게 더 이상의 교육은 허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나는 백인이든지 흑인이든지간에 우리가 그냥 한 색깔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 어른이 된 지금은 두 세계를 배경으로 가진 것을 특권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단순히 흑인으로서의 관점만이 아니라 유대인의 영혼이 일부 들어 있는 흑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p118)

 

 

 

 



하지만 이들이 온 몸으로 인종차별이라는 시련을 겪어낸 것 같지는 않다. 인종차별을 겪어냈다라는 것은 그 사람의 삶뿐만이 아닌, 같은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품어줄 수 있어야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막고 청각장애인과 같은 상태로 다른 사람들은 침범할 수 없는 울타리를 치고 살았다는 것인데, 나는 그에 좀체 호응을 할 수가 없었다. 책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저 겁쟁이처럼 살아갔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양상으로 생각해본다면, "저기 깜둥이 새끼들을 데리고 있는 여자 좀 봐." , "저 흰둥이 암캐좀 봐." , "니그로한테 미친 여자." (p40) 라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미국 힘없는 약자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할 말도, 해야할 말조차 찾지 못했다.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그 중 누구 하나 끄집어내지 않는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사악한 진실들을 구태여 거론해가며 이 책을 설명하게 된 것을 굉장히 원통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이 모든 이야기가 비단 이웃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작년이었던 2009년에 국내 첫 인종차별 사례가 있었다. 보노짓 후세인 교수가 한국에서 서른 남짓 먹은 한국인 남성에게 욕을 들은 것이 발단이 된 그 사건은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에게조차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조사를 받고 그것은 올해에 처음 인권위에서 인종차별로 결정 내렸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사건들이 접수됐지만 그것이 권고된 적은 처음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만큼 세계화에 발맞추어 나가려는 시대에 반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은 현저히 뒤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말로만 글로벌, 글로벌 줄기차게 떠들어대고만 있지,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사회에게 던져진 과제라고 생각하는데, 사회는 우리에게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고, 그저 자기를 믿고 따라오라며 손짓하고 있을 뿐이다. 차별이라는 것. 감히 같은 인간으로서 누가 누구를 구분짓고, 누가 누구를 어떠한 이유로 홀대할 수 있는가. 우리에겐 과연 그럴 권리가 주어져 있는지 그걸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박탈해야 옳지만 그럴 수 없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그러할 권리가 본래부터 주어지지 않았기에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던 사회의 첫 단락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사상에 매무새를 갖추어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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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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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글을 쓴다는 것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작가의 머리카락마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 어떤 것이 어떠한 형체를 띠고 있는지 나조차 알지 못하지만 - 그것은 모티브로 정한 사건이라는 벗어나서는 안되는 틀 사이에서 문장들을 짜맞추어 새로운 옷들을 덧입히는 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집단 자살극이냐, 타살극이냐'라는 처음부터 풀리지 않은 의문의 사건인 '오대양 사건'을 '또 다른 사건'으로 위장하여 그것을 글로써 풀어헤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갸우뚱거리는 머리를 한 곳에 고정시켜 놓을 수가 없었다. 분명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경찰에게서 내려진 결론은 '오대양 사장 박순자 씨에게 맹종해온 사람들의 종교적 광신상태가 빚어낸 동반자살극이다' 라는 것 뿐인 딱 한줄로 설명할 수 있는 - 더 이상은 설명할 수조차 없는 - 사건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경찰도 밝히지 못한 사실을 그 자리에 직접 있지도 않았고, 경험한 것도 아닌 그저 소설가에 불과한 작가가 과연 그 내막을 파헤칠 수 있을까 기대반, 의심반으로 읽어내려갔다.

 

 

 

'이 냄새다.' 라고 시작되는 이 책은 1인칭 화자인 '나'가 자신의 고향에서 나는 썩은 오수와 짐승들이 부패해 나는 악취를 꼬집으며 고향을 상기하고 있다. '나'로 지칭되는 화자는 많은 사람들이 기숙사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그들이 공장의 사장을 '어머니'로 부르고 있었다는 것, 특이하게도 그들 사이에 '아버지'라고 불리는 남자들이 없다는 것 (p47) 과 같은 곳에서 어머니의 뱃 속에서 떠밀려나오던 그 날부터 그 때에 제 1세대 신신양회가 타락하기 전까지를 회상하듯 독자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 당시 신신양회는 이익을 보기 위한 산업폐기물이 첨가된 일명 '쓰레기 시멘트'(1999년부터 산업폐기물이 시멘트의 부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유연탄 비용만 아껴도 순이익이 부쩍 늘어날 거라는 게 어머니의 계산이었다. 연료비도 절감하면서 폐타이어처리 비용까지 따로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p44))와 공장 확장(그 즈음 어머니는 만 삼천 통급의 사일로를 지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p45))을 꾀한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간 수면 위로 떠오른다 했던가. 시멘트에 들어가는 각종 폐기물의 주요 성분들이 전립선암이나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 된다는 보고였다. 공장 인근의 토양과 농작물에서도 중금속이 검출되었다. 공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국도변에 날아가 쌓인 분진에 자석을 대자 철가루가 달라붙었다고 했다. (…) 며칠 뒤 신신양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제목은 '당신의 집은 안전합니까'였다. 산업폐기물로 만든 '쓰레기 시멘트'로 지은 집 위험성과 피해 사례들이 실렸다. 아토피 피부염을 앓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기사에 힘을 실었다. (p44-45) '쓰레기 시멘트 파동'은 공장 확장을 하기에 차질이 있음을 경고했고, 결국은 그들의 보금자리이자 그들을 지켜주는 성이었던 신신양회는 한순간에 추락하고 만다. 그 후 다락방에서 24구(여자 21명, 남자 3명)의 시신이 '집단 자살'이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발견되지만, 그것을 보충해줄 어떠한 단서도 없다. 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와 또 다른 신신양회 아이들은 제 2세대 신신양회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신신양회를 찾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제 뿌립니다. 그곳은." (p172) 처음 그들에게 신신양회가 어떤 이유에서 다시 건립되었건간에 결국은 '그림자'라고 불렸던 기태영이 선악으로 그 대상이 바뀌면 '그림자'는 우리 속의 어두운 욕망, 악을 상징한다. (p254) 라는 말을 대변하듯 1세대의 그들 엄마들이 그러했듯 욕망에 눈이 멀어 '쓰레기 시멘트'와 '공장 확장'을 다시 한번 시도하고, 그들 엄마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결국 신신양회는 더 이상의 명예를 되찾기는커녕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 쓸 수도 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 책에서 신신양회는 오대양 사건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책은 이미 오대양 사건을 모티브로 지어진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을 전제로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고 이미 벌어진 이야기에 대해 질퍽한 진흙 속에 빠져 구해내지 못한 결말을 책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다. -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 그렇기에 뒤로 넘어갈수록 결말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몇 개의 반전들이 있었지만, 그것들 따위에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책을 다 읽고나서 누가 왜 신신양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숙제로 남아있다. (p273) 로 끝내려고 하는 이 책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고, 반항심이 솟아났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서 만약 작가가 임의대로 결말을 지었더라면, 나는 아마 작가에게 그만큼 비난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증인을 곁에 두고도 그저 추측만이 난무한 결론따위를 내세우는 경찰이 있는데, 어떻게 작가인 당신이 그런 결말을 내세울 수 있냐고 되물으며. 이게 무엇인가를 모티브로 했을 때 나타나는 독자에게 결코 허용될 수도 없고 허용되서도 안되는 한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는 애초에 그에 대한 글을 쓸 때에 사건과 그를 알고 있고, 책을 읽을 독자 사이에서,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문장들 속에서 허우덕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하성란 작가의 A는 꽤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고 있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려본다.

 

 

 

그러나 이 책은 집중하기가 굉장히 힘들었고 난해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나가야할지를 몰랐다. 유명했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검색이 아니라면 들을 기회도 많지 않았던 그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자주 바뀌는 시선에서 어떠한 부연설명조차 허용하지 않는 작가의 불친절함 또한 내 시선을 잡아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책을 읽어 내려갔고, 책상 위에 앉아 감흥도 없던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니 막막한 생각부터 드는 것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후에야 그 유명했던 사건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머릿 속에서 자리잡지 못했던 책의 내용들이 퍼즐 조각들을 맞추듯 딱딱 맞아가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책을 훑어보며 내용들에 살을 붙였고, 중간중간 아 - 하는 이유 모를 탄성들이 터져나왔다. 서평을 쓰며 책의 귀퉁이에 나와있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을 알았다는 것 자체도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책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그저 눈으로 활자를 좇기에만 바빠서 사건 전말에 의문성 제시따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읽어내렸다는 것이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처음 나는 A가 처음 안은영의 스펠링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 제목이라던가, 편지 발신인에 주홍 글자로조차 표기되어진 'A'에는 어떠한 특수한 목적성을 지닌 의미나 그 단어만으로 독자에게 던져주는 message가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A의 뜻을 나만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다른 서평들을 뒤적거렸지만 오직 한 서평에서만 아마조네스(amazones : 여성 무사족)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는 서평을 발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의미가 결여된 듯 보이는 그 단어에서 천사(angel)니, 아마조네스(amazones)니, 간통(adultery)이라는 의미를 결부시킨다는 것 자체에는 약간의 무리수가 따르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 결코 그 서평에 토를 다는 것은 아니다 -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이해를 하지 못해 난동피우는 머릿 속을 채 정리시키지 못한 채 길지 않은 작가의 말을 읽어나가는 마지막에 당신에게 A는 무엇일까, 나중에 나중에 듣고싶다. 라며 심심한 질문을 던지며 책을 끝마치는 걸로 봐서 작가 또한 독자가 A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어떠한 의미만을 좇는 것은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읽어본 하성란 작가의 A의 느낌은 B도 C도 F도 그렇다고 A+도 아닌 그저 A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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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나 소설
김규나 지음 / 뿔(웅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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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지음
뿔(웅진문학에디션) 2010.07.12
평점










 

 
 
 
 

 
 
 
 

 

 
 
 
 

 

 
 
 
 
한 여자가 유난히 파란색보다는 바닷빛깔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는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지 화를 추스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를 사악함이 엿보이는 표정을 한 채 창백한 얼굴로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표지를 바라보며 처음 든 생각은 음산하다 였다. 책을 다 덮은 후에 곧바로 서평을 쓰려고 펜을 들었으나 책에 대한 평은 쉽사리 써지지가 않았고, 그 때마다 펜을 놓기 일쑤여서 금세 포기해버리고 있다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한 것은 그 전이나 지금이나 혹은 그 후에도 똑같고, 똑같을 것만 같아서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펜을 들었다. 평을 쓰기 전 김규나 작가의 이름을 작게 읊조려 보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자유분방하게 써내려간 책 앞에서 손을 가만히 얹어놓고 눈을 감아본다. 아뿔싸, 책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역시 단편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열 한편의 단편을 읽으며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단편들도 여럿 있었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고 싶을 정도의 단편 역시 있었다. 단편에서 작가가 시사하려는 바를 오롯하게 이해하기란 왠지 모를 숙제처럼 남고, 그 속에서 시사한 바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 읽어야만 속이 풀리는 경우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규나의 <칼> 속에 나오는 단편들은 하나의 단편이 모여서 또 다른 하나의 프레임을 만든다. 사랑의 양면성에 상처 받으면서도 결국은 사랑을 갈구하고, 그것을 치유하며, 선택이라는 기로에 빠지게 되는. 그 틀의 이름을 나는 '인생'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 속에 합집합으로 남겨두고 그것을 포스트잇에 적어 책의 첫 장에 적어 붙인 다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칼'이라는 단어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나를 아프게도 함과 동시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피치 못하게 상대방을 아프게 찌를 수도 있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지만 나는 이 책의 첫 단편으로 선택된 <칼>이라는 이야기를 읽으며 작가가 말하려는 그 단어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당신을 부검하기 위해 여자가 든 그 메스를 제목으로 갖다붙인 것이라면 나는 매우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이 단편은 나에게 혼동을 주었다. 내가 위에서 말한 '인생'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글쎄, 어쩌면 그걸 죽음이라는 것조차 '인생'이라는 프레임 속에 넣고 싶지 않은 내 이상한 욕심이 작용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상처에 찌들어 더 이상 상처받을 공간조차 허용할 수 없던 당신은 결국 자살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 이미 이 세상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고, 당신을 부검하던 그 여자는  메스를 들고 또 다른 시신을 부검하러 간다. 사실 나는 그녀가 당신의 아픔을 끌어당겨안아 안아주고 어루어만져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독자만의 욕심이었던가. 그저 그녀는 직업으로서의 임무를 다했을 뿐 당신을 끌어안아 준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드는건 비단 나뿐일까. 독자인 내가 당신을 끌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일게 만든건 작가의 강도 높은 의도일까, 아니면 의도치 않은 우연일까.
 
 
 
꼭 감은 눈 속으로 퍼진 어둠에 쩍쩍 금이 갔다. 사선으로, 직선으로, 빗금으로, 갈라지고 부러지고 흩어진 빛의 실금들이 스스로 발광하며 심해를 헤엄치는 괴생물체처럼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이 빛을 따라 유영했다. 깊었다. 빠져나올 수 없었다. 오직 빛의 유희만이 현란하게 어둠을 희롱했다. 빛의 실체를 잡으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눈을 뜨고 빛을 직시하는 순간 빛은 처참히 해체되고 분해될 것이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둠에 갇혔다. (p45)
 
나는 단편을 다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들 중 하나는 단연 <달, 컴포지션>이었고, 완성도 또한 높았다고 평가하고 싶다. - 평가하는 건 독자의 몫이므로 - 이유는, 그 단편에서만큼은 인생의 현주소를 나타내주고 있는 가장 여실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당신에게선 항상 똑같은 냄새가 나. K의 손이 등을 토닥였다. 당신을 기억하게 하는 건 이 따뜻한 냄새야. K가 내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말했다. (p40) 던 그들의 달콤했던 사랑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던 날 K는 결혼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더 끔찍한 현실은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당신이라는 거야, 말하고 돌아선 K였다. 결혼하자는 K의 제안을 거절한 건 나였다. 프러포즈는 아이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임신한 섹스파트너에 대한 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K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를 사랑한다고 믿지 않았다.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잘 지냈을 관계였다. 그러나 일주일에 몇 시간 함께 잘 지내는 것과 결혼은 달랐다. (p41) 아니,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녀 자신이 사랑이 아니었다는데 내가 사랑이라고 구태여 고집 피울 이유는 없다. 우리는 사랑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또다시 상처를 주기에 더이상은 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싶지 않은 처음부터 무형의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강렬한 한 줄, 그래서 뻔히 보이는 결말.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잡고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처럼 책 표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없을거란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단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위와 같은 작가의 문장력을 이유로 꼽을 수 있겠다. 세상의 힘겨움을 깨달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편하게 살아온 나 역시도 가끔은 깊은 심연에 빠져 허우덕댈 때도 있었고, 그것에 대한 답답함에 숨이 턱까지 막혔던 적도 적지 않았다. 그 때의 감정들이 심연에 쌓여 올라올줄 몰랐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면에 떠올라 있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며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며, 작가가 등을 다독여준다. 그녀의 품 속에서 그 때에 참았던 깊은 울음을 토해낸다.
 
 
 
온갖 생존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당신과 내가 있다. 그러나 생존자에게도 행성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의 유한성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고, 소통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살아내는 건 투쟁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유전자를 진화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오늘도 힘겹게 뛰고 있는 당신은 나의 위대한 동지이다. 때로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당신을 위로하는 것들ㅡ철학과 종교, 음악과 미술, 의학과 과학, 경제와 문화, 그리고 수많은 소설과 시ㅡ그 분주하고 촘촘한 시간 속에서 잠깐만이라도, 내가 쓴 글 한 줄이 당신의 심장을 따사롭게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도 살아남은 지구인. 당신을 사랑한다. - 작가의 말
 
단편을 읽을 때에는 한 편의 이야기를 다 읽고 다음 이야기를 맞이하기 위해선 그 편의 이야기라던가 분위기를 리셋하고 나서야 그 다음 장을 펼쳐야한다. 하지만 하나부터 끝까지 이야기만 달랐을 뿐, 이 책은 표지에 대한 첫 인상만큼이나 음산했고, 어두웠고, 시니컬했다. 하지만 그 중 단연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이칼에 길을 묻다>라는 단편뿐이었지만, 그런 드라마같은 억지스러운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언급하기엔 조금 꺼림칙함이 남는다. 아마 작가의 말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전에 읽었던 단편들은 생각해내지 않고 마지막의 단편을 읽으며 남은 꺼림칙함을 안고 책을 덮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비록 단편이라는 틀 안에서 허우덕대느라 작가에 대한 매력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맛배기만 봐버린 기분이 드는 것도 같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해본다.
 
 
 
p145 , 오타 11번째 줄 - 단의 곁에 다가가 그의 팔짱을 껐다. -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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