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 92 | 93 | 94 | 95 | 96 | 9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A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떠한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글을 쓴다는 것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작가의 머리카락마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 어떤 것이 어떠한 형체를 띠고 있는지 나조차 알지 못하지만 - 그것은 모티브로 정한 사건이라는 벗어나서는 안되는 틀 사이에서 문장들을 짜맞추어 새로운 옷들을 덧입히는 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집단 자살극이냐, 타살극이냐'라는 처음부터 풀리지 않은 의문의 사건인 '오대양 사건'을 '또 다른 사건'으로 위장하여 그것을 글로써 풀어헤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갸우뚱거리는 머리를 한 곳에 고정시켜 놓을 수가 없었다. 분명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경찰에게서 내려진 결론은 '오대양 사장 박순자 씨에게 맹종해온 사람들의 종교적 광신상태가 빚어낸 동반자살극이다' 라는 것 뿐인 딱 한줄로 설명할 수 있는 - 더 이상은 설명할 수조차 없는 - 사건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경찰도 밝히지 못한 사실을 그 자리에 직접 있지도 않았고, 경험한 것도 아닌 그저 소설가에 불과한 작가가 과연 그 내막을 파헤칠 수 있을까 기대반, 의심반으로 읽어내려갔다.

 

 

 

'이 냄새다.' 라고 시작되는 이 책은 1인칭 화자인 '나'가 자신의 고향에서 나는 썩은 오수와 짐승들이 부패해 나는 악취를 꼬집으며 고향을 상기하고 있다. '나'로 지칭되는 화자는 많은 사람들이 기숙사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그들이 공장의 사장을 '어머니'로 부르고 있었다는 것, 특이하게도 그들 사이에 '아버지'라고 불리는 남자들이 없다는 것 (p47) 과 같은 곳에서 어머니의 뱃 속에서 떠밀려나오던 그 날부터 그 때에 제 1세대 신신양회가 타락하기 전까지를 회상하듯 독자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 당시 신신양회는 이익을 보기 위한 산업폐기물이 첨가된 일명 '쓰레기 시멘트'(1999년부터 산업폐기물이 시멘트의 부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유연탄 비용만 아껴도 순이익이 부쩍 늘어날 거라는 게 어머니의 계산이었다. 연료비도 절감하면서 폐타이어처리 비용까지 따로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p44))와 공장 확장(그 즈음 어머니는 만 삼천 통급의 사일로를 지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p45))을 꾀한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간 수면 위로 떠오른다 했던가. 시멘트에 들어가는 각종 폐기물의 주요 성분들이 전립선암이나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 된다는 보고였다. 공장 인근의 토양과 농작물에서도 중금속이 검출되었다. 공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국도변에 날아가 쌓인 분진에 자석을 대자 철가루가 달라붙었다고 했다. (…) 며칠 뒤 신신양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제목은 '당신의 집은 안전합니까'였다. 산업폐기물로 만든 '쓰레기 시멘트'로 지은 집 위험성과 피해 사례들이 실렸다. 아토피 피부염을 앓고 있는 아이의 사진이 기사에 힘을 실었다. (p44-45) '쓰레기 시멘트 파동'은 공장 확장을 하기에 차질이 있음을 경고했고, 결국은 그들의 보금자리이자 그들을 지켜주는 성이었던 신신양회는 한순간에 추락하고 만다. 그 후 다락방에서 24구(여자 21명, 남자 3명)의 시신이 '집단 자살'이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발견되지만, 그것을 보충해줄 어떠한 단서도 없다. 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와 또 다른 신신양회 아이들은 제 2세대 신신양회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신신양회를 찾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 제 뿌립니다. 그곳은." (p172) 처음 그들에게 신신양회가 어떤 이유에서 다시 건립되었건간에 결국은 '그림자'라고 불렸던 기태영이 선악으로 그 대상이 바뀌면 '그림자'는 우리 속의 어두운 욕망, 악을 상징한다. (p254) 라는 말을 대변하듯 1세대의 그들 엄마들이 그러했듯 욕망에 눈이 멀어 '쓰레기 시멘트'와 '공장 확장'을 다시 한번 시도하고, 그들 엄마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결국 신신양회는 더 이상의 명예를 되찾기는커녕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 쓸 수도 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 책에서 신신양회는 오대양 사건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책은 이미 오대양 사건을 모티브로 지어진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을 전제로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고 이미 벌어진 이야기에 대해 질퍽한 진흙 속에 빠져 구해내지 못한 결말을 책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다. -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 그렇기에 뒤로 넘어갈수록 결말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몇 개의 반전들이 있었지만, 그것들 따위에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책을 다 읽고나서 누가 왜 신신양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는 지금까지도 숙제로 남아있다. (p273) 로 끝내려고 하는 이 책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고, 반항심이 솟아났고,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서 만약 작가가 임의대로 결말을 지었더라면, 나는 아마 작가에게 그만큼 비난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증인을 곁에 두고도 그저 추측만이 난무한 결론따위를 내세우는 경찰이 있는데, 어떻게 작가인 당신이 그런 결말을 내세울 수 있냐고 되물으며. 이게 무엇인가를 모티브로 했을 때 나타나는 독자에게 결코 허용될 수도 없고 허용되서도 안되는 한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는 애초에 그에 대한 글을 쓸 때에 사건과 그를 알고 있고, 책을 읽을 독자 사이에서,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문장들 속에서 허우덕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하성란 작가의 A는 꽤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고 있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려본다.

 

 

 

그러나 이 책은 집중하기가 굉장히 힘들었고 난해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나가야할지를 몰랐다. 유명했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검색이 아니라면 들을 기회도 많지 않았던 그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자주 바뀌는 시선에서 어떠한 부연설명조차 허용하지 않는 작가의 불친절함 또한 내 시선을 잡아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책을 읽어 내려갔고, 책상 위에 앉아 감흥도 없던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니 막막한 생각부터 드는 것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난 후에야 그 유명했던 사건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머릿 속에서 자리잡지 못했던 책의 내용들이 퍼즐 조각들을 맞추듯 딱딱 맞아가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책을 훑어보며 내용들에 살을 붙였고, 중간중간 아 - 하는 이유 모를 탄성들이 터져나왔다. 서평을 쓰며 책의 귀퉁이에 나와있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을 알았다는 것 자체도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책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그저 눈으로 활자를 좇기에만 바빠서 사건 전말에 의문성 제시따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읽어내렸다는 것이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처음 나는 A가 처음 안은영의 스펠링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 제목이라던가, 편지 발신인에 주홍 글자로조차 표기되어진 'A'에는 어떠한 특수한 목적성을 지닌 의미나 그 단어만으로 독자에게 던져주는 message가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A의 뜻을 나만 찾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다른 서평들을 뒤적거렸지만 오직 한 서평에서만 아마조네스(amazones : 여성 무사족)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는 서평을 발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의미가 결여된 듯 보이는 그 단어에서 천사(angel)니, 아마조네스(amazones)니, 간통(adultery)이라는 의미를 결부시킨다는 것 자체에는 약간의 무리수가 따르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 결코 그 서평에 토를 다는 것은 아니다 -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이해를 하지 못해 난동피우는 머릿 속을 채 정리시키지 못한 채 길지 않은 작가의 말을 읽어나가는 마지막에 당신에게 A는 무엇일까, 나중에 나중에 듣고싶다. 라며 심심한 질문을 던지며 책을 끝마치는 걸로 봐서 작가 또한 독자가 A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어떠한 의미만을 좇는 것은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읽어본 하성란 작가의 A의 느낌은 B도 C도 F도 그렇다고 A+도 아닌 그저 A스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김규나 소설
김규나 지음 / 뿔(웅진)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김규나 지음
뿔(웅진문학에디션) 2010.07.12
평점










 

 
 
 
 

 
 
 
 

 

 
 
 
 

 

 
 
 
 
한 여자가 유난히 파란색보다는 바닷빛깔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는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지 화를 추스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를 사악함이 엿보이는 표정을 한 채 창백한 얼굴로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표지를 바라보며 처음 든 생각은 음산하다 였다. 책을 다 덮은 후에 곧바로 서평을 쓰려고 펜을 들었으나 책에 대한 평은 쉽사리 써지지가 않았고, 그 때마다 펜을 놓기 일쑤여서 금세 포기해버리고 있다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한 것은 그 전이나 지금이나 혹은 그 후에도 똑같고, 똑같을 것만 같아서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펜을 들었다. 평을 쓰기 전 김규나 작가의 이름을 작게 읊조려 보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자유분방하게 써내려간 책 앞에서 손을 가만히 얹어놓고 눈을 감아본다. 아뿔싸, 책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역시 단편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열 한편의 단편을 읽으며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단편들도 여럿 있었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고 싶을 정도의 단편 역시 있었다. 단편에서 작가가 시사하려는 바를 오롯하게 이해하기란 왠지 모를 숙제처럼 남고, 그 속에서 시사한 바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것을 알아낼 때까지 읽어야만 속이 풀리는 경우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규나의 <칼> 속에 나오는 단편들은 하나의 단편이 모여서 또 다른 하나의 프레임을 만든다. 사랑의 양면성에 상처 받으면서도 결국은 사랑을 갈구하고, 그것을 치유하며, 선택이라는 기로에 빠지게 되는. 그 틀의 이름을 나는 '인생'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 속에 합집합으로 남겨두고 그것을 포스트잇에 적어 책의 첫 장에 적어 붙인 다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칼'이라는 단어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나를 아프게도 함과 동시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피치 못하게 상대방을 아프게 찌를 수도 있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지만 나는 이 책의 첫 단편으로 선택된 <칼>이라는 이야기를 읽으며 작가가 말하려는 그 단어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당신을 부검하기 위해 여자가 든 그 메스를 제목으로 갖다붙인 것이라면 나는 매우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이 단편은 나에게 혼동을 주었다. 내가 위에서 말한 '인생'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글쎄, 어쩌면 그걸 죽음이라는 것조차 '인생'이라는 프레임 속에 넣고 싶지 않은 내 이상한 욕심이 작용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상처에 찌들어 더 이상 상처받을 공간조차 허용할 수 없던 당신은 결국 자살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 이미 이 세상 사람으로 돌아올 수 없고, 당신을 부검하던 그 여자는  메스를 들고 또 다른 시신을 부검하러 간다. 사실 나는 그녀가 당신의 아픔을 끌어당겨안아 안아주고 어루어만져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독자만의 욕심이었던가. 그저 그녀는 직업으로서의 임무를 다했을 뿐 당신을 끌어안아 준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드는건 비단 나뿐일까. 독자인 내가 당신을 끌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일게 만든건 작가의 강도 높은 의도일까, 아니면 의도치 않은 우연일까.
 
 
 
꼭 감은 눈 속으로 퍼진 어둠에 쩍쩍 금이 갔다. 사선으로, 직선으로, 빗금으로, 갈라지고 부러지고 흩어진 빛의 실금들이 스스로 발광하며 심해를 헤엄치는 괴생물체처럼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이 빛을 따라 유영했다. 깊었다. 빠져나올 수 없었다. 오직 빛의 유희만이 현란하게 어둠을 희롱했다. 빛의 실체를 잡으려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눈을 뜨고 빛을 직시하는 순간 빛은 처참히 해체되고 분해될 것이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둠에 갇혔다. (p45)
 
나는 단편을 다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들 중 하나는 단연 <달, 컴포지션>이었고, 완성도 또한 높았다고 평가하고 싶다. - 평가하는 건 독자의 몫이므로 - 이유는, 그 단편에서만큼은 인생의 현주소를 나타내주고 있는 가장 여실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당신에게선 항상 똑같은 냄새가 나. K의 손이 등을 토닥였다. 당신을 기억하게 하는 건 이 따뜻한 냄새야. K가 내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말했다. (p40) 던 그들의 달콤했던 사랑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던 날 K는 결혼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더 끔찍한 현실은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당신이라는 거야, 말하고 돌아선 K였다. 결혼하자는 K의 제안을 거절한 건 나였다. 프러포즈는 아이에 대한 의무와 책임, 그리고 임신한 섹스파트너에 대한 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K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를 사랑한다고 믿지 않았다.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잘 지냈을 관계였다. 그러나 일주일에 몇 시간 함께 잘 지내는 것과 결혼은 달랐다. (p41) 아니,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녀 자신이 사랑이 아니었다는데 내가 사랑이라고 구태여 고집 피울 이유는 없다. 우리는 사랑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또다시 상처를 주기에 더이상은 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싶지 않은 처음부터 무형의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강렬한 한 줄, 그래서 뻔히 보이는 결말.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잡고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처럼 책 표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없을거란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단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위와 같은 작가의 문장력을 이유로 꼽을 수 있겠다. 세상의 힘겨움을 깨달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편하게 살아온 나 역시도 가끔은 깊은 심연에 빠져 허우덕댈 때도 있었고, 그것에 대한 답답함에 숨이 턱까지 막혔던 적도 적지 않았다. 그 때의 감정들이 심연에 쌓여 올라올줄 몰랐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면에 떠올라 있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며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며, 작가가 등을 다독여준다. 그녀의 품 속에서 그 때에 참았던 깊은 울음을 토해낸다.
 
 
 
온갖 생존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당신과 내가 있다. 그러나 생존자에게도 행성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의 유한성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고, 소통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살아내는 건 투쟁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유전자를 진화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오늘도 힘겹게 뛰고 있는 당신은 나의 위대한 동지이다. 때로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당신을 위로하는 것들ㅡ철학과 종교, 음악과 미술, 의학과 과학, 경제와 문화, 그리고 수많은 소설과 시ㅡ그 분주하고 촘촘한 시간 속에서 잠깐만이라도, 내가 쓴 글 한 줄이 당신의 심장을 따사롭게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도 살아남은 지구인. 당신을 사랑한다. - 작가의 말
 
단편을 읽을 때에는 한 편의 이야기를 다 읽고 다음 이야기를 맞이하기 위해선 그 편의 이야기라던가 분위기를 리셋하고 나서야 그 다음 장을 펼쳐야한다. 하지만 하나부터 끝까지 이야기만 달랐을 뿐, 이 책은 표지에 대한 첫 인상만큼이나 음산했고, 어두웠고, 시니컬했다. 하지만 그 중 단연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이칼에 길을 묻다>라는 단편뿐이었지만, 그런 드라마같은 억지스러운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언급하기엔 조금 꺼림칙함이 남는다. 아마 작가의 말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전에 읽었던 단편들은 생각해내지 않고 마지막의 단편을 읽으며 남은 꺼림칙함을 안고 책을 덮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비록 단편이라는 틀 안에서 허우덕대느라 작가에 대한 매력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맛배기만 봐버린 기분이 드는 것도 같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해본다.
 
 
 
p145 , 오타 11번째 줄 - 단의 곁에 다가가 그의 팔짱을 껐다. - 팔짱을 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위해 산다는 것 -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관계로부터 담담하게
이모겐 로이드 웨버 지음, 김미정.김지연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 나는 나를 찾기 위한 책을 많이 읽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전에 읽었던 <팬이야>가 그랬고, 지금 서평을 쓰는 <나를 위해 산다는 것>도 그런 류이다. 예쁜 에메랄드 빛을 띄고 있는 이 책의 표지와 커다란 제목은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내가 지금 몸을 담고 있는 회사에서는 관공서를 위주로 계약 체결을 하지만 오래되지 않은 , 아직 병아리 삐약삐약일 뿐인 회사는 전국에 있는 시·도교육청, 학교의 비위를 살살 달래어가며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owner부터 시작하여 업무를 짊어진 모든 이들의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기는커녕 그것이 하늘을 찔러 올해는 유난히 해가 분노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누구 하나 빈둥빈둥 노는 이가 없고, 머리카락을 쭈뼛세우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적에 그 속에서 제외되는 나는 도면이나 패턴도 따위를 그려내며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을 실컷 쐬며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윗분들의 스트레스가 나에게 화살로 꽂히지 않게 하기 위해 정도껏 눈치를 봐야하는 스트레스를 만만치않게 받고 있고, 또한 그래서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서는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받기에 앞서 맏딸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자칫 허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의젓함을 가장한 삶을 살던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 - 그리 오래가진 못할테지만 잠시뿐이라 하더라도 - 오롯하게 내 자신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한마디로 - 매우 -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싱글녀들을 위해 차린 만찬이라고 해도 전혀 부족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 남자, 친구, 스위트홈, 가족, 외출, 건강'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무엇하나도 빠지면 안될 필수불가결한 조건들 중 하나이다. 저자는 이것들을 하나의 보따리에 집어넣어놓고 독자들에게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그것에 관한 이론을 펼치고 있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중 그나마 마음에 와닿는게 있었다면 단연 일이었다. 우리는 항상 직장에 대해 불만을 품는다. 페이가 작다던가, 일이 힘들다거나, 직장상사가 못되게 군다거나, 하다못해 출근시간이 너무 이르다거나, 퇴근시간이 너무 늦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한 일에서부터 문제점을 찾기에 바쁘고 그것에 불만을 품지만 딱히 어떠한 해결방안도 찾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그것들은 점점 모아져 알 수 없는 스트레스로 변질되어 최악의 경우 다니던 직장을 관두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나 또한 일을 시작할 때의 패기와는 달리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회의감을 많이 느끼고 있기에 어떠한 만족따위는 얻을 수 없는 남들과 같은 틀에 박혀 출근해서 일하다가 시간되면 퇴근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사람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야만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저자는 임시방편의 직장이라도 내가 괜찮은 사람임을 느끼게 해준다고 하는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글쎄. 라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직장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훨씬 낫다. (p23) 는 문장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던 이유는 나 역시도 원하는 일이 아니지만 당분간 내가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음으로 해서 스트레스는 많이 받고는 있지만 한켠으로는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것이 기정사실이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지 말고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자. (p28) 낯이 많이 익은 이 문장을 나는 안은영 작가의 여자공감에서 이미 접했던 이력이 있다. 그 때 그 한줄의 짤막한 문장은 항상 남들과 비교하며 프레임에 빠져살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었는데, 그것도 책을 읽는 그때 뿐이었고, 다시 이 문장을 곱씹게 되었을 땐 마치 내 마음에 꼭 와닿는 문장을 찾았다는 희열에 가득찼고, 점점 이 책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게 왠걸. 내가 도대체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무엇을 얻고자 끝페이지까지 도달해야하는가 하는 짜증이 솟구쳐왔다.

 

 

 

물론 섹스는 연인 사이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싱글녀다. 당신이 철이 여인이 아닌 이상 우리는 가끔 우발적 섹스를 한다. 남자들은 원나이트스탠드를 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자들은 우발적 섹스를 한다. (중략) 우발적 섹스를 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들볶지도, 죄책감을 갖지도 말자. 우리는 즐겼다. 그때 그것을 원했다. 그랬으면 됐다.(p121) 내가 이 문장을 오롯이 순수하게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싱글녀가 아니어서 그런가? 하는 막연한 의구심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금 이해하기에 힘든 부분이 아닐까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인터넷상에서 비슷한 글 - 예를 들면, 술먹고 누구랑 잤어요. 하는 등의 - 글이 올라오면 자신의 육체적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조금 격하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못하고 홀대하는 미친년이라고 욕하기도 하고 그 글에 달려있는 댓글들 또한 모두 악플로 가득 차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몸에 무성히 있는 털들에 대한 제모를 거리낌없이 부탁할 수 있는 수 있는 정도의 게이친구가 있고, 싱글이란 시기는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기다. (p173) 라는 말을 하며 싱글녀이기에 아이의 신발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 돈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다른 무언가를 투자할 수 있다는 경제적 여건을 언급하는 것을 보며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 문화권 자체가 다르기에 그럴 수밖에 없음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 저자를 이해하기란 나에게 좀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을 통해 나를 찾기는커녕 이 책을 읽는 동안 째깍째깍 잘도 지나가던 시간들을 다시 돌려놓고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책을 읽었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며 시간을 허비한 듯한 애석함이 뚫고 지나갔다. 아직 내가 20대 초반이라는 초원을 달리고 있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몇 년이 좀 더 지나고 먼 훗날 다시 읽어보게 된다면 그 땐 조금 더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음을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팬이야 (양장)
전아리 지음, 안태영 그림 / 노블마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젊은 작가들이 숨겨왔던 재능을 펼치고 있어 이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조금 더 뜨겁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들의 글을 읽을 때면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받기가 일쑤였고, 그로 인한 파장은 언제나 짜증으로 치솟았기에 '더 이상은 읽지 않을거야!' 라고 외치며, 그를 정화하기 위해 그보다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중년 작가들의 작품만을 선호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내 품에 들어온 전아리 작가의 <팬이야>를 젊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눈 감고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늦지 않게 읽어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책장 한 쪽에 밀어넣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차근차근 시작했는데, 컨디션이 말짱 꽝인 상태에서 좀처럼 마음을 다잡을 수 없어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아 전아리의 팬이야를 들고 표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익살스러운 일러스트에 피식 웃음을 짓고는 표지를 넘겼다. 책 날개에 작가의 사진과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많지 않은 문장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사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아닌 이상에야 작가 소개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는 작가가 1986년생이라는 숫자에 이끌려 소개란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력을 주욱 늘어놓고는 그녀의 문학에 관해 짤막한 호평을 써놓았다. 하지만 그 작가를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권리라고 생각하며, 내가 이 문장들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는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어주리라 생각하며 첫 장을 펼쳤다.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로비를 가로지르며 "잠깐만요!" 로 시작되는 바쁜 현대인의 일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이 책의 여주인공은 이렇다 할 꿈도 목표도 없다. 남들처럼 일에 대한 욕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딱히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도 찾지 못했다. 자주 만나 허물없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도 없다. 그리고 이제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사랑마저 끝이 났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걸까. 이제껏 삶을 뒤집어엎을 만한 어떠한 모험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 라고 둘러대곤 했찌만 스물아홉이 된 지금에 와서 두 손을 들여다보니 딱히 잃을 만한 것도 없다. 생각해 보면 모험의 부재가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삶에는 열정의 증거가 없었다. (p29) 라는 문장이 그 어떤 말보다 더 잘 어울리는 스물아홉 살 계약직 회사원 정운이다. 어느 날 '뚱뚱한 지석철 부장'의 줄임말로 알고 있지만 실은 '뚱뚱한 게 지랄도 하네'라는 줄임말인 '뚱지 부장'에게 불려가 해고를 당하는 꿈을 꿀 만큼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정직원이 될 수 있을거란 일념 하나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 와중에 사귀던 남자 동주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엔 미련없이 헤어지고, 같은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큰언니가 집에 온다는 말을 전해들은 정운은 잔소리를 듣지않기 위해 텅빈 냉장고를 채울 것을 마련해주고, 새로운 변기 커버가 있는 마트를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PR행사때 받은 뒤 적당한 사람에게 주려고 줄곧 들고 다닌 CD에 적혀있던 'S1001'이라는 시리얼 넘버로 인해 우연치않게 '시리우스'라는 아이돌의 포옹을 받게 되고, 그들의 팬이 된다. (중략)

 

 

 

이미 몇 권의 작품집을 낸 그녀의 문장들은 내가 그간 읽었던 책들엔 훨씬 못 미칠지언정 나름대로의 구색들을 맞추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 같다. 하지만 경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쓰는 중년 작가들을 따라가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애초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라는 명언과 같은 무리수였고, 한낱 독자의 이기심이었음을 간파했다. 그걸 감안하고 읽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초점이었던 '자아찾기'가 중간중간 빈틈을 보이는 것에는 탄식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자아찾기'를 과감하게 - 어떤 가수나 배우에 꽂혀 콘서트를 간다거나 시사회를 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었으므로 내 입장에서 보기엔 충분히 과감했다 말할 수 있었다 - 감행하면서도 그를 뒷받침해주는 혹은 그에 따른 결말인 로맨스가 쓸데없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자아찾기'에 대한 관찰은 guest가 된 것이 마이너스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 작가는 자아찾기보다 로맨스를 주로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 그저그런 로맨스소설을 쓰고자 했었더라면 난 아마 최악의 경우 이 책을 아예 펼쳐보지도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 또한 익살스러운 표지만큼이나 유쾌한 로맨스를 꾸려가길 바랬던 것과는 달리, 관찰자 입장도 아닌 1인칭 관점에서 끌어나가는 이야기임에도 여주인공의 감정처리같은 경우엔 오목조목한 세심함이 아쉬웠고, 책을 읽는 독자에게 넉넉하지 못한 아량을 베풀며 답답하리만큼 끄집어내주지 못했던 점 또한 아쉬웠다. 그래서 읽는 내내 왠지 답답한 드라마 한 편과 인터넷 소설을 혼합하여 보는 기분이었달까.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도 없었고, 로맨스에서 당연히 만끽해야할 두근거림조차 내 녹녹하지 못한 심장은 내비치지 못했기에 개인적인 짧은 소견으로 소설책이라면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할 1원칙이라 생각되는 재미조차 추구하지 못했고, 흡입력이 강하다거나 하는 것도 없이 그냥 책장이 넘어가는 기분. 그저 아무런 사건없이 유 - 하게 흘러가는 우리들의 사랑이야기가 책 속에 녹아있을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요즘같이 짜증이 치솟는 요즘에 읽은 것이기에 한층 더 감정적인 서평을 읽으며 심지어 한 단어 선택조차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정성스레 한 문장을 완성시켜 내 놓은 작가에게 미안함이 그지없다. 애초에 심난한 마음을 유쾌함이라는 가면으로 숨기기 위해 익살스러운 표지가 그려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들은 내 잘못인 것이다. "변화라는 게 그렇잖아. 기존의 자기를 깨부수고, 당당하게 상처받고, 남은 파편들을 치우고. 그 빈자리에 새로운 걸 세우는 거 아니겠어?" (p177) 저자가 책 속에 써넣은 변화에 대한 정의가 그녀에게도 가닿길 바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1899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피아노 연주곡을 만들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그 모티브에서 얻은 것이다. 라고 작가 소개란의 끝에 쓰여있다. 우리는 처음 책을 집어들면 표지부터 보게 된다. 표지를 보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혹은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표지때문에 더욱 끌렸던 책이었지싶다. 책의 표지에 있는 저들 각각의 모습은 유령처럼 다들 흐릿흐릿한 모습뿐인지라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등을 좀 더 자세히 보려면 책을 눈앞으로 끌어당겨 보아야 하지만, 가운데에 유독 못생긴 여자 난쟁이에게만큼은 관대하게 스포트라이트까지 비추고 있는 것을 우리는 깊이 관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 왜 박민규는 어째서 소재가 될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보잘 것 없어보이는 캐릭터로 글을 써내려갔을지 궁금해하며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한 장 , 한 장 읽어내려갔다.

 

 

 

이 책은 중간중간 말꼬리를 잘라먹기에 충분한 term을 가지고 있기에 읽으며 도무지 집중을 하려 애를 써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덜컹거리는 무궁화호 기차는 도무지 집중을 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던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 기차에 몸을 맡기고 될대로 되라지, 하는 생각을 가지며 읽고 있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박민규 작가가 써놓은 그 글을 따라 호흡을 내뱉으며 문장들을 음미하며 읽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이 책은 사회적측면을 독자에게 빠르고 부담스럽게 안기기 보다는 누구나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는 연애소설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른바 '외모 지상주의'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저자는 여주인공에게 이름조차 쥐어주지 않았음에 (물론 내가 찾지 못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난 그 여주인공을 '못생긴 여자'라 칭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 '못생긴 여자'가 배우를 할 정도의 페이스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둔 '잘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편지를 읽다보면 아래의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중략) 저같은 여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마취를 해도 고통을 이길 수 없는... 결국 어떤 방법도 찾을 수 없는 여자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마음 속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도려낸 여자입니다. 이젠 어쩔 수가 없구나... 마음의 단두대에 올라 스스로를 절단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피... 흥건히 세상을 적시던 마음의 출혈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발밑을 뒹구는 저 얼굴을 이제 누가 찌르고 찬다 해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봉합을 끝내고 몸통만 남은 마음으로살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택한 진통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여자를... 도대체 누가 사랑해 줄 수 있겠어요. (중략) (p274)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의 뇌는 엄청난 진동으로 인한 여파로 현기증을 남겼고, 그 후 몇분간은 몽롱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못났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리기에 바쁘지는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나가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저 사람보단 내가, 저 사람보다도 내가' (...) 라며 자신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서 구제시켜주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우리는 그들을 또 나를 비난할 수 없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외모 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그게 인간이야. 모든 인간에게 완벽한 미모를 준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때는 또 방바닥에 거울을 깔아놓고 내 항문의 주름은 왜 정확한 쌍방 대칭 데칼코마니가 아닐까, 머릴 쥐어뜯는게 인간이라구. 신이여, 당신은 왜 나에게 좌우비대칭 소음순을 주신 건가요... 당신은 왜 나에게 짝부랄을 달아준 건가요 따지고 드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지.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多數結)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p174)

 

 

 

나는 아주 미안하게도 박민규 작가의 의도와 벗어나서 - 벗어났는지 아닌지 요한의 말을 보면 아리송할 때가 많다 - 사회 속의 외모 지상주의를 탓하고 싶진 않다. 저자가 만들어놓은 '못생긴 여자' 그 여자의 못난 생각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문제점부터 찾아야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문제점으로만 치부해버리기에는 현실은 가혹하게도 외모 지상주의가 남발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란 참 많은 힘듦을 나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머리스타일부터 발사이즈까지 맞추려면 인형이 아니고는 탄생할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물어보고 싶다. 그들이 정해놓은 - 아무리 동화같다 해도 자칫하면 깨질지도 모르는 그런 - 스노우볼에서만 살 작정인가?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 안에서 매력적인 면을 찾아 그것을 발휘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못생긴 여자'는 말한다. 자신은 그러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하지만 나는 '하면 얼마나 했을까?' 라는 의문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겨우 몇 장의 편지에서조차 말투에서부터 자신감 부족이 뚝뚝 묻어져나오는 글을 읽으며 여주인공이 앞에 있는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고 좁히고 끝까지 좁혀서 혀를 끌끌 차는 둥 한심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저런 여자가 있다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얼굴이 못생겨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사랑이 매말라서. '못생긴 여자'는 다행스럽게도 편지의 끝에서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p289) 아니,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타인을 감싸줄 수 있는거야. 라고 귓가에 나긋나긋하게 말해주고 싶어졌다. 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땐 새벽에 잠도 못자고 축구를 봤는데 골 결정력이 아쉬워서 동점으로 비겼을 때와 같은 비스무리한 탄식이 터져나왔다. 왠지 자꾸만 뭔가가 아쉽고, 아쉽고 또 아쉬운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 92 | 93 | 94 | 95 | 96 | 9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