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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평점 :
이 소설집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 며칠이나 걸려서 봤어. 여전히 책읽는 시간이 아주 적어서 그렇지. 책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은 못하겠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걸 내가 만들지 못하는 거야. 이런 말 안 하고 싶었는데. 슬프네. 이 책 빨리 보고 쓰고 다른 책 보고 싶었는데. 책을 잘 보려고 해야지, 다른 책 보고 싶다 말하다니. 책 제목 《연년세세》는 ‘여러 해를 거듭하여 죽 이어짐’이야. 좋은 건 연년세세하면 좋겠지만, 어떤 건 끊겨야지. 이런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었을 거야. 그때보다 지금 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어. 여성 삶 말이야.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게 이어지는 여성 삶이야. 그건 여성 스스로 끊어야 할 텐데, 어쩐지 여성이 끊지 못하는 것 같아.
첫번째 소설 <파묘>는 김승옥문학상에서 처음 보고 슬프다 느꼈는데. 딸인 한영진은 왜 엄마한테 자기 집 살림을 맡겼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 그 이야기는 다음 소설 <하고 싶은 말>에서 조금 알겠더군. ‘파묘’만 보면 한영진을 알기 어려워. 엄마와 아빠가 하던 일이 잘 안 되고 아빠와 엄마는 한영진 시집 건물에 들어와 사는데, 한영진과 사위는 맞벌이여서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었어. 그걸 엄마 이순일이 해. 이순일은 둘째딸인 한세진한테 집에 와서 살림을 이으라고 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까 싶기도 해. 그 집에 그냥 살지 못하고 자신이 하기 어려우니 다른 딸이라도 하면 좀 덜 미안해서였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이순일은 자신이 힘들었던 건 잊은 걸까. 왜 딸한테만 힘든 걸 하라고 하는 건지.
한영진은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일을 했어. 그 일을 잘하기도 했어. 다른 사람은 잘 팔지 못하는 이불과 베개를 한영진은 잘 팔았어. 그렇다고 그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아. 한세진이 희곡과 시나리오를 쓰는 걸 보고 자기 밑에서 일하라는 말도 했어. 한세진이 걱정스러워서 한 말일지. 그렇겠지, 그럴 거야. 글쓰기로 버는 돈이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될 테니. 한영진은 엄마인 이순일을 조금 원망하는 것 같았어. 한영진이 일을 하게 된 건 이순일이 한영진한테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지 못한다는 말을 했거든. 그러면서 뉴질랜드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막내 아들 한만수한테는 돌아오라고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 했어. 이순일과 한중언은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어.
세번째 소설 <무명無名>엔 이순일 어린시절 이야기가 나와. 이순일이지만, 어렸을 때는 외할아버지가 순자라 했어. 이순일은 결혼하기 전까지 자기 이름이 순자인지 알았어. 그럴 수가. ‘파묘’에서는 외할아버지 무덤을 아주 없애서 슬픈 느낌도 들었는데,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따듯한 사람은 아니었더군. 이순일은 동생이 죽은 걸, 외할아버지가 이순일 탓을 한다 여겼던 것 같기도 해. 외할아버지는 별말 하지 않았는데. 차라리 뭔가 말을 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이순일은 부모가 죽고 외할아버지와 살다 고모 집에 가게 돼. 고모는 이순일한테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자기 집 일을 시키려고 이순일을 데리고 간 거였어. 진짜 고모 맞을까. 아버지와 배다른 고모다 했는데. 그때 어려워서 그랬다고 해야 할까. 모르겠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조카한테 힘든 일을 시키다니. 이순일은 순자라는 친구를 사귀고 고모 집을 떠나기도 했는데, 다시 돌아와야 했어. 순자가 이순일이 있는 곳을 고모한테 알려줬던 걸지도 모르겠어.
누구보다 힘들었던 사람은 이순일이겠지. 부모 없이 외할아버지와 살다 고모집에서 일했으니. 고모네가 다른 곳에 갈 때 이순일은 함께 가고 싶지 않아서 결혼해. 이순일이 보기에 한중언은 성실했어. 한중언, 잘 모르겠어. 아니 예전 아버지는 한중언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한중언만 그런 건 아니기도 하군. 한영진 남편 김원상도 그냥 있어. 그냥 있다니 뭐가 그냥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아버지 가장이라는 것도 무거운 짐이 되기는 하겠지. 그렇기는 해도 뭔가 일을 저지르면 엄마 여성이 해결하기도 해.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냥 생각나서.
마지막 <다가오는 것들>은 허영미와 한세진 이야길까. 그렇게 보이면서도 한세진 이모할머니, 이순일 이모인 안나 이야기 같기도 하군. 안나는 미군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갔다고 해. 그것 때문에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이 안 좋게 여기기도 했던가 봐. 양색시라는 말을 뒤에서 했다고 해. 한국 여성은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고 일제에서 해방을 맞은 뒤엔 양색시가 됐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 모두 그렇게 된 건 아니겠지만, 그건 이 나라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이 소설 보니 예전에 본 《일기》가 생각나기도 했어. 한세진 이야기엔 황정은 이야기도 겹쳤더라고. 그런 일이 처음은 아니겠지. 소설이라 해도 작가 이야기도 조금은 들어갈 테니. 한세진과 황정은이 아주 똑같은 건 아닐 거야. 한세진은 이순일 딸이기도 하지.
여성이 여성 삶을 알고 잊지 않고 안 좋은 건 끊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러지 않으면 힘든 여성 삶은 바뀌지 않을 거야. 예전보다 지금 괜찮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이 살기에 힘든 세상이야.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