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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브
존 맥아더 지음, 박주성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2년 1월
평점 :
슬레이브
Slave는 우리말로 종 또는 노예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이 책은 엄격히 종과 노예를 구분하고 있다. 종은 영어로 Servant이며 우리말로 봉사자나 종업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계약적인 느낌이 강하다.
왜 신약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노예라는 용어를 책 제목으로 사용한 것일까?
나는 최근에 신약성경 회복역이란 한국복음서원에서 출간한 성경책을 한권 보게 되었다. 회복역은 다시금 번역해 본다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읽어온 성경은 항상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 성경책의 앞부분에서 설명하듯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어로 만든 성경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소개된다. 이후 영어 성경책을 주로 참고하여 번역하게 되었다고 추가 설명이 되어 있다. 원서인 히브리어나 헬라어 등의 성경책이 아니다. 그래서 회복역은 미국에서도 히브리어 성경을 다시금 직역하는 방법으로 번역한 성경인데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었다고 서문에 나타난다.
내가 왜 이렇게 긴 말을 하느냐면 이 회복역 성경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등의 복음서의 시작에 주님의 노예인 누구누구는 하면서 시작하는 부분이 많다. 정작 우리가 흔히 보는 성경에는 이 노예라는 표현보다는 종이나 형제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왜 이 노예라는 표현이 보통의 성경에는 빠져 있는 것일까?
‘둘로스’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둘로스 선교단이라는 커다란 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선교와 봉사를 하는 단체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배에서 선교단은 참으로 허름한 옷들을 입고 세계 곳곳의 기념품과 선교단 자체 제작품들을 판매하기도 하고 전도용 책자들을 무료로 나눠 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에 ‘둘로스’라는 말을 들어는 보았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다. 그저 음감이 좋은 히브리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둘로스’는 바로 이 책의 제목인 노예를 뜻하는 말이다. 이제야 둘로스 선교단이 얼마나 청렴하고 순종적인 단체였던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 사후 로마시대를 거치고 유럽의 천주교는 이러한 노예라는 표현을 대부분 제거하고 다른 표현들로 바꿔 놓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잘못 알게 되었다. 예수님과 같은 촌수의 형제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으로 교회 내에서나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교만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노예이다. 그래서 그 분을 주님이라 부른다. Master와 Slave의 관계이다. 노예라는 단어의 어감으로 인해 우리는 낮고 천해지는 것이 다소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낀다. 그래서 종이라는 표현을 오히려 편하게 느낀다. 왠지 조금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주님께 구속됨을 전적으로 시인하고 받아 들일 때 더욱 강해진다.
우리가 주님의 노예가 아니면 죄의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죄 자체인 사탄은 우리에게 인간적 자유를 허락한다. 마음껏 죄짓도록 방치한다. 교만이 그에게는 너무도 요긴한 도구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주님을 통해 죄 사함 받았기에 주님 안에서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주님이 없이는 종국에는 지옥이다. 마음에 번민과 욕심이 가득해진다.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견디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유가 너무 많아 잘못된 선택을 한다. 자신이 자기의 것이라 판단하여 자신의 목숨도 자기 마음대로 다룬다. 하지만 결코 자유인이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건 스스로의 구속이요. 죄의 노예가 된 모습이다.
이 책은 꽤 읽기가 힘이 든다. 노예라는 주제어에 대한 거부감에서 그런 것일까? 그 보다 구원받고 주께 구속된 우리의 존재를 잘못 인식하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한 근거와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객관적인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다소 논문같은 문장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심지어 후반 50여 페이지는 믿음의 선배들이 스스로 노예라고 고백한 문건들과 참조한 많은 고문헌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오늘부터 나 스스로 ‘둘로스’ 임을 고백해 본다. 주님의 구속이 성령의 감동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구속의 역사가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