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오브 헤븐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리들리 스코트 감독, 올란도 브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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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은 코믹에서 공포 영화까지 세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물론 여러 장르에서 굵직한 영화들을 만든 큐브릭 감독에 비해 무게감이 다소 약하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성향에 있는 것 같다. CF감독에서부터 시작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대중의 눈을 의식하면서도 적당한 타협의 선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절충주의에 가깝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리들리 스콧은 못해서가 아니라 굳이 그렇게까지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 생생한 현대전을,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 시대의 전투장면을 멋지게 그려 낸 경험이 이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대규모 전투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인원이 동원된 거대한 싸움 장면들인데, 질질 끌지 않고 적당한 시각적 흥분도 주면서 잘 담아 낸 거 같다. 이 장면들만으로도 이 영화는 좋은 시각적 재미를 가진다.

올랜드 블룸이 맡은 '발리안'은 큰 야망을 품은, 원대한 기상을 지닌 남성상으로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거대한 운명에 이끌리는, 그러나 그 운명에 동참하면서 그것을 견딜만한 역량, 역능을 부여받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계기들을 통해 변화하는 인물을 묘사해 내야 하는데, 블룸의 연기는 다소 여려 보인다. 그래서 어떤 비장미를 느껴야 하는 부분에서도 몰입이 좀 힘든 아쉬움이 있었다.

문명과 종교의 문제가 얽혀 있는 영화이다 보니, 어느 입장에서 풀어나가느냐도 중요하다. 감독은 딱히 어느 편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더 미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에 자연히 초점이 맞춰지기에 서구인의 시선 안에 그려진 쳐들어오는 이슬람이고 살라딘 대군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십자군 전쟁'에 대해 이 영화는 큰 뼈대 하나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꽤 중층적인 것들이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이쪽도 저쪽도 어떤 거대한 하나의 힘과 단순한 생각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고민들이 나열되어 있고, 거기서 우세한 의견이 결국 힘을 행세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외면한 채, 단순히 적과 적의 싸움으로만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이 영화는 어느 정도 그러한 스펙트럼을 담고 있고, 또한 대규모 전투 장면을 통해 예루살렘을 둘러 싼 거대한 힘의 충돌를 시각적으로 관객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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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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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에 나온 책임에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목이 '문장강화(文章講話)'이듯 글을 잘 쓰기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단지 실용적인 차원의 문장기술로만 그치질 않는다. 예문들이 과거 여러 문인들의 글에서 꺼내온 것들이라 구경하는 맛도 쏠쏠하다. 요즘같은 세련된 문체들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런 글귀들을 마주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 더 그 가치가 있겠다.

이 책은 전문서는 아니기에, 글을 쓰는 방법에서 어떤 한 부분에만 집착하지 않고 '글쓰기' 전반에 대해 골고루 다룬다. 국어에 대한 기본 지식에서부터 각종 문장들의 특성과 요령들, 퇴고, 그 밖에 문장을 돋보이게 하는 다양한 방법 등등 말이다. 가장 큰 장점은 앞에서 잠시 말한데로, 설명과 예문의 조화가 잘 되어서 그 '쓰임새'를 좋은 문장을 통해 눈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긴 시간 갈고 닦은 그네들의 글에서 풍기는 각자의 '내공(內功)'을 엿보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글의 표현에서 다양하고 고고한 풍경들이 있음을 알고, 자신의 단조로운 표현 방식을 반성하는 데 좋은 자극이 된다.  거기다 책 밑에는 본문에 나온 한자어투들을 친절하게 설명해놔 따로 배우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을 읽고 기억나는 부분은 '퇴고'의 유래에 대한 것이다.(pp.223-224)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승고월하문(月下門)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책 내용을 잠깐 짤막하게 옮기자면,

위 글은 당 시대 시인 가도(賈島)가 지은 시인데,  '승고(僧敲)' 이 부분을 '승퇴()'로 할지 '승고()'로 할지 고민하다가, 우연히 만난 유명한 문장가 한퇴지(韓退之)의 조언에 따라 '승고'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끝에 글을 고치는 일을 '퇴고(推敲)'라 일컫게 된것이라 하니 그 유래가 퍽 흥미롭다.

글을 좀 더 정갈하게 다듬을 방법이 없나 해서 찾은 책인데, 여러 다양한 구수한 지식들과 선배 문인들의 맛깔스런 글들도 함께 접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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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어떤 계기로 인도로 가 켈커타 대학에서 다스굽타(Dasgupta)에게 인도철학을 배운다. 또한 히말라야 리쉬케쉬(Rishikesh)에서 직접 요가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이 <요가>라는 책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인도 사상, 요가, 탄트라, 연금술 등 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자료들이 그의 멋진 초점 역할을 통해 훌륭하게 한 권의 책에 투사되고 있다. 이 책은 예전에 우리나라에도 고려원(다르마 총서6)을 통해 잘 번역되어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절판 상태이다.      

 

 <요가(Yoga : Immortality and Freedom)>, 이 책과 중복되는 내용이 프랑스 세이유 출판사에서 나온 [성자  시리즈]  <파탄잘리(Patanjali)>에 일부분 담겨 있다. 이 책도 예전에 대원사에서 나왔는데, 역시 아쉽게도 지금은 구하기 어렵다.

언뜻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요가-불멸성과 자유-> 이 책이 내년에 재출간 된다는 얘기도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다행히 나는 '요가'와 '파탄잘리' 두 권을 다 가지고 있다)

엘리아데의 책들 중에서 유명한 것은 <요가>는 물론 <성과 속>, <영원회귀의 신화>, <샤마니즘>, <이미지와 상징> 그리고 마지막 저작에 속하는 <세계종교사상>'까지 굵직한 것들이 많다.

 

 

 

 

 

                                                    종교형태론                                                성과 속:종교의 본질

 <성과 속(thr Sacred and the Profane)>에서 성(聖)과 속(俗)은 궁극적으로 이원적인 차원은 아니라고 엘리아데는 본다. 특히 과거 동양 종교나 원시 문화에서 일상의 생활과 성스러운 것이 일치됨에서 그 본보기를 들고 있다. 이것은 바로 탈신성화된 현대사회에 대한 우려가 깃든 시각일 수 있겠다. 또한 이 책에서는 신성한 것의 드러남이라는 '히에로파니(聖顯, Hierophany)'로 새롭게 역사를 읽으려는 모습도 볼 수  있다(이 책은 두 출판사 한길사, 학민사에서 번역되어 나와 있다). <영원회귀의 신화>'낙원에의 향수(The Nostalgia for Paradise)'라는 '회귀와 반복'의 힘이 맥박처럼 담긴 책이다. 부제로 '"역사철학 입문"을 넣고 싶었다고 엘리아데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기존 역사철학에서의 직선적 시간관과는 다른 것을 시도하고자  했음이다. 그러나 책은 너무도 얇고, 치밀하고 논리적인 근거로 무거운 이탈을 하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를 담듯이 부드럽게 나아갈 뿐이다. 엘리아데의 문학적 스타일은 그래서 때에 따라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괴테의 형태학(형태학의 원리는 연금술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엘리아데는 괴테에게도 좋은 자극을 받은 거 같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종교형태론>이란 책이 있다. <샤마니즘>은 <요가>와 더불어 하나의 주제를 가진, 거기다가 꽤 두터운 책에 속한다. 전에 이 책을 사자마자, 샤마니즘에 관한 책이니 우리나라 부분도 있겠지 싶어 찾아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딱 두 군데 총 몇줄로만 다뤄져서 괜히 서운했다. 잘 모르는 멀고 생소한 장소들의 이야기들이 많아 지루하지만, 엘리아데의 역량이 보이는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엘리아데의 아버지에 대한 헌사로 시작하는(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인 1952녀에 나온 책이다.) <이미지와 상징>은 그의 장기인 '상징'을 적당한 두께에 담아 놓은 책이다. 뒤메질의 서문에 이어지는 상징들은 요약하면 '중심', '시간과 영원(인도와 관련)', '매듭(결박)', '조개(그리고 진주)'이다. 내 느낌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인지, 엘리아데 특유의 부드러움은 없고 좀 딱딱하게 읽었던 거 같다.

<세계종교사상사>는 정말 탐나는 책이다. 3권에 걸쳐 다루는 내용이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정말 있어야 할 책인데, 당장 사기엔 부담이 가는 가격이다. 더 관심이 가는 권부터 차근 차근 모아야 할 거 같다. <세계종교사상사 1 >는 '석기시대에서부터 엘레우시스의 비의까지' 부제가 달렸는데, 메소포타미아와 히타이트 그리고 차라투스트라 부분에 관심이 간다. <세계종교사상사 2>는 '고타마 붓다에서부터 기독교의승리까지'로 도교와 연금술,  켈트족 그리고 피타고라스와 오르페우스가 개인적으로 흥미를 돋군다. '무함마드에서부터 종교개혁의 시대까지'라는 부제의  <세계종교사상사 3>은 유목민의 종교, 성상 파괴 운동, 헤르메스의 전통 그리고 티베트 부분이 관심을 끈다. 그러고 보니 어느 권 하나도 떨치기 힘든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두꺼운 책들은 인터넷 주문보다는 직접 가서 사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가끔 받아 본 책들 중에 제본이 잘못 됐는지, 펼치면 중간 어딘가 쫙 갈라져서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제목도 범상치 않으면서, 나의 호기심을 독려하는 책들도 있는데,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 그것이다.  뭔가 노골적으로 양성의 겹침과 융해, 그리고 신비주의 지식을 드러내는 제목이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책표지도 그렇고, 처음엔 엘리아데의 소설책인줄 알았다.  이 책은 분량은 적지만, 다른 책들에 분산되어 있는 엘리아데의 원초적인 관심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연금술'만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야금술에서부터 바빌로니아, 중국, 인도 등 연금술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다. 정말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 아닐 수 없다.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
은 책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메피스토펠레스를 대극의 합일을 염두해 두고, '음'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살피는 그의 입장은 융의 심리학과 닮아 보인다(윗글에서 엘리아데가 괴테에서 받은 영향을 말했었는데, 융하고도 다정히 찍은 사진도 있는 것으로 봐선 꽤 교류가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괴테의 파우스트의 모습과 다른 메피스토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은 음지의 욕구를 자극한다. 엘리아데, 융 그리고 '양성인(androgyny)'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존 카메론 미첼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헤드윅(Hedwig)]에서는 원초적 형태의 양성의 행복한 결합체를 바라는 심정을 애니메이션 장면으로 매우 잘 묘사한다.

 

<융 심리학과 동양종교>는 '티벳 사자의 서', '요가' '易經' 등 융의 눈으로 동양 종교의 핵이 들춰진다. 융은 동양에 접근하는 수준 높은 노하우가 있지만, 엘리아데와는 달리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엘리아데는 단일한 주제를 가지고 책 한권을 쓰기도 하지만, 여러 곳에 낸 짧은 글들이나, 혹은 시기적으로 분산된 글들을 한데 모아서 출간하기도 한다.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도 그런 성격의 글로 보이고, <상징 신성 예술>, <신화 꿈 신비> 등도 그러하다.

 

  <신화. 꿈. 신비>이 책의 표지가 심상치 않다. 서양과 동양 신비주의의 '심  볼'들이 층을 쌓아 거대한 축을 짓고 있다. '샤머니즘'이라는 책과 '영원회귀의 신화'와 비슷한 괘를 이루는 모음집으로 보인다.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가 누구지? 왠 일본인.. <상징, 신성, 예술> 이 책의 헌사 "시간을 초월하는 예술 세계를 지닌 이사무 노구치에게"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었다. 찾아보니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각가라 한다. 여기까지는 아 그렇구나! 정도였는데, 브랑쿠시(Constatin Brancusi)의 제자였음을 알고는 약간 놀랐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좀 다른 맛을 내는데, 예술(회화, 조각, 사원, 문학 등)에 관한 엘리아데의 미학관을 살필 수 있는 책이다. 다만 표지가 너무 단순하고 밋밋한게 아쉽다.

 

 

 

 

 

우리나라 학자의 책 중에서 엘리아데에게 빌려 온 시선이 느껴지는 책 두 권이 눈에 띈다. <엘리아데.신화.종교>는 독문학 교수의 책으로 앞부분은 신화의 일반성을 살핀다면, 뒤로 갈수록 엘리아데의 사상을 비평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 M.엘리아데 - 종교와 신화 >는 엘리아데의 <우주의 역사 : 영원회귀의 신화>라는 책을 전에 번역하기도 했던 정진홍 교수의 책이다. 종교학자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분인데, 이 책은 엘리아데의 주요 개념을 간략하게 집어내고 있다. 독자적인 저술 활동도 활발한데, '종교문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보여준다. 특히 우리 사회 현실과도 연관짓는 실천적인 태도도 엿볼 수 있다.

내 책장엔 엘리아데의 책이 제법 많이 꽂혀 있다. 첵에 주술을 부렸는지 당장 읽을 것도 아닌데, 그의 이름만 보고 산 책도 여러 권이다. 그 남자의 글에선 왠지 여성적인 아우라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글의 굴곡이 크지 않은 편이라 그 단조로움이 여러 심도 깊은 빛깔을 얌전하게 품고 있으면서도, 살며시 앉아 있는 듯이 보이기에 지루함마저 주기도 한다. 하지만 별거 아닌 내용이나 소재를 가지고 문체의 화려함으로 독자를 희롱하는 글보다 차분하게 곱씹으면서 그 단조로움 안에 깃든 빛나는 것들을 끄집어내길 기다리는 책들도 있을 것이다. 엘리아데의 책을 담금질 하듯 읽다보면 그런 연성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엘리아데는 소설도 꽤 많이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아마 <만툴리사 거리>, <벵갈의 밤> 정도가 소개된 거 같다. 그런데 이마저도 절판, 품절이라 구하기 어렵다(만툴리사 거리>는 대형 인터넷 서점에 아예 정보조차 뜨질 않는다). 그의 소설들도 번역되거나 재출간되어서 어떤 문학의 맛을 가졌는지 알려주길 바래 본다.   

 며칠 전에 엘리아데의 나라인 루마니아 영화를 봤다. 루시안 핀틸리에(Lucian Pintilie) 감독의 '떡갈나무(Balanta'1992)'라는 영환데, 우리한테 익숙한 유럽 영화하고도 뭔가 좀 느낌이 달랐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슬픔은 우연한 사건들(편집이 강약 조절 하듯 불규칙한 맛도 나는데, 그것이 이 영화에 생기를 주는 효과도 있다)에 의해 오히려 해학적으로 분산되면서도 결국은 어떤 하나의 과정(아버지를 위한 딸의 여정)은 끝마친다. 약간 에밀 쿠스트리차(Emir Kusturica) 감독 영화와 비슷한 느낌도 나는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엉뚱한 것들이 끼어들어 영화의 흐름을 산만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묘하게 하나의 활력에 이끌리듯 고비를 넘긴다. 대사 중에 흥미로웠던 건, 시골 마을에서 저녁에 주민들이 TV에서 해주는 한국 영화를 보러 온다는 부분이다. 엘리아데의 루마니아 그리고 한국이 겨우 겨우 하나의 점으로 만난 사소하지만 신선한 장면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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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5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5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03-0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봤습니다..퍼갈께요..^^
종교사상사는 사놓고도 아직 못읽고 있네요..

TexTan 2007-03-05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책을 갖고 계시는군요.

TexTan 2007-03-18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근데, 가끔 쓴 글 중에, 본문에서 단어나 구절이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군요.
영어 원서 제목을 올릴 경우 자주 그러는 거 같고, 여기 이 글에서도 뭔가 사라졌는데, 원래 무엇을 썼는지 기억이 가물함. 이건 무슨 에러인가..

yoonta 2007-03-19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런 형태의 글을 올릴때 말씀하신 현상이 발생하는것 같더구뇨. 태그명령어로 인식하여 그러는 것 같은데 그럴경우에는 < , > 다음에 한칸 띄워 글을 써주면 해결되더군요..^^

TexTan 2007-03-19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혼잣말 비슷하게 한 소린데, 친절하게 답글까지 달아주셨군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에게 있다(Vengeance is Mine, 1979)'를 보고 나서, '간장선생'을 본다면 느낌이 어떨까?

 

 

 

 

 

간장선생에도 소녀의 어떤 야생성과 검은빛 활력을 느낄 순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과거의 영화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녀를 대상으로 어떤 에로틱한 시선을 감추지 않는 감독의 흔적을 과거로 돌려 본다면 '인류학 입문(The Pornographers, 1966)'이라는 묘한 제목을 가진 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흑백 영화인데다 비오는 장면도 많아서인지, 어떤 끈끈한 욕망의 내음이 가족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영화다. 그의 영화에는 '성(性)'이 여러 음률로 소리를 내지만, 지나친 호흡으로 길게 무리하게 끌고 가지는 않는다. 즉 템포나 간격을 가지고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는 건강한 맥박을 가진 듯이 말이다. 하지만 가끔 상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나는 영역도 감독 특유의 시선으로 도발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붉은 다리 아래 따스한 물'이나 '나라야마 부시코'가 여기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러나 두 영화는 전반적으로 야한 에로 영화는 물론 아니다. '붉은 다리..'는 아주 독특한? 여자가 나오는 관계로 어느 정도 해학적인 모드로 진행되기에 과감한 성애 장면이 들어가기에는 어색할 수 밖에 없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일본 시대물로 뱃가죽이 등에 닿을 정도의 원시적인 깡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데, 이 영화는 에로티시즘을 느낄만한 것이 있지만, 아들과 어머니의 그 애잔한 무언가가 더 큰 감동과 무게를 남긴다. 여기서는 가축과 시도하려는 남자가 나오는데, 이것도 도발적인 재미 이상은 아니다.

'우나기'에는 왠 뱀장어가 나온다. 아주 검은 빛깔로 매끄럽게 묘한 힘을 담지한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것이 어느 시점에서 탄력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소 지루함을 주는데, 더 어떤 힘을 제대로 발산해 낼 수 있는 영화이지 않았는가 생각이 든다.

 

 

 

 

 

이마무라 쇼헤이가 감독이 아니라 배우로도 잠깐 나온 우리나라 영화가 있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 사학자로 나왔는데, 나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인상 처럼 참 재미있게 삶과 영화를 즐기며 사는 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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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에 나오는 형사 데커드는 결정적인 시기에 분열을 예고하는 캐릭터의 모범을 보인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고, '이야기'의 매듭이 풀리려는 순간, 그것을 이끈 그 자신의 매듭마저 풀리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매듭은 이미 두 갈래로 풀려져 있었고, 그것이 인식 가능하게 노출되는 시점이 뒤늦게 찾아온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개봉 당시의 영화와 나중에 나온 감독판은 큰 차이가 있다.

 

 

 

데커드는 리플리컨트 제거에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신 역시 리플리컨트였다니!!

이런 인물 구조는 지금에 와서는 너무 자주 써먹는 것이긴 하지만, 막 시작될 무렵에는 철학적인 문제까지 우후죽순 터지게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흔히 블레이드 러너를 개봉 시기가 비슷했던 이티(E.T, 1982)에 가려 작품성에 비해 그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에 가려진 유사한 형식을 가진 영화들도 많을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이러한 중층적인 매듭으로 꼬인 정체성 고민을 공각기동대에서 다시 세련된 방식으로 지속할 수 있다.

이노센스에서는 실험적인 비쥬얼과 바로크적 미로 구조에 신경을 쓰느라, 어떤 정체성의 고민이 줄어 들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 개체의 문제를 이제는 인간과 기계라는 범주 전체의 문제로 전염시키는 고민을 담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데커드는 순수 인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리플리컨트의 입장에서 봐도, 데커드가 전향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는 또 다른 것이다. 즉 데커드는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겹쳐진 새로운 존재 영역을 어쩔 수 없이 가진다. 일종의 변종 영토처럼..

그것은 이미 내재된 것들이지만, 어느 순간 솟아오른 괴물과도 같은 것이다. 다루기 힘든, 통제하기 힘든.. 마치 에이리언처럼 말이다. 영화 에이리언에서 그 괴물을 만나게 되는 것은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태 쌓아 온 모순들이 하나의 초점을 통해 결국 쏟아지기 마련이다. 전체에 만연된 것은 불쾌한 기운이지만, 그것이 개인에게 할당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처럼 나타난다.  즉 시각적으로 그것을 외부에서 온 검은 이물질처럼 형상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재수 없는 우연이 아니다. 언제든 그 마지노선을 알리는 표지들을 건드리면, 또 다른 에이리언들이 등장할테니까.

이 글의 제목은 데커드는 에이리언이 아니다?였다. 그렇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결국 데커드도 너무 깊이 들어가 자신의 에이리언(자신의 정체성)을 보고야 만 것이 아닌가?  

 

 

 

 

 

리들리 스코트, 제임스 카메론, 데이비드 핀처, 장 피네르 주네 등 명감독들에 의해 에이리언은 시고니 위버를 연달아 삽입해서 각자의 페르조나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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