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에 나오는 형사 데커드는 결정적인 시기에 분열을 예고하는 캐릭터의 모범을 보인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고, '이야기'의 매듭이 풀리려는 순간, 그것을 이끈 그 자신의 매듭마저 풀리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매듭은 이미 두 갈래로 풀려져 있었고, 그것이 인식 가능하게 노출되는 시점이 뒤늦게 찾아온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개봉 당시의 영화와 나중에 나온 감독판은 큰 차이가 있다.
데커드는 리플리컨트 제거에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신 역시 리플리컨트였다니!!
이런 인물 구조는 지금에 와서는 너무 자주 써먹는 것이긴 하지만, 막 시작될 무렵에는 철학적인 문제까지 우후죽순 터지게 할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흔히 블레이드 러너를 개봉 시기가 비슷했던 이티(E.T, 1982)에 가려 작품성에 비해 그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에 가려진 유사한 형식을 가진 영화들도 많을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이러한 중층적인 매듭으로 꼬인 정체성 고민을 공각기동대에서 다시 세련된 방식으로 지속할 수 있다.
이노센스에서는 실험적인 비쥬얼과 바로크적 미로 구조에 신경을 쓰느라, 어떤 정체성의 고민이 줄어 들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 개체의 문제를 이제는 인간과 기계라는 범주 전체의 문제로 전염시키는 고민을 담고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데커드는 순수 인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리플리컨트의 입장에서 봐도, 데커드가 전향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는 또 다른 것이다. 즉 데커드는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겹쳐진 새로운 존재 영역을 어쩔 수 없이 가진다. 일종의 변종 영토처럼..
그것은 이미 내재된 것들이지만, 어느 순간 솟아오른 괴물과도 같은 것이다. 다루기 힘든, 통제하기 힘든.. 마치 에이리언처럼 말이다. 영화 에이리언에서 그 괴물을 만나게 되는 것은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태 쌓아 온 모순들이 하나의 초점을 통해 결국 쏟아지기 마련이다. 전체에 만연된 것은 불쾌한 기운이지만, 그것이 개인에게 할당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처럼 나타난다. 즉 시각적으로 그것을 외부에서 온 검은 이물질처럼 형상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지 재수 없는 우연이 아니다. 언제든 그 마지노선을 알리는 표지들을 건드리면, 또 다른 에이리언들이 등장할테니까.
이 글의 제목은 데커드는 에이리언이 아니다?였다. 그렇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결국 데커드도 너무 깊이 들어가 자신의 에이리언(자신의 정체성)을 보고야 만 것이 아닌가?
리들리 스코트, 제임스 카메론, 데이비드 핀처, 장 피네르 주네 등 명감독들에 의해 에이리언은 시고니 위버를 연달아 삽입해서 각자의 페르조나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