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화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장예모 감독, 주윤발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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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화'란 제목에서 왠지 황궁 안에서의 여자들의 문제(질투, 배신)를 다룬 시대극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중국영화에서는 과도한 신체의 힘을 발휘하는(그러나 슈퍼맨과는 다른) 어떤 박력과 기예(技藝)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거기에 속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보고난 결과, 우려했던 여인들의 깊고 복잡한 애증의 문제도 있었고, 또한 거대한 힘의 팽팽함과 웅장한 이동이 다 들어간 영화였다. 거기다 검은 옷 무사들의 흥미로운 묘기들도 눈길을 잡는다.(고로 남자와 여자 둘다 어디선가는 만족할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뿜어대는 빛깔은 정말 화려하다. 일단 황금빛의 발산이 실제적으로 느껴질 만큼 보는 사람의 눈에 닿는 그 강도의 줄기가 세다. 그리고 궁중 안 복도? 좌우로 펼쳐진 여러 빛깔의 문들은 미로 느낌은 주지 않지만, 묘한 신비감과 아울러 그 과잉 안에서 중국문명 힘의 내부를 뽐내려는 작가의 의도도 살짝 엿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복도에서의 압권은 검은 옷의 여인과 이를 발견한 태자가 같이 빠르게 달리는 장면에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 (벽)문들의 빛깔이 속도감에 그림자와 함께 흐드러지는 듯이 보이는 부분이다. 

여기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서로의 약점을 찌를 것들을 가지고 있고, 또 개인적으로는 깊은 비밀(이미 상대방에게 알려진 것이지만)이 있다. 그리고 불길한 초점으로 다가가는 운명도 역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어떤 '승리'를 위한 뒤집음을  노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파국을 예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감정의 골의 분출로 이끌려져 가는 운명의 노리개 같은 캐릭터인지도 모를 일이다.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순간 이 영화의 결말을 예감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장예모(장이머우) 감독의 과거 작품 <영웅, 2002>을 떠올리면 감을 잡을 수 있다. 선악의 문제와 "나쁜 놈은 벌 받는다"와 같은 순진성은 이미 멀리 벗어난 문제다. 거기다 감독은 교묘하게도 어떤 얼룩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권력의 꼭대기-왕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드러낸다. 이는 무엇인가? 순수한 시스템은 없다. 시스템은 도덕하고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느닷없이 '시스템'을 꺼내 들었는데, 가만 보면 이 영화에서도 사소하게 보이는 날개짓을 하는 인물이 있다. 정말 '파국의 단추'를 제대도 만끽하는 주인공은 왕도 아니고 국화를 열심히 수 놓는 황후도 아니였던 것이다! 

마지막에 약사발이 거대한 식탁 중앙에 떨어지고 그 황금빛 원이 경련하듯 얼룩져가는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 하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듯 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위로 물러서면서 시야를 넓히는데, 그 넓어지는 대상은 마치 복잡한 무늬를 통합적인 질서로 사로잡는 '만다라' 모양처럼 보이지 않던가?

그런 감독의 (정치적인) 노선을 멍하게 이식받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어떤 몰입과 볼거리에서 꽤 재미있는 영화로 보인다.

그런데, 왜 이 영화평 제목이 금가루 콩가루일까? 글 내용에서 금가루는 이해가 될테고, 콩가루는 안 보신 분들을 위해 남겨둔다.

 줄거리 보다는 볼거리가 더 재미있고 인상적인 영화다.(큰 화면이 절실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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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철학사.zip
로버트 C.솔로몬/캐슬린 M.히긴스 지음, 박근재. 서광열 옮김 / 작은이야기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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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두꺼운 철학사책이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철학자 항목을 찾아서 보기 마련이다. 그건 단지 분량이 많아서라기 보다는, 대개 철학사를 다룬 책들의 어떤 엄숙하고 건조한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연하고 흥미롭게 읽는사람의 눈을 계속 붙잡아서 끝까지 완주를 도와줄 철학사책이 있다면  하는 바램도 가져보게 된다.

이 책 <철학사.zip>는 일단 크게 진지한 자세를 갖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보인다. 거기다 컴퓨터에 넣고 압축을 풀 필요도 없이 그냥 펼쳐서 보면 된다.(특이한 책제목에 대한 농담이다)

<철학사.zip>가 가장 독자에게 호소하는 바는, 동양과 서양은 물론이고, 여태 잘 다루지 않던 대륙의 철학들도 아우르면서 방만하지 않게 (간결하게) 담아낸다는 것이다. 특히 짧게 다루기는 했지만 남미 아즈텍이나 아프리카쪽을 살핀 것은 생소하지만 새로운 지적 자극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볼땐, 그것이 반은 맞는 거 같다. 물리적으로도 책의 중간 부분까지는 그러한 성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글의 서술방식이 지루하지 않게 재미나다.

그러다 뭔가 불길한 예감을 받고야 마는데, 불교의 선(禪)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선禪은  일본의 전통종교와 불교가 종합된 것이며 사무라이계급의 발생과 함께 등장했다."(153쪽)에서 이건 어떤 선을 설명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선이 일본에서 발생했고 그것이 어떤 바탕에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보이는데, 중국의 선은 이 책에선 소거된 상태다.  그리고 니체의 '신의 죽음'에 대해 "그것은 근대적 퇴폐성과 불신이라는 고통이자, 분노의 폭력적인 결과이며 결국 어떠한 '진리'도 없다는 괴로운 진리이다"(266쪽)라는 설명으로 갸우뚱하게 만든다. 저자 중에 한명이 니체에 대해 여러권의 책을 낸걸로 나오는데, 니체를 너무 자기식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든다. 칸트를 다룬 곳에서는 기독교 신자이며 또한 뉴턴 물리학의 신봉자였던 칸트가 "신앙의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지성을 제한해야"(217쪽)한다고 주장했다는 부분과 '선험적 자아(transcendental ego)'(221쪽)도 뭔가 미심쩍다. 그런데 여기서 '초월적', '선험적', '선천적'에 대해 나도 엄밀한 구분을 시도하기엔, 희미한 기억으로 골치아프기에 멈춰야 할 거 같다. 그리고 새롭게 철학사를 다룬 책에서 어떤 전체적인 책의 흐름에 사소한 것을 너무 쪼는 것도 격에 맞지는 않는 거 같다. 한편으로는 그것을 옮긴분들이 역주로라도 보강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약간 의문이 드는 부분적인 문제는 위와 같고, 전체적으로는 분명 동양(중국 인도)과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균형있게 다루려는 의지와 내용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철학에 한정되는 것이고, 동양쪽에서는 그 이후에는 아무 연락이 없다. 중간과 끝까지 동서를 종횡무진하기에는 책의 분량문제인지, 아니면 저자들의 버거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책의 전반부까지는 상당히 흥미롭고, 새로운 지적 자극을 주는 내용들도 갖추고 있다. 그러다가 후반부는 보통 서양철학사(중세, 근대)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후반부도 나름대로 철학과 그 사회상을 유기적으로 엮으면서 짧은 시간에 훑어볼 수 있게 한 장점은 분명히 있다. 아마 공동저자의 책인데 두 사람의 필력차이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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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사무라이 SE (2disc) - [할인행사]
야마다 요지 감독, 사나다 히로유키 외 출연 /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쌈지)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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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사무라이'.. 정말 영화 제목에 눈이 부신다.

아마도 제목에 속아 이 영화를 본 사람도 있지 않을까?

마치 최강의 두 사무라이가 마지막 대결을 황혼이 비추는 장소에서 멋지게 펼칠것도 같은 데...

그런데. 그런 멋드러진 강도(세기)를 가진 싸움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남자 주인공 사무라이의 캐릭터도 우리가 흔히 어줍잖게 봐 왔던 B급 사무라이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가령 <아들를 동반한 무사>와 같은 영화하고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나는 두 종류 다 좋아하지만..).

그래서 처음에 왠지 김이 빠지고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거대한 돈을 들여 눈요기 몇개로 때우는 영화는 아니다. 느슨하지만 그 공간이 실없이 빈 느낌이 아니라 탄탄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로 자연스레 잘 메워져 있다. 그리고 우리가 헐리우드 액션이나 홍콩 무협 영화들에 익숙해서 그렇지, 이 영화가 오히려 더 사실적일 수 있다. 내성적이고 연약해 보이는 주인공에게서 실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에, 어느 순간 이 남자에게 동화되어 점점 몰입이 되어 간다. 여기까지 감상자가 적응했다면, 이 영화는 감질맛 나게 보는 이의 시선을 계속 끌고 갈지도 모른다.

평범한 성격에 정말 가난하지만, 사무라이의 정신을 나름대로 잃지 않고 살려는 이 남자를 세상이 가만두질 않는다. 물론 이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생뚱맞게?) 남다른 검술 재능은 갖고 있다. 이 부분을 바로 세상(권력)은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박하게 잘 살고 싶은 이 남자는 결국 목숨을 걸고 하나의 임무를 수행할 처지에 이른다. 두터운 줄기는 이러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사무라이의 또 다른 면-그들의 생활상의 한 다면을 엿볼 수 있고, 오랜만에 나온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와 남자 주인공과의 수줍은 감정씬 등 드라마적인 힘의 균형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물론 목숨을 걸고 벌이는 한판 대결은, 앞에서 말했듯 멋진 비쥬얼을 선사하진 않지만, 오히려 사실적인 긴장감을 전해준다. 정말로 사무라이들이 싸운다면, 저렇게 했을 거 같다는..

감독은 <행복의 노란 손수건>, <남자는 괴로워>로 유명한 야마다 요지가 맡았다. 이 영화가 괜찮았다면, 같은 감독의 영화 <숨겨진 검, 오니노츠메>도 함께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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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본 영화 중에  <갇힌 여인>과 <카프카>가 있는 데, 이 영화들은 단지 영화로만 끝날 만큼 확장성이 약한 영상들이 아니다. 먼저 그들의 천재적인 문학이 있겠고, 그리고 누구나 해보고 싶은 영화지만 도전하기 까다로운 영화이니 만큼, 역량 있는 감독의 손과 배우들이 딸려들어오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영화화는 칠레 출신 감독 라울 루이즈 (Raul Ruiz) 의 세 편의 시도가 알려져 있다.  특히 1999년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Time Regained, Le Temps Retrouve)>에는 까뜨린느 드뇌브, 엠마뉴엘 베아르, 존 말콤비치 등 걸죽한 배우들이 나온다. 물론 그 전에 양철북으로 유명한 폴커 쉴뢴도르프에 의해 알랭 드롱도 출연했던 <스완의 사랑(Un amour de Swann / A love of Swann,1984)>도 있지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진 못했다.

샹탈 애커만(Chantal Akerman)이라는 여자 감독에 의해 최근에 만들어진 <갇힌 여인(La Captive / The Captive, 2000)>은 주인공 남자의 의식의 흐름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느리면서도 잘 맞아떨어진 영화로 보인다. 일단 주인공이 자기의 애인 아리안느를 몰래 따라다니는 장면은 자연스레 히치콕의 <현기증>을 떠올리게 한다(감독도 스스로 히치콕 영화를 몇편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밤에 차를 모는 장면에서 하늘 위로 잎사귀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역시 히치콕의 <레베카(Rebecca)>에서 어둑컴컴하고 비오는 날 대저택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장면을 언뜻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미행장면에서 눈여겨 볼 것은, 그 공간이 대개 협소하다는 것이다. 주로 골목길이 나오는데, 이는 마치 강박증적인 좁은 의식의 흐름을 시각화하는데 적당한 스케일로 설정된 듯 하다.

여자주인공 아리안느 역은 실비 테스튀(Sylvie Testud)가 맡았다. 어떻게 보면, (내 취향에서 보자면) 그다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여자는 아니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남자 주인공이 보여주는 과도한 집착에 몰입이 되질 않았다. 이 여자가 나온 영화는 내가 본걸론 이거까지 세편이다.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영화로 만든 <두려움과 떨림>, 심리적 이상 인간을 다룬 <미로> 까지... 그리고 이 여배우의 프로필을 보다가 가스파 노에 감독의 악명 높은 수작 <아이 스탠드 얼론(Seul Contre Tous:I Stand Alone)>의 전작에 해당하는 <까르네(Carne, 1991)>에도 이름이 올랐는데, 이 영화에서 이 여배우에 대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나중에 다시 보면서 찾아봐야겠다). 그러나 이 여배우가 유명하게 된 영화는 <비욘드 사일런스>다.

<비욘드 사일런스>의 캐롤리네 링크 감독의 <핑크트헨과 안톤>에도 실비 테스튀의 이름이 보인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이 영화에서 보이는 남녀관계는 그냥 가벼운 연애담으로 만들 수도 있는 주제다. 어찌보면 남자의 단 하나의 줄기처럼 이어지는 (별 재미없는) 의식이지만, 그것을 영상과 음악으로 어떤 비슷한 호흡으로 맞춘다는게 꽤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영화 안에서 남자의 심리는 그냥 앙상한 뼈대처럼 노골적이다(이 영화는 '의식의 뼈'로 침투해서 그 뼈대를 훑는 듯한 영화다). 남자의 대상인 여자의 반응은 "(너가 좋다면) 그래 좋아.."인데, 이런 단순한 화학 반응이 어느 순간 대상으로서의 여자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소멸해버리는 것은, 영화가 인간적인 요구(관객의 요구)에 불응하는 것이지만, 영화자체의 굴곡으로서는 정직했다고 보여진다.

프랑스 (지루한) 영화라면 넌더리가 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피해야 할 영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몇몇 사람한테는 권하고픈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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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뉴트롤스 내한공연 기사가 실린게 아닌가? 4월 4일, 5일 이틀 동안 아주 멋드러진 공연이 펼쳐졌다고 하니.. 왠지 가슴 뻐근하게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갔다 온 몇몇 분들의 공연후기도 자세히 읽었고, YTN 뉴스 동영상으로 이들의 연습장면도 짧지만 볼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 처음 Concerto Grosso No.3이 연주되었다고 하는데, 꽤 괜찮았는가 보다. 내가 요새 통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안 듣다보니, 이런 아트락의 향수 밴드 내한을 도통 몰랐던 것이다.

이번 공연엔 뉴트롤스 멤버로 참여한 기이한 사람이 눈에 띈다. 바로 1970년 십대 3명이 모여 만든 '레떼 에 미엘라(Latte E Miele)'에서 드럼을 맡았던 알피오 비탄자(Alfio Vitanza)다. 이들이 만든 1972년작 마태수난곡(Passio Secundum Mattheum)은 그때는 물론 지금도 잠시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1973년작 파필리온(Papillon)도 그들 절정의 실력이 담겨 있는 변화무쌍하면서 여린 음악이 흐르는 앨범이다.

뉴트롤스의 초기 명반들은 거의 품절로 나온다. 그래도 살아남은? 앨범중에 <UT>와 <Tempi Dispari>는 수작에 속한다.

 


 

 

레떼에 미엘라(젖과 꿀)의 결정작 <마태수난곡>은 LP로, <파필리온> LP와 리마스터 CD로 (알라딘에) 아직 살아있는 거 같다. 리마스터링을 하면, 대개 잡음이 줄고 음색이 뚜렷해지는걸 느낀다. 비록 이들의 리마스터 앨범을 들어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오리지널 약간 촌스런 음색을 따라올 순 없을 것이다. 리마스터 앨범엔 영어 버전도 한곡 보인다. PFM도 미국시장에 진출하면서 영어로 다시 부른 적이 있었는데, 약간 어색하고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레떼에 미엘라의 영어버전 음악에 구미가 당긴다. 그때에는 신화였지만, 지금은 향수로 변용되어 여전히 무언가를 선사해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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