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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ㅣ 한나래 시네마 10
슬라보예 지젝 / 한나래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읽다가 좀 뜸을 들이고 마저 읽은 터라 연속적인 독서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책 제목에서 '영화에 관한 (지적인) 읽기' 라는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지젝의 글맛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대충 어떤식으로 글들이 풀려 나갈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영화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영화 이야기'만 늘어 놓는 것도 아니고, 영화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영화 이야기를 그렇게 자제하는 거 같지는 않다.
왜 이런 말을 꺼내는가 하면, 이 책을 단지 영화에 대한 책으로 오인하고 집었다가는 낭패를 보던가, 행운을 얻던가? 둘 중 하나로 이끌릴 관성이 농후해 보이기 때문이다. 즉, 책 제목이 풍기는 거 치고는 영화 이야기가 그렇게 주도적으로 나오지도 않으면서도 쉽지 않은 집중력을 가지고 봐야 이해가 가능하기에 그러하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에 기대어 다른 사람들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광범위하게 퍼뜨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영특하고 이해력이 좋은 사람들한텐 해당사항이 아닐게다.
찰리 채플린부터 본격적으로 지젝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러다가 잠시 비헐리우드 영화쪽으로도 넘어가는데,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와 그의 연인이자 배우인 잉그리드 버그먼에 대한 것이 나온다. 이 부분은 '왜 여자는 남자의 징후인가?'라는 장에 속하는데,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잉그리드 버그먼이 출연한 영화들도 포함해서)들의 분석과 아울러, 영화 밖에서도 그 둘의 만남은 물론 이름에서까지 묘한 고리들을 끄집어 낸다. 결국 로셀리니와 버그먼이라는 두 연인이 그냥 하나의 절묘한 '예'로 이 장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라캉, 프로이트, 칸트, 헤겔, 알튀세르, 푸코, 하이데거 등이 줄줄이 딸려 나오고, 그 사유의 물결 속에서 영화는 작게 소근되는 하나의 '예시' 역할을 맡는다.(원래 지젝은 영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그 활용이 참으로 풍부하고 예리하다는 거..)
내가 흥미있었던 부분은 '왜 남근은 나타나는가?'라는 장인데, 알랭 그로스리샤르를 통해 소개하는 18세기 괴물 얼굴 삽화가 인상적이었다. 이것을 데이비드 린치의 '코끼리 인간'(보통 엘리펀트 맨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과 뭉크의 회화로까지 이끄는데, 그 왜상적 찌그러짐, 기형에서 '남근'이라는 (원시적) 돌기(코끼리 코)를 읽어낸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어머니의 '응시'와 이를 곧바로 확장해서 '엄마와 아들'의 근친상간적인 낌새를 펼쳐보이는 것이다.
지젝이 쓴 영화에 관한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풍기는)책은 내가 알기로는 여러 사람과 함께 쓴 <항상 라캉에 대해...>말고는, <삐딱하게 보기>와 <진짜 눈물의 공포> 그리고 이 책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가 있다. 이미 <삐딱하게 보기>에서 몸을 충분히 풀어서인지, 이 책에서는 산만하지 않게 핵심 굴곡을 적당히 파 내려가는 내공이 충분히 느껴진다.
초기 지젝의 산뜻함과 지적인 매운맛이 잘 배합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