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상업적으로 그리고 대중의 입맛에 따라 변하는 것하고

원래 상업적이었던 것이 점차 고급화, 예술화되는 것은 어떤 차이일까 ?

 

캐나다에서 온 서커스단이 지금 우리나라를 여러 달에 걸쳐 자극하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는 뉴서커스(태양의 서커스, 써크 엘루아즈, 세븐 핑거즈는 캐나다에서 뉴서커스 재3세대를 대표한다고 한다고 함)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분명 우리한테 익숙한 재래식? 서커스와는 다른 다양한 볼거리들을 근사한 공연장에 풀어 놓는다.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백에서 거리 공연을 하던 기 랄리베르테(Guy Raliberte)라는 사람에 의해 1980년대 초중반쯤에 시작된 걸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서커스 문화의 침체를 타파하고자 과거와 다른 모습들을 시도하면서 점차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의 서커스'라는 모습을 다듬어 냈을 것이다.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즉 서민적 흥겨움을 꿈틀대게 하는 피에로타입의 친근하고 재미있는 무대마당 분위기를 기본적으로 만들고, 거기에 공연의 연속성과 컨셉을 강화하는 연극적인 요소, 긴장감을 높이는 역동적인 아크로바틱과 전위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몸짓, 중국 서커스풍 같은 (서양인의 입장에서) 이국적인 것 등이 음악과 어울리면서 복합적이고 거대한 공연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저 시장 바닥 풍경같은 익살과 어느덧 눈과 입이 멎을 거 같은 예술적 경지의 구성과 묘기 앞에 관객들은 매료당하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공연도 시간이 지나면 식상해진다.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새로운 메뉴를 계속 개발하는데, < O >와 같은 물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던가, <주매니티(ZUMANITY)>처럼 성인들을 위한 차별화된 에로틱한 공연. 그리고 최근에 비틀즈 히트곡들을 가지고 만든 <러브> 등등. 

 

 

 

이들의 공연은 시각적인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떤 서커스보다 더 음악이 큰 몫을 하는데, 단순히 배경음악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태양의 서커스는 영상물과 별도로 음반으로도 하나의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엔, 오래 전에 그들의 대표곡 몇 곡이 음악 매니아들에게 알려지면서, 태양의 서커스가 무대 공연팀으로서가 아니라 거의 음악하는 가수나 (프로그래시브) 밴드쯤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드랄리온(Dralion)은 드래곤(용)이 암시하듯, 중국적인 것들이 다른 공연들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표지를 보면 알겠지만, 서양용이 아니라 동양(중국)용과 닮았다. 중국풍 서커스도 볼만 하지만, 역시 거대한 사자탈을 쓰고 하는 사자춤 공연이 인상적이다. 거기다 백인들이 안에서 움직이니까 이색적인 맛도 난다. 또 색다른 거라면, 클래식 악기를 가지고 하는 묘기도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끌법석하지 않고 혼자서 우산만을 가지고 하는 묘기도 있는 데, 특히 무대에 스며드는 분위기 있는 여성 보컬이 잘 어울린다.         알레그리아(Alegria)는 역동적이면서도 어쩌면 태양의 서커스의 빛깔과 잘 어울리는 공연이란 생각도 들게 만는다. 거기다 귀를 반기는 멋진 음악들도 있는데, 'Alegria'를 비롯 'Querer', 'Mirko' 등이 유명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나라를 달구고 있는 퀴담(Quidam)을 보자. 이 공연은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부모로 보이는 두쌍이 의자에 앉아 있고, 어린 소녀가 낯선 손님의 방문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어준다. 그럼 머리가 없는 길다란 신사가 실내로 우산을 펴들고 들어온다. 자! 그럼 쇼는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공연은 다른 공연도 그렇겠지만, 특히 남녀노소가 즐길 만한 볼거리들이 많다. 현란한 줄넘기는 어린아이들 눈을 확 사로 잡을 거 같고, 붉은 천을 잡고 공중에서 펼치는 한 여자의 숨막히는 몸짓은 젊은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 있을 거 같다. 이 장면에 흐르는 곡 'Let Me Fall'은 귀까지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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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마도바르 영화에서 찰리 채플린의 손녀가 짧게 나온 것도 화제가 될 만큼, 채플린이 영화(라는 것)에 어떤 발화점을 가지고 있는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릴 적에는 채플린 영화는 그냥 우스운? 영화쯤으로 여겼는데, 머리가 커지면서 그게 아님을 서서히 알게됐다. 그 희극에 신경을 쓰느라 자연스럽고 기발하게 놓여 있던 것들이 눈에 띄질 않았던 것이다.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과 히틀러(Adolf Hitler)는 상반된 거울 이미지 같은 극과 극의 운명을 보여준다(물리학적인 비유를 든다면 둘 중에 하나는 반입자의 성질을 가진 거처럼). 콧수염도 그렇지만, 태어난 해가 같은 해인 1889년 4월생이다. 어떤 책에서 생일이 하루 차이라고 본 거 같은데, 찾아 보니까 나흘 정도의 간격이 있다. 채플린과 히틀러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거의 전지구적인 파급을 준 희-비극의 생성자 역할을 했다. 이 둘의 기막힌 겹침은 채플린이 그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에서 스스로 왜곡된(우스꽝스러운) 히틀러가 되어 실현하기도 하였다(이건 히틀러도 아니고 채플린도 아니여...) '만약에'라는 걸 즐기는 사람들은 히틀러가 앳된 시절 원했던 화가가 되었더라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상상역사를 그려본다. 그럼 반대로 채플린이 영화감독, 배우가 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정확한 제목은 알지 못해도, 채플린의 영화들은 TV를 통해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입자가 고르지 않은 흑백 화면과 프레임수가 적어 등장인물들의 동작이 빨라보이는(거기다 뒤뚱거리는 채플린의 걸음걸이) 등 채플린의 영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작품으로 분절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채플린 영화-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최근에 지젝(여기서 설명하는 것들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를 참조)에 의해서 히치콕 영화가 풍부한 이론의 보기(실례, 實例)로 제시되는데, 채플린 영화도 자주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라임라이트(limelight)>는 발레 무대와 관련된 '트레킹 숏'(tracking shot:카메라가 바퀴 위에서 이동하면서 찍는 숏, 라임라이트 이 영화 장면에서는 뒤로 물러서는 숏을 말함)을 각별히 주의하고 있다. 지젝은 이 장면을 정신분석학적 '얼룩', 그리고 '히치콕'적인 경지로 끌어올려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지젝은 "<시티 라이트(city lights)>는 영화사상 마지막 장면에 모든 것을 거는 가장 순수한 사례"라며 강한 어조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의 말을 통해 너무 기대를 가지고 봐서인지 나는 생각보다 강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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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우리에게 그 자신의 피부(스크린)를 보게 하고, 또한 피부에 감춰진 다양한 것들을  텍스트들을 통해 읽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에 매료된 자는 눈이 멀도록 네모난 섬광 앞에 자신의 정지된 유기체를 놓는다. 마치 영상 앞의 제의(祭儀)처럼.. 그리고 영화에 대한 경전들을 찾아  헤맨다. 뭘 위해서?

오늘 잠시 영화라는 이미지神이 담긴 경전(책)을 더듬어보자.

 

 

 

 

 

미국 헐리우드 시스템이 영화라는 몸을 세속적이고 대중적으로 만들었지만, 그 미국 안에 또 다른 기이한 몸매를 가진 영화들도 있다(과연 미국에 없는 게 뭐가 있을까?) <시각영화(Visionary Film)>는 바로 미국의 작가주의 영화들을 다룬 평범치 않은 책으로 보인다. '작가주의'라는 말에도 맥락에 따라 온도차가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체온은 미지근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덧붙여도 좋을 거 같고, 책도 이미 그것을 받아먹고 있다.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보여 준 여성 감독, 마야 데렌의 <오후의 올가미>를 비롯, 케네스 앵거, 스탠 브래키지,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 등의 활약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을 거 같다. 케네스 앵거의 영화에는 동성애 코드가 있고, 스탠 브래키지(Stan Brakhage)는 정말 실험적인 영화의 맛을 제대로 표현하는 감독 중 하나다. 그는 필름에 직접 색을 칠해서 작업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그래서 상영 길이에 비해 작업 기간이 상당히 길다), 독 스타 맨(Dog Star Man), 단테 쿼텟(The Dante Quartet) 등이 대표작이다. 나는 운이 좋아 보긴 봤지만, 우리가 아는 영화에서 많이 이탈한 '영상'이므로 큰 기대가 자칫 당혹감으로 바뀔 수도 있을 거 같다(국내 블로그에서도 검색해보면 맛보기로 올려진 영상이 몇 개 보인다). <전위영화의 이해>라는 책에도 여기에 나온 작가들 대부분을 만날 수 있다.

<영화인지기호학>.. 인지과학과 영화의 만남, 그 바탕엔 기호학적 시각을 깔고서 말이다. 신경과학(시각신경과학visual neuroscience)을 통해 미술을 설명하던 <이너비전>이란 책도  있었는데, 점차 눈이 아니라 더 원초적인 루트를 거슬러 올라가 근원적인 차원으로의 접근들이 행해지는 추세다(감각기관이 아니라 기관들을 관장하는 두).  <영화-감독의 미학>은 잘 눈에 띄지 않는 책같다. 저자(최영철)가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한 경험 탓인지  일본 영화에 관한 글이 많고, 유럽 작가주의 영화에 대한 것도 보인다.

몽타주에 관한 책은 두 권을 골라봤다. 몽타주에 (실천) 미학적 맥박이 뛰기 시작한 그 초기를 다룬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과 최근 영화들을 다룬 <현대영화의 몽타주>다. 초기 러시아 몽타주 이론가(감독)들이 비록 국가의 요구에 따르는 하나의 참여로서 영화를 만들었지만, 몽타주를 통해 관객에게 지적인 각성-능동성을 유도했던 태도는 요새 관객의 순응성을 강조하는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은 우리가 흔히 몽타주 하면 에이젠슈테인과 전함 포템킨을 떠올리는데, 쿨레쇼프와 푸도푸킨이라는 선배?들부터 다루고 있다.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기획한 영화이론 시리즈가 눈에 띈다. 영화 구조 문법의 기본(러시아 몽타주 이론에서는 마치 '단어'와 같은)이면서, 역시 영화 분석의 기본인 '쇼트'를 전문적으로 다룬 <쇼트>가 그것이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라서 조금만 버틴다면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내공 하나를 얹을 수도 있을 거 같다. 

 

 

 

 

 

영화의 물리적 장치들인 '영상기계'와 기술과 관련된  <세계 영화영상기술 발달사>는 1900년 이전부터 최근까지의 영상기술의 발달을 방대한 자료들을 가지고 엮어내고 있다. 이와 좀 비슷한 형식의 책으로 지금은 찾기 어렵지만 <영상기계와 예술>도 있었다. 영화의 색채를 전문적으로 다룬 <영화색채미학>도 눈여겨 볼 만한 책으로 보인다. 회화나 디자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관계인데, 영화에서는 꽤 드문 작업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결국 두 책은 영화를 가능케 하고, 영화 안에 상존해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가 영화의 익숙한 '겉'에 주의하느라 놓치던 것들을 상기시키는 낯설지만 필요한 텍스트다.

<영상 제작의 미학적 원리와 방법>은 앞의 두 책이 (감상자로서) 매니아타입에게 호기심을 준다면, 영상을 직접 대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책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만이 아니라 미학적인 영상을 가능케 하는 원리들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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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면 책장에 바로 꽂아 두기보다는 대충 눈으로 훑게된다. 이때 처음 손으로 잡으면서 느끼는 손맛이란게 있다. 책 본문을 읽기 전에 우리는 먼저 책을 손으로 잡게 되고, 맛을 느낀다. 그리고 유독 손맛이 좋은 책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아함의 중도체계>

내 페이퍼(불사를 꿈꾸다)에서 절판된 <인식의 나무>란 책을 다루려고 하던 참에, 이 책 <앎의 나무>의 거대한 나무 뒤통수? 표지를 발견했다. 그런데 기쁘면서도 뭔가 서운했다. 내가 여태 헌책방을 뒤져서라도 찾으려던 책은 '인식의 나무'인데, 이렇게 말끔하게 이름까지 바꿔서 나왔다니 말이다. '책의 물질성'에 잠시 빠졌던걸까? 하여튼 <앎의 나무> 이 책은 마뚜라나, 바렐라, 베이트슨 등과 함께 다른 게시판을 통해 정리해 볼 예정이다.

<양자역학과 경험>, 이 책은 살까 말까 잠깐 망설였다.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그래도 좀 본 편인데, 그것들이 대중을 배려해서 어려운 부분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경우도 있어, 그것의 정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내부적 통찰로 이끌기엔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려면 '수학적 표현'을 다루어야 한다. 나처럼 수학이 약한 사람에겐 곤란해지는 지점이다.  이 책, <양자역학과 경험>은 그런 면에서 참 애매하다. 전문적인 이해력이 요구되는 책은 아닌 거 같은데, (최대한 자제했겠지만) 수학적 표현들도 더러 보인다. 그래도 양자역학의 신화와 억측을 교정하는데 꽤 적절한 책으로 보이므로, 일단 도전을 해봐야 할 거 같다. 혀를 쭉 내민 표지의 책 <아인슈타인이 요라사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요리책이 아니라, 요리와 관련된 음식 재료, 요리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 숨은 과학을 흥미롭게 끄집어낸 책이다. 그러니 음식과 요리에 대한 상식들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함경(阿含經)'은 실제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담은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후에 방대해진 불교경전들도 아함의 체계를 통해서 불교의 근본과 본질에서 얼마나 벌어졌는지 가늠하는 반성들이 생기기도 한다. 국내 불교학자로서 자주 이름을 볼 수 있는, 이중표씨의 책인데 알라딘 저자소개는 기독교쪽 사람(동명이인인듯)으로 잘못된 정보로 적어놨다.

 

 

 

 

 

                                              <중국성풍속사>                                                  <화가와 그의 눈>

<세계풍속사>는 얌전한 책은 아니다.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에 비하면 양반이지만, '세계(성)풍속사'라고 해도 될 만큼, 인류학-사회학적 성에 대한 긴 흐름이 있는 책이다. 특히 쉽게 볼 수 없는 많은 도표와 그림들이 적당하게 시각의 재미를 준다. 이 책은 원래 전에 <상>, <하>로 나왔는데, 새롭게 1, 2, 3권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그러나  3권은 파울 프리샤우어가 아닌 다른 저자가 이어서 쓴 것이다.  이런 책과 비슷한 <중국성풍속사>는 네덜란드 외교관 출신인 동양학 학자의 책인데, 500여쪽에 걸쳐 선사시대부터 명나라까지의 중국 성풍속을 다룬다.

<미술과 시지각>은 오래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갖고 있었다. 근데 책이 구형이라 판형도 작고 왠지 읽기가 꺼려졌는데, 이번에 다시 이 책으로 구하게 되었다. '시각'에 대한 관심도 있는터라, 이런 책들을 모으는 편인데, 대개가 전문적으로 흐르는 편이라 읽는 재미는 떨어진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조금 봤는데, 꽤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거 같다. 미술의 순수성에 대한 유아적인 태도를 벗아나, 예술(미술)을 이데올로기, 사회성의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시력을 제공한다. 특히 이 책의 장점은, 짧고 간결한 설명으로 요점을 잘 제시한다는 것이다. 인용 그림과의 매치도 적절해 보인다. 괜히 쓸데 없는 그림으로 도배해서 별 거 없는 내용을 포장하는 책들에 비하면,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맛이 있다.        <화가와 그의 눈>은 미술에 관한 많은 책들 중에서 약간의 차별성을 갖는다. 화가 출신이기도 한 저자(M. Grosser)는 단지 보이는 그림만이 아닌 좀 더 내밀한 것들을 말해주는데, 특히 그림에 쓰인 재료(안료)들과 관련된 부분은 다른 곳에서 쉽게 전해 듣기 어려운 것이다.

 

 

 

 

 

다카시나 슈지는 그래도 미술쪽에선 잘 알려진 일본 학자인데, <만화 서양미술사>는 이 사람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고른거나 다름없다. 누구한테 선물하려고 산 책이긴 하지만, 만화로 꾸며진 것이라서 내가 먼저 얼른 읽어버렸다. 그런데 원시시대부터 현대미술까지 많은 것을 간결하게 다루려다 보니, 미술 사조의 흐름들이 자연스레 연결되지 않는 불규칙한 진행이 간혹 보인다. 그래도 중요한 예술 흐름이나 화가들과 일화들이 있어 어른들도 읽어도 될 거 같다. 너무 오래 마르크스를 멀리 하다 보니, 어렵지 않은, 그러면서 작은 자극이 될 만한 책을 골랐다. 바로 <쉽게 읽는 마르크스주의>..        <인간회복의 경제학>은 일본학자의 책인데, 자본주의 경제 흐름에 상실되는 인간의 그 '무엇'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인간학적 물음과 그것이 과연 이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가도 살필 수 있을 거 같다.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는 단순한 라틴아메리카 여행 경험을 담은 것이 아니라, 정치학자의 비판적인 시각도 함께 읽을 수 있는 진지함도 갖춘 책으로 보인다.

 

 

 

 

 

아까도 양자역학 책을 통해 수학에 대한 하소연을 했는데, 그래서 요새 수학공부를 다시 할 마음에 고른 책들이다. 기존의 수학책들엔 머리가 질려 있어서, 새로운 접근법을 찾게 되는데, 책의 제목도 '독본'이라 마음에 든다. 머리말을 보면, 내용은 중고교 수학, 특히 고교 수학이지만, 누구라도 읽기 쉽게 자세히 썼음을 밝히고 있다. 아직 읽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책 크기도 일반 문제지처럼 약간 큰 편이고, 본문 구성도 별다른걸 못 느끼겠다. 그러니 실제로 읽어보고 어떤지 알아나가야 할 거 같다.

 

===============본문과 관련된 책들============================

 

 

 

 

                                             <알기 쉬운 양자역학>

양자역학에 관한 책들 중에서 다소 전문적인 것들을 빼고 골라 봤더니, 대충 몇 권이 추려진다. <아인슈타인 & 보어>는 이 둘의 논쟁을 중심으로 꾸민 책으로 보인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인데, 이것은 인과론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 말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물리 현상도 그것은 결국 인간 인식의 한계 때문이지 자연 자체는 완전하다는 생각이다. 반면, 보어는 극미 세계에서 보이는 비합리적이고 불확정한 것들이 어쩌면 자연의 실제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이론화되면서, 자연에 대한 설명은 '확률'로서만 가능함이 강조된다. 거기다가 귀신소동?이 벌어지는데, 미시 세계에서의 관측은 관찰자와 분리된 객관적인 대상의 묘사라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관찰자가 그것을 볼 때에만 그것은(원자)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관찰자가 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허깨비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아인슈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직접 사고실험등을 통해 흥미로운 논쟁이 계속 진행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으론 아마도 보어쪽으로 기울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여튼 물리학의 두 대가들의 이런 우주적 논쟁은 참으로 부럽고 멋져 보인다. 사소한 것들로 말싸움을 하는 우리들과는 스케일이 다르지 않은가?   

 

 

 

 

                                                                          <아함경 1>     <아함경 2>     <한글 아함경>

*붓다의 설법이 담긴 아함경은 장부 아함경, 중부 아함경, 상응부 아함경, 증지부 아함경 등으로 나뉘는데, 보통 장아함경, 중아함경이라 하기도 한다.

 

 

다카시나 슈지의 책들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여러 책들

라틴아메리카와 우리나라가 과거 경제 발전에서 비슷한 점이 있고, 미국이나 유럽 등 외세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독재자, 쿠테타 등도 그러하다. 특히 라틴아메리카는 동양계가 자국 외, 다른 나라에서는 처음 대통령이 당선된 곳(페루에서 후지모리)이기도 하다.  이런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책들도 생각보다는 많이 보인다. 역사나, 문화에 관한 책들도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건 영화에 관한 것들이다. 흔히 마야나 잉카 등 고대유적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시선에서 좀 더 넓힌다면, 우리와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그들의 모습과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월드음악의 붐으로 라틴계열 음악이 전지구적으로(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우리 가까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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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책들이 봄싹 피듯 눈에 들어온다.

HOW TO READ 시리즈...

소박한 두께지만 거장들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탐험하기 앞서 안내 역할을 하는 책들이 있다. 가령 나의 경우엔 '시공사 로고스 총서'나 '시공 디스커버리' '시공 아트', 그리고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 청미래의 '만화로 보는...'  등에서 톡톡하게 도움을 받았다. 아무래도 수월하게 볼 수 있고, 그 대신 뭔가 가벼운 뒤끝을 남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간혹 다른 책들에서 건지지 못하는 명료하고 단순한 끈들을 발견하기도 한다(기억나는 책이 있는데, 시공사 로고스 총서로 나온 '데리다'는 어떤 데리다 입문서 보다 데리다의 기본 골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거 같다) 

 

 

 

 

 

최근에 눈에 띄는 이와 유사한 시리즈-HOW TO READ도 왠지 기대되는 책들이다.  소개글을 살펴보니, 영국 그란타 북스(Granta Books, Granta Publications)의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시리즈로, 이와 유사한 다른 시도들과는 질적인 차별성도 갖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책의 저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소화한 것들을 알기 쉽게 풀이 하는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HOW TO READ'답게 -원전 텍스트를 중심으로 직접 읽기의 과정이- 이 시리즈의 큰 특징에 속하는 거 같다.  

 

참여한 필진들도 (몇몇은) 예사롭지 않다. 우선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라캉을 맡았다니, 내용이고 번역이고 생각할 겨를 없이 충동적으로 보고 싶어진다. 물론 지젝의 스타일로 볼 때, 얌전하고 친절하기만 한 라캉의 전달자 역할을 기대하진 않지만 말이다.

 키스 안셀 피어슨(Keith Ansell Pearson)은 니체를 맡았다. 그가 쓴 <싹트는 생명>은 폭넓은 자료들을 촘촘하게 활용하면서 들뢰즈의 '생명철학' 이라는 주제를 유기적으로 잘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베르그송이 큰 기둥 역할을 하며, 더불어 니체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키스 안셀 피어슨 자신이 ('생명'이란 화두로) 니체-베르그송-들뢰즈에 관심이 큰 만큼, 이번 책에서도 그만의 니체 접근법이 기대된다.

 

 

 

 

 

그 외, 우리나라에도 이미 나와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형식의 책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자 레이 몽크가 <비트겐슈타인>을, 여성으로서 사회와 성(性)에 관한 주제의 책들을 써왔던  페넬로페 도이처가 <데리다>를 맡았다. 여성 학자의 시선에 담긴 데리다, 그것은 그 전 데리다에 관한 책들과 사뭇 다른  긍정적인 보완을 기대하게 만든다.

HOW TO READ 시리즈에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나오진 않았지만, 사르트르, 사드, 키에르케고르, 칼 구스타프 융, 제임스 조이스, 하이데거, 아퀴나스, 보부아르 그리고 이집트 사자의 서(Egyptian Book of the Dead)등도 보인다. 사드와 하이데거도 이번에 같이 나왔다면, 프로이트, 라캉과 함께 연대(連帶)적 읽기도 가능했을거란 생각도 해본다.

나는 아무래도 이 시리즈에서 <니체> <라캉>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마르크스> <데리다> 순으로 모아 볼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시리즈물에서 프로이트는 단골로 자주 등장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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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an 2007-05-2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구해서 읽다 보니 5장에 접어드는군요. 아직까진 좋군요. 다 읽고 간만에 서평이라도 써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