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가기를,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며 보냈던 수많은 날들이 떠오른다. 

할말이 너무 많아 아무 말도 쓰지 못할 것 같다. 상황과 환경에 확연한 차이가 있음에도 몇몇 장면은 『82년생 김지영』과 겹쳐진다. 

여자의 삶이 똑같이 하나의 모습이라는게 슬프다.  



내가 네 살 때, 스웨터 소매가 팔 위로 말려 올라가지 않게 손으로 소맷자락을 붙들고 코트 입는 법을 가르쳐준 아버지에 대해서는 오직 자상함과 배려의 이미지만 남아 있다. 그의 말이 곧 법인 가장,식구들에게 호통을 치고, 말대꾸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장, 전쟁 영웅이나 일터의 영웅, 그런 아버지는 나는 모른다. 나는 그저 내 아버지의 딸이었다. - P26

게다가 어머니는 정리해야 할 영수증, 맞이해야 하는 부인네들, 풀어놓아야 하는 상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장미 나무 밑의 야생초를 뽑고, "이렇게 하면 피부가 좋아진단다"라고 말하면서 5월의 아침 이슬로 내 뺨을 문질러 나를 깨우는 여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언제 어디서나 독서에 몰입한다. - P33

그 점에서 나는 지역 소식을 알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저녁 식사 후에 신문을 훑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를 벗어나, 우리를 벗어나, 굳어진 낯선 그 얼굴이, 어머니가 빠져드는 그 침묵이, 꼼짝도 하지 않는 완벽한 부동자세에 빠져 무거워진 그 몸이, 나는 부럽다. 오후마다, 저녁마다, 일요일마다, 어머니는
신문이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때로는 새로 산 책을 꺼내 든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말하고 있잖아, 그 소설책들 지겹지도 않아!" 하고 고함을 치는데, 어머니는 "이 이야기 다 읽게 좀 내버려둬"라고 대꾸한다. - P33

나는 나의 파렴치한 행동, 예를 들면 좋은 점수를 받으며 느끼는 기쁨,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는 즐거움, 어머니에게서 사탕을 훔치는 즐거움 같은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하지만 내 타고난 장난기, 나의 조심성 부족은 어떻게 해도 숨길수 없다. 공책에 얼룩을 묻혀놓고, 식탁에서 공부했다는 말을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바느질 천에 묻은 얼룩진 손가락 자국들, "청결은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여러분!" 내 본모습이 드러난다. - P78

이야기 속 여자들은 언제나 속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실패하고, 결국 행복은 와지끈 부서지고 만다. 브리지트는 그 부분에서는 실패했고, 나는 더는 브리지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완전한 헌신에 대한 그녀의 열광,한 남자를 사랑하면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의 똥도 먹을 수 있다는 그런 열광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96

아주 어려운 수학에 관해서,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어에 관해서, 예를 들면 루소에 관해서 그들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러면 그들은 지루해한다. 여자아이들의 대수학 문제는 남자아이들의 문제와 견줄 수 없다. 우리 집에서나 학교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런 성공은 오히려 결점이 되어버린다. - P125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자유롭게 가고, 점심은 먹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내 방에서 공부하는 그런 자유를 누리는 처녀 시절. 결국 나는 고독을 상실할 것이다. 둘이 사는, 가구가 딸린 조그만 방에서 우리가 쉽게 격리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하루에 두 번 식사하기를 원할 것이다. 온갖 종류의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결국 재미없는 삶. 나는 이런 생각들을 내몬다.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자아를 걱정하고, 근본적으로 버릇없는, 외동딸이 하는 생각, 부끄럽다. - P171

점잖은 사람들은 비웃는다. 결혼의 결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면 아예 결혼하지 마, 남자도 결혼하면 손해다, 주위를 둘러봐, 최저임금만 받는 사람들, 공부할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 종일 볼트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니야, 세상의 불행을 모두 다 긁어모아한 여자의 말문을 막아버리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내가 입을 다물 수밖에. - P206

시시포스와 그가 끊임없이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바위, 지평선을 등지고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그럴듯하게라도 보이지만, 부엌에서 1년에 365번 프라이팬에 버터를 던져넣는 여자는, 멋지지도, 부조리하지도 않다. 그냥 여자의 삶이다. 그러면 대체, ‘당신은 체계적이지 않아‘는 무슨 말인가. 체계적, 여성들을 위한 멋진 말, 모든 잡지에는 조언들로 넘쳐난다. 시간을 버세요, 이렇게 저렇게 하세요, 내 시어머니 같다. 만약 내가 여러분이라면 좀 더 빨리하기 위해 이렇게 하겠어요, 하지만 사실 이런 비결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우울해하지도 않으면서 최단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일을 할 수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 P214

공원에서 우리는 여자들끼리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거나, 오후 한창때 오솔길 사이로 한가롭게 산책을 한다. 시간을 죽이며, 아이가 자라기를 기다리며. 여자들이 내 아이의 나이를 물어보았고, 그들의 아이와 치아, 걸음, 청결 상태를 비교했다. 나중에 아이가 걷게 되고 다른 아이들과 놀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날카롭게 감시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 P218

그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길거리의 사람들을 밀치면서 안시를 돌아다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서, 오후가 흘러가기를, 아이가 어서 자라기를, 기다려본 적도 절대 없었다. 그는 일이 끝난 후,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조용히 안시를 구경했고, 그에게는 모든 공간이 자유로웠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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