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은 보라색 표지와 적당한 크기가 딱 내 스타일이라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머리말에서부터 목에 가시가 걸린 듯했다.
작년 즈음부터(책 출간을 기준으로) 한일간의 외교 관계가 왜 이렇게 악화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고 적었다. 그리고는 어떤 사안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한 해법을 찾으려는 태도에 대해 비판했다. 난 단순한 사람이라 명확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만, 사안을 단순하게 보고 판단하려는 태도 자체는 주의해야 한다고 믿기에,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일본인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괴뢰 정부가 아닌 민주 정부)와 절차에 따라 ‘위안부 합의’를 얻어냈고, 한국 정부의 안일함과 일본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문구까지 합의문에 넣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한국 정부는 이전 정부의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위안부’ 제도는 일본의 국가 범죄였음을 인정하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없었고, 피해자 당사자인 위안부 여성들의 요구에 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일본인이라면. 그래, 의아할 수도 있겠다. 정부 간의 합의를 이렇게 뒤집어 버리다니. 일본인의 입장에서라면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겠(다고 생각하려 하)지만, 그래도 알만한 분이 이렇게 판단한다는 데에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책을 덮어 버렸다. 그래도 전작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가 너무 좋았기에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는 펼쳐보았고, 그리고 다 읽었다.
퇴임을 앞둔 시기의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이어서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다루는 내용 자체가 쉽지는 않다. 말과 글, 전자책과 종이책,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 하루키 문학이 세계성을 확보한 이유 등이 흥미로웠고, 7강 계층적인 사회와 언어 부분도 재미있었다. 인덱스 했던 문단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문단은 여기.
지금 우리 주위에 오고가는 언어의 대다수는 ‘전해지는 언어’가 아닙니다. ‘평가를 받으려는 언어’도 아닙니다. 단지 ‘나를 존경하라’고 명령하는 언어입니다. 정말입니다. 세상에는 일정한 비율로 ‘머리좋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용은 다양하더라도 메타 메시지는 하나뿐입니다. 바로 ‘난 머리가 좋으니까 날 존경하도록 해’라는 것입니다. 메시지 차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고 또 퍽 훌륭한 내용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메타 메시지는 슬플 만큼 단순합니다. ‘내게 존경을 표하라’. 그것뿐입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306쪽)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렇지 않나 싶다. 인간의 삶이란 인정 투쟁을 위한 긴 여정이지 않은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메타 메시지는 오직 하나. 난 머리가 좋으니까 날 존경하라. 예전에 읽었던 문유석 판사의 글도 기억난다.
자학 취미가 있지 않고서야 숨기고 싶은 자기 위선과 추악한 치부 위주로 글을 쓸 사람은 없다. 어차피 글쓰기도 진화심리학적으로는 인스타에 셀카 올리기, 수컷 공작새의 꼬리 펼치기와 다를 바 없을 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기 장점을 어필하여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자원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인정욕구와 결부되지 않은 표현 욕구란 없다. 다른 점이라면 그걸 어느 정도로 노골적으로 하느냐, 세련되게 감추며 하느냐가 있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자기가 지금 잘난 척하는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는 있느냐, 그것조차 모를 정도로 바보냐 정도일 것이다. (『쾌락독서』)
글쓰기가 주는 즐거움, 자기표현과 자기 해방의 즐거움을 넘어서서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는. 읽기만 하지 않고 쓰고자 하는 심리의 맨 밑바닥에는. 길게 쓰려고 하고 재미있게 쓰려고 하고, 자꾸 고쳐 쓰는 성실한 습관의 이면에는.
메타 메시지가 있다. 나는 잘났고 그러니 나를 존경하라.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