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은 일찍부터 유럽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이식된 것은 물론이고 인도, 중국, 아랍계 이주민들의 디아스포라가 짧은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척의 배로 페낭을 점령한 영국

1786년 8월 11일 영국은 페낭을 점령했다. 사실상 네덜란드나 스페인, 포르투갈에 비하면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영국은 당시 페낭을 지배하던 끄다(Kedah)의 술탄과 협약을 맺었다.

다인종, 다종족 도시의 형성

열대우림이 우거진 미개척지였던 페낭에서 비교적 먼저 건설된 곳이 조지타운이다. 조지타운 건설 초기의 과제는 늪지대를 메우는 것이었다.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 영국 해협식민지 정부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계약노동자들을 투입했다. 여기에 유럽 아르메니아인까지 들어가 다인종, 다종족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고푸라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종다양한 신과 동물, 자연물을 조각하고 명도가 높은 색으로 화려하게 색칠을 했다. 어쩌면 밋밋한 조지타운 도시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을 신전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구나 쉽게 사원을 잘 찾아오라고 눈에 확 띄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호화찬란한 색은 역시 인도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스리 마하마리암만 사원의 고푸라 역시 페낭의 다문화적이고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

가톨릭이 처음 전해진 후 조정의 박해로 신학교를 개설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의 학생들도 페낭까지 와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페낭신학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양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12 1855년 이만돌, 김요한, 김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을 시작으로 1884년까지 여러 명의 신학생이 페낭에서 사제 교육을 받고 돌아갔으며, 이 중 12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페낭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으며, 교정에는 페낭신학교 교수였던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있다.

조지타운의 페낭교구박물관에는 박해를 받아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와 ‘황사영 백서’ 사본이 있다.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1775~1801)이 신유박해(1801)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적은 기록이다.13 지금은 페낭신학교의 옛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거니플라자와 거니파라곤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신학교의 일부였던 성요셉학교만 보존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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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처음에 베일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알 물라타민(al-mulathamin, 베일의 전사)으로 불렸다.

왕조의 수도요, 베르베르족의 활동무대인 마라케시의 상징성 때문에 모로코 왕가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마라케시의 베르베르족에게서 맞이한다고 한다. 이 땅의 원주민에 대한 배려이자, 국가 통합을 위한 정책으로 보인다.

쿠투비아 모스크

황토색 흙벽돌로 쌓아올린 가로와 세로 높이의 균형비가 1대 5인 직사각형 미너렛은 6층 구조이며 높이가 77미터에 이른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첨탑의 표준형으로 모로코 수도 라바트의 하산탑,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탑과 함께 알모하드 왕조의 3대 걸작 미너렛 중에서도 으뜸이다.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데하르 양식의 대성당 종탑의 원형이 바로 쿠투비아 미너렛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확인했다. 쿠투비아는 안달루시아에서 감탄하며 눈에 익혔던 소박하고 투박한 무데하르 건축 유행의 원조인 셈이다. 그러니 더욱 애착을 갖고 쿠투비아를 응시했다.

우주의 순환과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이슬람 철학을 명료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삶의 공간 그 자체가세계문화유산

쿠투비아 모스크를 돌아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가면 그 유명한 제마 엘프나(Jemaah al-fna) 광장이다. 오전에는 옥외시장이 열렸다가 천막이 걷힐 무렵부터 세계인이 즐기는 광장 무대가 된다. 위치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인 오후 느지막한 시각, 그저 인파의 물결을 따라가면 된다.

이곳은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곳이다.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삶의 역동성과 활력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무대. 민중 예술의 위대한 현장이다. 주변에 특출난 유적지나 진귀한 예술품이 없음에도 이렇게 삶이 살아 있는 공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의 안목에 찬사를 보낸다.

종교를 뛰어넘는포용력이 만들어내는 매력

사하라의 전통과 명예를 이어받은 마라케시의 강인함과 포용성은 도시 구석구석에서 보이지 않는 매력을 발산한다. 500년간 대대로 마라케시에 살고 있다는 유대인 보석상 유후디를 만났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신비와 애절함  
아라비아반도에서 도도한 새 물결로 출발해 지중해를 따라 북아프리카를 돌아온 이슬람의 파고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에 첫발을 내딛는다. 711년이었다. 이슬람은 비잔틴과 페르시아를 껴안고 아프리카 대륙에 상륙해 이집트 신화, 아프리카의 원초적 순수함까지 포용하며 코르도바에 둥지를 틀었다. 그 후 약 800년 동안 이슬람은 유럽 땅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빛깔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르도바는 에스파냐 남부안달루시아 지방의 역사 도시다.
다양한 문화가 아프게 섞이면서 아름다운조화를 이룬 문명 공존의 현장이다.
152년부터 로마, 572년부터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8세기 이후 약 800년간이나이슬람 왕조가 이 도시의 주인이었다.
15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600년간 가톨릭이 중심이다.
한때 코르도바는 이슬람의 도시로 세상의 중심이었다.
힘과 권위만을 내세우는 오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로맨스와 예술, 학문과 과학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지식과 지혜의 심장이었다. 그리스·로마의 철학과학문적 성취를 집대성했으며,
이슬람의 수준 높은 과학을 유럽에 전해주었다.
이로써 유럽은 오랜 암흑에서 벗어나비로소 르네상스의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나는 지난 겨울에 코르도바를 다시 찾았다.
중세 도시 코르도바가 내뿜는 깊은 역사의 입김과진한 오렌지 향에 취해 오랫동안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슬람 예술가들에게 건축만큼 좋은 캔버스는 없었다. 넓디넓은 캔버스인 천장, 벽, 바닥에 한 줌의 여백도 남겨둘 여유가 없었다. 허용된 캔버스에 온 기량을 쏟아부었다. 천장에는 꾸란 서체 벽화를 그려넣고, 벽에는 아라베스크 타일을 붙이고, 바닥에는 아라베스크 카펫을 깔았다. 그래서 아라베스크 문양을 바라보면 신비와 절절함이 묻어난다.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할둔은 "지중해는 유럽인이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안달루시아 문화 특유의 공존 정신인 ‘콘비벤시아Convivencia’ 전통의 결과였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주변 문화를 쉽게 받아들였고, 수준 높은 과학 기술과 절충의 미가 빛을 발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메스키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대표적인 건축물이 메스키타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다. 785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11세기에 완공된 세계 최대 이슬람 사원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메스키타를 보기 위해 서둘러 과달키비르강 언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은 코르도바 주교좌 대성당이 되어 있는 곳이라 유럽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잇고 있었다.

두 문명과 종교의 화해와 충돌의 현장

1236년 6월 29일, 코르도바는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 3세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에스파냐 이슬람 왕조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메스키타는 성당으로 탈바꿈했다. 그렇지만 500년간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사랑받던 메스키타 앞에서 정복자들마저 넋을 잃었다.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는 1523년 이교도의 정신적 상징을 헐어 없애는 대신 개조해서 대성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비록 영혼은 뺏겼지만, 메스키타 일부는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돔이 잘려나가고 세속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모스크 입구 아치문은 콘크리트로 막아버렸고, 천국을 상징하던 모스크 내부의 파티오와 정원의 분수도 헐리거나 모양이 바뀌었다. 새로운 천국을 만들기 위해 이교도의 천국을 막아버린 셈이다. 천국은 똑같은 천국일 텐데…

무엇보다 코르도바를 살찌운 것은 화해와 관용이었다. 당시 이슬람 왕정은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과 토착민에게도 종교 구분 없이 능력과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다른 생각과 가치를 받아들이는 문명은 번성하고, 자신의 가치만을 고집하며 소수민족을 억압한 문명은 소멸하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인류 사회에 가르쳐준 도시가 코르도바였다.

코르도바를 차지한 에스파냐 왕들은 과달키비르 강변에 있는 아랍식 목욕탕 자리에 아랍 궁전을 본떠 알카사르 요새를 짓고, 마지막 이슬람 왕조가 있던 그라나다를 함락했다. 1492년 1월의 일이었다. 이로써 에스파냐의 무슬림과 유대인은 쫓겨나거나 강제로 개종당했다. 바로 그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에스파냐의 시대가 열렸다.

그라나다라는 이름은 왠지 고급스럽고 꽤 낭만적으로 들린다. 어릴 때 최고급 국산 자동차 이름이었기 때문일까.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문화의 깊이와 현실의 풍요가 느껴지는 고도. 그 도시 가운데를 다로강이 동서로 흐른다. 아름다운 남부 유럽의 전형적인 풍광이다.

스페인 남부를 안달루시아라 부른다.
무어(Moor)라 불리는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이곳에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남겨놓았다. 약 800년간 이베리아반도에심어놓은 아랍 문화의 토양에 꽃을 피운 에스파냐 문화를안달루시아 문화라고 부른다. 두 문화가 공존할 때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인류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슬픈 역사가 도시 언저리마다 웅크리고 있기는 하지만.
안달루시아 문화의 중심 도시는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3대 역사 도시다. 지중해 안달루시아 문화를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그라나다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교도 조상들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그라나다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는 데 특별한 의미를 두는 시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미 그라나다 시민들의 재산이고 문화유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슬람 문명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안달루시아에 머무는 동안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이다.

구시가를 형성하는 다로강 북쪽으로는 고풍스러운 멋을 뽐내는 무어풍 빌라와 저택이 잘 가꾸어진 정원과 과수원 사이로 줄지어 있다. 강 반대편 언덕에 보이는 것이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토록 꿈꾸어왔던, 그 이름만으로도 황홀한 알함브라다.

알함브라,인류 최고의 보석

그라나다는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조(1238~1492)의 수도였다. 13세기에 들어서자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국가들은 내분과 영토 분쟁으로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종교적 단합보다는 개별 권력이 앞서면서 군소 이슬람 국가들은 기독교 국가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다. 전세는 점차 역전되어갔다.

기독교 세력에 함락되어가던 무슬림들이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가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래서 그라나다는 알함브라의 도시다. "그라나다라는 에메랄드에 알함브라라는 빛나는 오리엔트산 진주가 박힌 인류 최고의 보석." 15세기 한 아랍 시인의 표현이다.

역사는 보아브딜과 알함브라의 작별을 "무어인의 탄식(El Suspiro del Moro)"으로 기록하고 있다.

"알함브라를 잃은 자여, 불쌍하도다. 나 같으면 알함브라를 버리고 알푸하라스 언덕에서의 삶을 택하기보다는, 알함브라를 지키며 내 무덤으로 삼았을 텐데"라며 보아브딜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승승장구하던 기독교 세력이 시시각각 침략의 손길을 뻗쳐올 때, 최후를 앞두고 유언장을 쓰듯 비감한 손길로 빚어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다. 그래서인지 알함브라를 세세히 살펴보면 비감함과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유난히 붉은 낙조가 알함브라를 물들인다. 태양이 붉게 지던 그날, 그라나다도 어느 무명 시인의 통곡처럼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불운의 왕이여!

죽을 용기가 없어 그라나다를 떠나는 못난 왕이여!

남아 있는 인생이 무어 그리 대단할진데,

그까짓 왕관 하나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라나다를 떠나가느뇨!

이슬람의 궁성이 함락되던 그해, 1492년 이사벨 여왕이 후원하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는 에스파냐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한편 이슬람의 술탄 보아브딜은 에스파냐에서 쫓겨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711년, 그의 선조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할 때 의기양양하게 건넜던 바로 그 길이다. 모로코의 이슬람 도시 페즈에 정착한 뒤에도 보아브딜은 꿈에도 알함브라를 잊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 페즈의 초라한 궁전은 지금도 알함브라를 닮아 있다.

아프리카만큼 총체적 무지와편견에 갇혀 있는 대륙도 드물 것이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두려운가상 공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꼽으라면,
‘원시‘, ‘미개‘, ‘야만‘, ‘블랙(black)‘처럼문명의 반대편에 있거나 ‘말라리아’, ‘에이즈’, ‘에볼라‘ 같이불편하고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보라면,
제법 배운 사람들은 최초의 인류인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들먹이고 나서는,
‘21세기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무한한 자원의 보고‘라는말을 보탠다. 이런 편견을 바꿔줄 수 있는 곳이바로 아프리카의 자존심, 팀북투다.

문명(文明)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개념으로, 인류는 동일한 진보 과정을 겪는다는 지극히 유럽 중심적인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이어 19세기 사회진화론자에 의해 ‘발전’ 개념이 문명 담론에 적용되면서 백지 상태에서 ‘야만(구석기시대)-미개(신석기시대)-문명(청동기 이후)’으로 나아간다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오로지 사회·경제적 조건을 기준으로 인류의 가치와 삶의 수준을 측정했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19세기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갔다.

아프리카는 ‘기록의 역사’보다는 ‘기억의 역사’ 전통이 강한 사회다. 기록은 처음부터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큰 데다가 후일 권력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수정되고 미화되고 조작될 수 있지만, 공유된 기억은 가락 하나 숨소리 하나 틀릴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형·무형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통을 이어가는 수백 수천만 개의 공유되는 기억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젠네 대모스크,서아프리카의 랜드마크

젠네 모스크는 말리 왕국의 중심 도시 젠네에 13세기경에 세워진 이슬람 대사원이다. 말리 왕국의 이념적 성격과 국가 규모, 경제적 풍요를 짐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젠네 모스크 건립에 관한 기록은 팀북투의 연대기 작가 아브드 알사디(Abd al-Sadi)가 1655년경에 집필한 《수단의 역사(Tarikh al-Sudan)》라는 책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 유럽인들에게 이 도시는 실제 존재하는 도시라기보다는 전설과 신화 속 환상의 도시로 여겨졌다. 그래서 팀북투라는 말 자체가 ‘아주 머나먼 곳’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석재가 부족한 환경에서 진흙벽돌로만 이 거대한 모스크를 축조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젠네 모스크는 말리 왕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진흙벽돌 모스크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수단-사하라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며,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말리를 이은 서부 아프리카 문명의 전성기:송가이 왕국

송가이 왕국(1000~1591)은 원래 말리 왕국의 속국이었으나 말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서아프리카에서 번성했던 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다. 말리 왕국을 멸하고 송가이 왕국을 세운 사람은 손니 알리였다.

가장 성스러운 장소와 가장 세속적인 장소, 가장 진보적인 담론의 장소가 공존하는 현장이 바로 이태원이다. 거리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언어가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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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바닷길로 불과 1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지중해가 오랫동안 유럽 남부 바다와 동의어로 쓰였지만, 튀니지를 보고 나면 북아프리카 지중해가 얼마나 아름답고 역사적으로 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지 확연히 깨닫게 된다.

한니발의 위엄과 포부가 살아 있는 카르타고가 특히 매혹적이다.

바브엘바하르, 즉 ‘바다의 문’이다. 아마도 지중해의 바닷물이 이 문을 통해 들락날락한다고 믿었던 시절에 붙여진 이름인 듯싶다.

부르기바는 튀니지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31년간이나 통치한 튀니지 현대사의 중심 인물이다. 용기와 지성을 겸비한 그는 오로지 조국 튀니지를 위해 존재한 인물이었다. 아랍 국가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남녀평등과 여성의 사회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지도자였다.

장기 집권은 스스로가 이룩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1987년 11월 7일,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치매 증세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산송장이나 다름없었음에도 의사가 통치 불능 판정을 내릴 때까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2001년 여름 다시 튀니스에 갔을 때 거리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11월 7일의 거리.’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날이었다.

아랍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이븐 할둔을 배출한 곳이 이 자이투나대학이다.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이자 독보적인 역사 서술 체계를 확립한 이븐 할둔은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서양 인문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학자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 벤 알리는 일상적인 대화는 아랍어로 하지만, 정치적인 이슈나 학술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프랑스어가 편하다고 한다.

350년간 튀니지를 지배한 오스만튀르크의 영향보다 76년간(1881~ 1956) 식민 통치한 프랑스의 힘이 더 크다. 프랑스의 문화 이식 정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페니키아, 로마, 반달족, 초기 기독교, 비잔틴, 아랍, 오스만튀르크, 프랑스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끊임없는 부침을 겪었던 튀니지의 역사와 문화를 한번쯤 정리해볼 수 있는 곳이다.

바로도 박물관

시디부사이드,유럽 대문호들이 사랑한 지중해 해변 마을

시디부사이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지중해 언덕의 푸른 마을이다.

하얀 돔을 올린 자우이야 아부 사이드 모스크다. 시디부사이드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이 마을의 사연을 담고 있는 현장이다. 주인공은 바로 아부 사이드 칼라브 번 야프야 엘 타미미 엘 베지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슬람 성자다.

"아저씨, 총각이에요? 왼쪽 귀에 꽃 한 송이 꽂으면 시집가고 싶은 거래요."

아! 그렇구나!

한니발의 도시 카르타고

티레의 왕 벨루스의 딸 디도는 오빠 피그말리온이 왕위에 올라 사랑하는 남편 시카에우스를 숙청하자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올라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기원전 814년의 일이다.

현지 뱃사람들은 그녀를 엘리사-디도라 부르며 항해의 수호여신으로 받든다.

지중해 너머로 멀리 로마를 바라보고 있는 포에니 선착장만이 세계 제패를 꿈꾸며 진군했던 한니발의 영광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할 뿐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이다. 한니발은 보병과 기병, 그리고 40마리의 코끼리 부대와 함께 피레네산맥과 알프스를 넘는 과감한 행군을 택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파라다이스 함마메트

튀니지에 오면 가까운 지중해 해변 도시 함마메트도 빼놓을 수 없다. 수도 튀니스에서 자동차로 동남쪽 해변을 따라 1시간 거리에 있다. 함마메트는 ‘목욕’을 뜻하는 아랍어 함맘(Hammam)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시디부사이드를 예찬했던 앙드레 지드, 오스카 와일드, 조르주 베르나노스, 클레 같은 예술가들의 휴양지가 되면서 함마메트는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근대 아랍 도시로

알제리로 가는 여정은 그리 쉽지는 않다. 서울에서 11시간을 날아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다시 4시간을 더 가야 알제 공항에 닿는다.

처절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가진 순박한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는 인파 사이로 여기저기 골목길이 나 있었다. 각양각색의 물건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한 흥정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제리 독립을 위해 애쓰던 독립투사들이 1957년 프랑스의 공격을 받고 순교한 곳이라고 했다. 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잠시 묵념을 했다. 우리도 독립의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가를 떠올리며….

알제리는 8년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학살당한 희생자 수를 200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피해자 숫자가 다소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10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알제리 인구가 9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20세기 중후반에 인류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나는 프랑스가 인권과 자유를 지키는 톨레랑스의 나라라고 말하는 담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축구 영웅 지단, 소설가 알베르 카뮈,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도 알제리 출신 피에누아르였다.

독립 영웅 에미르 압둘 카디르 동상과 알제리대학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싸게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에미르 압둘 카디르(Emir Abdul Kadir) 동상이다. 19세기 알제리 서부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며 조국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투사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 튀니지는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고대 로마를 살찌운 젖줄로우리의 관심을 끈다. 2011년 거대한 민주화 물결과함성으로 지구촌을 울렸던 ‘아랍의 봄‘
민중 시위의 산실이기도 하다. 아직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민주화의 목적지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북아프리카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가장 민주화 열망이 강하고여성의 인권이나 사회참여 수준이 높으며, 개방성과 융합성이앞서 있는 매력적인 나라다. 아랍 시민혁명 이후에도대부분의 아랍 국가가 권위주의 군부정권으로 회귀하거나내전으로 고통받을 때, 튀니지에서는시민사회단체 4곳이 협력과 대화, 조정을 통해 사태를 수습해다원적 민주주의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바로 이 ‘튀니지 국민 4자 대화기구‘가201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서쪽에 위치한 알제리는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는 아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잘 모르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고향이고,
《이방인》, 《페스트》의 배경이 된 땅이기 때문이리라.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지드는 알제리를 비롯한아프리카 일대를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소설과 시,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역사적인 대문호들의 활동 무대였던 알제리는 오늘날그리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1962년에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로,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국가 원수가 수시로 바뀌는 등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알제리는아프리카의 투명한 햇빛과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로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일어서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씻어내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북아프리카 지중해의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사연이 진주처럼하나씩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거리를 지나 알제리대학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19세기 이전에 편찬된 귀중본만 100만 권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북아프리카 최대 도서관 중 하나다. 그러니 알제에 와서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운이 좋았는지 도서관장의 특별 배려로 전 세계에서 단 한 부만 남아 있다는 1936년 판 카뮈의 《형이상학, 기독교, 신플라톤주의Christian Metaphysics and Neoplatonism》라는 빨간 표지의 책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카뮈의 알제대학교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그때의 짜릿한 기분이란, 정말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문화는 섞일수록 발전한다

물론 알제 주변에 이슬람 유적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유적도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고대 유적지가 티파사다. 티파사라면,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이란 작품이 탄생한 무대가 아닌가.

알제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티파사로 가는 해안길은 풍요와 은총으로 가득했다. 흑갈색 땅에서는 옥수수가 자라고 그 사이로 푸른 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티파사에 도착했다.

카뮈가 거닐었을 길을 걸으며 단절된 역사의 향기에 취해본다.

알제에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알제리 남쪽 도시 타만라세트까지 2000킬로미터에 이르니, 알제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보다 길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사하라를 고향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토착 투아레그족이나 베르베르족의 전통과 관습보다 로마나 유럽의 해양 문화가 더 강하게, 더 빨리 스며들 수밖에 없는 북아프리카 문화의 특성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문화는 섞일수록 발달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할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는 사실을 북아프리카 최고의 해안 도시 알제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마라케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와닿은 느낌은여유로움과 독특한 문화의 향기였다.
괜히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근엄한 이슬람의 눈총도 없고,
사하라의 주인공인 베르베르의 자유분방함과사막 유목전사의 위엄이 넘치는 도시였다.
마라케시는 참으로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훌륭한 현대 박물관이나갤러리, 콘서트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이 넘치는나날을 경험할 수 있는지 마라케시는 직접 보여주었다.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아틀라스 산맥 기슭의 하우즈 분지에 있는오아시스에 들어선 도시가 바로 마라케시다.
예부터 끝없는 사하라 사막이 시작되는 관문이고,
지중해와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낙타 대상의거점 도시였다. 마라케시의 흥망성쇠는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 바가 크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왕조의 중심 도시였던 페즈에 도읍을 정한 이드리스 왕조가 거의 쇠망해갈 무렵, 11세기 초 마라케시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알모라비드 왕조다. 사하라 사막의 여러 베르베르족이 연대하여 흥기한 알모라비드 왕조는 독실한 이슬람 지도자 압달라 빈 야신(Abdallah Bin Yassin)의 영도 아래 승승장구하여 남부 및 동부 모로코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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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은 배낭여행으로, 중년층은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 동남아시아를 찾았다. 압도적으로 많이 찾는 곳은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이다. 베트남 하노이와 다낭, 태국 방콕도 상당히 인기 있는 관광지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남아시아를 찾는가?

유럽인들이 작물 재배를 위한 플랜테이션과 주석 광산 개발에 앞장서면서 일손이 달리자 19세기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노동 이주를 권장했다. 인구가 부족한 동남아시아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이때 데려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쿨리’라고 불리는데, 인도와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장 인구가 많은 것은 중국인 노동자였다.

도시야말로 동남아시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첫인상은 깨끗하다는 느낌이었다. 중국어나 영어 간판이 뒤섞여 있어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인상인데 왁자지껄한 활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싱가포르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시가, 홍콩처럼 적당히 무질서한 건물들. 어느 쪽도 아닌 도시, 믈라카를 그렇게 만났다.

싱아푸라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 일명 이스칸다르 샤(Iskandar Shah)가 1402년 믈라카를 거점으로 삼고 왕국을 세웠다. 이것이 비록 짧지만 영화로웠던 믈라카 왕국의 시작이다. 그가 믈라카를 택한 이유는 1년 내내 접근하기 쉽고, 폭이 좁은 믈라카 해협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환관 정화를 통해 파라메스와라는 명나라와 성공적인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그가 노린 것은 명의 비호를 받아 믈라카를 넘보던 시암(지금의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있던 나라 마자파힛 왕국을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믈라카는 공식적으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번국이 되었고, 이는 믈라카가 중국과 인도, 아랍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의 거점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상교역의 강자로 등장한 신흥 왕국

1405년 명나라 환관 정화가 함대를 이끌고 와서 비석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믈라카는 시암에 종속된 변두리 항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화는 믈라카가 일개 항구가 아니라 분명한 나라임을 밝히는 비석을 세웠고, 파라메스와라에게 믈라카를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믈라카는 계절풍이 시작되고 끝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오가는 선박들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리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입지 조건도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해상교역에서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 열강의 진출과 믈라카 왕국의 운명

하지만 국제 교역 항으로서 믈라카 왕국의 영화는 길지 않았다. 믈라카가 차지하는 지리적 이점을 눈여겨본 포르투갈의 침입이 치명타였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협상했고 1824년에 영란조약을 맺었다. 이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망해서 국가가 그 빚을 떠안게 되어 재정적으로도 휘청거리던 참이었다. 두 나라는 가신들이 점유하고 있던 식민지를 맞바꾸는 데 동의했다. 싱가포르 해협을 기준으로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는 영국령, 인도네시아 쪽은 네덜란드령이 되었다. 믈라카는 영국령이 되었다.

바다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절,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많은 나라가 눈독을 들였던 믈라카. 바로 그 위치 때문에 부를 축적했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게 재앙이 되기도 했다. 열강들이 함대를 이끌고 와서 믈라카 쟁탈전을 벌였으니 말이다. 그 덕분에 복합적인 다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을 갖게 되었고 유명한 관광지가 되기도 했으니, 새옹지마란 말이 여기에도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겠다.

페낭은 동남아시아 여느 도시와는 어딘지 조금 다른 분위기를 지닌 곳으로 1990년대 후반 한국인의 신혼여행지로 제법 인기가 많았다. 일찍이 유럽인들은 페낭을 아시아의 진주 또는 인도양의 에메랄드라고 불렀다. 그만큼 서구에는 전근대부터 알려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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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을 먼저 찾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그래야 원하는 곳을 마음껏 돌아볼 수 있고, 나머지 것들을 포기해도 덜 아쉽기 때문이다.

외관의 투박함과 내부의 화려함, 이것이 이슬람 건축의 기본적인 철학이다. 바깥은 속세이고, 내부는 천국인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문 하나를 경계로 두 세상이 만나고 단절된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샬리마르 정원은 그러한 이슬람 건축 정신의 상징과도 같다. 이 아름다운 정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라호르 박물관의 간다라관에서 압권은 ‘고행하는 불타상(Fasting Buddha)’이다. 간다라의 방 중앙에 전시된 고행상 앞에서 관람객은 충격과 전율에 빠져든다. 높이 약 80센티미터의 부처님 고행상은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고 혈관이 간신히 붙어 있는 모습이다. 극도의 고통을 극복한 뒤에 찾아오는 해탈과 열반의 미소는 평온함을 넘어 숙연한 자기성찰의 채찍으로 다가온다.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이토록 절절하게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타지마할을 만나러 가는 길

인도 전역에서 혹은 인도 바깥에서 타지마할이라는 인류 최고의 걸작을 만나기 위해 아그라행을 손꼽아 기다린다. 누구에게는 버킷 리스트이고, 누구에게는 사랑의 메카 순례일지도 모른다.

아그라는 타지마할의 도시다.
무굴 제국이 남긴 찬연한 인류 문화유산이다.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후예다.
티무르 제국의 마지막 왕자 바부르가 권력 투쟁에 패배한 뒤새로운 세상을 찾아 인도 북쪽으로 갔다.
바로 그 바부르 왕자가 무굴 제국의 창건자다.
이전 왕조들도 그러했지만, 무굴 제국은 토착문화와 융합하고종교 간 화해와 다른 가치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독특하고 창의적인 문화를 이룩했다.
이슬람의 가치와 티무르 제국이 남긴 페르시아 문명,
중앙아시아 튀르크인에게 물려받은 역동적인 유목 문화를힌두적 토양에 이식함으로써 문화의 용광로를 가동할 수 있었다.
수학·천문학·의학 분야는 물론, 건축 분야에서도타지마할로 대표되는 불멸의 문화를 꽃피웠다.
무굴 제국은 1857년 영국에 항복하고인도 아대륙에 잔혹한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었다.
1947년 마하트마 간디의 주도로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힌두 중심의 정치체제를 받아들였다.
한편 800년 이상 인도 아대륙의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았던북부의 이슬람 공동체는 동서 파키스탄으로 떨어져 나가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오랜 사회적 연결망과 삶의 기반을 포기할 수 없었던약 2억 명의 인도 본토 이슬람 공동체는 인도 서부를 중심으로지금도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그라는 수백 년 동안 이슬람 문화가 지배하던 곳인데 힌두교도들이 기득권을 내세우며 행패를 부린다"라며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과 방관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에어컨도 없이 4시간을 달린 버스는 긴 경적 소리와 함께 아그라에 도착했다. 그토록 그리던 꿈의 도시 아그라에.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

곧바로 야무나강 가의 타지마할로 갔다. 순백색 대리석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운 자태를 그저 멍하게 서서 몇 시간이고 보기만 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타지마할(‘왕궁의 왕관’이라는 뜻)은 샤 자한이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하며 예술적 정열과 국력을 쏟아 완성한 무덤 궁전이다.

두 사람은 열네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녀는 결국 출산 후유증으로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놀라운 기술력과 디테일에 경의를!

타지마할은 무굴 건축가 무함마드 이사와 바그다드의 세계적 돔 건축 기술자인 무함마드 샤리프의 지휘로 1632년에 착공해 약 22년 만인 1654년에 완성되었다. 약 2만 명의 노동력과 1000마리 이상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절대권력자의 사치와 집착으로 결국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났고, 샤 자한은 아들에 의해 폐위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타지마할의 디테일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타지마할은 알함브라 궁전을 참고하여 설계한 전형적인 페르시아-이슬람 건축 양식이기 때문이리라.

기원전 3000년경에 발달한 이집트 문명은 피라미드와스핑크스로 대표된다.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나일강 변의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세계 최고의 고대문명이 이집트에서 번성했다.
태양력과 측량술, 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던 이집트 문명은사방이 사막과 바다로 고립되어 있어 오랫동안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문명의 독자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5000년 전 고대문명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뿐이다"라는어느 고고학자의 고백을 떠올리며, 숙연한 마음으로카이로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겨울의 이른 새벽이었다. 짐을 풀고 고층 호텔의창문 커튼을 열어젖히자 시내 한가운데를 흘러가는나일강 위로 막 일출이 시작되었다. 이집트 문명은나일강의 선물이라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표현을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전 국토의 97퍼센트가 사막인이집트에서 나일강이 갖는 의미가피부로 느껴졌다.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고원에서 그리고 빅토리아 호수에서 아프리카 6000킬로미터를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르는 나일강이 그 하구에 만들어 놓은 마지막 선물 같은 곳이 카이로다. 카이로를 중심으로 피라미드 시대인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와 태양신 ‘라’ 신앙의 발상지인 헬리오폴리스가 펼쳐진다. 카이로 일대야말로 고대문명의 요람이요 ‘문화’라는 인류 최고의 산물을 본격적으로 일구어낸 실험장이었던 셈이다.

나는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첫 햇살이 스핑크스의 두 눈을 정확히 비추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스핑크스가 더이상 피라미드의 수호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피라미드보다 훨씬 먼저 세워진 스핑크스는 빛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 작품인 것이다.

해가 떠올라 피라미드 사이에 걸릴 때쯤이면 카이로는 금방 1000만 시민이 빚어내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한다. 길을 메운 사람들과 자동차, 왁자지껄한 소음과 경적, 남루한 가난, 세속에 찌들어 시간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카이로의 도시 문명을 피라미드는 그저 묵묵히 안타까운 듯 지켜보고 서 있다.

한 면의 길이가 250미터, 높이가 170미터인 돌 600만 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몇 센티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 완벽한 축조물 앞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인간의 지혜와 초월성이라는 숙제를 생각했다.

피라미드에는 강제 노역의 아픔이 서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압제를 뛰어넘는 인간의 위대한 생명력과 절대적 신앙이 배어 있음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태양신의 아들인 파라오를 신으로 섬기는 백성들의 믿음과 정성이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세운 원동력일 것이다. 그들에게 피라미드는 신전이었고, 그 속에 모신 파라오를 수호신으로 받듦으로써 불멸의 파라오와의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과학으로는 이 신비를 풀 수 없다"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 | 이희수 저

모처럼 맞이하는 관광객이라며 집주인 하산은 2500년이나 되었다는 미라를 보여주었다. 거의 완벽한 형체를 가진 조상을 이제는 불멸의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생계의 방편으로 집집마다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구경을 시켜주고 사진을 찍게 하고는 약간의 돈을 받아갔다.

미라 연구에 평생을 바친 프랑스 생화학자 모리스 뷔카이유는 한 강연회에서 미라 제작의 신비를 묻는 질문에 "인간의 지식과 과학으로는 이 신비를 풀 수 없다. 이것은 신의 작품임에 틀림없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신에 귀의하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이슬람 사람들은 고려 말에도 대거 한반도로 이주했는데, 그들을 회회(回回, 위구르인)라고 불렀다. 고려가사 <쌍화점>에 개경 한복판에서 회회아비(이슬람 사람)가 운영하는 만두가게가 나올 정도니 적지 않은 이슬람 이주자들이 고려사회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도시는 아프리카와 유럽, 오리엔트 여러 지역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튀르키예, 이라크,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불가리아에도 알렉산드리아가 있다. 아랍에서는 ‘이스칸다리야’, 튀르키예에서는 ‘이스켄데룬’, 그리스에서는 ‘알렉산드로폴리스’ 등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이 모든 중심은 이집트 지중해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다.

낙타가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것은 한번에 거의 100리터의 물을 마시고 200리터를 3개의 위에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500킬로그램의 짐을 싣고 400킬로미터를 걸어간다. 2킬로미터 밖에서 물 냄새를 맡고 정확하게 물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천부적인 후각을 갖고 있다. 콧구멍과 귓속에 난 털을 이용해 모래 먼지를 차단하는 놀라운 장치까지 갖고 있는 완벽한 사막의 배다.

알렉산드로스 왕의 돌연한 죽음으로 세계 제국의 꿈은 사라진다. 그는 결국 제국을 완성하지 못했다. 힘과 야망으로 거대한 땅을 정복만 했지, 그곳에 영속적인 문화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세계 역사는 그를 대왕으로 부르길 주저한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였을 뿐이다. 오리엔트의 정복지에 셀레우코스와 안티오코스 왕조가 들어서고 서서히 토착문화에 동화되어갈 때, 이 도시는 300년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가 이어간다.

리비아는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가장 아름다운해변을 갖고 있으며 로마시대 유적지를 품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20세기 역동의 시대, 혁명과 반미노선으로서방세계를 흔들었던 카다피가 통치하던 나라다.
카다피 제거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10년 가까이 내전 중인 혼란과 고통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시에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했던북아프리카 최대의 유전 강국이다.
이처럼 로마시대 역사와 현대사의 파란만장한질곡의 중심에 수도 트리폴리가 있다.
리비아의 모든 것을 압축해서 볼 수 있는 수도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으로 덮여 있는 가운데 가장비옥한 지역이기도 하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트리폴리 주변에 모여 살고,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리비아를 지탱하는 곡물 생산지가 형성돼 있다.
밀, 보리, 토마토, 컬리플라워, 대추야자, 아몬드, 올리브,
감귤 등이 리비아에 주어진 신의 선물이다.

리비아는 2011년까지만 해도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통치하는 독재국가였다. 나는 대학원 시절 카다피 혁명사상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1983년 트리폴리의 알파타대학에서 4시간에 걸친 카다피의 연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패기만만한 정열과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미국에 의해 오염된 정신과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를 설파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고 인민에 의한 인민의 직접 통치를 실현하는 ‘그린북(Green Book)’ 이론을 장황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전개했다. 당시 학생들은 열광했고, 트리폴리 시내 그린스퀘어(녹색 광장)를 중심으로 반미 구호와 시위의 함성이 날마다 하늘을 뒤덮었다.

2000년 가을 벵가지 교외 베이다의 한 병원 앞뜰에서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초췌해 보였고 연설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미국을 향한 독설은 조심스러워졌고, 리비아의 당면 과제에 대해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노선을 피력했다.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이라는 기다란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랍과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라는 고대 지명을 행정 구역상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놀랍다.

리비아의 나이든 세대는 사회주의 체제의 후유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사유 재산의 개념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족하고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하나라도 더 팔아보겠다고 억지 웃음과 친절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게 좋은 삶인지, 여행을 하다 보면 자주 고민하게 된다.

카다피와 함께 막을 내린 녹색의 시대

1969년 카다피의 혁명 이후 리비아는 녹색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 국기도 녹색이고 교복도 녹색이다. 원래 녹색은 이슬람의 상징색이지만, 카다피는 이슬람에 충실한 자신의 이념과, 사막을 녹색의 옥토로 바꾸겠다는 강한 신념에서 녹색을 리비아와 카다피의 상징색으로 삼았다. 그래서 트리폴리에서 모든 길은 그린스퀘어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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