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을 먼저 찾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그래야 원하는 곳을 마음껏 돌아볼 수 있고, 나머지 것들을 포기해도 덜 아쉽기 때문이다.
외관의 투박함과 내부의 화려함, 이것이 이슬람 건축의 기본적인 철학이다. 바깥은 속세이고, 내부는 천국인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문 하나를 경계로 두 세상이 만나고 단절된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샬리마르 정원은 그러한 이슬람 건축 정신의 상징과도 같다. 이 아름다운 정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라호르 박물관의 간다라관에서 압권은 ‘고행하는 불타상(Fasting Buddha)’이다. 간다라의 방 중앙에 전시된 고행상 앞에서 관람객은 충격과 전율에 빠져든다. 높이 약 80센티미터의 부처님 고행상은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고 혈관이 간신히 붙어 있는 모습이다. 극도의 고통을 극복한 뒤에 찾아오는 해탈과 열반의 미소는 평온함을 넘어 숙연한 자기성찰의 채찍으로 다가온다.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이토록 절절하게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타지마할을 만나러 가는 길
인도 전역에서 혹은 인도 바깥에서 타지마할이라는 인류 최고의 걸작을 만나기 위해 아그라행을 손꼽아 기다린다. 누구에게는 버킷 리스트이고, 누구에게는 사랑의 메카 순례일지도 모른다.
아그라는 타지마할의 도시다. 무굴 제국이 남긴 찬연한 인류 문화유산이다.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후예다. 티무르 제국의 마지막 왕자 바부르가 권력 투쟁에 패배한 뒤새로운 세상을 찾아 인도 북쪽으로 갔다. 바로 그 바부르 왕자가 무굴 제국의 창건자다. 이전 왕조들도 그러했지만, 무굴 제국은 토착문화와 융합하고종교 간 화해와 다른 가치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독특하고 창의적인 문화를 이룩했다. 이슬람의 가치와 티무르 제국이 남긴 페르시아 문명, 중앙아시아 튀르크인에게 물려받은 역동적인 유목 문화를힌두적 토양에 이식함으로써 문화의 용광로를 가동할 수 있었다. 수학·천문학·의학 분야는 물론, 건축 분야에서도타지마할로 대표되는 불멸의 문화를 꽃피웠다. 무굴 제국은 1857년 영국에 항복하고인도 아대륙에 잔혹한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었다. 1947년 마하트마 간디의 주도로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힌두 중심의 정치체제를 받아들였다. 한편 800년 이상 인도 아대륙의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았던북부의 이슬람 공동체는 동서 파키스탄으로 떨어져 나가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오랜 사회적 연결망과 삶의 기반을 포기할 수 없었던약 2억 명의 인도 본토 이슬람 공동체는 인도 서부를 중심으로지금도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그라는 수백 년 동안 이슬람 문화가 지배하던 곳인데 힌두교도들이 기득권을 내세우며 행패를 부린다"라며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과 방관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에어컨도 없이 4시간을 달린 버스는 긴 경적 소리와 함께 아그라에 도착했다. 그토록 그리던 꿈의 도시 아그라에.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
곧바로 야무나강 가의 타지마할로 갔다. 순백색 대리석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운 자태를 그저 멍하게 서서 몇 시간이고 보기만 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타지마할(‘왕궁의 왕관’이라는 뜻)은 샤 자한이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하며 예술적 정열과 국력을 쏟아 완성한 무덤 궁전이다.
두 사람은 열네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녀는 결국 출산 후유증으로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놀라운 기술력과 디테일에 경의를!
타지마할은 무굴 건축가 무함마드 이사와 바그다드의 세계적 돔 건축 기술자인 무함마드 샤리프의 지휘로 1632년에 착공해 약 22년 만인 1654년에 완성되었다. 약 2만 명의 노동력과 1000마리 이상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절대권력자의 사치와 집착으로 결국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났고, 샤 자한은 아들에 의해 폐위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타지마할의 디테일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타지마할은 알함브라 궁전을 참고하여 설계한 전형적인 페르시아-이슬람 건축 양식이기 때문이리라.
기원전 3000년경에 발달한 이집트 문명은 피라미드와스핑크스로 대표된다.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나일강 변의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세계 최고의 고대문명이 이집트에서 번성했다. 태양력과 측량술, 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던 이집트 문명은사방이 사막과 바다로 고립되어 있어 오랫동안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문명의 독자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5000년 전 고대문명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뿐이다"라는어느 고고학자의 고백을 떠올리며, 숙연한 마음으로카이로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겨울의 이른 새벽이었다. 짐을 풀고 고층 호텔의창문 커튼을 열어젖히자 시내 한가운데를 흘러가는나일강 위로 막 일출이 시작되었다. 이집트 문명은나일강의 선물이라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표현을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전 국토의 97퍼센트가 사막인이집트에서 나일강이 갖는 의미가피부로 느껴졌다.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고원에서 그리고 빅토리아 호수에서 아프리카 6000킬로미터를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르는 나일강이 그 하구에 만들어 놓은 마지막 선물 같은 곳이 카이로다. 카이로를 중심으로 피라미드 시대인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와 태양신 ‘라’ 신앙의 발상지인 헬리오폴리스가 펼쳐진다. 카이로 일대야말로 고대문명의 요람이요 ‘문화’라는 인류 최고의 산물을 본격적으로 일구어낸 실험장이었던 셈이다.
나는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첫 햇살이 스핑크스의 두 눈을 정확히 비추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스핑크스가 더이상 피라미드의 수호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피라미드보다 훨씬 먼저 세워진 스핑크스는 빛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 작품인 것이다.
해가 떠올라 피라미드 사이에 걸릴 때쯤이면 카이로는 금방 1000만 시민이 빚어내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한다. 길을 메운 사람들과 자동차, 왁자지껄한 소음과 경적, 남루한 가난, 세속에 찌들어 시간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카이로의 도시 문명을 피라미드는 그저 묵묵히 안타까운 듯 지켜보고 서 있다.
한 면의 길이가 250미터, 높이가 170미터인 돌 600만 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몇 센티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 완벽한 축조물 앞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인간의 지혜와 초월성이라는 숙제를 생각했다.
피라미드에는 강제 노역의 아픔이 서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압제를 뛰어넘는 인간의 위대한 생명력과 절대적 신앙이 배어 있음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태양신의 아들인 파라오를 신으로 섬기는 백성들의 믿음과 정성이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세운 원동력일 것이다. 그들에게 피라미드는 신전이었고, 그 속에 모신 파라오를 수호신으로 받듦으로써 불멸의 파라오와의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과학으로는 이 신비를 풀 수 없다"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 | 이희수 저
모처럼 맞이하는 관광객이라며 집주인 하산은 2500년이나 되었다는 미라를 보여주었다. 거의 완벽한 형체를 가진 조상을 이제는 불멸의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생계의 방편으로 집집마다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구경을 시켜주고 사진을 찍게 하고는 약간의 돈을 받아갔다.
미라 연구에 평생을 바친 프랑스 생화학자 모리스 뷔카이유는 한 강연회에서 미라 제작의 신비를 묻는 질문에 "인간의 지식과 과학으로는 이 신비를 풀 수 없다. 이것은 신의 작품임에 틀림없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신에 귀의하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이슬람 사람들은 고려 말에도 대거 한반도로 이주했는데, 그들을 회회(回回, 위구르인)라고 불렀다. 고려가사 <쌍화점>에 개경 한복판에서 회회아비(이슬람 사람)가 운영하는 만두가게가 나올 정도니 적지 않은 이슬람 이주자들이 고려사회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도시는 아프리카와 유럽, 오리엔트 여러 지역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튀르키예, 이라크,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불가리아에도 알렉산드리아가 있다. 아랍에서는 ‘이스칸다리야’, 튀르키예에서는 ‘이스켄데룬’, 그리스에서는 ‘알렉산드로폴리스’ 등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이 모든 중심은 이집트 지중해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다.
낙타가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것은 한번에 거의 100리터의 물을 마시고 200리터를 3개의 위에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500킬로그램의 짐을 싣고 400킬로미터를 걸어간다. 2킬로미터 밖에서 물 냄새를 맡고 정확하게 물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천부적인 후각을 갖고 있다. 콧구멍과 귓속에 난 털을 이용해 모래 먼지를 차단하는 놀라운 장치까지 갖고 있는 완벽한 사막의 배다.
알렉산드로스 왕의 돌연한 죽음으로 세계 제국의 꿈은 사라진다. 그는 결국 제국을 완성하지 못했다. 힘과 야망으로 거대한 땅을 정복만 했지, 그곳에 영속적인 문화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세계 역사는 그를 대왕으로 부르길 주저한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였을 뿐이다. 오리엔트의 정복지에 셀레우코스와 안티오코스 왕조가 들어서고 서서히 토착문화에 동화되어갈 때, 이 도시는 300년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가 이어간다.
리비아는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가장 아름다운해변을 갖고 있으며 로마시대 유적지를 품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20세기 역동의 시대, 혁명과 반미노선으로서방세계를 흔들었던 카다피가 통치하던 나라다. 카다피 제거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10년 가까이 내전 중인 혼란과 고통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시에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했던북아프리카 최대의 유전 강국이다. 이처럼 로마시대 역사와 현대사의 파란만장한질곡의 중심에 수도 트리폴리가 있다. 리비아의 모든 것을 압축해서 볼 수 있는 수도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으로 덮여 있는 가운데 가장비옥한 지역이기도 하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트리폴리 주변에 모여 살고,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리비아를 지탱하는 곡물 생산지가 형성돼 있다. 밀, 보리, 토마토, 컬리플라워, 대추야자, 아몬드, 올리브, 감귤 등이 리비아에 주어진 신의 선물이다.
리비아는 2011년까지만 해도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통치하는 독재국가였다. 나는 대학원 시절 카다피 혁명사상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1983년 트리폴리의 알파타대학에서 4시간에 걸친 카다피의 연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패기만만한 정열과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미국에 의해 오염된 정신과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를 설파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고 인민에 의한 인민의 직접 통치를 실현하는 ‘그린북(Green Book)’ 이론을 장황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전개했다. 당시 학생들은 열광했고, 트리폴리 시내 그린스퀘어(녹색 광장)를 중심으로 반미 구호와 시위의 함성이 날마다 하늘을 뒤덮었다.
2000년 가을 벵가지 교외 베이다의 한 병원 앞뜰에서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초췌해 보였고 연설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미국을 향한 독설은 조심스러워졌고, 리비아의 당면 과제에 대해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노선을 피력했다.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이라는 기다란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랍과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라는 고대 지명을 행정 구역상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놀랍다.
리비아의 나이든 세대는 사회주의 체제의 후유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사유 재산의 개념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족하고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하나라도 더 팔아보겠다고 억지 웃음과 친절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게 좋은 삶인지, 여행을 하다 보면 자주 고민하게 된다.
카다피와 함께 막을 내린 녹색의 시대
1969년 카다피의 혁명 이후 리비아는 녹색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 국기도 녹색이고 교복도 녹색이다. 원래 녹색은 이슬람의 상징색이지만, 카다피는 이슬람에 충실한 자신의 이념과, 사막을 녹색의 옥토로 바꾸겠다는 강한 신념에서 녹색을 리비아와 카다피의 상징색으로 삼았다. 그래서 트리폴리에서 모든 길은 그린스퀘어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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