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은 일찍부터 유럽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이식된 것은 물론이고 인도, 중국, 아랍계 이주민들의 디아스포라가 짧은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척의 배로 페낭을 점령한 영국

1786년 8월 11일 영국은 페낭을 점령했다. 사실상 네덜란드나 스페인, 포르투갈에 비하면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영국은 당시 페낭을 지배하던 끄다(Kedah)의 술탄과 협약을 맺었다.

다인종, 다종족 도시의 형성

열대우림이 우거진 미개척지였던 페낭에서 비교적 먼저 건설된 곳이 조지타운이다. 조지타운 건설 초기의 과제는 늪지대를 메우는 것이었다.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 영국 해협식민지 정부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계약노동자들을 투입했다. 여기에 유럽 아르메니아인까지 들어가 다인종, 다종족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고푸라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종다양한 신과 동물, 자연물을 조각하고 명도가 높은 색으로 화려하게 색칠을 했다. 어쩌면 밋밋한 조지타운 도시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을 신전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구나 쉽게 사원을 잘 찾아오라고 눈에 확 띄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호화찬란한 색은 역시 인도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스리 마하마리암만 사원의 고푸라 역시 페낭의 다문화적이고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

가톨릭이 처음 전해진 후 조정의 박해로 신학교를 개설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의 학생들도 페낭까지 와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페낭신학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양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12 1855년 이만돌, 김요한, 김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을 시작으로 1884년까지 여러 명의 신학생이 페낭에서 사제 교육을 받고 돌아갔으며, 이 중 12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페낭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으며, 교정에는 페낭신학교 교수였던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있다.

조지타운의 페낭교구박물관에는 박해를 받아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와 ‘황사영 백서’ 사본이 있다.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1775~1801)이 신유박해(1801)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적은 기록이다.13 지금은 페낭신학교의 옛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거니플라자와 거니파라곤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신학교의 일부였던 성요셉학교만 보존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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