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은 배낭여행으로, 중년층은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 동남아시아를 찾았다. 압도적으로 많이 찾는 곳은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이다. 베트남 하노이와 다낭, 태국 방콕도 상당히 인기 있는 관광지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남아시아를 찾는가?

유럽인들이 작물 재배를 위한 플랜테이션과 주석 광산 개발에 앞장서면서 일손이 달리자 19세기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노동 이주를 권장했다. 인구가 부족한 동남아시아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이때 데려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쿨리’라고 불리는데, 인도와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장 인구가 많은 것은 중국인 노동자였다.

도시야말로 동남아시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첫인상은 깨끗하다는 느낌이었다. 중국어나 영어 간판이 뒤섞여 있어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인상인데 왁자지껄한 활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싱가포르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시가, 홍콩처럼 적당히 무질서한 건물들. 어느 쪽도 아닌 도시, 믈라카를 그렇게 만났다.

싱아푸라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 일명 이스칸다르 샤(Iskandar Shah)가 1402년 믈라카를 거점으로 삼고 왕국을 세웠다. 이것이 비록 짧지만 영화로웠던 믈라카 왕국의 시작이다. 그가 믈라카를 택한 이유는 1년 내내 접근하기 쉽고, 폭이 좁은 믈라카 해협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환관 정화를 통해 파라메스와라는 명나라와 성공적인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그가 노린 것은 명의 비호를 받아 믈라카를 넘보던 시암(지금의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있던 나라 마자파힛 왕국을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믈라카는 공식적으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번국이 되었고, 이는 믈라카가 중국과 인도, 아랍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의 거점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상교역의 강자로 등장한 신흥 왕국

1405년 명나라 환관 정화가 함대를 이끌고 와서 비석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믈라카는 시암에 종속된 변두리 항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화는 믈라카가 일개 항구가 아니라 분명한 나라임을 밝히는 비석을 세웠고, 파라메스와라에게 믈라카를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믈라카는 계절풍이 시작되고 끝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오가는 선박들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리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아마도 이러한 입지 조건도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해상교역에서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 열강의 진출과 믈라카 왕국의 운명

하지만 국제 교역 항으로서 믈라카 왕국의 영화는 길지 않았다. 믈라카가 차지하는 지리적 이점을 눈여겨본 포르투갈의 침입이 치명타였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협상했고 1824년에 영란조약을 맺었다. 이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망해서 국가가 그 빚을 떠안게 되어 재정적으로도 휘청거리던 참이었다. 두 나라는 가신들이 점유하고 있던 식민지를 맞바꾸는 데 동의했다. 싱가포르 해협을 기준으로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는 영국령, 인도네시아 쪽은 네덜란드령이 되었다. 믈라카는 영국령이 되었다.

바다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절,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많은 나라가 눈독을 들였던 믈라카. 바로 그 위치 때문에 부를 축적했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게 재앙이 되기도 했다. 열강들이 함대를 이끌고 와서 믈라카 쟁탈전을 벌였으니 말이다. 그 덕분에 복합적인 다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을 갖게 되었고 유명한 관광지가 되기도 했으니, 새옹지마란 말이 여기에도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겠다.

페낭은 동남아시아 여느 도시와는 어딘지 조금 다른 분위기를 지닌 곳으로 1990년대 후반 한국인의 신혼여행지로 제법 인기가 많았다. 일찍이 유럽인들은 페낭을 아시아의 진주 또는 인도양의 에메랄드라고 불렀다. 그만큼 서구에는 전근대부터 알려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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