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문장에서 영어 단어들은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등 이슬람에서 만들어진 용어이거나 적어도 이슬람권에서 맨 먼저 시작되어 유럽에 전해진 산물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동과 이슬람 세계를 ‘건설, 석유, 테러’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만 바라본다. 언제까지 이런 단편적인 시선으로 이슬람 세계를 대할 것인가? 이제는 우리가 갖고 있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슬람 세계의 예술과 역사, 인문학적 가치와 세계관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어야 지구촌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문화권과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다.
온전한 인류 역사를 복원하고 보편적인 역사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서양 중심의 역사에서 잘려 나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같은 고대 문명을 제대로 재해석하고 편견과 오류로 뒤덮인 이슬람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
생활 종교로 뿌리내린 이슬람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를 믿는 종교다. 알라로 불리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절대자이고, 유일하고, 우주 삼라만상을 만든 창조주’다. 따라서 알라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다를 수 없는 존재다.
이슬람에서는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서》에 기록된 많은 선지자들을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하고 추앙한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에 신이 보낸 마지막 인간 예언자로서, 앞선 복음을 완성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본다. 즉, 이슬람교는 신 앞에 만민이 평등하고,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두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흔히 이슬람을 폐쇄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는데, 당시만 해도 다른 종교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배척한 쪽은 서구의 기독교였지 이슬람 사회가 아니었다.
무함마드는 결혼 후 여유로운 환경에서 그동안 품어 오던 사회적 악습과 모순에 대해 고뇌하면서 명상을 시작했다. 40세가 되던 610년, 드디어 메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았다. 알라가 글자와 학문에 무지한 무함마드를 선택해 22년에 걸쳐 내려 준 계시는 《꾸란》으로 집대성되었다.
첫째, 무함마드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죽을 때 아내에게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라 이르고, 정리한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둘째,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혈통보다는 능력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셋째, 무함마드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결단코 신이 되기를 거부했다.
"무함마드를 섬기고 경배하지 말라. 그는 죽어 없어졌다. 하느님을 섬기고 복종하라. 그분은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넷째, 무함마드는 적에게 관용을 베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낮춤의 자세를 보였다.
다섯째, 그는 종교적 열정과 온화함을 조화롭게 행동으로 보인 지도자였다. 나아가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 막아 내는 불굴의 정치 지도자였다.
여섯째, 그는 여성에 대한 지위와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꾼 이슬람의 페미니스트였다. 여성이 노예로 매매되고 남성의 장식물로 여겨지던 시대에 여성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하라고 명했으며 여성에 대한 상속을 법률로 규정했다.
무함마드는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모든 것을 비우고 돌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죽음을 맞았다. 보통 사람으로 태어났고, 결코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죽음 뒤의 신비도 갖추지 못했다. 철저히 인간으로 남은 그의 생애야말로 일반 무슬림의 마음속에 영원한 지도자로 살아남은 진정한 배경이 아닐까?
공동체의 발전과 여성들의 생존을 위해 일부다처제가 상당한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때 무함마드는 전쟁 중에 죽은 동료들의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미망인들과 차례로 결혼했고, 그들의 자식을 보살폈다. 이러한 무함마드의 정신은 그가 많은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는 ‘파티마’라는 외동딸 하나만 둔 사실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나는 존재한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이슬람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 주는 말이다. 개인주의가 널리 퍼진 서구 사회와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삶의 특징이다.
이슬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슬람의 네 가지 해악을 주장했다. 이슬람은 진리를 왜곡했고, 폭력과 전쟁의 종교이며, 무분별한 성적 접촉을 허용하는 종교이며, 무함마드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이다. 그의 이슬람에 대한 견해는 그 후 유럽 지성 사회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서구 사회가 이슬람을 오해하고 적대감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악의적인 말을 만든 것도 바로 그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전역을 휩쓴 이슬람 열풍을 막고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당대 최고의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만들어 놓은 적의감 가득한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이슬람 사회가 발전하고 다양성을 갖게 된 것은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문화적 관용의 결과였다. 무슬림은 이교도의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보장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리던 시절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라고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비무슬림을 일컫는 법률적 용어로, 기독교도, 유대인, 동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도를 의미했다.
그래서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할둔1322~1406은 "지중해는 유럽인들이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라고 호기롭게 말할 정도였다.
안달루시아 문화가 그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민족이 상호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과 언어를 접하고, 서로 적대시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조화롭게 공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슬람의 정신이 최고조에 달한 술레이만 시대에 들어 기독교 성화는 회칠로 살짝 가려졌다. 하지만 쪼아 없애지 않은 덕에 오늘날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가 지켜볼 수 있다. 제국을 경영해 본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문화에 대한 아량과 포용의 결과물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인류의 무지를 일깨워 준다. 공존을 모색하기보다는 자기 가치만 고집한 채 상대의 가치를 무너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일신교도의 오만함과 반문명적 발상에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문화의 다양성을 배우고, 종교 다원주의를 실천한 인류의 학습장이다. 이곳을 문명의 공존과 협력의 산실로 길이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2020년 7월 튀르키예 정부는 이런 오랜 공존의 관례를 깨고,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모스크로 사용하는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인류 사회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유대인 공동체가 상권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무슬림의 라마단 단식도 지킨다. 단식을 하는 이유를 묻자, "주 고객인 무슬림들이 종교적 신념을 위해 힘들게 단식하고 있는데, 내가 배불리 먹으면서 그들을 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종교와 문화가 이처럼 조화롭고 아름답게 섞여 있는 곳을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소수 민족과 이교도에 대해 기본적으로 완전한 자치와 전통적인 종교 문화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만 제국 안에서 기독교, 유대인,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종교적 자유와 전통 관습을 법적으로 보호받았다.
자신과 다른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자신과 다르더라도 옳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이슬람 본래의 정신이 튀르키예에 살아 있다. 이슬람이 가야 할 길을 모범적으로 실천하며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서구와 협력하고 공존을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정신이야말로 낙후된 이슬람 세계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중세 최고 학문의 전당: 지혜의 집(바이트 알히크마) 8세기 중반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압바스 제국은 아랍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이란, 인도 문화를 흡수해 독창적인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정복한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여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로 일군 것이다.
소주는 아랍의 알코올 증류 기술로 만들어진 술이다. 이후 소주는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는데, 우리나라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들어왔다. 소주를 아랍어로 ‘알아락’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고려 말에 소주가 도입되었을 때 ‘알라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증류 기술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용어까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실을 맺은 아랍 학문이 서양에 전파됨으로써 서양 문명은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1,000년이라는 긴 중세의 암흑기 동안 유럽에는 오로지 신의 목소리만 존재하고,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의 합리성은 여지없이 매장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서양 근대 과학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슬람 과학은 인류에게, 특히 서양 문명에 과학이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 시대는 화려하게 문을 열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는 신학과 과학이 갖는 상호 모순된 문제점을 회피하지 않고 치열한 논쟁을 거쳤으며, 몇몇 뛰어난 칼리프의 지원을 통해 종교적 해석에 이성과 과학이라는 선물을 허용했다. 신성과 세속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오랜 고뇌 끝에 ‘과학 연구는 종교적 의무’라는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마련해 주었다.
이슬람이라는 용광로에 녹여 자기화하는 특유의 융화력을 발휘했다. 융화력과 포용 정신은 이슬람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다른 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포용 정신은 이슬람 문화의 발전과 성장을 가져다 준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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