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원성왕릉의 문인석상은 중앙아시아 위구르인의 모습인 데 반해, 무인석상은 페르시아계 무슬림 군인의 모습이다.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토용의 모습에서도 페르시아계나 튀르크계 서역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페르시아 왕자의 신라 진출을 전해 주는 고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의 발굴과 연구는 신라 사회의 대외 접촉사에 새로운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고려에 거주하던 회회인들은 왕실과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적 활동으로 부를 축적해 갔으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개경에 가게를 차리고 장사도 했다.

대표적인 고려 가사 <쌍화점>에 보면 ‘회회 아비’가 등장하는데, 이는 이슬람 상인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쌍화’는 지금도 위구르 지역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즐겨 먹는 만두의 하나인 ‘삼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1427년 세종의 외국 문화 배척 칙령으로 이방인들에게 빠른 동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국가적 이념으로 받아들인 신유교주의가 강조되면서 세계관의 초점은 온통 중국이었다.

그 결과 이즈음 이슬람권을 평정하고 새롭게 세계의 강자로 떠오르던 오스만 제국과, 그들과 경쟁하며 힘을 키워 가던 유럽의 변화를 읽을 수가 없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놓친 잘못은 훗날 참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무엇보다 오스만 제국의 튤립이 유럽으로 이식된 것은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튤립은 오스만 제국 황실의 꽃이 되면서 모자이크, 타일, 옷, 장식에 쓰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 튤립의 알뿌리가 이스탄불에 파견되어 있던 비엔나 대사에 의해 1554년 비엔나로 건너갔다. 그 뒤 1591년 네덜란드에서 재배에 성공하면서 대단한 인기 품목이 되었다.

1554년 세계 최초의 카페인 ‘차이하네’가 이스탄불에서 문을 열었다. 16세기는 오스만 제국이 가장 활력에 넘치던 시대였으며,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수도 이스탄불에는 600개가 넘는 카페가 있었다. 화려한 카페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카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담론을 나누는 공간이 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설계하는 혁명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좋은 예가 1789년 7월 13일, 파리의 ‘카페 드 포이’에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미국 커피의 중심 도시는 시애틀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와 보잉사를 중심으로 화이트칼라가 주도하는 첨단 산업의 메카 시애틀에서 미국 3대 커피 브랜드인 스타벅스, 시애틀 베스트, 툴리스가 탄생했고, 이제 커피는 세련된 서구 문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나마 하나의 위안은 아직도 전통과 역사를 이야기할 때 튀르키예 커피가 빠질 수 없는 아랍의 정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쿠쉬나메》의 신라 부분은 2014년 1월 우리말로 출판되었고, 필사본 전체도 완역되어 2022년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인생은 유한하고, 하늘의 도는 바꿀 수 없다. 선을 행하고, 거짓과 절도, 기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 살인은 대역죄이다. 그러나 전쟁에 나가 적을 무찌르고 전사하는 자는 큰 보상을 받으리라."

탈라스 전투는 13세기 몽골 제국이 건설되어 동서 문화 교류가 속도를 더하기 전까지, 서아시아 이슬람 문화와 동아시아 유교, 불교문화의 상호 교류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아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동아시아 문화와 아랍-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문화권이 적극적으로 교류한 결과 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셀주크의 승리가 주는 의미는 튀르크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튀르크족의 역사가 아나톨리아에서 새롭게 시작되어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비잔틴의 핵심 지역이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게 됨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약진과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완패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는 영원히 튀르키예의 차지가 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 셀주크 튀르크는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유럽 기독교 세계의 공포를 더욱 커지게 했다. 이는 유럽 교황청에서 성지 탈환을 주장하며 십자군 전쟁을 독려하는 빌미가 되었다.

결국 국가의 안전과 미래는 누구도 대신 지켜 줄 수 없다는 역사의 처절한 교훈을 되새기게 된다.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알려진 비밀협정1915년으로 전쟁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 주었다. 이에 따라 아랍 민족들은 얼마 전까지 지하드의 대상이던 영국을 위해 형제 나라인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종교적 신념마저 버리는 운명적 선택을 했지만, 영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합의했고, 급기야 2,000년간 아랍인들이 살아온 땅을 유대인에게 넘겨 버렸다.

"미국은 아랍 석유의 판매를 대행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그 수익을 도둑질하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석유 1배럴이 팔릴 때마다 미국은 135달러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중동이 도둑맞은 금액은 하루에 40억 5,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둑질이다.

이런 대규모 사기에 대해 세계의 12억 무슬림은 1인당 3,000만 달러를 보상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로레타 나폴레오니, 《모던 지하드》,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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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에서 출발한 이슬람은 주변 문화를 수용하고 발전하면서 가장 동쪽에 가서 꽃을 피웠다. 그 금자탑이 17세기 무굴제국 시대에 세워진 인도의 타지마할이다. 반면 방향을 바꾸어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문화, 에스파냐의 가톨릭 문화를 집대성해 가장 서쪽 끝에서 빛을 발한 작품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이다.

삶의 중심, 모스크
모스크는 이슬람 사원을 말한다. 아랍어로는 마스지드, ‘엎드려 예배드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스지드가 이슬람이 지배하던 에스파냐에서 ‘메스키따’로 불렸고, 이 말에서 영어 ‘모스크’가 나왔다.

무아진이 미나레트 꼭대기에서 매일 다섯 차례 낭랑한 목소리로 아잔을 외친다. "신은 위대하다. 우리 모두 예배를 보러 올지니. 알라만이 유일하시고 다른 어떤 신도 없나니, 무함마드는 그분의 예언자임을 증언하나이다."

아라베스크 무늬의 신비
모스크 안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대신 꽃과 나무를 상징하는 무늬와 하느님의 말씀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한 아랍어로 예술성을 표현했다. 이것을 ‘아라베스크’라 한다. 천장은 프레스코화로, 벽면은 푸른빛이 도는 타일로, 바닥은 온갖 색감과 형태를 가진 아라베스크 무늬의 카펫으로 꾸며 놓았다.

아라베스크는 반복과 대칭이 특징이며, 《꾸란》 구절을 아랍어 서체로 꾸며 장식한다. 모든 예술은 결국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과 대칭 구도 자체가 바로 오묘한 신의 예술이다.

무용에서는 고전 발레 자세의 하나로, 한 발로 서서 한 손은 앞으로 뻗고 다른 한 손과 다리는 뒤로 뻗은 자세를 아라베스크라고 한다.

이슬람 건축의 최고봉, 알함브라 궁전
많은 건축가들은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예술 건축물로 동양의 타지마할과 서양의 알함브라 궁전을 꼽는다. 둘 다 이슬람 건축물이다. 알함브라의 매력과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가장 높은 벨라 탑에 오르면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마을은 무척이나 환상적이다. 새하얀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터를 잡고 있는 이곳이 바로 그라나다의 정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이슬람 마을 알바이신이다.

카를 5세가 이 궁전을 싫어하거나 파괴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알함브라 예찬론자였다. "알함브라를 잃은 자여, 불쌍하도다. 알함브라를 버리는 삶을 택하느니 차라리 알함브라를 내 무덤으로 삼을 테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알함브라 궁전에 강한 애착을 보였고, 보압딜의 결정을 안타까워했다.

붉은 석양이 유난히 낮게 깔린 어느 날, 그라나다의 어느 무명 시인은 보압딜의 항복을 두고 목 놓아 울었다.

불운한 왕이여!

죽을 용기가 없어 그라나다를 떠나는 못난 왕이여!

남아 있는 인생이 무어 그리 대단할진대

그까짓 왕관 하나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라나다를 떠나 가느뇨.

유럽인들의 화려한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중세의 긴 암흑에서 유럽이 깨어나는 역사의 전환점이 마련된 셈이다. 그러나 소위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는 어디까지나 유럽인들에게 국한된 지극히 서구 중심적인 생각이고 역사 인식이었다.

10년이 지난 1990년 11월에는 오만 국왕의 개인 탐사선인 ‘풀크 알 살라마’가 유네스코의 해상 실크로드 조사를 위해 베니스에서 우리나라 부산항까지 고대 교역로를 따라 항해했다. 이 탐사에서 고대 항해로와 교역품, 해류나 항해술 조사를 통해 바다의 실크로드가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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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에서 영어 단어들은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등 이슬람에서 만들어진 용어이거나 적어도 이슬람권에서 맨 먼저 시작되어 유럽에 전해진 산물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동과 이슬람 세계를 ‘건설, 석유, 테러’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만 바라본다. 언제까지 이런 단편적인 시선으로 이슬람 세계를 대할 것인가? 이제는 우리가 갖고 있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이슬람 세계의 예술과 역사, 인문학적 가치와 세계관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어야 지구촌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문화권과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다.

온전한 인류 역사를 복원하고 보편적인 역사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서양 중심의 역사에서 잘려 나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같은 고대 문명을 제대로 재해석하고 편견과 오류로 뒤덮인 이슬람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

생활 종교로 뿌리내린 이슬람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를 믿는 종교다. 알라로 불리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절대자이고, 유일하고, 우주 삼라만상을 만든 창조주’다. 따라서 알라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다를 수 없는 존재다.

이슬람에서는 아담에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서》에 기록된 많은 선지자들을 시대적 임무를 띤 훌륭한 인간 예언자로 인정하고 추앙한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에 신이 보낸 마지막 인간 예언자로서, 앞선 복음을 완성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본다. 즉, 이슬람교는 신 앞에 만민이 평등하고,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두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흔히 이슬람을 폐쇄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는데, 당시만 해도 다른 종교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배척한 쪽은 서구의 기독교였지 이슬람 사회가 아니었다.

무함마드는 결혼 후 여유로운 환경에서 그동안 품어 오던 사회적 악습과 모순에 대해 고뇌하면서 명상을 시작했다. 40세가 되던 610년, 드디어 메카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았다. 알라가 글자와 학문에 무지한 무함마드를 선택해 22년에 걸쳐 내려 준 계시는 《꾸란》으로 집대성되었다.

첫째, 무함마드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죽을 때 아내에게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라 이르고, 정리한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둘째,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혈통보다는 능력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셋째, 무함마드는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어떠한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결단코 신이 되기를 거부했다.

"무함마드를 섬기고 경배하지 말라. 그는 죽어 없어졌다. 하느님을 섬기고 복종하라. 그분은 영원히 살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넷째, 무함마드는 적에게 관용을 베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낮춤의 자세를 보였다.

다섯째, 그는 종교적 열정과 온화함을 조화롭게 행동으로 보인 지도자였다. 나아가 모든 어려움을 앞장서 막아 내는 불굴의 정치 지도자였다.

여섯째, 그는 여성에 대한 지위와 인식을 혁명적으로 바꾼 이슬람의 페미니스트였다. 여성이 노예로 매매되고 남성의 장식물로 여겨지던 시대에 여성을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하라고 명했으며 여성에 대한 상속을 법률로 규정했다.

무함마드는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모든 것을 비우고 돌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죽음을 맞았다. 보통 사람으로 태어났고, 결코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았으며, 죽음 뒤의 신비도 갖추지 못했다. 철저히 인간으로 남은 그의 생애야말로 일반 무슬림의 마음속에 영원한 지도자로 살아남은 진정한 배경이 아닐까?

공동체의 발전과 여성들의 생존을 위해 일부다처제가 상당한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때 무함마드는 전쟁 중에 죽은 동료들의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미망인들과 차례로 결혼했고, 그들의 자식을 보살폈다. 이러한 무함마드의 정신은 그가 많은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는 ‘파티마’라는 외동딸 하나만 둔 사실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나는 존재한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이슬람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 주는 말이다. 개인주의가 널리 퍼진 서구 사회와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삶의 특징이다.

이슬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슬람의 네 가지 해악을 주장했다. 이슬람은 진리를 왜곡했고, 폭력과 전쟁의 종교이며, 무분별한 성적 접촉을 허용하는 종교이며, 무함마드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이다. 그의 이슬람에 대한 견해는 그 후 유럽 지성 사회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서구 사회가 이슬람을 오해하고 적대감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악의적인 말을 만든 것도 바로 그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전역을 휩쓴 이슬람 열풍을 막고 기독교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당대 최고의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만들어 놓은 적의감 가득한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이슬람 사회가 발전하고 다양성을 갖게 된 것은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문화적 관용의 결과였다. 무슬림은 이교도의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 생활을 보장했다. 전쟁에서 패하면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자들은 노예로 팔리던 시절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라고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 비무슬림을 일컫는 법률적 용어로, 기독교도, 유대인, 동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도를 의미했다.

그래서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할둔1322~1406은 "지중해는 유럽인들이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라고 호기롭게 말할 정도였다.

안달루시아 문화가 그토록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민족이 상호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과 언어를 접하고, 서로 적대시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조화롭게 공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슬람의 정신이 최고조에 달한 술레이만 시대에 들어 기독교 성화는 회칠로 살짝 가려졌다. 하지만 쪼아 없애지 않은 덕에 오늘날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가 지켜볼 수 있다. 제국을 경영해 본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문화에 대한 아량과 포용의 결과물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인류의 무지를 일깨워 준다. 공존을 모색하기보다는 자기 가치만 고집한 채 상대의 가치를 무너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일신교도의 오만함과 반문명적 발상에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문화의 다양성을 배우고, 종교 다원주의를 실천한 인류의 학습장이다. 이곳을 문명의 공존과 협력의 산실로 길이 기억하고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 소피아 성당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2020년 7월 튀르키예 정부는 이런 오랜 공존의 관례를 깨고,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모스크로 사용하는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인류 사회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유대인 공동체가 상권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무슬림의 라마단 단식도 지킨다. 단식을 하는 이유를 묻자, "주 고객인 무슬림들이 종교적 신념을 위해 힘들게 단식하고 있는데, 내가 배불리 먹으면서 그들을 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라고 대답했다. 다른 종교와 문화가 이처럼 조화롭고 아름답게 섞여 있는 곳을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소수 민족과 이교도에 대해 기본적으로 완전한 자치와 전통적인 종교 문화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만 제국 안에서 기독교, 유대인, 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종교적 자유와 전통 관습을 법적으로 보호받았다.

자신과 다른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자신과 다르더라도 옳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이슬람 본래의 정신이 튀르키예에 살아 있다. 이슬람이 가야 할 길을 모범적으로 실천하며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서구와 협력하고 공존을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정신이야말로 낙후된 이슬람 세계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중세 최고 학문의 전당: 지혜의 집(바이트 알히크마)
8세기 중반 세 대륙에 걸쳐 형성된 압바스 제국은 아랍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이란, 인도 문화를 흡수해 독창적인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정복한 지역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여 국제적이고 종합적인 문화로 일군 것이다.

소주는 아랍의 알코올 증류 기술로 만들어진 술이다. 이후 소주는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졌는데, 우리나라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들어왔다. 소주를 아랍어로 ‘알아락’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고려 말에 소주가 도입되었을 때 ‘알라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증류 기술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용어까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실을 맺은 아랍 학문이 서양에 전파됨으로써 서양 문명은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다. 1,000년이라는 긴 중세의 암흑기 동안 유럽에는 오로지 신의 목소리만 존재하고,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의 합리성은 여지없이 매장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날의 서양 근대 과학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슬람 과학은 인류에게, 특히 서양 문명에 과학이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 시대는 화려하게 문을 열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는 신학과 과학이 갖는 상호 모순된 문제점을 회피하지 않고 치열한 논쟁을 거쳤으며, 몇몇 뛰어난 칼리프의 지원을 통해 종교적 해석에 이성과 과학이라는 선물을 허용했다. 신성과 세속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오랜 고뇌 끝에 ‘과학 연구는 종교적 의무’라는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마련해 주었다.

이슬람이라는 용광로에 녹여 자기화하는 특유의 융화력을 발휘했다. 융화력과 포용 정신은 이슬람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다른 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포용 정신은 이슬람 문화의 발전과 성장을 가져다 준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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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개장한 게오르그 카스텐슨은, "사람들이 즐겁게 놀 때 정치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왕의 허락을 얻었다. 정치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민들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할 궁리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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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프랑스혁명에 빚지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개선문을 바라보며 우리는 프랑스혁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헤아려보았다. 그 혁명이 어찌 프랑스 시민만의 것이겠는가. 인류 모두가 그 혜택을 입었다. 프랑스혁명이 있었기에 후세는 공화국의 가치를 알았다. 자유와 평등이란 지표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통념을 부정한다. 베를린의 본래 뜻은 ‘습기가 많은 땅’이었단다. 이 도시를 적시는 풍부한 강물과 근교의 크고 작은 호수로 인하여, 이곳은 오래전부터 습지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졌다 해도, 시민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 베를린은 곰의 도시가 맞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이 도시 한복판에는 파리 광장이 있다. 1814년 프로이센 군대는 연합군의 일부로서 파리를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영원히 물러났다. 이를 기념하여 베를린 도심에 파리 광장이란 지명이 생겼다. 그 이전에는 지형이 사각형이었기 때문에 ‘피어에크’(사각형)라고 했다. 바로 그곳에 브란덴부르크 문이 나를 보란 듯 버티고 서 있다.

상수시 궁전에서 게오르크와 나는 비스마르크 수상을 떠올렸다. 그는 빌헬름 1세 때의 명재상이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연달아 격파했고, 급기야는 독일제국을 건설한 으뜸가는 공신이었다. 그는 재상으로 취임할 당시, ‘오직 철(무기)과 피(전쟁)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해 ‘철혈재상’이란 별명을 얻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전형적인 군국주의자였다.

그때 비스마르크는 예언하였다. ‘만약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내가 퇴임한 지 15년쯤 뒤에 독일제국이 파멸할 것이다.’ 그가 해임된 것은 1890년이었고, 독일제국이 파산한 것은 1918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천만 명의 전사자와 2천만 명의 부상자를 낸 채 끝났으나,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은 형언할 수 없이 처참하였다.

1942년 1월 20일에는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숫가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나치 친위대의 별장에서 열린 그 회의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이 구체적으로 계획되었다. 이후 유럽에서는 오직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60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히틀러의 인종청소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과거 유럽 역사에서 반유대주의 광풍이 간헐적으로 되풀이되었으나, 마침내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현재 독일은 순항 중인 것 같다. 역사상 오랜 숙적이던 프랑스와도 관계 개선에 성공했다. 두 나라는 힘을 합쳐 유럽통합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 길은 험하고 아득히 멀다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초유의 역사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평화와 공존을 향한 노력이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성 평등 지수(GDI)가 가장 높은 곳은 어디일까. 덴마크이다(2019년 현재). 그럼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역시 덴마크이다.

그들은 세상의 아이들이 더없이 좋아하는 레고(LEGO)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잘 만들어도 부자 나라가 될 수 있다!

공원을 개장한 게오르그 카스텐슨은, "사람들이 즐겁게 놀 때 정치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왕의 허락을 얻었다. 정치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민들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할 궁리에 여념이 없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가 다음과 같은 말로 덴마크 사람들을 고무 격려했단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노란 별을 가슴에 붙이라고 명령한다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노란 별을 달 것이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발한 반격인가.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어린이만을 위해서 동화를 창작한 것도 아니었다. "어린이는 내 이야기를 피상적으로 읽는다. 성숙한 어른이라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까마득한 옛날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에 세관이 있었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독일을 하나로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취리히라는 도시의 이름이 세관을 뜻하는 라틴어(Turicum)에서 유래했다니 신기하다.

모스크바는 날씨도 빈부 차이도 극단적이다. 이곳에는 1천 200만(2019년 현재) 명의 시민이 거주한다. 일부는 서구적 가치를 내면화했다고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가 ‘모스코비치’(모스크바 사람)의 가슴을 지배한다.

도시 분위기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었다.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들의 독특한 생활 감정을 피부로 느꼈다. 차르(황제)와 보야르(고위 귀족)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크렘린이 역사의 주된 무대가 된 것은 13세기였다. 모스크바 공국의 창건자 유리 돌 고루키가 이곳에 목책을 둘러 요새를 구축했었다. ‘성채(城砦)’ 또는 ‘성벽(城壁)’을 뜻하는 러시아어가 크렘린이다.

알래스카를 잃었음에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다. 그들에게 시베리아는 유형지였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그러했다. 레닌도 스탈린도 시베리아 유형을 직접 체험하였다. 지금은 그곳이 천연자원의 보고로서 사랑받고 있으나, 한때는 저주받은 자들의 땅이었다.

박물관 앞에는 푸시킨 부부 동상이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나 손을 마주 잡지는 않은 모습이다. 그 두 사람의 손을 함께 잡으면 영원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청춘 남녀들은 부부의 손끝을 쥔다. 시인 부부의 손끝이 매끈하게 닳아 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레닌의 후계자는 스탈린이었다. 그 역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망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는 레닌의 뒤를 이어 차르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스탈린이란 말은 ‘강철 사나이’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였다. 신앙심이 강했던 모친의 영향으로,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그를 혁명가로 만들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는 헤어나기 어려운 혼란에 빠져 있었고, 혁명의 기운이 움텄다. 스탈린은 권력을 손에 쥐자 산업화를 서둘렀다. 계획경제를 신봉했기 때문에, 그는 5개년 계획을 세웠다. 3차에 걸친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각 방면에서 초유의 속도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업은 겉만 번지레하였다. 실제로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는 최악의 독재자였다. 끝없이 자신을 우상화하고, 죽을 때까지 공포정치를 펼쳤다. 불행히도, 그를 모방한 독재자들이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에 등장했다. 루마니아의 차우체스크를 비롯해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북한의 김일성도 스탈린의 분신이었다.

국경 도시의 비운
처음부터 이 도시는 국제적인 교통의 요지였다. 인구는 고작 30만 명(2019년)이지만 이곳을 독일어로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라고 한다. 로마 시대부터 그렇게 불렀다. ‘스트라스(stras)’는 큰길이란 뜻이요, ‘부르(bourg)’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가리킨다. 즉 한길에 자리한 성곽도시였다. 수백 년 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는 훈족의 지배 아래 신음하였다. 5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그 후로는 줄곧 독일 영토였다.

스트라스부르는 중세부터 문학의 중심지로도 호평을 받았고, 출판업의 전통도 깊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금속활자로 이름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오늘날 구시가지에는 구텐베르크 광장이 있고, 그의 동상이 있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하였다. 16세기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출판업의 중심지였다.

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의 진실
스트라스부르의 운명은 기구했다. 19세기 후반, 근대화에 성공한 프로이센(독일)이 팽창전략을 펼쳐 옛 땅을 회복하였다(1870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 무렵 알자스의 민심은 어땠을까. 프랑스 애국 시민의 관점에서 쓴 문학작품 하나가 있다. 『마지막 수업』이란 단편소설로, 알퐁스 도데가 1871년에 발표한 인기 소설이다. 이 소설은 국토 상실이라는 첨예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나도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소설을 읽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새롭다.

모국어를 상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이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이 애국심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해, 그 시절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의 모국어는 아직도 독일어였다. 그들은 심한 사투리를 사용하였고, 지금도 큰 차이가 없다. 도데의 소설이 묘사한 애국심은 너무 과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스트라스부르는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독일 쪽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또다시 독일군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프랑스로 국적이 또 바뀌었다. 1869년부터 1946년까지 스트라스부르 시민의 국적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혼란의 연속이었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점차 강화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학은 자본주의의 하급 간부를 육성하는 공장이 되고 말았다. 지식인들이 이를 묵인하는 슬픈 현실이다."

당시 유럽 대학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한 다음, 공저자들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대학생들은 오직 사회 전체에 대한 처절한 저항을 통해서만 자신들이 당면한 소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은 제아무리 훌륭한 문명을 건설한다 해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다. 만약 이 사실을 망각하면 큰 재앙이 올 뿐이다. 자연 앞에 오만한 도시는 결코 오랫동안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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