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에게는 농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였다. 차마 웃지 못할 것이 그린란드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사실 그 섬에는 녹색의 초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농경에 대한 꿈을 지닌 이주민을 많이 모으려고,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비겁한 속임수라고 비웃기에는 바이킹의 소망이 너무도 절실했다.

뿔 달린 투구 쓴 바이킹은 없었다

바이킹의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동서남북으로 전개된 침략 활동이었다. 그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해안을 습격하여 값진 보물을 약탈했다. 나중에는 이탈리아까지 쳐들어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상당수의 포로를 노예시장에 내다팔았다.

잔인한 약탈자로만 알려진 바이킹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진정한 평화를 추구했다. 또, 바이킹의 대부분은 전사가 아니라 어부와 농부였다. 바이킹 사회에는 본래 솜씨가 탁월한 금은세공업자도 많았다. 해적질에 종사한 바이킹은 부족장 휘하의 몇몇 용사들뿐이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생각난다. 유럽의 주요 도시를 하나로 이어주는 호화로운 철도여행 중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명탐정 이야기다. 소설의 무대인 오리엔트 특급은 실제로 존재했다. 1889년 6월 1일, 첫 번째 특급열차가 파리를 떠나 이스탄불로 향했다. 1977년 5월 19일까지 이스탄불은 이 노선의 동쪽 종착점이었다. 이후 비행기가 여행 산업의 주류로 떠올랐고, 오리엔트 특급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승객이 계속해서 줄어든 결과, 2009년 12월에 결국 노선 자체가 폐지되었다.

실크로드가 있었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융성은 실크로드(비단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이 무역로의 서쪽에는 여러 도시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실크로드의 가장 서쪽에 버티고 있었다.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바스라와 바그다드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진 고대의 교역로를 연구하다가 주된 교역상품이 중국산 비단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그래서 독일어로 ‘자이덴 슈트라쎄(Seiden Straße)’, 곧 ‘비단길’이라 이름 지었다.

비단길은 한국과 일본은 물론 베트남이나 타이 등 유럽과 중동 및 아시아의 많은 나라를 직접 간접으로 이어주었다.

다시 400년이 흐른 15세기 중반 동로마제국이 명을 다했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소피아 대성당도 모스크로 변신하였다. 본래 기독교 신앙을 묘사한 모자이크는 회칠해서 감춰졌다. 대성당에는 새로 미흐랍(mihrab)과 미나레(minare)가 설치되었다. 전자는 메카를 향해 만든 우묵하고 둥근 모양의 예배실이요, 후자는 이슬람 사원 특유의 첨탑이다.

십자군, 콘스탄티노플의 보배를 약탈하다

3일간 원정대는 무려 은화 9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얻었다. 그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동방의 찬란한 기독교 도시가 이른바 십자군원정대의 말발굽 아래 처참하게 짓밟혔다. 기독교 국가가 십자군원정대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재앙은 쉬 끝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주변 여러 민족이 잇따라 침략을 감행했다. 가진 것이 많아도 지킬 힘이 부족하면 도리어 재앙만 거듭될 뿐이다.

1453년,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풍상을 이기고 아직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성벽 밑을 거닐었다. 산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을 추억했다. 군사전략에 빼어난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빼앗아 이슬람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삼고 싶어 했다.

메흐메트 2세가 거느린 7만 대군이 물밀 듯 밀려왔다. 헝가리 출신의 기술자 우르반은 원정대를 위해 초대형 청동 대포를 만들었다. 53일 동안 69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5만 발의 무거운 돌덩어리가 성벽을 연속해서 때렸다. 날마다 1천 발의 포탄이 쏟아지자 드디어 철옹성이 무너졌다. 성벽의 길이는 6킬로미터, 높이는 30미터였는데, 포탄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이스탄불은 여전히 대륙 간의 중요한 교차로이다. 지금도 러시아와 미국의 이익이 여기서 굉음을 내며 서로 충돌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양대 문화가 갈등을 벌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는 꾸준히 교섭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스탄불의 어제와 오늘이 뚜렷이 증명하는 바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에 가본 적이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나는 대성당의 장엄함에 감탄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광장 앞에 나섰을 때, 5월 한낮의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치 샤워라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폴레옹이 했다는 그 말을 떠올렸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희곡 가운데 하나가 『베니스의 상인』이다. 작중 인물 샤일록은 소문난 구두쇠였다. 냉혈한인 그는 부채를 제때 청산하지 못한 채무자 밧사니오의 심장을 꺼내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베니스의 상인들 가운데는 샤일록과 같은 수전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베니스 상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곳 상인들은 아프리카 황금을 두카트라는 금화로 만들어 유럽 금융시장을 거머쥐었다. 베니스 상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출한 사람들이었다. 비엔날레를 기획한 상인들은 다름 아닌 그 후예였다.

피난처에서 부유한 상업 도시로

상인들의 용기와 모험정신이 이 도시를 키웠다. 그들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왕정(王政)을 거부했다. 경제가 정치 권력에 종속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베니스 상인들은 공화국을 선택했고, 부유한 상인들이 집권해 과두정치로 도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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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누구라도 세계 곳곳에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다.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이 달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980년대만 해도 해외여행은 거의 모든 시민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우선 가고 싶은 도시를 선택하고, 여러 달 동안 그 도시와 나라의 역사를 자세히 공부한다. 마침내 목적하는 도시에 도착하면 열흘 이상 그곳에 한가로이 머문다.

여행자들은 대개 짧은 시간에 되도록 많은 명소를 둘러보려고 애쓴다. 다시 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구태여 많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에 한두 곳만 자세히 살피고, 그 향기를 깊이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새것을 구경하기보다는 지나간 역사를 반추하는 데 여행의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가는 도시의 정치적 변천을 포함해 그곳의 사회경제적 변천을 미시적 또는 거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작업이 내게는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한 역사가의 수학 여행기와도 같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행 정보를 담은 책은 아니다. 내가 둘러본 모든 유물 유적을 빠짐없이 기록한 여행안내 책자도 아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애호하는 유럽 도시들에 관한 일종의 문화적 체험담이다.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국가들은 모두 도시였다고 볼 수 있으니, 도시는 어디서나 역사의 중심 무대였던 셈이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편으로 나는 이런 도시를 어떻게든지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매력에 빠져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한다.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도 근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유교, 불교에 못지않게 금욕적이었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별로 구애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조상과는 달리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멀리 떠남으로써 도리어 가까워진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우선 꼭대기에 올라갈 일이다. 그래야 언덕과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손금처럼 환히 드러난다.

그리스의 관문은 예상 밖이었다. 깐깐한 입국 절차는 없었다. 허술하다 못해 허망할 정도였다.

전국 어디든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총동원해 사소한 지명까지도 일일이 표기한 우리나라의 과잉 친절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었다.

지금 나는 아테네 사람들의 무신경을 은근히 비꼬는 것이 아니다. 외부인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 또는 약간의 불친절에 도리어 감사를 느꼈다. 덕분에 아테네 여행은 훨씬 자유롭고 평안했다. 그곳에 머문 2주일 동안 아테네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때로는 낯설어 보이는 친구처럼 다가왔다.

우리들의 조상은 이미 오래전에 어느 특정 민족이나 영토의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이미 여러 세기 전에 그들은 그리스를 벗어나 서구로 갔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새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서구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또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고대 그리스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의 선조가 된 것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옳은 말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서구 문명이 탄생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전 지구를 지배하는 현대문명이 이룩되었다. 우리가 지구상 어느 나라에 살든지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인과 예술가와 신들의 후예요 제자가 된 것이다. 모두가 그리스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낭만적이기만 한 고대 황금기의 그리스는 거대한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그리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경험한 적도 없다.

기원전 5세기에 특히 찬란한 빛을 내뿜었던 휘황한 영광도 지리적 결핍의 산물이었다. 날 선 산맥으로 인해 국토가 종횡으로 갈라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날씨 또한 덥고 건조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서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지중해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인들의 용기가 그들을 고대의 무역 대국으로 키웠다.

그리스인들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던 쪽은 스파르타였다. 들판이 넓고 토질이 비옥했다. 그리하여 스파르타 사람들은 자급자족하는 농업사회에 그쳤다. 그들은 지중해로 진출해 외부세계와 활발하게 교역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테네는 이 동맹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인 침략 야욕을 실현할 군사, 외교적 도구로 이용하였다. 선한 군사동맹 같은 것은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신전이 델로스 동맹의 중앙은행 역할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신탁으로 이름난 델포이 신전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보물창고 또는 은행이었다면 이곳은 아테네의 금융센터였다는 뜻이다. 그럴 법한 주장이다.

파르테논신전, 이야말로 고대 아테네의 영광을 길이 후세에 전하는 금자탑이요, 갖은 악조건에도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아테네 시민들의 용기와 지혜를 상징하는 기념탑이다. 머지않아 그리스는 현재의 경제적 고난을 이기고 반드시 다시 비상할 날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이른바 ‘발전론’이란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거듭 깨달았다. 역사는 한 단계 한 단계씩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은 허황한 것이다. 그리스문화를 살펴봐도 그렇다.

지금은 이들 여러 강대국이 그리스의 지정학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자국의 이익을 키우기 위해 마구 이용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중국은 피레우스 항구를 사실상 독차지했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그리스를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유럽연합의 깃발 아래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러시아 역시 그리스 반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나라가 투명성과 청렴성을 자랑하는 현대국가로 재탄생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여기에도 허다한 비정상적 관행이 차고 넘친다. 두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손들에게 어려운 일이라면, 단군 자손에겐들 쉬울 리가 있을까.

전설 속 로물루스 형제가 티베르 강가에 나라를 세우고 1천 년이 지난 뒤였다. 전성기를 지나 오랫동안 혼미를 거듭하던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졌는데, 공교롭게도 로마의 마지막 황제도 그 이름이 로물루스였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속담이다. 로마인들은 유난히도 변화와 실용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타민족의 기술, 특산품 및 장점을 수용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좋게 말해 로마 사람들은 실질을 숭상했다. 일반적으로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법률 같은 것조차 로마인은 다르게 대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유연해, 정복지의 사정에 맞추어 법률을 개정하였다. 그들은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고, 통치는 현지의 지배 세력에게 위임했다. 그러면서도 정복지의 백성들을 로마 시민으로 탈바꿈시키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 로마 이후에도 곳곳에서 거대한 제국이 들어섰으나, 로마처럼 피정복지역의 동화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역사의 실험실 ’ 이탈리아

하필 내가 로마에 있을 때 한 사람의 이름난 천재가 세상을 떠났다(2016.2.19.). 『장미의 이름』(1980)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1932~ 2016)이다. 그로 말하면 현대 유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요 언어학자이자 고전학자였다. 유럽 문화에 박통했던 그는, 이탈리아를 ‘역사의 실험실’이라고 불렀다.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던 터이다.

무솔리니의 등장, 이것이 마침내는 1945년 이후에 전개될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로마제국은 양극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통치자들은 로마의 기득권층을 설득하여 경제적으로 양보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중주의라는 우회적인 수단을 선택하였는데, 끝내는 그것이 제국의 비극적 운명을 낳은 독배가 되었다.

스톡홀름은 스웨덴의 수도요,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14개의 섬을 57개의 다리로 연결한 도시라서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이 있다. 알다시피 스웨덴은 지구상에서 복지제도가 가장 완벽하게 갖춰진 나라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는 가장 무자비했던 바이킹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마침내 자유와 평화를 구가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생각해 보니, 바이킹 시대에도 그들의 가공할 힘은 협동에서 나왔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바이킹 전사들은 한몸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용머리가 장식된 기다란 배, 즉 용선을 타고 죽음의 바다로 곧장 나아갔다. 위험천만한 항해였다.

바이킹은 강의 상류에 이르러 물줄기가 끊어져도 항해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름칠한 통나무를 땅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깔았다. 그 위로 용선을 조금씩 밀었다. 이런 방식으로 바이킹은 수십 킬로미터 숲길도 헤쳐나갔다. 강물 줄기가 나올 때까지 배를 끌고 밀면서 전진하였다. 우두머리는 강한 용기와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부하들의 단결심과 복종심도 대단해,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유럽 대륙 어디에도 없었다.

노벨과 아바, 린드그렌에서 이케아까지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물결이 스웨덴에도 이르렀다. 그때 알프레드 노벨이 등장하여 창의적인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했다. 알다시피 그는 다이너마이트 사업으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재산을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았고, 유언장을 작성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노벨은 문명 발달에 공헌한 사람들을 찾아내 고무 격려하고자 했다.

오늘날의 스톡홀름은 탁월한 문화도시이다. 음악을 좋아하는이라면 누구나 그룹 아바(ABBA)를 기억할 것이다. 1972년부터1982년까지 활동한 4인조 남녀 혼성 그룹 말이다. 아바의 앨범은 무려 3억7천만 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아바의 리듬과 선율에 담긴 북유럽 특유의 독특하고 순수한 정서가 전 세계 대중음악 팬을 사로잡았다.

문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느 날인가 사랑하는 딸이 병석에 누웠다. 엄마는 즉석에서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며딸을 간호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 유명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탄생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화를 통해 은연중 주입되는 얌전한 소녀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삐삐 롱스타킹’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의 인격적 독립을 촉구하는 무언의 항의이기도 하였다.

여행이란 한 사회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깊이 숨어 있는 본질을 실감하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는 틈만 나면 유럽의 여러 도시를 즐겨 찾는다.

1879년, 스웨덴 사람 라스 올슨 스미스가 앱솔루트 보드카를 처음으로 생산했다. 보드카는 물론 러시아 국민주로 유명하지만 가장 도수가 높은 보드카를 만든 것은 스웨덴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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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미국 총영사관 정문 가까이에 1968년의 구정 공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이런 글귀를 적어두었다.

"원숭이해의 설날, 1968년 1월 31일에 민족해방사업을 위해 미국 대사관에 대한 공격 전투에서 완강히 싸우고 영웅적으로 희생된 사이공-자딘 지구 특공 전사들의 공을 조국은 영원히 기록하며, 인민은 그 은혜를 영원히 기억한다."

중국 대륙이 1949년 10월에 공산화된 직후였기에, 미국은 공산 세력이 동남아로 확산되는 데 민감하게 반응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도미노가 쓰러지듯 이웃한 다른 국가들도 차례로 공산화될 것으로 보았다.

프랑스는 호찌민과 그의 세력이 공산주의자임을 강조했고,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트남이 독립국을 선포하자,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 지배하려고 획책했다. 두 나라는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당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전쟁을 뒤로하고 미래를 향하여

호찌민시에서 빼어난 건물 가운데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 옛 사이공 시청사를 빼놓을 수 없다. 통일 후 베트남 정부는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 앞 광장에 어린이를 안고 있는 호찌민 좌상을 세웠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호찌민을 국부로 모시지만, 젊은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다.

똔득탕은 남부 출신의 혁명가로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호찌민이 1969년에 사망한 후 북베트남의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통일 베트남의 국가주석이 되었다.

비텍스코 타워는 베트남 기업 비텍스코가 발주해 한국의 현대건설이 시공했고, ‘랜드마크 72’는 한국 경남기업의 투자로 지어졌다.

도시의 역사를 비교사적으로 살펴보면, 도시는 문명화의 산물이지 결코 근대화의 산물이 아니다. 세계 ‘4대’ 문명의 개화는 도시의 출현과 성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구가 수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이들 초기 국가의 도시들에 이어 등장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에는 아테네와 같이 10만 명이 넘는 곳도 있었다.

고전시기 동남아는 도서부와 대륙부에 정부 조직은 달라도 국가 성격이 같은 두 국가 체계(복수의 국가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체계), 즉 제국을 탄생시켰다. 지금의 캄보디아 씨엠립에 근거지를 두었던 앙코르(크메르)와 수마트라섬 팔렘방 근처에 수도를 두고 있던 스리위자야가 두 전형으로 꼽힌다.

두 제국은 이처럼 지리적·경제적·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인도 문명의 영향을 받은 ‘고전국가(classical state)’였다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근대 이전-그러나 대부분 고전시대가 막을 내린 뒤, 또는 ‘후기 고전시기(Post-Colonial Period)’-에 탄생했으나, 도시로서 본격적인 발전은 식민통치기에 이루어진 도시로서, 하노이, 방콕, 족자카르타, 덴파사르, 믈라카, 쿠칭, 치앙라이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식민통치기에 식민정부의 행정 중심지 또는 한 도시로 처음 건설되어 독립 이후로 이어진 경우다. 싱가포르, 양곤, 호찌민시, 페낭, 수라바야가 이에 해당한다.

요컨대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탄생 시기는 다양하나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은 식민 지배와 국가 건설 과정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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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은 이들에게 현금을 얻는 수단이자 만병통치약과도 같았다.

1953년에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마자 친프랑스파 왕실 대 친베트남파 왕실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두 세력은 중립을 지키기 힘들 정도로 서로 멀어지기만 했다. 특히 1961년 1월에 단지평원이 빠텟라오와 중립파 세력에 의해 점령되자 몽 공동체는 더욱 분열되었다.

하늘에서 폭탄이 비처럼 쏟아졌던 나날들

1960년대 초 ‘리’ 씨족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미국 중앙정보부에 매수된 라오스 군부와 손을 잡고 빠텟라오와 중립주의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나섰다.

1965년 3월 미군이 남베트남에 상륙함과 동시에 베트남과 라오스 북부, 그리고 국경에 걸쳐 있는 월맹군의 비밀 물자보급로 ‘호찌민 트레일’을 중심으로 무차별 공습이 가해졌다. 단지평원은 말 그대로 불지옥이 되었다.

그때도 저렇게 헬기가 날아가고,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을 눈이 맑은 라오 사람들에게 폭탄 비를 퍼부었겠지. 그 헬리콥터가 태양 가까이 가서 타버렸으면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프레드 브랜프먼(Fred Branfman)은 2000명이 넘는 라오 주민들을 인터뷰했고, 이후 베트남 전쟁에 가려져 미국 중앙정보부의 ‘비밀작전’으로만 남아 있던 미군의 라오스 공습을 대중에게 알렸다.

1965~ 1973년 라오스에는 210만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이 유럽에 투하한 폭탄이 270만 톤이었음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화려한 색깔은 이국적인 아시아 수예품을 수집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아픈 역사를 알아달라고 외치는 소리 없는 비명인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불발탄이 아닌 현재가 숨기고 있는 희망으로

전쟁의 상처가 깊지만 그런 역사를 뒤로할 수 있다면, 폰사완은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래서 매력적인 도시다.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 과속방지턱이 없는 그 넓은 평원을 달리며 현재가 숨기고 있는 희망만을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

전쟁은 기억되어야 하고, 그 상흔은 치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을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까지 미룰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사원을 중심으로 불교를 신봉하는 양곤 시민들의 일상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바로 우리가 상상하던 소승불교의 나라 미얀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서 소승불교를 가장 처음 받아들여 다른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인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으로 전파했다

양곤은 군부독재 정권이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변경하기 전까지 랑군(Rangoon)
으로 불렸고, 2006년 군부가 수도를 북부의 네피도(Naypyidaw)로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의 오랜 수도였다.

양곤을 방문한 타고르의 절망

인도의 시성으로 추앙받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는 1916년에 양곤을 방문한 뒤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이 도시는 국가라는 토양으로부터 난 나무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 마치 시간이라는 조류 위의 거품처럼 떠도는 듯하다. (…) 나는 랑군(양곤)을 둘러봤지만, 그저 겉으로만 보았을 뿐이었고, 그 속에는 버마라고 여길 만한 것은 없었다. (…) 그 도시는 추상화다.

영국 식민통치의 고통을 받고 있던 인도인들이 같은 처지인 버마인을 ‘이등 제국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것이다.

미얀마의 진정한 원주민은 에야와디강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퓨족(Pyu)과 몬족(Mon)이었다. 그러다가 800년경에 티베트 지역에서 이주해온 버마족이 에야와디강을 중심으로 정착한다. 현재 미얀마 인구의 70퍼센트에 달하는 버마족의 시작이다.

버마 지역에는 북부에 버마족과 샨족 중심의 아바(Ava) 왕조, 남부 몬족 중심의 페구(Pegu) 왕조, 동부에는 버마족의 따웅우(Taungoo)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따웅우 왕조에 의해 통합되면서 버강 왕조 이후 미얀마의 통치를 확립한다.

그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유명한 독립영웅 아웅산(Aung San) 장군이다. 현재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는 미얀마의 가장 유력한 정치인인 아웅 산 수 치(Aung San Suu Kyi) 여사의 부친이자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하노이는 고전미와 현대적 경관이 어우러진 도시다. 이 도시는 과거에 오랫동안 탕롱(Thang Long, 昇龍)이라고 불렸다. 탕롱은 "용이 날아오른다"는 뜻이다. 리(Ly, 李) 왕조는 1009년에 수립된 후 이듬해 수도를 지금의 하노이로 옮기며 도시 명을 탕롱이라 붙였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고 국자감은 과거의 대학이니 한국의 성균관과 형제뻘이 되는 셈이다. 베트남이 중국에 대한 저항심에도 불구하고 유교를 들여와 국가의 기본 질서를 세운 것이다.

리 왕조가 망하자 리롱뜨엉(Ly Long Tuong, 李龍常) 왕자는 고려로 이주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으니, 하노이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베트남은 1940년 후반부터 일본의 침공으로 프랑스와 일본의 이중 지배를 받다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중국을 물리친 칼과 말뚝

베트남의 역사를 북거남진(北拒南進)의 역사라고 한다. 북쪽의 중국에 항거하고 중남부의 참파(Champa)와 남부의 크메르, 즉 옛 캄보디아의 영토를 획득해 확장한 역사를 말한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부터 1000년 동안이나 중국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938년 중국을 물리치고 이듬해에 독립국을 선포한 후에도 여러 차례 중국의 침공을 받았다.

1946년 말부터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베트남은 1954년 5월까지 서북부 산간지대인 디엔비엔푸에서 치른 마지막 대항전에서 간난신고 끝에 프랑스를 물리치고 전쟁을 마무리했다.

남북 베트남은 서로 대치하다가 각각 외국의 지원을 받으며 1964년부터 열전을 치른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1975년 4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끝났다.

호찌민시행 보딩패스의 목적지는 ‘SGN’이라고 적혀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세계 공항을 표기하는 ‘쓰리 레터 코드’인 ‘SGN’은 ‘Sai Gon(사이공)’을 뜻한다. 도시명이 호찌민시로 바뀌었어도 옛 사이공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사이공은 영문으로 ‘Ho Chi Minh City’이며 줄여서 HCMC라고 표기한다. 호찌민은 베트남 국부의 이름이니, ‘호찌민’과 ‘호찌민시’는 구분해야 한다

이 지역이 개발되기 전에는 목화나무가 많았는데, 사이공이라는 지명은 목화나무의 한자 표기인 ‘자곤(柴棍)’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남부를 식민 지배하면서 지명이 ‘사이공’이 됐다.

사이공을 한자로 ‘서공(西貢)’, 중국어 발음으로는 ‘시꽁(꿍)’이라고 한다. 베트남어 ‘Sai Gon’을 발음에 맞춰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서공’이 된 것이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941년 후반에 일본에게 점령되어 두 나라의 공동 지배를 받게 된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패망하고 9월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수립된 후 그 동상은 철거됐다.

베트남에 거주하던 중국인 부호의 면모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연인〉에서 잘 보여준다.

양가휘(梁家輝)가 연기한 주인공 남성은 열여섯 살의 프랑스 소녀와 성관계를 갖는다. 그는 그 프랑스 소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으려면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메콩델타의 사덱(Sa Dec)에서 사이공으로 가는 배에서 처음 만났다.

소녀는 꼭 돈 때문에 그와 계속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남성이 주는 돈은 그녀를 풍족하게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딸의 연애를 방조한다. 부도덕한 프랑스인 어머니와 타락한 그의 형제들은 식민지에 살던 몰락한 프랑스인 가정을 보여준다.

베트남도 한국처럼 음력설을 쇠는데 이를 ‘뗏(Tet)’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미국 대사관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1995년에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정상화되었고, 1999년 옛 대사관을 허문 자리에 새로 총영사관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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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민주화를 외치는 이유는 단순히 시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태국 어디에서 태어났든, 어느 가정에서 자랐든, 어떤 학교에 다니고 어떤 직장을 다니든 간에 공평한 기회를 갖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게 그들의 소망이었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은 이들이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하는 스카이 캐슬은 이 세 가지 요구가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무너질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왕정개혁은 태국의 권위주의적 전통과 역사를 기초부터 흔들어 그들이 학연을 통해 진입하고자 하는 정치·사회·경제적 엘리트층의 입지를 완전히 뒤틀어놓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결국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을 Z세대가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민주화의 역사가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태국의 왕실 모독죄는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 왕실 모독죄가 특히 2006년 쿠데타 이후 광범위하고 일관성 없이 적용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검열을 강요해왔다.

군부독재자도 왕의 발밑에 온몸을 바닥에 붙이고 낮추는 것은, 비록 실질적인 권력은 없지만 왕정이 붕괴되는 순간 가부장적 권위주의 위에 세워진 태국의 모든 전통이 무너져 내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2020년 Z세대가 요구한 왕정개혁은 권위주의 타파라는 더 큰 사회적·문화적 개혁이었던 것이다.

2월 7일 랏차담넌 길과 시 아유타야 길을 잇는 랏차담넌 길에 있는 유엔 건물 앞에서 미얀마 국기를 들고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태국의 젊은이들과 미얀마 이주 노동자들이 나란히 행진했다. 반목의 역사를 갖고 있는 두 나라의 청년들이 함께 방콕을 민주화의 성지로 재탄생시키는 순간이었다.

짜끄리 왕조의 역사만큼, 독재의 역사만큼, 방콕의 민주화의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그리고 오늘도 민주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땀과 눈물과 핏방울이 수만 개의 쏘이 사이사이에 녹아들고 있다.

관광객이 주로 찾는 곳은 ‘단지평원’ 혹은 ‘항아리평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넉넉히 잡아 20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돌항아리들이 있는 곳이다. 특히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폰사완의 관광산업을 촉진하려는 라오스 정부의 관심이 단지평원에 집중되었다.

단지평원 제1구역에만 가도 이 평원에 숨어 있는 슬픈 역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불발탄 점검 중이라는 표지판들이다. 베트남 전쟁의 화염을 피하지 못했지만 베트남 전쟁에 가려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라오스 내전의 상처가 이 단지평원에 오롯이 남아 있다. 폰사완은 작은 도시가 담기에는 너무나 큰 역사를 등에 지고 있는 도시다.

폰사완 역사기행은 단순히 이 도시만의 역사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인도차이나 국가들(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단지평원이 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의 장이 되었는지를 되짚어보며 라오스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도 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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