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바닷길로 불과 1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지중해가 오랫동안 유럽 남부 바다와 동의어로 쓰였지만, 튀니지를 보고 나면 북아프리카 지중해가 얼마나 아름답고 역사적으로 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지 확연히 깨닫게 된다.

한니발의 위엄과 포부가 살아 있는 카르타고가 특히 매혹적이다.

바브엘바하르, 즉 ‘바다의 문’이다. 아마도 지중해의 바닷물이 이 문을 통해 들락날락한다고 믿었던 시절에 붙여진 이름인 듯싶다.

부르기바는 튀니지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31년간이나 통치한 튀니지 현대사의 중심 인물이다. 용기와 지성을 겸비한 그는 오로지 조국 튀니지를 위해 존재한 인물이었다. 아랍 국가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남녀평등과 여성의 사회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지도자였다.

장기 집권은 스스로가 이룩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1987년 11월 7일,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치매 증세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산송장이나 다름없었음에도 의사가 통치 불능 판정을 내릴 때까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2001년 여름 다시 튀니스에 갔을 때 거리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11월 7일의 거리.’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날이었다.

아랍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이븐 할둔을 배출한 곳이 이 자이투나대학이다.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이자 독보적인 역사 서술 체계를 확립한 이븐 할둔은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서양 인문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학자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 벤 알리는 일상적인 대화는 아랍어로 하지만, 정치적인 이슈나 학술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프랑스어가 편하다고 한다.

350년간 튀니지를 지배한 오스만튀르크의 영향보다 76년간(1881~ 1956) 식민 통치한 프랑스의 힘이 더 크다. 프랑스의 문화 이식 정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페니키아, 로마, 반달족, 초기 기독교, 비잔틴, 아랍, 오스만튀르크, 프랑스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끊임없는 부침을 겪었던 튀니지의 역사와 문화를 한번쯤 정리해볼 수 있는 곳이다.

바로도 박물관

시디부사이드,유럽 대문호들이 사랑한 지중해 해변 마을

시디부사이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지중해 언덕의 푸른 마을이다.

하얀 돔을 올린 자우이야 아부 사이드 모스크다. 시디부사이드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이 마을의 사연을 담고 있는 현장이다. 주인공은 바로 아부 사이드 칼라브 번 야프야 엘 타미미 엘 베지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슬람 성자다.

"아저씨, 총각이에요? 왼쪽 귀에 꽃 한 송이 꽂으면 시집가고 싶은 거래요."

아! 그렇구나!

한니발의 도시 카르타고

티레의 왕 벨루스의 딸 디도는 오빠 피그말리온이 왕위에 올라 사랑하는 남편 시카에우스를 숙청하자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올라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기원전 814년의 일이다.

현지 뱃사람들은 그녀를 엘리사-디도라 부르며 항해의 수호여신으로 받든다.

지중해 너머로 멀리 로마를 바라보고 있는 포에니 선착장만이 세계 제패를 꿈꾸며 진군했던 한니발의 영광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할 뿐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이다. 한니발은 보병과 기병, 그리고 40마리의 코끼리 부대와 함께 피레네산맥과 알프스를 넘는 과감한 행군을 택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파라다이스 함마메트

튀니지에 오면 가까운 지중해 해변 도시 함마메트도 빼놓을 수 없다. 수도 튀니스에서 자동차로 동남쪽 해변을 따라 1시간 거리에 있다. 함마메트는 ‘목욕’을 뜻하는 아랍어 함맘(Hammam)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시디부사이드를 예찬했던 앙드레 지드, 오스카 와일드, 조르주 베르나노스, 클레 같은 예술가들의 휴양지가 되면서 함마메트는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근대 아랍 도시로

알제리로 가는 여정은 그리 쉽지는 않다. 서울에서 11시간을 날아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다시 4시간을 더 가야 알제 공항에 닿는다.

처절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가진 순박한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는 인파 사이로 여기저기 골목길이 나 있었다. 각양각색의 물건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한 흥정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제리 독립을 위해 애쓰던 독립투사들이 1957년 프랑스의 공격을 받고 순교한 곳이라고 했다. 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잠시 묵념을 했다. 우리도 독립의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가를 떠올리며….

알제리는 8년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학살당한 희생자 수를 200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피해자 숫자가 다소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10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알제리 인구가 9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20세기 중후반에 인류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나는 프랑스가 인권과 자유를 지키는 톨레랑스의 나라라고 말하는 담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축구 영웅 지단, 소설가 알베르 카뮈,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도 알제리 출신 피에누아르였다.

독립 영웅 에미르 압둘 카디르 동상과 알제리대학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싸게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에미르 압둘 카디르(Emir Abdul Kadir) 동상이다. 19세기 알제리 서부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며 조국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투사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 튀니지는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고대 로마를 살찌운 젖줄로우리의 관심을 끈다. 2011년 거대한 민주화 물결과함성으로 지구촌을 울렸던 ‘아랍의 봄‘
민중 시위의 산실이기도 하다. 아직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민주화의 목적지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북아프리카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가장 민주화 열망이 강하고여성의 인권이나 사회참여 수준이 높으며, 개방성과 융합성이앞서 있는 매력적인 나라다. 아랍 시민혁명 이후에도대부분의 아랍 국가가 권위주의 군부정권으로 회귀하거나내전으로 고통받을 때, 튀니지에서는시민사회단체 4곳이 협력과 대화, 조정을 통해 사태를 수습해다원적 민주주의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바로 이 ‘튀니지 국민 4자 대화기구‘가201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서쪽에 위치한 알제리는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는 아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잘 모르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고향이고,
《이방인》, 《페스트》의 배경이 된 땅이기 때문이리라.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지드는 알제리를 비롯한아프리카 일대를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소설과 시,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역사적인 대문호들의 활동 무대였던 알제리는 오늘날그리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1962년에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로,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국가 원수가 수시로 바뀌는 등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알제리는아프리카의 투명한 햇빛과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로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일어서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씻어내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북아프리카 지중해의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사연이 진주처럼하나씩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거리를 지나 알제리대학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19세기 이전에 편찬된 귀중본만 100만 권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북아프리카 최대 도서관 중 하나다. 그러니 알제에 와서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운이 좋았는지 도서관장의 특별 배려로 전 세계에서 단 한 부만 남아 있다는 1936년 판 카뮈의 《형이상학, 기독교, 신플라톤주의Christian Metaphysics and Neoplatonism》라는 빨간 표지의 책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카뮈의 알제대학교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그때의 짜릿한 기분이란, 정말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문화는 섞일수록 발전한다

물론 알제 주변에 이슬람 유적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유적도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고대 유적지가 티파사다. 티파사라면,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이란 작품이 탄생한 무대가 아닌가.

알제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티파사로 가는 해안길은 풍요와 은총으로 가득했다. 흑갈색 땅에서는 옥수수가 자라고 그 사이로 푸른 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티파사에 도착했다.

카뮈가 거닐었을 길을 걸으며 단절된 역사의 향기에 취해본다.

알제에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알제리 남쪽 도시 타만라세트까지 2000킬로미터에 이르니, 알제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보다 길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사하라를 고향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토착 투아레그족이나 베르베르족의 전통과 관습보다 로마나 유럽의 해양 문화가 더 강하게, 더 빨리 스며들 수밖에 없는 북아프리카 문화의 특성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문화는 섞일수록 발달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할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는 사실을 북아프리카 최고의 해안 도시 알제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마라케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와닿은 느낌은여유로움과 독특한 문화의 향기였다.
괜히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근엄한 이슬람의 눈총도 없고,
사하라의 주인공인 베르베르의 자유분방함과사막 유목전사의 위엄이 넘치는 도시였다.
마라케시는 참으로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훌륭한 현대 박물관이나갤러리, 콘서트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이 넘치는나날을 경험할 수 있는지 마라케시는 직접 보여주었다.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아틀라스 산맥 기슭의 하우즈 분지에 있는오아시스에 들어선 도시가 바로 마라케시다.
예부터 끝없는 사하라 사막이 시작되는 관문이고,
지중해와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낙타 대상의거점 도시였다. 마라케시의 흥망성쇠는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 바가 크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왕조의 중심 도시였던 페즈에 도읍을 정한 이드리스 왕조가 거의 쇠망해갈 무렵, 11세기 초 마라케시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알모라비드 왕조다. 사하라 사막의 여러 베르베르족이 연대하여 흥기한 알모라비드 왕조는 독실한 이슬람 지도자 압달라 빈 야신(Abdallah Bin Yassin)의 영도 아래 승승장구하여 남부 및 동부 모로코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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