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처음에 베일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알 물라타민(al-mulathamin, 베일의 전사)으로 불렸다.

왕조의 수도요, 베르베르족의 활동무대인 마라케시의 상징성 때문에 모로코 왕가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마라케시의 베르베르족에게서 맞이한다고 한다. 이 땅의 원주민에 대한 배려이자, 국가 통합을 위한 정책으로 보인다.

쿠투비아 모스크

황토색 흙벽돌로 쌓아올린 가로와 세로 높이의 균형비가 1대 5인 직사각형 미너렛은 6층 구조이며 높이가 77미터에 이른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첨탑의 표준형으로 모로코 수도 라바트의 하산탑,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탑과 함께 알모하드 왕조의 3대 걸작 미너렛 중에서도 으뜸이다.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데하르 양식의 대성당 종탑의 원형이 바로 쿠투비아 미너렛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확인했다. 쿠투비아는 안달루시아에서 감탄하며 눈에 익혔던 소박하고 투박한 무데하르 건축 유행의 원조인 셈이다. 그러니 더욱 애착을 갖고 쿠투비아를 응시했다.

우주의 순환과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이슬람 철학을 명료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삶의 공간 그 자체가세계문화유산

쿠투비아 모스크를 돌아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가면 그 유명한 제마 엘프나(Jemaah al-fna) 광장이다. 오전에는 옥외시장이 열렸다가 천막이 걷힐 무렵부터 세계인이 즐기는 광장 무대가 된다. 위치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인 오후 느지막한 시각, 그저 인파의 물결을 따라가면 된다.

이곳은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곳이다.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삶의 역동성과 활력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무대. 민중 예술의 위대한 현장이다. 주변에 특출난 유적지나 진귀한 예술품이 없음에도 이렇게 삶이 살아 있는 공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의 안목에 찬사를 보낸다.

종교를 뛰어넘는포용력이 만들어내는 매력

사하라의 전통과 명예를 이어받은 마라케시의 강인함과 포용성은 도시 구석구석에서 보이지 않는 매력을 발산한다. 500년간 대대로 마라케시에 살고 있다는 유대인 보석상 유후디를 만났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신비와 애절함  
아라비아반도에서 도도한 새 물결로 출발해 지중해를 따라 북아프리카를 돌아온 이슬람의 파고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에 첫발을 내딛는다. 711년이었다. 이슬람은 비잔틴과 페르시아를 껴안고 아프리카 대륙에 상륙해 이집트 신화, 아프리카의 원초적 순수함까지 포용하며 코르도바에 둥지를 틀었다. 그 후 약 800년 동안 이슬람은 유럽 땅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빛깔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르도바는 에스파냐 남부안달루시아 지방의 역사 도시다.
다양한 문화가 아프게 섞이면서 아름다운조화를 이룬 문명 공존의 현장이다.
152년부터 로마, 572년부터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8세기 이후 약 800년간이나이슬람 왕조가 이 도시의 주인이었다.
15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600년간 가톨릭이 중심이다.
한때 코르도바는 이슬람의 도시로 세상의 중심이었다.
힘과 권위만을 내세우는 오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로맨스와 예술, 학문과 과학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지식과 지혜의 심장이었다. 그리스·로마의 철학과학문적 성취를 집대성했으며,
이슬람의 수준 높은 과학을 유럽에 전해주었다.
이로써 유럽은 오랜 암흑에서 벗어나비로소 르네상스의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나는 지난 겨울에 코르도바를 다시 찾았다.
중세 도시 코르도바가 내뿜는 깊은 역사의 입김과진한 오렌지 향에 취해 오랫동안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슬람 예술가들에게 건축만큼 좋은 캔버스는 없었다. 넓디넓은 캔버스인 천장, 벽, 바닥에 한 줌의 여백도 남겨둘 여유가 없었다. 허용된 캔버스에 온 기량을 쏟아부었다. 천장에는 꾸란 서체 벽화를 그려넣고, 벽에는 아라베스크 타일을 붙이고, 바닥에는 아라베스크 카펫을 깔았다. 그래서 아라베스크 문양을 바라보면 신비와 절절함이 묻어난다.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할둔은 "지중해는 유럽인이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안달루시아 문화 특유의 공존 정신인 ‘콘비벤시아Convivencia’ 전통의 결과였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주변 문화를 쉽게 받아들였고, 수준 높은 과학 기술과 절충의 미가 빛을 발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메스키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대표적인 건축물이 메스키타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다. 785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11세기에 완공된 세계 최대 이슬람 사원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메스키타를 보기 위해 서둘러 과달키비르강 언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은 코르도바 주교좌 대성당이 되어 있는 곳이라 유럽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잇고 있었다.

두 문명과 종교의 화해와 충돌의 현장

1236년 6월 29일, 코르도바는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 3세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에스파냐 이슬람 왕조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메스키타는 성당으로 탈바꿈했다. 그렇지만 500년간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사랑받던 메스키타 앞에서 정복자들마저 넋을 잃었다.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는 1523년 이교도의 정신적 상징을 헐어 없애는 대신 개조해서 대성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비록 영혼은 뺏겼지만, 메스키타 일부는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돔이 잘려나가고 세속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모스크 입구 아치문은 콘크리트로 막아버렸고, 천국을 상징하던 모스크 내부의 파티오와 정원의 분수도 헐리거나 모양이 바뀌었다. 새로운 천국을 만들기 위해 이교도의 천국을 막아버린 셈이다. 천국은 똑같은 천국일 텐데…

무엇보다 코르도바를 살찌운 것은 화해와 관용이었다. 당시 이슬람 왕정은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과 토착민에게도 종교 구분 없이 능력과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다른 생각과 가치를 받아들이는 문명은 번성하고, 자신의 가치만을 고집하며 소수민족을 억압한 문명은 소멸하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인류 사회에 가르쳐준 도시가 코르도바였다.

코르도바를 차지한 에스파냐 왕들은 과달키비르 강변에 있는 아랍식 목욕탕 자리에 아랍 궁전을 본떠 알카사르 요새를 짓고, 마지막 이슬람 왕조가 있던 그라나다를 함락했다. 1492년 1월의 일이었다. 이로써 에스파냐의 무슬림과 유대인은 쫓겨나거나 강제로 개종당했다. 바로 그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에스파냐의 시대가 열렸다.

그라나다라는 이름은 왠지 고급스럽고 꽤 낭만적으로 들린다. 어릴 때 최고급 국산 자동차 이름이었기 때문일까.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문화의 깊이와 현실의 풍요가 느껴지는 고도. 그 도시 가운데를 다로강이 동서로 흐른다. 아름다운 남부 유럽의 전형적인 풍광이다.

스페인 남부를 안달루시아라 부른다.
무어(Moor)라 불리는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이곳에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남겨놓았다. 약 800년간 이베리아반도에심어놓은 아랍 문화의 토양에 꽃을 피운 에스파냐 문화를안달루시아 문화라고 부른다. 두 문화가 공존할 때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인류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슬픈 역사가 도시 언저리마다 웅크리고 있기는 하지만.
안달루시아 문화의 중심 도시는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3대 역사 도시다. 지중해 안달루시아 문화를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그라나다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교도 조상들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그라나다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는 데 특별한 의미를 두는 시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미 그라나다 시민들의 재산이고 문화유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슬람 문명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안달루시아에 머무는 동안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이다.

구시가를 형성하는 다로강 북쪽으로는 고풍스러운 멋을 뽐내는 무어풍 빌라와 저택이 잘 가꾸어진 정원과 과수원 사이로 줄지어 있다. 강 반대편 언덕에 보이는 것이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토록 꿈꾸어왔던, 그 이름만으로도 황홀한 알함브라다.

알함브라,인류 최고의 보석

그라나다는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조(1238~1492)의 수도였다. 13세기에 들어서자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국가들은 내분과 영토 분쟁으로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종교적 단합보다는 개별 권력이 앞서면서 군소 이슬람 국가들은 기독교 국가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다. 전세는 점차 역전되어갔다.

기독교 세력에 함락되어가던 무슬림들이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가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래서 그라나다는 알함브라의 도시다. "그라나다라는 에메랄드에 알함브라라는 빛나는 오리엔트산 진주가 박힌 인류 최고의 보석." 15세기 한 아랍 시인의 표현이다.

역사는 보아브딜과 알함브라의 작별을 "무어인의 탄식(El Suspiro del Moro)"으로 기록하고 있다.

"알함브라를 잃은 자여, 불쌍하도다. 나 같으면 알함브라를 버리고 알푸하라스 언덕에서의 삶을 택하기보다는, 알함브라를 지키며 내 무덤으로 삼았을 텐데"라며 보아브딜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승승장구하던 기독교 세력이 시시각각 침략의 손길을 뻗쳐올 때, 최후를 앞두고 유언장을 쓰듯 비감한 손길로 빚어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다. 그래서인지 알함브라를 세세히 살펴보면 비감함과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유난히 붉은 낙조가 알함브라를 물들인다. 태양이 붉게 지던 그날, 그라나다도 어느 무명 시인의 통곡처럼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불운의 왕이여!

죽을 용기가 없어 그라나다를 떠나는 못난 왕이여!

남아 있는 인생이 무어 그리 대단할진데,

그까짓 왕관 하나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라나다를 떠나가느뇨!

이슬람의 궁성이 함락되던 그해, 1492년 이사벨 여왕이 후원하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는 에스파냐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한편 이슬람의 술탄 보아브딜은 에스파냐에서 쫓겨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711년, 그의 선조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할 때 의기양양하게 건넜던 바로 그 길이다. 모로코의 이슬람 도시 페즈에 정착한 뒤에도 보아브딜은 꿈에도 알함브라를 잊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 페즈의 초라한 궁전은 지금도 알함브라를 닮아 있다.

아프리카만큼 총체적 무지와편견에 갇혀 있는 대륙도 드물 것이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두려운가상 공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꼽으라면,
‘원시‘, ‘미개‘, ‘야만‘, ‘블랙(black)‘처럼문명의 반대편에 있거나 ‘말라리아’, ‘에이즈’, ‘에볼라‘ 같이불편하고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보라면,
제법 배운 사람들은 최초의 인류인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들먹이고 나서는,
‘21세기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무한한 자원의 보고‘라는말을 보탠다. 이런 편견을 바꿔줄 수 있는 곳이바로 아프리카의 자존심, 팀북투다.

문명(文明)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개념으로, 인류는 동일한 진보 과정을 겪는다는 지극히 유럽 중심적인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이어 19세기 사회진화론자에 의해 ‘발전’ 개념이 문명 담론에 적용되면서 백지 상태에서 ‘야만(구석기시대)-미개(신석기시대)-문명(청동기 이후)’으로 나아간다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오로지 사회·경제적 조건을 기준으로 인류의 가치와 삶의 수준을 측정했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19세기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갔다.

아프리카는 ‘기록의 역사’보다는 ‘기억의 역사’ 전통이 강한 사회다. 기록은 처음부터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큰 데다가 후일 권력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수정되고 미화되고 조작될 수 있지만, 공유된 기억은 가락 하나 숨소리 하나 틀릴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형·무형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통을 이어가는 수백 수천만 개의 공유되는 기억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젠네 대모스크,서아프리카의 랜드마크

젠네 모스크는 말리 왕국의 중심 도시 젠네에 13세기경에 세워진 이슬람 대사원이다. 말리 왕국의 이념적 성격과 국가 규모, 경제적 풍요를 짐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젠네 모스크 건립에 관한 기록은 팀북투의 연대기 작가 아브드 알사디(Abd al-Sadi)가 1655년경에 집필한 《수단의 역사(Tarikh al-Sudan)》라는 책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 유럽인들에게 이 도시는 실제 존재하는 도시라기보다는 전설과 신화 속 환상의 도시로 여겨졌다. 그래서 팀북투라는 말 자체가 ‘아주 머나먼 곳’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석재가 부족한 환경에서 진흙벽돌로만 이 거대한 모스크를 축조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젠네 모스크는 말리 왕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진흙벽돌 모스크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수단-사하라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며,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말리를 이은 서부 아프리카 문명의 전성기:송가이 왕국

송가이 왕국(1000~1591)은 원래 말리 왕국의 속국이었으나 말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서아프리카에서 번성했던 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다. 말리 왕국을 멸하고 송가이 왕국을 세운 사람은 손니 알리였다.

가장 성스러운 장소와 가장 세속적인 장소, 가장 진보적인 담론의 장소가 공존하는 현장이 바로 이태원이다. 거리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언어가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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