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함께 활동했던 두 사람은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의 주요 인물로 검거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이곳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윤동주 사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사망 전보를 받고 와서 시신을 인도받아 화장했다. 그의유해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명동촌 인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송몽규 역시 다른 곳에 안장되었다가 윤동주의 곁에 모셔졌다. - P78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P79

"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명성황후는 이미 칼에 베여 마루에 쓰러진 채로 후후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들은 사진을 보며 왕비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있다가 절명했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사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창고에 넣었다. 곧 사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 P83

우범선은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도 하지만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현구레시 와쇼정 2079번지(현재의 와쇼 17번지)로 알려진 집에서 살해된다. 그를 죽인 사람은 조선에서 온 고영근(高根, 1853~1923)이었다. 고영근은 범행 직후 와쇼 파출소에 가 자수한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이유로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P84

고종과 명성황후를 향한 고영근의 충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2년 12월 그는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에 ‘고종태황제‘, ‘태황후‘ 등 여덟 글자를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웠다. 고종의 묘비에 ‘황제‘를 쓰지 못하게 하고 ‘대한‘ 앞에 ‘전자를 붙이라 했던 일제 때문에, 고종 사후 4년이 넘도록 묘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조선 땅에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결국 해낸 것이다. 일제는 발칵 뒤집혔고, 고영근 역시 이 일로 인해 1923년 3월 파직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일을 다 마쳤다는 듯 한 달 뒤 사망한다. - P84

2024년 초, 영화 <파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서 배우 유해진 씨가 연기한 인물의 이름이 고영근이었다.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에서 차용한 인물이다. - P85

이곳에 서볼 것을 추천하는 이유는, 1400여 년 전 백제인의 숨결이 여전히 이곳 미즈키 유적을 비롯해 열도 전역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만주 벌판에 서면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이, 일본 열도에 서면 백제인의 선진 문명이 아로새겨진다. - P89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자이후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이곳으로 부임되는 것을 ‘좌천‘으로 인식하는 경향 또한 늘었다.  나라 시대인 740년에 당대의 귀존인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후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자이후 정청 주춧돌과 터만 남아 있다. - P9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토가 이홍장을 불러다 그 유명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곳에 왔다. 재밌는 건 역사를 뒤흔든 그 장소가춘범루라는 음식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성업 중인 고급 복어요릿집이다. 여담이지만 시모노세키 지역 특산물이 바로 복어다. 시모노세키곳곳에서 복어 요리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시간을 내서 복어탕과 복어지리를 먹어 볼 것을 추천한다. 다만 시모노세키에서는복어3 <, fugu를 일본식 발음인 ‘후구‘가 아니라 ‘후쿠‘로 발음한다. 복자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복어를 먹으면 복이 들어온다는 이유라고 한다. 식당에 들어가 복을 부르는 ‘후쿠‘를 시켜 먹자. - P106

터널을 걷다 보면 불현듯 머리 위로 거대한 선박이 오간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인간의 기술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그런 감상 때문에 이 터널에 가보기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일본의 역사가 펼쳐졌고, 이곳이 한반도와 조선의 관계에서 주요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의 왕래부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비극까지, 이 좁은 해협을 오가며 교류도 충돌도 있었다. 이 터널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듯한 느낌을 준다. - P111

이와쿠라 사절단의 표면적인 목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과 조약을맺은 서구 제국 수장들에게 일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목표는 최혜국 대우 등으로 점철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반강제로 개항하면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불평등 조항을 만국공법(국제법)‘의 취지에 맞게 바꾸는 게 진짜 목표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시구의 선진 문물을 습득하겠다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 P113

하지만 이곳 역시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입은 상처만을 부각한다. 더나아가 오히려 자신들을 전쟁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려 한다. 오직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입은 자신들의 피해를 부각하는 주장만 있을 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가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살아남은 자가 함께 풀어내야 할 과업이다. - P129

천하영웅 윤봉길이
마지막 한 달을 보낸 곳 오사카성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뒤쪽에 비석이 하나있다. 일본 육군의 오사카 위수구금소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 주는 비석이다. 바로 이곳이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이 생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낸 장소이다. - P136

윤봉길은 상하이 일본 헌병대 사령부 지하에 6개월 넘게 구금되어 있다가 1932년 11월 18일 일본으로 이송된다. 우편 수송선 타이요마루 편으로 고베항에 도착해 오사카성 내 육군 위수구금소에 수감되어 한 달 동안독방 생활을 한다. 사형 집행지가 일본 육군 제9사단의 주둔지인 가나자와로 결정되면서 12월 18일 오사카 헌병대에 의해 이송된다. 그는 가나자와 제9사단 위수구금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인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미간에 총을 맞고 미쓰코지산 육군 작업장에서 순국한다. 이에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7부 <가나자와> 편에서 다뤘다. - P137

아이러니한 점은 일본 육군 제1사단이 전쟁을 벌이고 주둔했던 중국, 태국,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이 쇼핑몰의 주된 고객이라는 사실이다. 제4사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1937년경에는 관동군에 배속돼 중국과 전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방콕에 주둔했다. 구글 리뷰에도 ‘한국인이 이곳을 참 좋아하는 건 재밌는 일‘이라며 비꼬는 글이종종 올라온다. 오사카성 천수각과 미라이자가 그런 곳이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좋겠다. - P141

무엇보다 염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덴노지 공원은 3·1운동 기념일을 비롯해 5월 노동절, 8월 국치일, 9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일 등항일 집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927년 6월 1일 열린 조선총독 폭압정치 규탄대회에는 4000여 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1925년 11월 검거된 조선공산당원에 대한 가혹행위, 전남 완도군 소안도 소안학교 강제폐쇄 등 국내에서 벌어진 식민통치의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같은 해 7월과 8월에도 연설회가 이어졌고, 이후 오사카 조선인노동조합이 반제반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덴노지 공원 어디에서도 관련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P144

조명하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5분, 대만 타이중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도서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彥王, 1873~1929)에게 독을 바른 단검을던졌다. 구니노미야는 8개월 뒤인 이듬해 초 세균 감염에 의한 복막염으로 사망한다. - P150

조 의사가 던진 단검에 묻은 독이 사망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구니노미야의 죽음보다 앞서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그의 나이 스물셋에 불과했다. 고향에는 부인과어린 아들만 남았다. - P151

당시 구니노미야는 여덟 대 차량 중 두 번째 무개차(지붕 없는 차)에탑승했다. 조명하 의사는 차량에 뛰어올라 칼을 던졌지만 실패했고, 재차칼을 던져 구니노미야의 목덜미와 어깨에 찰과상을 입혔다. 당시 현장에서조 의사는 군중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단지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뒤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다. 당시 일제는 배후를 캐기 위해 갖은 수를 썼지만 조 의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 의거임을 강조했다. - P153

조 의사는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순국 직전형리가 마지막 할 말이 없는지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삼한의 원수를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 P154

우리 역사는 조명하 의사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한인애국단이나 의열단 등 어떤 항일단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독으로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했던 까닭이다. - P154

•국립서울현충원 조명하 의사 묘: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44번 묘 참배 후 고개를 들면 좌상단에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의 묘가 보인다.
조명하 의사 의거 장소: 옛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 2018년5월 14일 의거일에 맞춰 고시패가 세워졌다.
•조명하 의사 순국 장소: 옛 타이베이 형무소 자리. 형무소 옛벽이 온전히 남아 있지만, 조 의사 관련 흔적은 없다. - P155

대만 조명하 의사상: 타이베이 한국학교 교정, 한국인들의 자부심으로 기억하기 위해 2019년 5월 11일 세워졌다.
서울대공원 조명하 의사상: 1988년 5월 14일 조명하 의사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됐다. 인근에 국가공인 친일파 김성수의 상도 함께 있다. - P156

한편 앞서 말한 대담에서 조 선생은 서울대공원에 조명하 의사상을 세우기까지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 선생에게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훈장이 아니라 멍에였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죄를 지은 게 분명히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남은 가족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중략) 관청이든 누구든 간에 와서 ‘조명하 의사‘ 이렇게 말만 꺼내면아버님이 돈을 줘야 했고, 아버님은 항상 굽실거리며 살았어요. (중략) 이건 외롭지 않은 겁니다. ‘나라에 목숨을 바친 사람의 후손이 왜 이렇게 항상굽실거리 말해야 하지? 이건 나라가 해줘야 되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솟구쳤습니다. "후손이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후손의 회한을 넘어 사회와 국가에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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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가 처음부터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아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초기에는 선교사의 활동을 어느 정도 묵인했다. 기독교를 서구 문물 수용, 일본 열도 통일, 조선 침략에 유용한 통제할 수있는 자원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1587년 바테렌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면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집행이 느슨했고 선교사들은 계속 은밀하게 활동했다.
- P63

그런데 1596년 ‘산펠리페호 사건‘이 터진다.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호가 시코쿠 해안가에 좌초했다. 히데요시는 좌초된 배의 모든 교역물자를 압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선원 중 한 명이 일본 관리에게세계지도를 펼쳐 보이며 스페인은 강대한 국가라면서, 기독교가 세계 정복을 위한 선봉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는 ‘통제되지 않는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발생할 수 있음을 감지했다. 그는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교토와 오사카 등지에서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일본인 예수회원, 신자 등 24명을 체포한다. - P63

히데요시는 본보기로 일본 기독교의 성지였던 나가사키에서 이들의 사형을 집행하기로 했다. 그들은 교토에서 시작해 오사카를 거쳐, 시모노세키, 후쿠오카, 나가사키까지, 10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한겨울에 3개월동안 걸어서 가야 했다. 이미 말할 수 없는 가혹한 징벌을 받은 뒤였다. ‘외부의 힘‘인 기독교를 믿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히데요시에 의해 이뤄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박해 사건이다. - P63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오우라 천주당이라는 곳이 있다. 천주당 정면은 니시자카 언덕을 향해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성당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된 건물 중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퓌레 신부가 성당 건립을 주도했고, 뒤이어 부임한 프티장 신부가 그 뜻을 이어갔다. 이곳은 1864년에완공되었으며, 1873년에 금교령이 해제되기 전까지 가쿠레 키리시탄들이신앙을 고백하는 장소였다. 보통 오우라 천주당으로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일본 26성인 순교자 천주당이다. - P65

글로버 가든의 가장 높은 곳에서는 나가사키 조선소가 한눈에 보인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의 주요 시설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함을건조하고 어뢰를 제조하던 곳이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이 애초 겨냥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조선소에 최소 5975명의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고, 이 중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은 최소 13명이다. 히로시마 조선소에는 28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는데, 이 중원폭 피해자는 45명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 풍광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잠시라도 그들을 기억해 보자. - P69

<나비부인>은 미국인 장교와 일본인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는데, 두 주인공의 결혼식 장면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되고,여주인공은 일본 전통 복식 기모노를 입는다. 한편 공영방송 KBS가 2024년 광복절 새벽에 <나비부인>을 방영했다가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고 "제작진의 불찰"이라는 성명과 함께사과한 일이 있었다. - P71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와 청년 문사 송몽규(宋奎, 1917~1945)의 순국지, 후쿠오카 형무소다. 1945년 이곳에서 윤동주는 2월에, 송몽규는 3월에 사망했다. 둘 다 스물여덟이었다. - P76

윤동주와 송몽규가 순국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대부분 철거되고 그 부지에는 주택과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후쿠오카 형무소 좌측 공터에 신축한 것이 지금의 후쿠오카 구치소다. 후쿠오카 지하철 후지사키역2번 출구로 나와 5분만 걸어가면 주택가 끝자락에 자리한 후쿠오카구치소 정문을 마주하게 된다. 구치소가 지하철역과 너무나 가까워 놀랍다. 동네를 걷다 보면 구치소 바로 옆에 있는 가나쿠즈강을 따라 산책하는 시민들도 쉬이 마주친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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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의사에 대한 온전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당위적인 차원의 언급이아니라 정말로 그가 걸은 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절실하다. 김익상의사는 1922년 3월 중국 상하이 황포탄의거의 주인공이다. 그가 쏜총탄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1933년 백정기 의사의 육삼정의거와 더불어 ‘상하이 3대 의거‘로 불린다. - P27

김 의사가 총을 겨눈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1929)는 일본 군부의영웅이라 칭송받던 인물이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모두 참전했으며, 일본 군부의 대표적인 전쟁론자로 평가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1920년 훈춘사건과 경신참변의 책임자였다. 말 그대로 원흉그 자체인 인물이 의열단이 활동하는 상하이로 찾아온다니, 김익상을 포함해 의열단원들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 P27

"어떠한 형벌이든지 사양치 아니할 터이며 나의 수령과 동지자는 말할 수 없으나 이후로 제이 김익상, 제삼 김익상이가 뒤를 이어 나타나서 일본 대관 암살을 계획하되 어디까지든지 조선독립을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할 터이라. (중략) 나의 이번 일에대하여는 조금도 뉘우침이 없다." - P30

1922년 9월 일본 재판부는 김익상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검사는사형해야 한다며 항소했고, 그해 11월 2심에서 김익상은 나가사키 공소원(고등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일본 왕가의 행사 등을 이유로무기징역과 20년 형으로 감형됐다. 이후 추가적으로 감형되어 1936년 여름 석방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 P30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의 출소 이후의 삶과 마지막을 특정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그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기에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마련된 위패 하나로 그를 위로할 뿐이다. 그의 위패 머리에는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이 잠들어 있다. - P31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김익상을 기리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2022년 3월28일 서울시 마포구 아현주민센터 입구에 ‘김익상 의사 본적지 터 표석이 세워졌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로지금의 아현동 일대이다. 이런 까닭에 마포문화원이 황포탄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아현동 주민들과 뜻을 모아 표석을 건립했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역사란 결국 이렇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P31

김학철 지사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했다.
북에서 잠시 활동했다는 것이 이유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다. 김학철 지사의 유언을 생각한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우리 김학철 지사를 가슴에품고 사람답게 살자. - P33

1921년 5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한 박재혁은 고향 부산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1969년 10월 박 의사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76번 무덤에 모셨다. 박 의사의 후손 및 박 의사를 따르는 후인들의 노력으로, 의거지인 부산경찰서 터에도 박 의사의 의거를알리는 입간판이 세워졌다. 주소는 용두산으로 향하는 길목인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로85번길 15‘다. 현재는 큼지막한 노래방이 자리해 있다. 이곳 역시 박 의사 생가 터인 ‘범일동 183번지‘와 더불어 너무나도 귀한 곳이다. 부산에 간다면 꼭 들러 박 의사를 위해 소주 한잔 올렸으면 좋겠다. - P40

월요일 오후 군함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평일인데도200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만 이 정도면, 휴일이나 단체 관람이 있을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올까 싶었다. 나가사키 공식 관광 웹사이트의 "세계문화유산 군함도를 가까이서 보자!" 문구처럼, 세계의 유산이 된 군함도는 이제 나가사키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어 일본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 P41

일본 정부는 1922년 ‘데지마 네덜란드 상관 터‘를 국가사적으로 지정했고, 2025년 현재 데지마는 옛 모습이 복원돼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폭신폭신 다디단 나가사키 카스테라를 한 입 베어 문 채 ‘코히커피의 일본식 발음)‘ 한 잔 들고 데지마를 걸어 보길 추천한다. 일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 그 거리를 거닐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 P52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피해자‘ 일본에 대한 참상만이 강조됐을 뿐전쟁을 일으킨 ‘가해자‘ 일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끌려와 총을 들고, 노역하고, 원자폭탄에 맞아 사망한 조선인에 대한 기록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 중 일본은 1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열도로 끌고와 탄광이나 조선소로 보냈다. 또 일부는 학도병으로, 위안부로 전선에 보냈다. 2010년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펴낸 자료에 따르면, 원폭에 피폭된 조선인 수는 히로시마에서 5만 명, 나가사키에서 2만 명으로 추정된다. - P54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친일 청산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구자 임종국 선생의 이름을 딴 임종국상 2022년 사회 부문 수상자가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라는 발표를 보고 그 존재를 처음 알게 됐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는 선정의 이유로 "풀뿌리 시민운동이 동아시아의 과거청산과 평화 실현에 기여한 공로"를 들었다.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극우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흔들림 없이 평화운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 또한 높이 평가했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이곳에 한번쯤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 P59

"받은 고통에서 가한 고통의 깊이를 깨닫는 것으로 나아가야만평화를 구할 수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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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진짜 수학여행을 떠나자
‘항일로드‘를 답사하고 책으로 쓰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것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수학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즐거웠다. 예전에는 거의 반강제로 간 수학여행이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원해서 기획한 수학여행이었다. 직접 준비해서 제대로 즐기고 의미를 찾은 진짜 수학여행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지사님들께 술을 올리고 또 올렸다. 걸음을 이으며 ‘지사님들 덕에 내가 지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기뻤고 뿌듯했으며 감동적이었다. 이 귀한 여정을 혼자만 간직하고 싶지 않아, 이 감정을 여럿이 함께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썼다. - P10

돌아보니 이 같은 마음은 2018년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을 찾아떠난 ‘임정로드‘를 마친 뒤의 마음과 매우 유사하다. ‘일생에 한 번은 백범의 계단에 서자!‘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20박 21일의 여정을 마쳤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몰아치는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기가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서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임정로드로 수학여행을 떠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임정로드 4000km> 책을 썼다. 바람이 통한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임정로드 여정을 잘 마쳤다‘는 시민들이 나타났다. - P10

현장에서 태극기를 펼쳐 놓고 지사님들께 술 한잔 올리면 좋겠다. 윤봉길과 이봉창이 순국한 그곳에서 독립투사들이 불렀던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 사인 Auld Lang Syne> 곡조로 <애국가>도 부르면 좋겠다. 윤동주가 걸었던 교토와 도쿄의 거리에서 그의 시를 낭독하면 좋겠다. 불러 본 사람만이읊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깊은 여운이 밀려온다. 단언컨대, 그 감정이당신의 내일을 만드는 기초가 될 것이다. - P11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킨 독립투사들을 기억하며술 한잔 올리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항일로드 여정을 시작하자.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만세. - P11

안정감은 여행을 여행답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항일로드> 책을 준비하며 내게 안정을 준 요소를 생각해 봤다. 예약한 비행기와 숙소도 있지만  역시나 한국에서  미리  준비한 데이터 무제한 유심과 넉넉한 동전지갑, 일본 전역을 관통할 수  있는 JR패스가 큰 힘이 됐다. 이 세 가지 덕에 일본 특유의아날로그 감성을  느끼며 안정감 있게 여정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 P12

지하철은 자동발권기를 이용해 구간별로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심지어 모든 기계가 한글 지원이 된다. 버스의 경우 기사 옆에 요금함이 있다. 다만 우리와 달리 대부분 탈 때가 아니라 내릴 때 동전을 넣어야 한다. 동전 교환기까지 있어서 500엔이나 1000엔을 넣고 잔돈으로 교환할 수도 있다. 동전을 넣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아주 오래전 동전을 사용하던 시절의 감성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슬쩍 웃게 된다. 어느새 동전지갑에서 동전을 꺼내며 아날로그 여행에 익숙해진 나를 보게된다. 유쾌한 경험이다. - P13

그들의 숨결이 깃든 곳
나가사키 형무소
나가사키를 항일로드 여정의 시작점으로 잡은 이유가있다. 나가사키 형무소 때문이다. 흑색공포단 백정기 의사가 순국한 곳, 의열단 김익상 의사가 15년 동안 수감되어 있던 곳,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지사가 광복을 맞을 때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 이곳에서 술 한 잔 올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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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코우겐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갑자기  책상에 놓인 등불이 흔들거리면서 불길이 커졌다. 코우겐이 황급히 불을 끄자  은은한 달빛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행동에서 뻗어나온 그림자가 좀 이상했다. 벽면으로 길게 늘어진그림자가 꼭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방 구석에 서서물끄러미 코우겐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 코우겐은 참으로 익숙한 느낌이구나 생각하다가 퍼뜩. 규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코우겐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행동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그림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없었다. - P174

미련이 남은 뱀未練の残った어느 날, 사가미 땅에 살던 한 스님이 죽었다. 그 후그가 머물던 방에서 큰 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디숨어 있던 것인지 방문을 열면 튀어나와 쉭쉭 대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때마다 승려들이 합세해 쫓아내곤 했는데, 뱀을 아무리 먼 곳에 가져다 버려도 계속해서 다시 나타났다. 하는 수 없이 그 스님이 살던 방은 아무도 살지 못하고 비워두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은 스님이 생전에 숨겨둔 물건이 아까워서 뱀으로 환생해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농담을 던지곤했다. - P181

그러던 어느 날, 공사가 있어 그 방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천장에서 다섯 냥이나 되는 돈이 나왔다. 승려들이 그 돈을 가지고 죽은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더니 뱀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 P181

츠다의 진주津田何某と真珠
교토, 타코야쿠시 거리에 츠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주 일곱 알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그가 먹던 밥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 P183

"애초에 살생을 생업으로 하는 이 죄 많은 남자의눈에 보살이 보일 리 있겠습니까. 만약 진짜 부처라면화살 따위에 맞을 턱이 없으니 염려 마십시오."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자, 사냥꾼은 승려를 데리고 절을 나섰다. 세 사람이 핏자국을 더듬어 쫓아보니암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짜기로 이어졌다. 골짜기 아래에는 커다란 너구리가 가슴에 화살을 꽂은채 죽어 있었다. - P185

증오의 불길은계속해서 타오르는데 상대는 없고 나만 괴로울 뿐입니다. 아, 원한을 품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쯤 극락에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괴로워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적을 없애고 없애도 원한이 끝나지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처음부터 원한 따위는 남기지 않고 죽었을 텐데.... - P-1

"그것은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으면 변하는 ‘온세키이레키‘*‘라는 것이다. 육신을 죽여도 그 영혼은 그대에게 달라붙어 있다. 오늘 밤, 반드시 온세키이레키는 그대의 피를 빨아마시며 고기를 뜯고 뼈를 씹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 P210

센다이 강변의 짐승仙台河岸の河童
캇파는 강에 사는 짐승으로, 어린애만 한 원숭이같이 생겼지만 원숭이와는 다르다고 한다. 그것은 강속에 숨어 있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깊이 끌어내려서잡아먹는 짐승이다. - P253

사람들은 이 기이한 짐승을 본을 뜨어 남겨두었는데, 훗날 마츠모토의 어느 호기심 많은 부호가 이것을사갔다고 한다. 부호가 캇파를 보았다는 사냥꾼을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자 사냥꾼은 오래전에 보았던 캇파와 똑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며 매우 놀라워 했다고한다. 오버 - P254

그날 밤, 성 안에 정체모를 괴물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몸통에 커다란 머리통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것은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성내를 뛰어다니다가, 관리관을 찾아내서는 그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관리관은 그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즉사했고, 요괴는 어둠 속으로 깍깍 거리며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것이 그가 창문을 건드렸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신임관리는 곧바로 창문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 P269

사람 잡아먹는 저택おばけ屋敷
노토 지방에 아무도 사는 사람 없이 오래도록 방치된 저택이 있었다. 저택은 사람 손길이 너무 오랫동안닿지 않아 그 외양이 상당히 기괴하고 무서웠다. 그집이 버려진 이유는 사람을 잡아먹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집이 사람을 삼켜버린다. 그렇게 여겨져왔다. - P270

그러던 중, 이쿠타 하치쥬하치라는 이름의 무사가그 저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쿠타는 구경삼아 가보기나 할까 하고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P270

"왜 울고 있느냐."
어린 하인이 대답했다.
"주인님이 잠드시고서 제가 요근래 키우던 쥐를 꺼내어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인님이 주무시다말고 벌떡 일어나시더니 그 쥐를 확 잡아 삼켜버리셨습니다." - P276

두 유령은 말을 마치자 곧바로 사라졌다. 유키노죠는 곧바로 절을 찾아 두 사람을 위한 공양을 올려주었는데 그 후로 저택에는 유령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군은 유령을 물리친 공으로그 저택을 유키노죠에게 하사했다. 그 후로 유키노죠는 오카야마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나이로 불리게 되었다. - P284

그러나 지갑에 든 돈은 진짜 돈이었고 오물이 들어있던 꾸러미는 사실 관리가 돈을 빼앗으려고 꾀를 부린 것이었다. 그렇게 큰돈을 뜯어낸 판관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가다가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나가베에게서 뺏은 돈을 모두 치료비로 써버리고 자신의 재산까지 약값에 쏟아부었지만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P294

나중에 사냥꾼은 마을의 박식한 노인을 찾아가 이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노인은 무척 안타까운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아, 아깝도다. 그것은 ‘산의 아가씨‘라고 한다. 그분의 마음에 들면 복이나 진귀한 보물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인데......" - P305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제  멈추십시오."
고승은 여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기도에만 전념했다. 그러자  여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제단으로 올라가 고승을  노려보았다.
"그깟 걸로 되겠느냐. 그만두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고승도 이에 질세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감히 내 기도를 방해하느냐!"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자 여자는 걸치고 있던 장옷을 벗어 던졌는데, 옷 속에는 여인이 아닌  거대한 귀신이 있었다. 고승은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귀신은 그것을 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곤겐이니라."
귀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승을 발로  걷어차버렸다. 제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승려는 그대로 목이 꺾여 즉사했고  여자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権現, 권현. 일본 신격의 일종. - P307

날이 밝은 후 노보리노스케 일행은 핏자국을 따라갔다. 길 끝에는 반쯤 무너진, 피칠갑이 된 흙무덤이있었다.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어 보니 피로 물든 해골이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그날 이후, 귀신은 다시는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어리석음과 오만함이 이런 일을 불러온 것이라며 모두 그날 밤을 오래도록 떠올리며 후회했다고. - P312

어떤 사람이 여자에게 대체 그런 것을 어찌 아느냐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대답했다. 모든 집에는 지킴이가 있는데, 그것들이 집안 살림을 가지고 길흉을 알리는 것이라고. 자기는 그것의 뜻을 읽을 수 있지만 보통 사람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 P316

그는 옛날 사라졌던 복장 그대로였다. 집안 사람들이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며 여러 가지를 물었으나 이치베가 배고픔을 호소하여 식사를 먼저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음식이 준비되는 사이, 이치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방바닥에는 먼지만 소복이 쌓여있었다고. - P344

그 후, 도경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고향으로 돌아갔던 스님이 병을 얻어 급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를세어보니 여자의 머리가 울부짖던 날이 승려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 P351

그 후 단이치에게 망령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는 한쪽 귀를 잃었지만 살아남았고 이후 ‘귀가잘린 단이치‘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 P358

오진시황이 서복에게 불사의 약을 찾게 한 이래, 여러 왕이 재물을 들여 불로불사를 구하려 했지만 손에넣은 사례는 없소이다. 그저 가짜 약을 판 자와 가짜선인이 잡혀와 대거 처형됐을 뿐이오.  - P375

이정전서에 이르길 사람은 육지에 사는 것이므로 하늘을 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세속과의 교제를 끊고 산속에틀어박혀 솔잎 등을 먹고살면 그저 일반적인 삶보다수명이 조금 늘어날 뿐이라 했소. 이런 진위가 분명치않은 방법을 믿고, 미련한 자가 선인 수행에 산에 들어갔다가 굶어죽기라도 하면 그 행방이 묘연해진 것을 우화"로 포장하며 ‘도를 닦다 신선이 되어 자취를 감췄다‘고 둘러대는 것이라오" - P375

‘정법에는 신기함이 없다‘, 즉 올바른 도에는 이상한 재주가 없다." - P376

돌아보니 나무에게서 뻗어나온 그림자가 초가집에 어른어른 비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찌륵찌륵찌륵,
벌레 우는 소리.
마치 웃는 것처럼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방울벌레 소리였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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