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시 씨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상당히 불쾌해지는군요. 우리까지 품격도 절도도 모르는 무뢰한이 된 것 같다, 이 말입니다. 자, 후루카와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그렇고 1년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요."
미타무라는 유리에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년이면 스무 살? 이야, 역시 나이가 차면 여자는 아름다워지는 법이군요. 후지누마 씨가 부럽습니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정각이었다. 차를 마신 뒤 나는 시마다에게 5시에 내 방으로 와달라고 말해두었다.

도모코는 시마다 기요시가 이 편지를 방금 전에 건네주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마다가 이 편지를 발견한 시각은 2시 50분쯤.
시마다가 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오후 2시 20분에서 50분 사이에 누군가 이것을 문 아래 끼워놓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를테면 손님 세 명 중 누군가가 구라모토와 도모코의 눈을 피해 일을 치를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구라모토와 편지를 건네준 도모코가 ‘협박장을 보낸 사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쪽 회랑‘에 있는 내 방은 거실, 서재, 침실 이렇게 세 공간이 연결되어 있다.복도와 연결된 북쪽의 넓은 방이 거실이고 그 남쪽으로 서재와 침실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 서재가 복도 쪽이고 침실은 중앙정원 쪽에 면해 있다. 거실과 나머지 두방은 각각 다른 문으로 연결되어 있고, 침실에서 서재로 통하는 문도 있다. 하지만 서재에는 복도로 난 문이 없다.

역시 물리적인 상황만 봐서는 ‘협박자‘를 한정할 수 없을 듯하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나 자신만은 ‘범인‘이 아니라는 것.

"자세하고 뭐고 특별한 건 없었어요. 손님 세 분이 도착한 그때, 저는 혼자 회랑을 돌며 그림을 보고 있었죠. 저쪽 ‘북쪽 회랑‘에서 이쪽으로 여유를 부리며 걷고 있는데...... 이곳 방문 밑에 녹색의 뭔가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어요. 처음에는 복도에 깔린 빨간 융단에 얼룩이 졌나 싶었습니다."
"융단의 얼룩이라."
나는 몸을 구부려 탁자의 편지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고진 씨가요?"
"당신이 추리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듯싶어서요. 그래서 나도 거기에 맞춰 상상력을 발휘해본 겁니다. 1년 전에 종적을 감춘 후루카와가 실은 이 저택 어딘가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뭔가 불미스러운 짓을 꾸미려 하고 있다......."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취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봉투도 없고 해서...
"읽었다는 말이로군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정말이지 허투루 볼 수가 없군."

"그 종이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이걸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듣고 싶군요. 아니, 그 전에."
나는 고무가면 밖으로 드러나 있는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들여다봤습니까?"

"저도 서재다운 방을 한 번 가져보고 싶어요. 규슈에 있는 저희 집은 오래된 절이라서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역시 서재는 이런 서양식 주택에 있어야 폼이 난다고 해야 할까. 괜찮다면 잠깐 구경해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갈 수 없다니요?"
"열리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당장은 누가 ‘범인‘인지 좁혀서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적어도 물리적 시간적 조건만으로는 무리입니다. 하지만 동기로 보면...... 후지누마 씨, 정말로 짚이는데가 없습니까?"
"없다고 했을 텐데요."
"그러신가요. 그럼 뭐 그렇다고 해두죠."

거무스름한 얼굴에 큼지막한 매부리코를 움찔거리면서 시마다는 다시 서재 문을 쳐다보았다.
"흥미롭다고 하면 실례겠죠. ‘열리지 않는 방‘이라......."

(구라모토한테도 기회는 있었어)(목적은? 이 협박 글에 담긴 의미는?)
구라모토 쇼지. 그가 의미를 두는 것은 저택의 주인이 아니라 이 저택 자체라고 나는 예전부터 생각해왔다. 그는 후지누마 기이치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수차관이라는 이 집에 봉사하고 있다.

휠체어를 움직이면서 나는 사고의 방향을 틀었다.
(역시 ‘범인’은 저택을 방문한 손님 중에 있어)
그렇게 단정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 것이다.
시마다 기요시까지 네 사람.

"아, 그렇지. 실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오늘 밤 ‘탑‘에 있는 당신 방으로 그림을 보러 가고 싶은데요.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보긴 했지만, 다시 한 번 꼭....
"아니, 후지누마 씨한테는 비밀로요. 아마 싫어하실 겁니다. 둘이서만 천천히 얘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어때요, 괜찮죠?"
"좋아요, 결정한 겁니다. 그럼 오늘 밤, 그렇지, 자정 넘어서 뵙겠습니다. 알겠죠?"

(그렇다면 설마......)
다음으로 유리에를 머릿속에 그렸다가 바로 떨쳤다.
그건 아니다. 결코 그럴 리 없다.

규슈 전역을 폭풍우 속으로 밀어 넣은 태풍 16호는 진로를 유지하며 동쪽으로 나아가다가 오늘 밤에서 내일 아침 사이에 동해 쪽으로 빠져나갈 전망이며, 세력은 약간 약해졌으나 주고쿠 지방에도 꽤 강한 비바람이 예상되니 주의를 기울이라는 내용이었다.
"길이 또 무너지지나 말아야 할 텐데요."

(그래, 유리에가 제법 성숙해지기는 했어)그래서 작년까지는 그런 티를 내지 않던 호색한 외과 의사가 갑자기 유리에한테 흥미를 보이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휠체어를 돌려 어스름한 회랑을 되짚어갔다.

"그리고 후지누마 씨의 건강과 유리에 씨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껄이는 미타무라의 말에 내 옆에 앉은 유리에는 미소로 답했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가슴이 턱 막혔다.
유리에는 저녁을 들기 전에 ‘북쪽 회랑‘에서 미타무라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아직 내게 알리지 않았다. 엿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가능하면 먼저 고백해주기를바랐다.

어느 틈엔가 냅킨과 안주 포장지로 만든 다양한 ‘종이접기 작품‘이 그의 앞에 진열되기 시작했다. ‘학‘이며 ‘배‘, 난생처음 보는 훨씬 복잡한 ‘작품‘도 있었다. 아무래도종이를 접는 움직임이 몸에 배어서 손에 잡히는 종이는 무의식중에 접어버리는 모양이다.
"술이요?"
내 물음에 시마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을 멈췄다.
"그럼 좀 마셔볼까요."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복도에서 본 것이 있어요."
"뭘 말입니까?"
"복도의 융단이 젖어 있는 걸요."

"그런 일이 터진 직후라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지만 제가 선두에 서 있었다는 건 확실히 기억해요. 그러니까 오이시 씨, 미타무라, 후루카와 씨, 저까지 넷이서 되돌아올 때 제가 맨 앞에서 걸었다는 말이죠. 모두 비를 맞아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흠뻑 젖어 있던 터라 우리가 지나간 다음이라면 융단이 젖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어요. 하지만 제 눈에 들어온 건 앞쪽, 그러니까 비에 젖은 우리가 지나가려는 곳이었습니다."

"구라모토 씨의 목소리가 ‘별관‘까지 들렸고 그 후에 현관 쪽이 시끌시끌했어요. 아무래도 무슨 큰일이 났구나 싶어서 우리는 현관으로 달려갔고, 네기시 씨가 그렇게물살에 휩쓸려간 다음에 우리는 다시 ‘별관‘ 쪽으로 되돌아왔었죠."

"융단이?"
"예. ‘남쪽 회랑‘에 깔린 융단이 물에 젖어서 더러워져 있었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요?"
오이시가 끼어들었다.
"아니, 뭐...... 아아, 그냥 그랬단 말이죠."
시마다는 입을 오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를 주시한 채 손가락을 움직여 또 ‘종이접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언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누군가 네기시 후미에를 살해했다, 그때 후루카와 쓰네히토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마사키를 죽인 범인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혐의의 소극적인 부정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요컨대 이런 이야기로군요. 어수선한 소리를 듣고 여러분이 현관으로 달려간 그때 이미 몸이...... 아니, 적어도 구두가 물에 젖은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섞여 있었다.
‘여러분‘이란 그때 ‘별관‘ 쪽에서 달려온 네 명. 여기에 계신 세 분과 돌아가신 마사키 씨죠. 그리고...... 아, 교수님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다른 가능성. 예를 들어, 그렇지. 꽃병의 물을 쏟았다거나 화장실 수도꼭지가 고장 나서 물이 튀었다거나 그랬던 분은요? 역시 안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젖은 원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비를 맞았다는 것."

"그럼 여기서 결론입니다. 그 사람이 비를 맞은 곳은 ‘탑의 방‘ 발코니다. 즉 그 사람이 네기시 후미에가 추락하는 데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다는 말입니다. 더 단적으로 말할까요? 비에 젖은 그 사람이 바로 네기시 후미에를 발코니에서 떨어뜨린 범인입니다."

"호오, 그럼 이 작품은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마사키는 눈앞 벽에 걸린 소품을 가리켰다.
‘분수‘라. 1958년 작품이로군요."
미술상은 팔짱을 끼고 언덕 위에 분수가 있는 기묘한 풍경을 응시했다.
천오백 만."

"세상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해요. 돈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죠. 그 차이를 구분하는 것, 그게 장사라는 거요. 마사키라는 남자는 한눈에도 못 가진 자로 보입디다. 그렇지 않소? 어쩐지 그 스님이랑 분위기가 비슷하잖아요."
"아하, 후루카와 씨. 그 사람은 예년보다 혈기가 더 없어 보이더군요."
"그야 그럴 테죠. 원래도 그랬지만, 특히 아까는 그림이 몇 천만 엔 어쩌고 하니까 더 그랬겠죠. 그 스님이 잇세이 화백의 그림에 끌리면 끌리는 만큼 아쉬움은 더 커질 거요."

10년을 한 지붕 아래서 같은 ‘집‘에 헌신해온 여자의 죽기 직전의 얼굴과 표정. 그때 거센 빗줄기 사이로 들린 비명까지도 귓속 깊은 곳에 박힌 채 메아리쳤다.
수차에 튕겨서 공중에 떴다가 탁류 속에 빨려 들어간 그녀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길이 끊겨서 수색이 불가능하다던 경찰의 목소리에서도 이미 늦었음을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생각해보시오. 그 남자는 반년 전부터 이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어요.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해요. 한두 달이면 모를까 반년이라니...... 그렇지않소? 뭔가 구린내가 나."
"구린내요?"
"음, 아주 폴폴 풍겨요. 돈이 엄청 아쉽든지 아니면 그보다 더 골치 아픈 사정이 있을 거요. 오늘 그 남자를 처음 봤을 때도 어쩐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었어요. 아무래도 그 사진 같은 걸 보지 않았나 싶은데."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놀라움과 두려움,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이 그의 마음속을 더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서로 뒤얽혀서 그의 마음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식사 준비는 익숙하지 않았다. 더구나 후미에의 얼굴과 목소리가 문득문득 뇌리에 되살아나서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식사 시중을 들 때 접시 한 장 깨뜨리지 않은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설거지를 마치면 그다음은 수차 기계실 점검과 문단속.......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후미에가 주인에게 말했다. 밤에도 감기약을 잘 챙겨 드시라고. 어떻게 할까. 뭐,
괜찮을 것이다. 주인의 건강관리는 자신의 담당이 아니니까.

2026.07.04 오후 20시 2분48%
"그럼 저도 이만 쉬겠습니다."
홀을 떠나려는 구라모토의 뒤에서 그런 말소리가 들리더니 마사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때 별 생각 없이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 50분이었다.
‘남쪽 회랑‘에서 현관 홀로 향했다.

후루카와는 허둥거리며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그러더니 바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그럴 생각으로 그런 건...... 그러니까 그, 정말로 멋진 그림이라서 저도 모르게 그만."
"어찌되었든 작품에 손은 대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아, 그건, 예."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이 붉어졌다.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수치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구라모토는 알았다.
"거듭 당부 말씀 올립니다. 유념해주십시오."

어스레한 회랑 가운데쯤에 사람이 보였다.
누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한순간 움찔했지만, 둥글둥글한 민머리를 보고 바로 후루카와 쓰네히토임을 알았다. 마르고 왜소한 몸에 흰색 긴팔 셔츠, 검은 슬랙스. 멀찍이서 보니 마치 아르바이트에 지친 고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잔을 비운 뒤 불을 끄고 어중간한 취기에 비척거리며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반쯤 걷어두었던 남쪽 창의 커튼을 치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는 분명 그것을, 암흑 속에서 흔들리는 작고 노란 빛을 보았다.
‘별관‘ 쪽이었다.

구라모토에게 후미에의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 남자는 유능한 ‘집사‘지만 결코 주인인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집‘, 이 건물 자체에 충성할 뿐이라고 기이치는 생각했다.

(무슨 빛이었을까)구라모토는 혼자서 되물었다.
2층 복도는 불이 꺼져 있다.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 불빛..
(누가 담배에 불이라도 붙인 걸까)(......전등이 꺼진 깜깜한 복도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이 열릴까.
하얀 천장갑을 낀 양손으로 드러난 뺨을 만져보았다. 천 한 장을 사이에 두어도 우둘우둘 불쾌한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다못해 이 얼굴, 이 두 다리라도 성했더라면......)

"유리에예요."
기이치는 바로 문을 열었다. 어둑어둑한 복도에 하얀 네글리제로 몸을 감싼 어린 아내가 서 있었다.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니?"
그는 놀랐다. 혼자서 ‘탑의 방‘에 있기 싫으면 이리로 오라고 말은 했지만 설마 진짜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그 방에 혼자 있기가 힘들었구나."
"아니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아아, 유리에)바로 그녀만이 그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존재였다. 마사키 신고가 지적한 대로 그는 이 저택에 모아들인 후지누마 잇세이의 환상풍경 속에 그녀를 가두어 독점하는것에서만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유리에는 내 손안에 있어도 도저히 손에 닿지를 않아)

"불을 켰더니 뒷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게, 뭔가 이상했어요."
"뒷문이?"
"예. 그리고 복도의 그림이 한 장 없어졌고요."
"뭐라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길이 도중에 끊겨서 마을과 저택을 오가기는 불가능해. 게다가 저 자물쇠를 봐. 부서지지 않았어. 안에서 돕지 않는 한 외부인이 들어올 수는 없다고 보네."

"후루카와 씨는?"
"없습니다."
미타무라가 계단 난간 너머로 상반신을 내밀고 대답했다.
"방에 아무도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야심한 밤에 벌어진 이 이상한 사태에 모두 곤혹을 감추지 못했다. 입을 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건물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2층 높이의 공간에 고인 긴장된 공기를 뒤흔들 뿐이었다. 이윽고.

"문은 안 잠겨 있고, 방 안에는 짐이 그대로 있더군요."
"화장실에는?"
"화장실과 욕실에도 없어요. 몇 번이나 불러봤는데, 아무래도 2층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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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둥피둥하니 불그무레한 얼굴에 알랑거리는 웃음을 띠고서 굵은 목소리로 말하는 미술상. 희고 단정한 얼굴로 눈꼴신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 외과의. 왜소한 몸을 움츠리고 보청기가 달린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로 소심하게 눈을 깜박이는 대학교수.
하지만 작년과 마찬가지로 현관 홀에서 그들을 맞이한 내 마음은 작년과는 또 다른 형태로 복잡하게 흔들렸다.
이유는 몇 가지나 있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작년 모임 날에 일어난 그 사건이다. 그들이 찾아온 바람에 좋든 싫든 되살아난 그 폭풍우 치던 날 밤의 기억…….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오로지 저택 회랑에 걸린 후지누마 잇세이의 작품들과, 그리고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잇세이의 유작 ‘환영군상’이라 불리는 그 그림에만 관심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날의 사건으로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역시 방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춘 그 남자였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죽었을까, 아니면 어딘가에 살아 있을까.

"작년에 마사키가 쓰던 방입니다. 괜찮겠어요?"
"마사키라면…… 살해당한 그 마사키 신고?"
좀 놀란 듯했지만 시마다는 곧바로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런 건 별로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내객용 방은 전부 몇 개나 있나요?"
"1층에 세 개, 2층에 두 개. 당신이 쓸 방은 2층에 있습니다."

"그럼 2층에 있는 또 다른 방이 작년에 고진 씨가 쓰던 방인가? 맞죠? 거기가 작년에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고진 씨가 사라진 방이죠?"
"예, 그 후로 그 방은 잠가두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바로 그때, 현관문 위쪽 무늬가 들어간 반원형 유리 너머로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은 구름과 그 사이를 내달리는 섬광이 보였다. 곧이어 산도 무너뜨릴 기세로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1년 전 오늘을 재현하려는 듯한 자연의 조화에 나는 불길한 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탑의 방’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다가오는 폭풍우의 발소리에 겁을 먹기라도 한 듯 한없이 어두운 그늘 속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 구름, 산, 강……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음울한 잿빛 세계.

1년 전. 유리에는 태어나서 스무 번째로 맞이하는 봄에서 여름 사이 한때를 마사키 신고가 치는 이 멜로디 속에서 보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쳐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칠 수 없어, 그때의 마사키 신고처럼은)

"이게, 그러니까 주인어른의 방 문 아래에……."
두 번 접은 편지지였다. 옅은 잿빛 바탕에 검은 세로 괘선이 들어간 아주 흔해빠진 물건이었다.
(이게 내 방에?)
무슨 일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펼쳐보았다.
 
나가.
이 집에서 나가.

"이건……."
흠칫흠칫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노자와 도모코를 나는 가면에 감춰진 굳은 얼굴로 노려보았다.
"언제 발견했지?"
"아, 예. 그게, 방금 전에요."

형식적인 인사를 하면서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네 남자와 차례로 눈을 맞췄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1년 전과 변함없는 얼굴들. 네 번째 자리만 달라졌다. 작년에는 후루카와 쓰네히토가 앉았던 자리. 그곳에 자리를 차지한 남자는 아까부터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뭔가를 그리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나는 조금 전에 편지지를 넣어둔 가운 호주머니를 더듬으며 다른 한 손으로 ‘불청객’을 가리켰다.
"시마다 기요시 씨. 사정이 있어서 오늘 특별히 초대했습니다."

오이시 겐조, 모리 시게히코, 미타무라 노리유키, 그리고 시마다 기요시. 나는 다시 한 번 모인 남자들을 차례로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도대체 누가 이 글을 썼을까)
(누가?)
(무슨 목적으로?)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이군요."
세 사람이 구라모토의 안내를 받으며 ‘남쪽 회랑’ 쪽으로 사라지자 마사키 신고는 그렇게 말하며 뼈가 불거진 어깨를 움츠렸다.
"모두 뱃속에 시커먼 속셈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요. 저런 사람들을 왜 또 불렀어요?"
"전에 한 번 설명했을 텐데."
가면을 쓴 저택 주인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이시 겐조는 잇세이의 작품을 오래 전부터 취급해온 미술상. 모리 시게히코는 잇세이의 작품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고 잇세이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미술 연구가의 아들. 미타무라 노리유키는 12년 전 사고 당시 기이치와 두 친구가 실려 갔던 병원의 후계자.

"아마 아버지 당신도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의아하셨을 거야. 몹시 당황했고 겁에 질리셨지."
기이치가 생각하건대 후지누마 잇세이는 진정한 의미의 ‘환시자’였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의 그림은 ‘마음의 눈’이 포착한 환상풍경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본 그 풍경에, 그것을 옮긴 그림에 그는 당황하고 겁을 먹은 것이다.

"아버지처럼 나도 그 그림이 무서워. 꺼려질 만큼 오싹해. 그래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뒀어. 아무한테도 보여주기 싫고, 나도 보고 싶지 않거든."

"한 분 더 오신다고 들었는데, 스님이셨죠? 후루카와 씨였던가요?"
"음. 대대로 우리 가문의 위패를 모신 절의 부주지지. 오늘은 다카마쓰에서 바다를 건너올 거야."
"부주지라면 혹시 주지 스님의 아드님?"
"그래. 춘부장이신 주지 스님이 우리 아버지랑 자별한 사이셨거든.".

주인인 후지누마 기이치는 그를 ‘집사’라고 불렀다. 구라모토 역시 그 명칭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주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뿐 아니라 동정심도 품고 있었다. 또한 다리가 불편한 주인을 대신해서 이 넓은 저택을 관리하는 일은 그에게 커다란 충족감을 주었다. 그 감정은 때때로 자신이 이 저택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10년 근무한 이 직장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충족감과 만족감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집사’는 언제 어느 때라도 충실하고 조용하고 무표정하고 영리하고 냉정한 ‘로봇’이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신조였다.
어쨌거나 눈곱만큼의 모자람과 불편함이 없도록 이 저택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다. 그리고 주인의 발언과 행동에 쓸데없이 참견해서는 안 된다. 주인과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구라모토는 두세 계단 올라가서 다시 가정부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건물을 때리는 빗소리 사이로 뭔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목구멍에서 나온 찢어질 듯한 소리…… 그것은 비명이었다.

"주인어른, 큰일 났습니다."
집사는 평소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던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후, 후미에 씨가."
"왜 그러나?"
"방금 전에 후미에 씨가 ‘탑’ 위에서……."
"무슨 소리지?"
"수로에 떨어져서 떠내려갔습니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네기시 후미에의 몸은 돌아가는 수차에 휘말려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마 후.
무표정하게 돌아가는 수차 세 대가 넝마처럼 변한 하얀 앞치마 차림의 후미에를 뱉어냈다. 거센 물살 속에서 어른거리던 후미에의 몸은 후루카와가 서 있는 다리 밑을 지나 하류로 흘러갔다.

물살에 휩쓸려 내려간 네기시 후미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쫓아가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본들 그녀를 구할 방법은 없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비는 사정없이 내리쳤고 물살은 사나웠다.

"이 난간, 흔들흔들하는데요. 발코니에 고정한 아래쪽 볼트가 헐거워요."
번개가 다시 시커먼 골짜기의 풍경을 하얗게 밝혔다.
"아아……."
가면을 쓴 저택 주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신음을 토했다. 골짜기의 정적을 산산조각 내는 폭풍우를 원망하며 10년을 함께한 잔소리꾼의 죽음을 소란한 마음으로 애도했다.

"비 때문에 저택으로 오는 길이 중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빗발이 점점 더 거세져서 폭풍우가 지나갈 때까지는 방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고진 씨가 타고 온 택시는 간발의 차로 되돌아갔다는 말이로군."
시마다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물었다.
"그런데 구라모토 씨. 네기시 후미에 씨의 시신이 발견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던가요?"
"그렇습니다."

"사인은?"
"익사라고 들었습니다."
"발코니에서 수로로 떨어진 후, 잠시 동안은 살아 있었다는 말이군요. 흐음."

"볼트가 헐거워진 발코니의 난간. 비, 천둥번개, 그리고 거센 바람. 사고가 일어나기에 충분한 상황이죠.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 상황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분이 아무리 악조건이 겹쳤다고는 해도 익숙하게 다니던 발코니에서 떨어지다니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런 이상한 살인사건이 발생했죠. 우연이 너무 겹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불행이란……."
나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때때로 그렇게 믿기지 않는 우연이 한꺼번에 겹쳐서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엘리베이터는 2층에 멈춰 있었다는 뜻입니다. 같은 시간, 엘리베이터의 유일한 사용자인 후지누마 씨는 유리에 씨와 단둘이 현관 홀에 계셨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평상시에 후지누마 씨만 엘리베이터를 쓴다면 당사자가 ‘탑의 방’에 없을 때는 엘리베이터가 항상 1층에 있을 테고 표시등은 ‘1’일 겁니다. 그런데 ‘2’였다는 건……."
"누군가 다른 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의 방’에 올라갔다, 그런 이야기로군요."

"잊으셨습니까? 그때, 그러니까 구라모토 씨가 우리를 방에 안내할 때, 복도를 걷다가 오이시 씨가 구라모토 씨한테 말을 거셨을 텐데요."
"아……."
"후미에 씨는 저녁 식사 준비로 많이 바쁘냐고요. 구라모토 씨는 이렇게 대답했죠. 아직 유리에 씨의 방을 청소하고 있을 거라고."

"행여 오해하실까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결코 경찰의 끄나풀이 아닙니다. 사고로 묻힌 사건을 파헤쳐서 진범을 붙잡아 영웅이 되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저는 다만 그 후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이 후루카와 쓰네히토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이렇게 제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려고 결례를 무릅쓰고 오늘 이 저택에 찾아온 겁니다."

"확실해졌군요. 사용했다고 나서는 분이 없으시다, 즉 이런 뜻이죠. 그날 누군가가 엘리베이터를 의도적으로 사용했으며, 그 누군가는 자기가 한 짓을 다른 시랐으면 한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기회는 언제 있었을까요?

"잊으셨습니까? 그때, 그러니까 구라모토 씨가 우리를 방에 안내할 때, 복도를 걷다가 오이시 씨가 구라모토 씨한테 말을 거셨을 텐데요."
"아......."
"후미에 씨는 저녁 식사 준비로 많이 바쁘냐고요. 구라모토 씨는 이렇게 대답했죠. 아직 유리에 씨의 방을 청소하고 있을 거라고."

처음에는 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이 건물 어딘가에 부딪치는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똑같은 소리가 또 들렸다.
방 한쪽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담배를 피우던 마사키 신고는 의자를 빙글 돌렸다.
"누구십니까?"
"저, 후루카와입니다."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마사키는 문으로 다가갔다.

골짜기에 몰아치는 폭풍우는 저녁이 되어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경찰에서 산길이 도중에 무너져서 올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리하여 이저택에 갇힌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버님이 잇세이 선생님과 자별한 사이셨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저는 그 영향으로 잇세이 화백이 그린 그림의 포로가 됐죠.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해서 가능하면 그 방면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절을 이어받아야 하니어쩔 수 없이......."

후루카와 쓰네히토는 몸이 비썩 말랐고 굽실거리는 태도가 눈에 띄는 남자였다. 키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민머리 때문인지 광대뼈가 유난히 불거져 보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제법 남자답게는 생겼지만 나쁜 안색에 얼굴의 장점이 묻혔다.

마사키는 담배를 물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 그리운 연인, 호쓰타 게이코의 얼굴이 가슴 한구석을 쓸고 지나갔다.
"그녀는 그때 죽었어요. 후지누마 씨는 얼굴과 팔다리, 척추를 크게 다쳐서 이 저택에 이렇게 숨어 살게 되었죠. 저는 다행히도 온전했지만 후유증이 생겨서 그림을그릴 수가 없었답니다."

"후루카와 씨도 아는 모양이군요. 저는 12년 전에 붓을 꺾었습니다. 그 후로 오늘까지 제대로 된 그림은 한 장도 그리지 않았어요."
"혹시...... 12년 전의 그 교통사고로?"

"그렇다면 미타무라 씨 댁은 주인장이 독점한 그림을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은 마음이 훨씬 강할 듯싶은데, 아니오?"

"이를테면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을 ‘인류의 공동재산‘ 운운하며 평가하는 방식은 그 자체가 난센스예요. 공적인 평가는 일종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장치에 지나지 않죠. 백 명이 피카소의 그림을 봤다고 칩시다. 그 중에 몇 명이 그 안에서 순수한 미를 발견할까요?"
"견강부회 격이구먼."

하기야 인간은 결국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서는 뭔가를 느끼거나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예술성‘이니 ‘미‘니 하는 개념도 그 제도에갇힐 수밖에 없다. 아니, 애당초 우리가 사용하는 ‘말‘ 자체가 ‘제도‘의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작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미타무라는 냉소어린 표정을 지으며 퉁퉁한 미술상을 곁눈질했다.

"이렇게 멋진 예술 작품을 이런 곳에 처박아놓다니 죄짓는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안 그렇습니까, 교수님? 미타무라 씨?"
"그런 다음에는 본인이 독점하겠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하지만 두 분도 제 마음하고 같지 않습니까?"
"허어...... 뭐, 그야."
(그 말이 맞다)

"저는 12년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후지누마 씨가 자기가 만든 폐쇄적인 세계에 자신을 가둔 것과는 대조적으로요. 뭐, 그러고 다니는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생겨서 후지누마 씨한테 받은 사고보상금도 바닥이 났고...... 난처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결국 올봄에 염치 불고하고 이곳으로 쳐들어왔습니다. 후지누마 씨는 아마저한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였겠죠, 진심은 어떨지 몰라도 흔쾌히 거둬주더군요."

(우리의 바람은 기이치를 대신해 여기 소장된 잇세이의 작품을 ‘독점‘하는 것이겠지)모리 역시 자신을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했다. 미타무라의 말대로 잇세이의 그림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거 말이오, 그거. 우리도 아직 본 적 없는 그......."
"아아."
"아까 오자마자 슬쩍 찔러는 봤는데 말입니다."
"역시 퇴짜?"
"찬바람이 쌩 붑디다. 뭘 그리 꺼리는지, 원."
"미타무라하고도 오면서 이야기했어요. 그 일은 당분간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아, 역시 그래야 하나."
오이시는 인상을 찌푸리고 짜증스럽게 콧등을 긁적였다.
"그렇게까지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어쩌면 이것이, 이 설명이 불가능한 감각이야말로 자신이 ‘선택받은 자‘라는 증거가 아닐까.
과연 알까.
작품을 돈으로밖에 보지 않는 장사꾼 오이시나 건방지게 입만 나불대는 애송이 미타무라가 이 감각을 조금이라도 알기나 할까.

"흐음. 그분은 뭐랄까, 예전부터 필요 이상으로 우리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 같더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아까도 자기는 어차피 남루한 절의 중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재능도 없어서 한심하다,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말만 한바탕 늘어놓더군요."

"발이 묶이면 묶인 대로 고맙게 여길 일이지요. 그만큼 잇세이 화백의 작품을 오래 감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마사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폭풍우를 가장 마뜩잖게 여길 분은 후지누마 씨겠군요."

"유감스럽지만 저도 모릅니다. 문제의 ‘환영군상‘이 저택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데."

"어허, 이래서야 오늘 밤도 그건 허탕이구먼."
오이시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거?"
마사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타무라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잇세이 화백의 ‘환영군상‘ 말입니다. 오이시 씨도 참 집요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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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그림은 세상에 발표되지 않았죠. 완성하고 얼마 뒤 화백은 병으로 쓰러졌고, 병으로 세상을 뜬 뒤에는 고베의 집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요. 듣건대 그건 화백 자신의 뜻이기도 했다는군요. 그리고 그 후에는 후지누마 씨가 그 저택에 가져가버렸고."

"그 그림…… 환상의 유작 ‘환영군상’……."

그렇게 중얼거리고 미타무라는 날렵한 턱 끝을 쓰다듬었다.

"교수님 부친께서는 보셨다는 말씀이죠."

"뒤에서 수군거리기 뭣하지만,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사람은 자의식과 열등감의 화신이에요.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의식과 열등감의 화신)
모리는 미타무라의 과격한 표현에 멈칫했지만 바로 수긍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12년 전 겨울에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모리와 미타무라는 물론 오늘 저택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다른 두 사람, 오이시 겐조와 후루카와 쓰네히토도 잘 알고 있었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운전대를 잘못 조작해 반대 차선에서 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차는 엉망으로 망가지고 불탔다. 동승한 친구 중 한 명은 즉사했고 기이치는 얼굴과 양쪽 팔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상태가 너무 끔찍해서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이것은 미타무라의 말이다.

그리하여 기이치가 그런 자신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그 가면이었다.
(하얗고 표정 없는 얼굴……)
모리는 지금도 그 ‘얼굴’을 보면 섬뜩해서 소름이 돋았다.

퇴원한 후에 기이치는 그때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어오던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아버지 잇세이의 유산까지 합쳐서 마련한 막대한 자금의 일부를 들여 오카야마 현 북부의 이 산간 지역에 세상과 단절된 기묘한 저택을 지었다.

잇세이의 작품 대부분을 자기 손에 넣었다.
그들은 그것을 ‘후지누마 컬렉션’이라고 불렀다.

그런 가운데 1년에 딱 한 번, 잇세이의 기일인 9월 28일, 저택에 방문해서 수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허락된 네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 모리, 미타무라, 오이시, 후루카와였다.

"3년 전에 혼인 신고를 했다고 들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요. 유리에 씨는 어릴 적부터 줄곧 그 집에 갇혀 지낸 셈이잖아요. 아마 ‘결혼’의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일방적으로 아내라는 이름을 떠안았을 거예요."

"어디서 들은 이름이다 싶더니만."
"그런데 어째서 마사키 씨가 여기에?"
미타무라가 그렇게 물었을 때.
바깥 풍경이 한순간 허연 섬광에 감싸였다.
콰광!
이어서 하늘이 갈라질 듯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리에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고, 현관 홀에 모인 일동은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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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책이다.
갑자기 어제 아침 7시
북플 마니아 시리즈에 새로운게 하나 생겼다,
“유럽 도시 기행” 이었다.
근데 이게 왜생겼을까
그런데 가지고 있는 책 표지 색이 아니었다.
보라 & 핑크..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었갔으나....
오후 들어.. 어 색이 왜이러지 의문이 생겼다.
아!!! 새 책이 나왔구나.
사야지... 하다가
야. 책꽂이에 꽂아놀데도, 쌓아놀데도 없잖아...
이북을 기다려야 되나.. 고민이 ㅠ

유시민, 유홍준...유씨들이 글을 잘 쓴단 말이야.
부러워!!

유시민 마니아 2등, 유홍준 마니아 1등
유시민도 언능 1등 만들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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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의 대발해 - 전10권 세트 (케이스 포함)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김홍신의 『대발해』 타임라인 & 명문구

1. 건국 (668~698)

• 명문구: “고구려의 칼끝이 발해의 기둥이 되었다.”
• 핵심 사건: 대중상·대조영의 재건 준비, 천문령 대첩, 동모산에서 진국 건국.


2. 성장·중흥 (698~830)

• 명문구: “군주의 힘과 충신의 피가 국운을 세웠다.”
• 핵심 사건: 대무예의 공세적 기상, 장문휴의 등주 공격, 대흠무의 문치와 수성, 대인수의 최대 판도.


3. 붕괴 (830~900)

• 명문구: “간신의 술책과 군주의 방탕은 백성의 고혈보다 더 빨리 국운을 말린다.”
• 핵심 사건: 대원의 찬탈, 황실 혼란, 외척·권신 정치, 민심 이반.


4. 멸망 (900~926)

• 명문구:• “참매가 죽자 발해도 죽었다.”, “외침은 칼끝이었을 뿐, 이미 안에서 자멸했다.”
• 핵심 사건: 대위해·대인선의 타락, 거란 야율아보기의 총공세, 홀한성 함락, 대광현의 고려 망명.


5. 역사적 교훈

• “내부 혁신과 민심 통합 없이는 어떤 강국도 오래 가지 못한다.”
• “간신의 달콤한 말은 나라를 무너뜨리고, 충신의 피는 역사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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