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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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문] 『유럽 도시 기행 3』 포르투갈편

리스본 ― 제국의 영광과 그늘, 그리고 저자와 티격태격하며 걸은 도시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지나 이제 포르투갈로 넘어간다.

잠깐, 이베리아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재미있는 게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 조그만 포르투갈이 반도 서쪽의 대서양 연안을 길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스페인이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리스본과 뽀르투를 비롯한 좋은 항구들은 포르투갈 땅이다.

물론 스페인에도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은 있었다. 그러나 갈리시아나 남쪽의 항구 몇 곳을 가지고 있는 것과, 리스본과 뽀르투를 포함한 포르투갈의 긴 대서양 연안을 통째로 차지하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천지차이다.

지도를 보고 있으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은 저 땅을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그러다가 생각을 좀 더 깊이 해봤다. 애초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두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당시 두 나라가 차지했던 세계지도를 겹쳐놓으면 상상은 훨씬 커진다. 남아메리카 대부분은 사실상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역이었고,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태평양과 필리핀으로 뻗어나갔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마카오까지 이어지는 해상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나라의 힘이 하나로 합쳐진 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면 유럽과 세계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에 걸친 거대한 해양제국이 되었을 것이고, 훗날 영국, 프랑스,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하거나 오히려 앞서가는 강대국으로 남았을 가능성도 상상해볼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과연 지금과 같은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고 때로는 싸웠다. 포르투갈은 거대한 스페인 옆에서 끝내 자기 나라를 지켜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참 답답했겠다. 그래도 끝내 못 먹었다. 솔직히 나는 엄청 꼬시다. 피사로를 비롯한 정복자들이 아메리카에서 벌인 일을 생각하면 스페인 제국의 화려한 영광을 마냥 좋게 바라볼 마음도 없다.

그렇게 지도를 한 번 들여다보고 리스본으로 들어갔다.

리스본에서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세운 폼발 후작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를 따라가다 보면 포르투갈의 독재와 개발, 사라마구와 페소아의 문학, 벨렝에 남은 제국의 기억, 마누엘 양식의 화려함과 그 뒤에 가려진 노예무역과 침략의 역사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도시를 읽는 동안 내가 계속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하나였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1. 폼발 후작, 이름부터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 직후 왕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외무장관은 죽은 사람을 묻고 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말에 그치지 않고 폐허가 된 리스본을 다시 세웠다. 오늘날 리스본 한복판의 높은 곳에 왕이 아닌 그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다.

그런데 저자는 그의 작위가 리스본과 뽀르투 사이의 지명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면서, 본명이 너무 기니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한다.

아니,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면 이름부터 알려주고 무엇을 기억할지는 독자에게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 ‘폼발’은 그의 이름도 아니고 지명에서 따온 작위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이 책의 저자를 ‘경주 출신 작가’라고 부르면 될 일이다.

그래서 저자가 굳이 알려주지 않은 이름을 찾아봤다.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적어놓고 보니 짧은 이름은 아니다. 그래도 리스본을 폐허에서 다시 일으킨 사람이라면 이 정도 이름쯤 한 번 알고 지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더 재미있는 것은 왕의 이름이다. 저자는 왕의 이름이 꼭 궁금하면 가서 확인해보라고 한다. 이번에도 독자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그 왕은 주제 1세(José I)였다. 폼발 후작의 이름도, 왕의 이름도 결국 내가 찾아봤다.

2. 폼발을 읽다가 박정희를 떠올리다

폼발 후작은 리스본을 재건한 유능한 행정가였지만, 권력을 집중시키고 반대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자는 그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시대를 앞서간 인문주의자’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리스본을 재건한 공이 크다고 해서 강압적 통치와 탄압이라는 과가 작아지는 것일까. 반대로 독재적 통치를 했다고 해서 리스본을 되살린 그의 업적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저자는 그의 동상에 인사를 하고, 폼발이 자신에게 “국가의 기능과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여기서 박정희가 떠올랐다.

두 사람을 같은 인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시대와 정치체제가 다르다. 그러나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반대세력을 억압한 동시에 국가에 커다란 변화를 남겼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역사적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다. 폼발의 독재에는 이렇게 후하면서 박정희에게도 같은 잣대를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런데 조금 더 읽자 내가 유시민을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모든 독재는 나쁘다고 전제하면서도 한국의 경험을 ‘성공한 개발독재’라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반대로 살라자르의 포르투갈은 산업발전이 노동조합과 공산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경제발전 자체를 억제한 ‘저개발독재’였다고 평가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나의 한국현대사』를 두 번이나 읽었다. 그런데도 저자가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 성과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책을 두 번 읽었다는 것과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처음 품었던 이중잣대에 대한 의심은 여기서 조금 거두었다.

그러나 더 어려운 문제가 남았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가.

리스본을 재건한 폼발과 사람을 탄압한 폼발은 같은 사람이다.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와 유신독재의 책임자 박정희 역시 같은 사람이다. 공이 있다고 과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과가 있다고 공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법정이 정말 있다면 사람에게 최종점수를 매기는 곳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이 지녔던 여러 얼굴을 모두 기록하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공과 과를 함께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3. 사라마구를 보며 내가 기억하고 싶은 작가들을 생각하다

리스본에서 만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장소는 주제 사라마구 기념관이었다. 특히 포르투갈어권의 여러 창작자가 사라마구 작품의 제목을 저마다의 손글씨로 써서 만든 전집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한 작가에 대한 존경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 좋았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기억하고 사랑할 만한 작가로 박경리, 최인훈, 박완서, 황석영, 한강을 떠올렸다.

나라면 조금 다르다.

황석영, 박경리, 조정래, 박완서, 이문열, 최인호.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깊이 있게 그렸고, 청춘의 방황과 시대의 분위기에서 역사와 사상, 종교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넓은 작품세계를 보여준 작가들이다. 무엇보다 내가 오랫동안 여러 작품을 직접 읽으며 좋아했던 작가들이다.

누구를 넣고 누구를 뺄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라마구 전집이 보여준 기억의 방식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를 후대가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4. 리스본의 인간 챗GPT, 페소아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라마구보다 리스본 거리에서 더 자주 만나는 작가는 페르난두 페소아였다. 저자 자신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데도 리스본 시민들은 페소아를 각별히 사랑하는 듯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조금 더 알아보니 이해할 만했다.

페소아는 단순히 여러 필명을 사용한 작가가 아니었다. 70개가 넘는 이명과 가상인물을 만들고 각각에게 서로 다른 성격, 생애, 사상, 문체를 부여했다. 알베르투 카에이루, 히카르두 헤이스, 알바루 드 캄푸스 같은 인물들은 이름만 바꾼 페소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작가처럼 움직였다.

1914년 3월 어느 날에는 카에이루의 이름으로 하루에 서른 편이 넘는 시를 썼다고 한다.

이쯤 되니 웃음이 났다.

페소아는 20세기 초 리스본의 인간 챗GPT였던 것 아닐까.

한 사람 안에 여러 작가를 만들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다른 페르소나를 불러내 엄청난 양의 글을 쏟아냈으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인간 멀티에이전트에 가깝다.

저자는 페소아의 이명들이 궁금하면 관련 책을 읽어보라고 한다. 폼발과 왕의 이름에 이어 또 독자에게 숙제를 내준다.

이쯤에서 별도 부록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억지로 하는 유시민의 심부름 1 ― 페소아의 이명들」

5. 여행에서 부지런함이란 무엇인가

리스본의 유명한 전차는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 저자는 나중에서야 전차를 여유롭게 즐기려면 아침 일찍이나 밤늦게 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벨렝에서도 서둘렀지만 벨렝 타워, 발견기념탑, 제로니무스 수도원마다 긴 줄을 만났고, 자신들은 ‘부지런한 여행자’에 끼지 못했다고 했다.

여기서는 바르셀로나에서 저자가 말했던 ‘성당 하나 원칙’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여행에서 오히려 반대다. 먼 곳까지 갔다면 새벽 네 시나 다섯 시라도 일어나 사람이 몰리기 전에 한 곳을 여유 있게 보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으로 다른 곳도 하나라도 더 보는 편이다.

많이 본다고 허겁지겁 다니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행에서 부지런함은 많이 보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유 있게 보기 위해 시간을 먼저 확보하는 일이다.

리스본 전차와 벨렝에서 저자가 몸소 얻은 교훈은 내가 여행할 때 늘 사용해온 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6. ‘대항해시대’의 영광은 누구의 영광인가

벨렝에서는 포르투갈의 화려했던 해양제국 시대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딴 마누엘 양식은 배, 닻, 밧줄, 조개 같은 바다의 모티브와 기독교 상징, 해외에서 받아들인 여러 장식기법을 건축물에 화려하게 쏟아부었다.

『우스 루지아다스』가 문학으로 제국의 영광을 노래했다면, 마누엘 양식은 그 영광을 돌에 새겨놓은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를 ‘졸부의 교만과 과시욕’이라고까지 평가한다. 해외 팽창으로 얻은 부와 권력을 건축에 과시했다는 지적에는 공감한다. 다만 “누가 보든, 어떻게 보든” 그렇게 보인다고 단정하는 데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건축의 아름다움과 그 건축을 만든 시대의 어두운 역사는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마누엘 1세의 ‘행운’을 곧바로 다른 사람들의 불운과 연결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포르투갈이 인도양과 브라질로 뻗어나가는 동안 원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으며,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노예가 되었다.

엔히끄 왕자 역시 포르투갈에서는 ‘항해왕자’이자 역사적 영웅이지만, 그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아프리카 진출은 초기 대서양 노예무역과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대항해시대’라는 말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그것은 발견과 영광의 시대였지만 다른 지역 사람에게는 침략, 수탈, 노예화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다.

저자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급부상을 ‘개가 두 발로 걷는 기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재미있었다. 당시 유럽의 변방에 가까웠던 두 나라가 갑자기 세계사의 중심으로 올라섰으니 그 뜻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적은 모두에게 기적이 아니었다.

한쪽의 행운은 다른 쪽의 불운이었고, 한쪽의 기적은 다른 쪽의 재앙이었다.

7. 경주 출신 작가가 시킨 두 번째 심부름

벨렝의 카몽이스 동상을 지나면서 저자는 포르투갈의 국민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를 소개한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작품이라고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숙제다.

궁금해서 찾아봤다.

『우스 루지아다스』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결합하고, 포르투갈인의 항해를 고대 영웅서사처럼 그린 국민서사시였다. 포르투갈이 자신들의 해외 진출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줄거리는 본문 흐름을 끊으니 부록으로 돌린다.

「억지로 하는 유시민의 심부름 2 ― 『우스 루지아다스』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경주 출신 작가가 리스본에서 독자를 제법 부려먹는다.

8. 바벨탑의 저주와 인공지능 ― 신빨이 떨어지는 시대

리스본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문장 가운데 하나는 인공지능 번역기 이야기였다.

구약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신은 인간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 흩어놓는다. 그러나 저자는 영어도 신통치 않고 포르투갈어도 전혀 몰랐지만 인공지능 번역기 덕분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했다.

이 비유에는 나도 공감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을 갈라놓았던 언어의 장벽을 이제는 휴대전화 하나로 상당 부분 넘을 수 있다. 신화 속에서 인간에게 내려졌던 벌을 인간이 기술로 조금씩 무력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바벨탑에서 내려졌다는 벌도 약발이 다해가는 모양이다. 신빨이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나로서는 이런 식의 비유가 꽤 재미있었다.

9. 굴벤키안과 사실 하나 바로잡기

리스본에서는 석유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칼루스트 굴벤키안도 만난다. 아르메니아계 오스만제국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공부하고 여러 나라에서 사업을 벌이며 억만장자가 된 뒤 리스본에 자신의 유산을 남긴 인물이다. 저자는 여러 국가와 문화를 오가면서도 아르메니아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은 그를 ‘세계시민’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실관계를 하나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책에는 굴벤키안이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공학박사가 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확인해보니 그는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해 Associate of King’s College(AKC) 자격을 얻은 것이지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AKC는 박사학위가 아니다.

또 굴벤키안 재단도 그가 생전에 직접 설립한 것이 아니라, 그의 유언에 따라 사후에 설립되었다.

이런 차이가 굴벤키안이라는 인물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기적 사실을 다루는 책이라면 바로잡고 넘어가는 것이 맞다.

감상문은 저자가 써놓은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글이 아니다. 공감할 것은 공감하고, 단정적인 주장에는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과 다른 부분은 확인해 바로잡는 것 역시 제대로 책을 읽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10. 결국 리스본에 푹 빠진 저자

리스본을 떠나면서 저자는 언젠가 오래 살아보고 싶다고 한다. 자연이 아름답고 도시가 정겹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으며 음식과 음악이 훌륭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도 파두의 멜로디와 해물밥 냄새가 떠오른다며 기회가 생기면 다시 가고 싶다고 한다.

고 며칠 머물렀다고 이렇게까지 좋은가 싶어 조금 웃음이 났다.

거의 사랑에 빠진 사람의 고백 같다.

그래도 여행에는 며칠만 머물러도 유난히 마음에 들어오는 도시가 있는 법이다. 폼발 후작을 두고 역사와 리더십을 생각하고, 사라마구와 페소아를 만나 문학을 이야기하고, 벨렝에서는 제국의 영광과 그 뒤의 침략과 노예무역을 돌아보고, 전차에서는 여행의 부지런함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도시.

리스본은 저자에게 그런 도시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책을 따라 리스본을 걸은 나에게도, 아직 가보지 않은 도시 하나에 제법 많은 이야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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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홀’의 실내장식은 이슬람 문화와 기술을 극단적인 수준으로 구현한 무어 양식이었다. 꾸미는 데 20년이나 걸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단단한 원목을 물샐 틈 없이 정교하게 짜 맞춘 바닥, 아랍 문자를 활용한 벽장식, 기둥과 벽체의 기하학적 문양, 스테인드글라스의 다양한 색채와 형태, 10킬로그램 넘는 금을 썼다는 기둥과 천장의 장식,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이겨 먹으려고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슬람의 장식 기술을 그렇게 높은 수준으로 구현한 집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국회에서 일하던 때 UAE의 아부다비부터 오만의 무스카트까지 걸프 국가 다섯 곳의 왕궁 접견실을 보았는데, ‘아랍 룸’ 실내장식의 예술적 수준에 이른 경우는 없었다.

멀리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뽀르투에서도 사람들이 무얼 어떻게 먹는지 살폈다. 리스본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제일 두드러진 차이는 정어리였다. 가장 뽀르투다운 관광지인 히베이라 광장의 공기는 정어리 굽는 냄새가 지배했고 강변 노점의 기념품 중에 정어리를 모티브로 쓴 것이 많았다. 리스본에도 정어리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는 기념품으로 정어리를 그려 넣은 접시와 에코백을 샀다. 정어리 요리는 이스탄불 갈라타 광장의 고등어 케밥이 그런 것처럼 생선 비린내를 싫어하면 먹기 어렵다. 나는 등 푸른 생선의 비린내와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 아무 문제가 없었다.

‘벨 에포크’가 지난 이후 유럽은 미국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주도권을 넘겨주었고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벨 에포크’는 끝나버린 전성기에 대한 유럽인의 그리움을 자극하는 말이다.

점심시간이 임박한 히베이라는 관광객 천지였다. 밤 굽는 연기, 음식 냄새, 호객 소리, 연인들, 아이들, 서로 어깨를 기댄 낡은 집들, 그 모두가 다시 오라고 나를 유혹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뽀르투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한국과 정반대여서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하는 서울과 달리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도시여서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그 무엇을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한 가지 더, 중세와 근대 역사의 영향도 있었을 수 있다. 정복 전쟁을 일삼았던 포르투갈 왕국은 대항해 시대의 짧은 전성기를 지나 유럽의 변방 국가로 되돌아왔다. 공화주의 혁명을 이룬 뒤에는 살라자르의 장기독재를 겪었다. 그런 역사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을 다해 이웃과 싸우면서 남을 정복했지만,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고 남은 것도 없다. 이기는 것보다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좋다. 이웃을 적으로 삼기보다는 서로 기댈 수 있는 친구로 만드는 게 낫지 않겠는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붐비는 거리에서도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친구나 사업 파트너를 만나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충분히 들으면서 오래 이야기를 나눈다. 이방인에게도 경계하고 의심하는 표정이 아니라 여유롭게 환대하는 미소를 선사한다. 리스본과 뽀르투 사람들한테서 나는 그런 마음을 느꼈다.

이유가 무엇이든 리스본과 뽀르투는 내가 한국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주었다. 무엇이든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성공적으로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걱정과 근심을 잊고 매 순간 내가 머무르는 공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활주로에서 날아오르는 비행기에서 뽀르투를 향해 약속했다. ‘잘 있어. 또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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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리아가 리스본의 대표 가수라면 대표 작가는 누구일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라마구 아닐까 싶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난해함을 넘어 기괴함에 이른 텍스트를 남긴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1935)를 리스본 시민들은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라마구는 기념관에서만 보았지만, 페소아는 리스본 어디에나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여행자가 보아야 할 리스본(Lisboa, what the tourist should see)』을 샀다. 페소아가 1925년 영어로 쓴 텍스트에 사진을 곁들여 만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여러 판본이 나와 있다

페소아의 정신은 외모보다 더 특이했다. 연금술·신비주의·마법·비밀결사·점성술에 심취했고, 셰익스피어와 나폴레옹 같은 역사 인물의 별자리 운세 모음집을 만들었으며, 바이런 스타일의 영국 낭만주의부터 보들레르가 대표하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엘리어트의 모더니즘까지 온갖 문예사조를 섭렵했다. 1935년 가을 복통과 고열 증세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그는 영어로 된 책 네 권과 포르투갈어책 한 권밖에 출간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원고와 스케치를 남겼다. 포르투갈 국립도서관은 나무 트렁크에 들어 있었던 원고를 시민들에게 공개했고 정부는 페소아의 관을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겼다.

나는 페소아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팬이 많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도 취향 차이일 것이다. 페소아는 무엇보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몇 달이 걸려도 쓰기 어려웠을 법한 분량의 글을 하루에 생산했다.

1914년 3월 8일, 서랍장 앞에 종이를 놓고 가상 캐릭터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이름으로 서른 편 넘는 시를 썼고 자신의 이름으로도 여섯 편을 쓴 것이다. 작가 스스로 ‘승리의 날’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한다.

페소아가 만든 이명 캐릭터를 알고 싶다면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과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같은 책을 읽으시기 바란다. 나는 독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페소아의 집’을 보아도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집을 본 건 좋은 선택이었다. ‘내면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과 꿈이 차오르면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 봐. 들어주는 이가 많지 않아도 괜찮아.’ 페소아는 그렇게 나를 격려해 주었다.

리스본 전차는 특이하다. 차체가 작고 짧아서 비탈의 좁고 휘어진 골목을 다닐 수 있고 전조등은 아래쪽에 하나만 달려 있다. 원색을 칠해서 장난감처럼 보이는데 노란색이 가장 인기가 있다. 전차는 주로 관광객이 이용하고 리스본 시민들은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탄다.

수신기를 목에 건 단체 관광객이 대부분이라 전차가 정류장에 멈추어도 내리는 이가 별로 없었다. 전차 골목 투어를 여유롭게 즐기려면 아침 일찍 또는 밤늦게 타야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 시인과 작가 여덟 명의 조각상을 받침대에 놓고 위에 루이스 드 카몽이스(Luis de Camoes, 1524~1580)의 청동상을 올린 광장의 조형물은 주변의 범선 모양 바닥 장식과 함께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리스본에서 죽은 그가 ‘국민시인’의 영예를 얻은 것은 1572년 출판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서사시라고 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내용이 어떤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리스본에서 죽은 그가 ‘국민시인’의 영예를 얻은 것은 1572년 출판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서사시라고 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내용이 어떤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종이책을 많이 읽는지 리스본에는 서점이 흔했다. 오래된 책방은 예쁘고 책이 많았으며 헌책방에는 책 말고도 오래된 물건을 팔았다. 우리는 오래된 서점에서 페소아가 영어로 쓴 리스본 가이드북을 구입했다.

14세기 후반 게릴라전으로 까스띠야 왕국의 침략을 물리쳤던 독립 영웅 페레이라(Nuno Alvares Pereira, 1360~1431)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 나라의 독립을 지킨 전사였던 페레이라는 나이가 들어 종교 지도자로 살면서 까르무 성당 신축을 이끌었고 죽은 다음에는 거기에 묻혔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임진왜란 후에 스님이 되어 서울 경복궁 가까운 곳에 절을 세웠고 죽어서 거기 묻혔다고 가정해 보라. 민중은 그 절을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고고학 유물이 아니라 폐허를 만나고 싶어서 까르무에 갔다. 대성당이나 상 조르즈성처럼 겉보기에 멀쩡한 건물로 복원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까르무 성당은 복원 작업을 중단한 덕에 새로운 가치를 획득했다. 완전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2025년 9월 탈선 사고로 열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 푸니쿨라다. 구간이 짧은 데다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우리는 걸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리스본에서 올랐던 모든 전망대 중에서 경치는 단연 최고였다. 발아래 바이샤지구 시가지가 펼쳐졌고 건너편 알파마지구와 상 조르즈성이 보였으며 멀리 타구스강의 드넓은 하구까지 눈에 들어왔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덕분에 널리 알려진 그 전망대는 유원지 같았다.

벨렝지구의 마누엘 1세
세 번째 날은 벨렝지구에서 보냈다. 중년의 운전기사가 부탁하지도 않은 관광 안내를 열심히 하기에 스마트폰 번역 앱을 켜고 실시간 이동 경로를 보면서 내용을 짐작해 보았다

벨렝지구는 지진이 덜했던 덕에 크고 오래된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관광객이 붐빈다고 해서 서둘렀지만, 우리는 부지런한 여행자에 끼지 못했다. 벨렝 타워(Torre de Belem)부터 발견기념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까지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벨렝 타워는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 밖에서만 보았다. 볼만한 집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다른 어떤 건물보다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벨렝지구는 지진이 덜했던 덕에 크고 오래된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관광객이 붐빈다고 해서 서둘렀지만, 우리는 부지런한 여행자에 끼지 못했다. 벨렝 타워(Torre de Belem)부터 발견기념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까지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벨렝 타워는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 밖에서만 보았다. 볼만한 집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다른 어떤 건물보다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벨렝 타워는 20세기 후반 들어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군사시설의 흔적을 지우고 내부에 회랑을 만들어 문화 행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최근에는 신기술을 적용해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고 안팎을 새로 꾸며 집 자체를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체현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외양은 이슬람 스타일인데 곳곳에 십자가와 성모상을 비롯한 기독교의 상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군사 요새의 특징과 대항해 시대의 정서를 보여주는 장식이 많으며, 군주제의 흔적인 왕실 문장과 공화정의 상징인 내부 회랑이 공존한다. 그래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넘쳐나는 것이다.

마누엘 양식이라는 말이 생기게 한 마누엘 1세의 별칭은 ‘행운왕’이다. 그는 평생 운이 좋았다. 왕의 사촌이라서 왕위 계승권이 없었는데 왕세자가 죽는 바람에 왕이 되었다. 그때 포르투갈은 사회가 평온했고 스페인과 관계가 원만했으며 정부에 유능한 인재가 많았다.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신항로를 개척한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그의 행운은 타인의 불운이었다. 인도 일부 지역과 브라질 원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학살당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짐승처럼 붙잡혀 노예로 팔려나갔다. 마누엘 1세는 스페인 왕에게 아부해 공주와 혼인할 목적으로 리스본 유대인을 학살하고 추방했다. 페스트에 걸려 죽은 것이 인생에서 겪은 유일한 불운이었다.

아치·회랑·기둥·문·창문 등 건축물의 기본 요소에 돈을 많이 들여 크고 복잡한 장식을 함으로써 왕의 권력과 부를 과시했다. 둘째, 장식에 배·닻·돛·밧줄·조개 등 바다와 관련이 있는 모티브를 썼다. 셋째, 힌두 사원 문양이나 이슬람 세공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위세를 보여주려 했다. 넷째, 십자가·성모·천사 같은 기독교 상징을 두드러지게 배치해 도덕적 이념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침략과 약탈 행위를 정당화했다.

누가 보든, 어떻게 보든, 마누엘 양식 건축물은 ‘졸부의 교만과 과시욕’을 드러낸다. 스페인의 압박에 시달리는 약소국가였다가 갑자기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던 포르투갈 권력자의 자아도취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런 문화양식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며 널리 퍼질 수도 없다. 마누엘 양식은 북아프리카와 브라질, 인도의 고아, 마카오 등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곳에서만 잠깐 존재했다.

엔히끄 왕자는 포르투갈의 역사 영웅이지만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납치해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한 일과 최초의 노예 매매 시장이 생긴 것이 그와 관련이 있다. 칙명을 내려 포르투갈 왕에게 이교도를 노예로 삼을 권리를 부여한 가톨릭 교황청의 잘못도 크지만 직접 책임은 엔히끄에게 물어야 맞을 것이다.

그 시대에 스페인만 ‘개가 두 발로 걷는 기적’을 연출한 게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더 극적으로 떠올랐고 더 허망하게 가라앉았다. 엔히끄는 포르투갈 국민의 마음에 남은 대항해 시대 전성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사 인물이다.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벨렝지구에서는 다들 에그 타르트를 찾는다. 여행 책자에 빠지지 않는 유명한 점포에 가면 홀에서 먹으려고 줄을 서기보다는 포장 판매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 큰 기대는 하지 말기 바란다. 적당히 달고 식감이 부드러운 간식일 뿐이다. 나는 제과점보다 식당이 많아 좋았다.

신이 언어를 다르게 해서 인간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독교 구약의 이야기는 효력이 다한 것 같았다. 우리는 영어도 신통치 않고 프랑스말이나 포르투갈말은 아예 몰랐지만, 인공지능 번역기 덕분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굴벤키안은 ‘세계시민’이라고 할 만한 인생을 살았다. 오스만제국에 복속한 아르메니아 귀족의 후손으로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공학박사가 되었다. 가업인 석유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러시아 유전을 연구하고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을 탐사했다. 1896년 오스만제국 군대가 아르메니아인 수십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가족을 이끌고 런던에 망명해 영국 국적을 얻었으며 로열 더치 셸의 대주주로 이라크 석유회사를 설립했다.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굴벤키안은 리스본에 굴벤키안 재단을 설립해 재산과 예술품을 관리하면서 교회·학교·병원에 거액을 지속적으로 기부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회사에 아르메니아 사람을 고용하려고 노력했고 런던 아르메니아교회에 묻혔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관적으로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리스본을 떠나왔다.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도 다른 어느 도시에서보다 마음이 편했다. 자연이 아름다웠고 도시는 정겨웠으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고 음식과 음악이 훌륭했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모든 풍경이 기억에 또렷하고 파두의 멜로디와 해물 밥 냄새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기회가 생긴다면 기쁜 마음으로 갈 것 같다. 리스본은 그런 곳이다.

뽀르투는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에 합류하는 도루강(Douro) 하류의 북쪽 비탈과 언덕에 들어선 도시다. 포르투갈에서는 리스본 다음으로 큰 도시라지만 면적은 서울 강서구와 비슷하고 상주인구는 25만 명밖에 되지 않으며, 도루강 남쪽 가이아(Gaia)지구를 비롯해 행정구역 뽀르투에 속하지 않는 인근 도시들을 다 묶어야 150만 명 정도다. ‘광역 뽀르투’는 정유·조선·코르크·자동차부품·식품 등 다양한 산업을 안고 있지만 세계시장 경쟁력은 없어서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하며 일부를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 수출한다. 뽀르투(porto)는 지명인 동시에 ‘항구’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다. 국호 포르투갈(Portugal)이 라틴어 지명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이렇다 할 유적은 없지만 고대부터 중요한 항구도시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딱 하루 뽀르투에 머문다면 어디를 어떻게 다니면 좋을까? 내가 찾은 답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이틀 있다면 같은 경로를 더 여유 있게 다니면 된다. 아침 일찍 시청사에서 출발해 강을 향해 걸으면서 이름난 서점과 기차역과 성당 같은 명소를 본다. 한낮에 히베이라(Ribeira, 강변)지구에 도착하면 간단히 점심을 먹고 유람선을 탄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유람선을 탄 다음 건너편 가이아지구에서 늦은 점심을 먹어도 된다. 도루강 양안에는 식당이 즐비하고 메뉴와 가격대는 다양한데, 목이 좋은 식당이라고 해서 음식값이 특별히 비싸지는 않다. 우리가 들렀던 식당들은 음식 맛이 다 다르게 좋았고 값도 적당했다.

책에 넣을 사진을 찍느라 우리는 이렇게 다니는 데 이틀을 썼다. 젊은이라면 하루에 다 해도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뽀르투는 리스본보다도 더 마음 편하게 다녔다는 말을 덧붙인다. 소매치기 따위는 걱정할 필요 없었고 경찰관이나 순찰차를 만난 기억도 없다. 발을 들인 순간부터 떠나온 때까지, 우리가 본 사람들은 다 친절했다.

가헤뜨는 낭만파 시인이자 민주주의 혁명가이고 문화운동가였다. 뽀르투 시가 청사에 하필 그의 흉상을 세운 것은 뽀르투에서 태어났고 포르투갈 국민이 카몽이스만큼이나 좋아하는 시인이라서다. 꼬임브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가헤뜨는 무신론자임을 숨기지 않고 글을 쓴 탓에 숱한 필화(筆禍)를 겪었으며 1820년 뽀르투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크게 활약했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시와 희곡을 발표했고, 후일 돌아와 민담집을 편찬하고 역사소설을 썼으며, 만년에는 귀족 작위를 받았고 왕립극장 신축을 주도했다. 리스본이 자랑하는 카몽이스와 나란히 국립 판테온에 묻힌 그를 뽀르투 시민들은 지금도 사랑한다.

시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렐루서점(Livraria Lello)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책방’이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책방’이라는 건 확실하다. 포르투갈에는 문을 연 지 백 년 넘은 서점이 드물지 않다고 하는데 렐루서점도 그런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렐루서점은 책방이라고 하기 어렵다. 소설가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의 마법학교를 구상할 때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사람이 끝없이 밀려드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며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산다. 리스본도 서점이 많았는데 뽀르투도 그랬다. 우리가 묵은 호텔 바로 옆에도 있었고 렐루서점 가는 뒷골목에도 조그만 쇼윈도를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으로만 채운 헌책방이 있었다

포르투갈은 오래된 출판 선진국이다. 대항해 시대의 항해 기록과 탐사 보고서를 쌓아나갔던 15세기부터 그랬다. 언론의 자유를 혹심하게 탄압했던 살라자르 시대에도 출판 산업은 생명력을 유지했고 시민들은 서점에서 정치 정보를 나누었다. 언덕과 비탈이 많은 리스본과 뽀르투에서 서점은 커피와 음악을 즐기는 쉼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포르투갈 사람들은 작가를 높이 받든다. 리스본의 가장 중요한 광장에 카몽이스의 이름을 붙였고 뽀르투 시청사 정문 앞에 가헤뜨의 흉상을 세웠다.

책과 서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이 총포와 같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총포처럼 위력 있는 것은 새롭고 유용한 지식과 정보이지 문자 텍스트를 인쇄한 종이책이 아니다. 세상은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 책은 지성의 상징이 아니며 숭배할 대상 또한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나는 책을 전성기가 지난 전통 미디어로 여긴다. 서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통념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상벤투역의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의 역사를 구현한 작품이다. 딱 보면 바로 무서워지는 그림이 있었다. 국가의 탄생을 확정한 1140년의 발데베즈 전투 장면이다. 아폰수 1세는 이 전투에서 레온-까스띠야 왕국 군대를 제압해 포르투갈 왕국의 출발을 알렸다. 그것 말고도 포르투갈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지배자와 사건들이 나왔다. 레온-까스띠야 왕국 알폰소 7세의 포르투갈 공식 외교사절 접견, 주앙 1세 부부의 뽀르투 입성, 엔히끄 왕자의 북아프리카 세우타 정복 같은 것이다. 종교축제·농사·시장과 마을 풍경은 그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 가장자리에는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반복 사용하는 이슬람 양식을 적용했다. 대합실 중앙에 서서 벽과 천장을 휘둘러보았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본 최고 수준의 아줄레주였다.

세계 모든 곳에서 온 여행자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면서 저마다의 언어로 감탄사를 내뿜었다.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그렇게 한국인을 많이 본 적은 없었다. 뽀르투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힙한 여행지’로 떠올랐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배를 채운 다음 뽀르투 대성당(Sé do Porto)을 거쳐 강변으로 걸었다. 뽀르투 대성당은 리스본 대성당보다 더한 시골 교회였다.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긴 세월이 걸려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에 나중 고딕 회랑과 바로크 스타일의 제단을 추가했다고는 하지만 크게 볼 것은 없었다. 0층과 1층의 아줄레주도 크기만 했을 뿐 상벤투역에는 견줄 수 없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리만큼은 명당이었다. 성당의 탑에 오르자, 시내와 도루강 넘어 바다까지 보였다. 고층 건물이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을 가렸지만, 앞마당에서 보는 경치가 나쁘지 않았고 성당 아래편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는 시민들의 일상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당 떨어진’ 느낌이 들어 해가 저물기 전에 숙소로 복귀했다. 체력을 회복하려고 고칼로리 저녁밥을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포트와인은 ‘뽀르투 와인’의 영국식 표현이다. 영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맥주와 위스키뿐 아니라 포도주도 좋아했는데, 영국은 위도가 높아 포도를 재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포도주를 프랑스에서 들여왔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국이 15세기 중반 백년 전쟁에서 패하면서 보르도를 비롯한 대륙의 영토를 상실했다. 잔 다르크가 전세를 역전해 프랑스에 승리를 안겨주었던 바로 그 전쟁이다. 그때부터 프랑스 민중은 잉글랜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고 두 나라는 끝없이 외교 분쟁을 벌였다

나도 그날 오후의 햇살에 잔을 비추어 보면서 포트와인을 마셨다. 내 인생에 제일 많이 마신 날이었지만 긴 시간 동안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우버를 불러 숙소로 돌아오는데 운전사의 영어가 심상치 않아 물어보았더니 미국 사람이었다. 농구 관련 일로 뽀르투에 왔다가 너무 좋아서 눌러앉았고 뽀르투 여인과 혼인했으며 자녀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다들 미국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에서 기술 발전으로 이룬 거대한 물질적 풍요보다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이 아름답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뽀르투 국립 미술관은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웠다. 마드리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오디오 가이드 해설을 들으면서 거장들의 대작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뽀르투의 예술가들이 자신과 세상에 관한 생각과 감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을 마주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곳을 다녀온 뒤로 나는 국내여행을 할 때도 미술관이 있으면 들러보는 습관이 생겼고, 광주시립 미술관의 청년 작가 초대전과 영암군 하정웅 미술관의 이우환 작품 시리즈를 보았다. 강원도 양구군에 박수근 미술관이 있고 양평·진천·청송 등도 군립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슈마허 선생의 견해를 절반은 예술에 적용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중심과 변방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나름대로 다 멋질 수 있고, 중심과 변방이 저마다 아름다울 수 있다. 이런 배움을 얻었으니 그만하면 훌륭한 미술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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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보다 군인에 가까운 기질이어서 결단해야 할 때는 단호하게 결단했고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폭력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사회의 지배적인 관습과 규범까지 무시했다. 복잡한 가톨릭 장례 의식을 생략하고 시신을 신속하게 바다에 버리게 함으로써 전염병 확산을 막은 게 대표 사례다.

리스본 항구에 들어온 상선의 물품을 강제로 인수해 참사 이전의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폼발 후작은 리스본을 재건하자고 왕을 설득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직책은 총리였지만 실제로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발탁해 재건 계획을 신속하게 세웠다. 마차가 다니는 중심 도로를 넓고 반듯하게 만들고 여러 곳에 광장을 조성했으며 주변 건물의 높이와 형태를 규제하고 건축 자재의 종류를 지정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인문주의자였다.

죄 없이 죽은 이가 없었을 리 없다. 무자비한 독재자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리스본 시민과 포르투갈 국민은 그런 잘못을 용서한 듯하다. 잘못에 비해서 공이 월등히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폼발 후작 동상은 ‘역사의 법정’이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리스본을 재건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전권을 맡긴 것 말고 왕이 한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것도 공이라면 공이다. 그래서 해일이 잔해를 쓸어간 해변의 왕궁터에 광장을 조성하면서 왕의 기마상을 세운 것이리라. 왕의 이름을 꼭 알고 싶다면 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폼발 후작 동상 주변의 초록색 비탈은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이고 호드리게스 공원은 그 북쪽 끝에 이어져 있다. 에두아르두 7세는 포르투갈 왕이 아니라 60년 가까이 왕세자로 살다가 늙어서야 즉위했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7세다. 그의 1902년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려고 그토록 잘 보이는 곳에 공원을 만들 정도로 두 나라는 가까웠다.

공원을 나와 폼발 후작한테 인사를 드렸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말했다. ‘국가의 기능과 리더의 역할이 무언지 생각해 봐.’ 우리는 강을 향해 뻗은 ‘아베니다 다 리베르다드(Avenida da Liberdade)’를 걸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자유로’쯤 되는데 리스본 사람들은 줄여서 ‘아베니다’라고 한다.

‘헤스타우라도르’는 광복(光復)이라는 뜻이다. 누구의 지배를 받았기에 ‘광복 광장’을 만들었을까? 국경을 맞댄 건 스페인뿐이니 다른 나라일 수 없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강국이 되어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포르투갈이 외국의 지배를 받았으니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광복 광장’은 포르투갈의 주권 회복을 기념한다. 한가운데 설치한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에 여러 날짜를 새겨두었는데, 1640년 12월 15일이 제일 두드러져 보였다.

명목 국민소득은 서유럽 나라들보다 낮지만, 리스본이나 뽀르투에는 노숙자나 거지가 많지 않다. 물건을 도둑맞을까 걱정하면서 다니지 않아도 된다. 파리나 바르셀로나보다 물가 수준이 훨씬 낮다. 난민이나 불법 체류자 문제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이민을 비교적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포르투갈말을 쓰는 남미와 북아프리카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들어와 일한다.

오늘날의 포르투갈 영토는 로마제국 시대 ‘루시타니아’라는 행정구역이었는데 서로마가 무너진 뒤 서고트족과 무슬림이 차례로 지배했다.

리스본의 포르투갈 이름은 리스보아(Lisboa)다. 자체 인구는 50만 명, 주변을 포함한 광역 인구는 2백만 명 정도 된다. 상업과 무역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일찍부터 페니키아·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았는데 ‘리스보아’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뽀르투가 먼저 무슬림 지배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국호에는 리스본이 아니라 뽀르투가 들어갔다. 포르투갈 왕국이 13세기 중반 국경을 확정했을 때 수도가 된 리스본은 15세기 말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524)의 인도 항로 개척을 계기로 전성기를 맞았다.

세바스티앙 1세 왕이 모로코 원정에서 전사한 1578년 길지 않았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나라가 찢어지거나 정복 전쟁의 먹잇감이 되는 시대였다. 스페인 왕국의 펠리페 2세는 어머니가 포르투갈 공주였다는 사실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리스본의 귀족들을 회유하고 압박해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포르투갈을 합병했다.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섰던 포르투갈이 졸지에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헤스타우라도르 광장 오벨리스크에 제일 크게 새겨 놓은 ‘1640년 12월 15일’은 주앙 4세가 히베이라 궁전 옆 교회에서 대관식을 한 날이다.

포르투갈 왕국은 광복을 이루었을 뿐 국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리스본 대지진의 상처를 다 치유하기도 전에 나폴레옹 군대에 점령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질이 독립해 나갔다. 포르투갈은 영향력 없는 유럽의 변방 국가로 되돌아갔다.

1910년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을 세웠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군사 쿠데타와 독재의 악순환에 갇혔다. 독재자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했던 시기에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살라자르(Antonio Salazar, 1889~1970)가 통치했다. 36년 지속한 살라자르 독재는 프랑코 독재보다 더 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살라자르는 초등교육을 장려한 반면 고등교육은 사실상 폐지했다.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는 정도로만 국민을 교육한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쓴 것이다. 그 결과 국민의 지적 수준은 하락했고 과학기술은 퇴보했다. 196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서도 총리 자리를 지킨 살라자르가 1970년 봄 죽었는데도 포르투갈 사회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혁신을 추진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6년 봄 새 헌법에 따라 실시한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중도 진보 성향 마리우 수아레스(Mario Soares)가 총리로 취임해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정부는 4월 25일을 ‘자유의 날(Dia da Liberdade)’로 지정함으로써 ‘카네이션 혁명’의 최종 승리를 선포했다.

국가 포르투갈과 도시 리스본은 지금도 살라자르가 저질렀던 저개발 정책과 우민화 정책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아무 준비 없이 지식정보화 혁명과 디지털 전환의 시대를 맞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반도체를 비롯한 기술 집약 고부가가치 산업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고학력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모든 독재는 나쁘다. 하지만 똑같이 나쁜 건 아니다. ‘개발독재’는 ‘저개발독재’보다 덜 나쁘다. ‘개발독재’도 다 같지는 않다. ‘성공한 개발독재’는 ‘실패한 개발독재’보다 낫다. 한국은 ‘성공한 개발독재’를 겪은 이후 독재는 끊어내고 개발을 이어갔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다 이루었고 지식정보화 혁명과 디지털 전환에 빠르게 적응했다. 포르투갈은 독재 중에서도 최악인 ‘저개발독재’를 겪었다. 독재는 극복했지만 ‘저개발’의 후유증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역사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삶도 사회의 역사도 필연적 법칙이나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고, 포르투갈은 특별히 불운했다고 생각한다. 살라자르가 저개발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기괴한 망상에 빠진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포르투갈은 무척 다른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통 음식을 파는 양편의 식당들은 손님맞이 준비에 분주했다. 광장 이름을 잘 지은 것 같았다. ‘꾸메르시우(comercio)’는 상업 또는 거래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 있었던 궁전은 지진에 무너졌고 잔해는 해일에 휩쓸려 사라졌다. 왕은 두려움에 떨면서 벨렝지구의 목조 건물에 머무는 동안 폼발 후작은 왕궁의 폐허를 행정·경제 복합센터로 바꾸었다. 광장 좌우의 정부 청사 건물은 그가 직접 지었고, 시내와 광장을 가르는 개선문은 후임자가 세웠다. 시간이 가면서 주변에 민간 건물이 들어섰고 상인과 제조업자들이 영업을 시작했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광장에서 왕의 즉위식을 비롯한 국가 의전행사를 열었고 군 사령부가 전쟁을 지휘했다.

‘흠, 리스본은 해물 밥이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리스본에는 해물 밥 말고도 맛난 음식이 아주 많았다.

꾸메르시우 광장에서 알파마지구로 가다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1922~2010) 기념관을 발견했다.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리스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노동자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라마구는 번역가·평론가·기자 등 여러 직업을 거쳐 작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살라자르 시대에는 독재를 비판하는 정치 칼럼을 썼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창작에 전념하면서 시와 희곡까지 여러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사라마구 전집의 표지 디자인이 특이했다. 제목을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썼는데 책마다 필체가 달랐다. 포르투갈어를 쓰는 창작자들이 손으로 쓴 글씨였다. 3층에 전집 세트를 진열해 두고 2층 서점에서 낱권으로 판매했는데 제목을 쓴 이들은 소설가부터 영화감독과 화가까지 직업이 다양했다.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다니!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기억하고 사랑할 만한 분이 있나?’ 왜 없겠는가. 내 기준으로는 박경리와 최인훈이 있다. 박완서와 황석영도 그럴 만하다. 한강은 이미 많은 작품을 썼고 앞으로 더 많은 소설을 낼 것이다.

산 감천 문화마을과 통영 동피랑 마을이 떠올랐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오래된 집, 강렬한 색을 칠한 벽화, 노점의 음식 냄새, 서로를 구경하는 사람들, 다른 유럽 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과 분위기였다. 하지만 알파마는 그저 오래된 곳이 아니라 긴 세월 가꾸고 다듬고 꾸민 동네여서 후미진 골목의 어느 귀퉁이도 버려진 데가 없었다.

폐허가 된 바이샤와 달리 알파마가 대지진을 견뎌냈다는 사실은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지진을 신의 징벌로 여긴 시대였다. 신은 왜 바이샤의 왕궁과 성당과 저택을 무너뜨려 왕족과 귀족과 성직자들을 죽이면서 알파마의 가난한 노동자와 선원과 몸 파는 여인들은 살려두었는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신학자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지진은 리스본의 성당만 무너뜨린 게 아니라 유럽의 종교 권력도 무너뜨렸다. 신의 자비에 기대지 않고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인간과 세상을 구하려는 새로운 사상에 힘을 불어넣었다.

파두는 슬프다. 멜로디와 노랫말과 창법이 다 애절하다. 어부·노동자·집시와 같은 이들이,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달콤하다. 듣고 나면 또 듣고 싶다. 비평가들은 ‘사우다드(saudade)’를 담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향수(鄕愁) 또는 그리움이라고 번역하는데 우리말 한(恨)과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나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사우다드’는 사람을 주저앉게 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 살아가게 한다. 조심하자. 이건 ‘리스본 파두’ 이야기다. ‘꼬임브라 파두’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

유럽 도시들은 ‘오버투어리즘’ 몸살을 앓고 있다. 명성 높은 박물관과 왕궁과 성당만이 아니라 이름난 레스토랑·와인 바·재즈클럽도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어렵다. 알파마지구도 그랬다. 파두 박물관 맞은편 길 건너 식당에 갔더니 빈자리가 없었다. 혹시 ‘노쇼’가 있을지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미련을 접고 이틀 후 자리를 예약한 다음 길 찾기 앱에서 제일 비싼 파두 레스토랑을 골랐다. ‘여긴 자리가 있을지 몰라. 비싸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키 크고 잘생긴 젊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으시군요. 딱 두 자리가 남아 있거든요.’ 역사가 백 년 가깝다는 그 집은 실내 공간이 들쭉날쭉했는데 입구 반대편 끝의 쓰지 않는 벽난로 앞 조그만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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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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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문] 『유럽 도시 기행 3』 스페인편
―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저자의 시선을 따라 걷다가 내 생각으로 멈춰 서다

『유럽 도시 기행 3』의 네 도시 가운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읽었다. 두 도시는 모두 스페인에 있지만 책을 따라 걷다 보면 같은 나라의 도시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역사와 표정을 가지고 있다. 마드리드에서는 왕조와 내전, 프랑코 독재와 민주화의 역사가,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건축과 카탈루냐의 오랜 비극적 역사의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의 도시 여행은 유명 관광지를 차례로 찾아가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길과 건축물, 미술관과 광장에 남아 있는 역사를 찾아내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재의 도시와 연결한다. 내가 여행하면서 좋아하는 것도 이런 방식이다. 유적이나 건축물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가기보다 그것이 왜 그곳에 있고, 누가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1. 마드리드 ― 그림을 통해 읽는 스페인의 역사

마드리드에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역시 스페인의 근현대사와 미술이었다. 프랑코 독재와 스페인 내전, 민주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프라도 미술관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특히 고야가 인상적이었다. 궁정화가로 출발했지만 전쟁과 폭력, 인간의 잔혹함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미술작품이 한 시대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마찬가지다. 그림 한 점이 전쟁의 참혹함을 세대를 넘어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미술관에서 그림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남긴 시선으로 그 시대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연결을 잘한다. 역사와 미술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읽게 만든다.

2. 바르셀로나 ― ‘성가족 성당’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에 들어오면서 책은 더욱 재미있어졌다. 무엇보다 가우디가 있었다.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성가족 성당’이라는 이름을 자주 접했지만 『유럽 도시 기행 3』에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쓴다. 처음에는 ‘사그라다’라는 말이 낯설었다. 파밀리아가 가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같은 건축물이라는 것은 바로 짐작했지만, ‘사그라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뜻을 알고 보니 나는 오히려 ‘성가족 성당’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 번역해버리면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들리는 이름이 원어를 살리니 고유명사로서의 느낌도 살아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사그라다라는 표현을 꽤 오래전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무지의 소치다.

저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면서 종교적 경건함보다 예술적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가우디 자신은 깊은 종교적 감정과 예술적 열정을 모두 담았겠지만 자신은 그 가운데 예술적 열정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도 좋았다. 같은 건축물을 보더라도 누구나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종교 건축은 신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놀라움은 눈에 보이는 장식에만 있지 않다. 가우디의 곡선과 기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현수선 원리를 뒤집은 아치와 가지처럼 갈라지는 수목형 기둥은 하중을 자연스럽게 분산시키고, 다양한 곡면의 기하학적 구조는 건축적 안정성과 공간의 개방감, 자연채광을 함께 만들어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예술적 상상력과 구조역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형태로 합쳐진 건축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건축물을 두고 ‘건축으로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의 최고 수준’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3. 평생을 건축에 바치고 그곳에 잠든 가우디

가우디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가운데 가장 안타까웠다. 평생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에 매달렸던 사람이 미사를 보러 가던 길에 노면전차 사고를 당했고,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신원 확인과 적절한 구조가 늦어졌다. 그는 결국 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의 작품은 화려하고 거대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쓸쓸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평생을 바친 성당에 잠들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한 인간의 삶과 건축이 마지막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이야기할 때 앞으로는 그 기괴하고 아름다운 외관만 떠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안에는 평생을 한 건축물에 바치다 길에서 쓰러진 한 사람의 삶도 함께 들어 있다.

4.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과 자기합리화

그런데 저자의 바르셀로나 여행 방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다.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았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건너뛰었다고 했다. “한 도시에서 성당이나 교회를 하나만 본다는 나만의 규칙”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바다의 성모 성당’은 예외로 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어이가 좀 없었다.

예외로 했으면 규칙을 지킨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여행에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일정이 빠듯하거나 다른 곳을 더 보고 싶어서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건너뛸 수도 있다. 그것은 여행자의 선택이고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나 역시 여행하면서 시간 때문에 보고 싶은 곳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어이없어 한 것은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한 도시에서 성당은 하나만 본다’는 원칙으로 설명한 부분이다.

누가 한 도시에서 성당을 두 군데 보았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보고 싶은 곳이면 보면 되고 시간이 없으면 건너뛰면 된다. 그런데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을 지켰다고 말한 바로 다음에 다른 성당은 예외로 보는 것은 조금은 자기합리화처럼 느껴졌다.

더 중요한 것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단순히 ‘성당 두 개’로 묶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두 건축물은 지어진 시대도 다르고 건축양식도 다르며 도시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성격도 다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중세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대성당까지 이미 본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오히려 반대다. 멀리 왔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보고 싶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는 새벽 네 시, 다섯 시에도 일어난다. 사람이 몰려오기 전에 한가하게 장소를 보고, 사진을 찍고, 오전 일정을 일찍 시작해 오후에는 또 다른 곳을 찾아간다. 같은 종류의 유적이라도 시대와 역사와 이야기가 다르면 각각 볼 이유가 있다.

5. ‘귀족의 성당’과 ‘민중의 성당’이라는 선명한 구도

‘바다의 성모 성당’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저자 특유의 시선도 드러난다.

그는 지배자와 귀족과 부자들이 고딕지구에 대성당을 지었던 시기에 가난한 어부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바닷가에 자신들의 성당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쓰면 두 성당은 자연스럽게 권력과 부의 성당 대 가난한 민중의 성당이라는 구도로 나뉜다.

물론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성당 건축에 참여하고 힘을 보탠 것은 중요한 역사다. 그러나 실제 도시의 사회구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두 편으로 갈리지 않는다. 바닷가 지역에는 어부와 노동자뿐 아니라 상인과 다양한 계층이 함께 살았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저자의 글을 조금 거리를 두고 읽게 된다. 역사 자체와 저자의 해석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책에는 당연히 저자의 시선이 들어간다. 오히려 그것이 여행기를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다만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가도 독자는 어느 순간 자기 눈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6. 카탈루냐 ―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원한을 내려놓는 것

카탈루냐의 역사는 이 책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졌다. 1714년의 패배와 자치제도의 상실, 오랜 지역 정체성, 그리고 2017년 독립 주민투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으면 오늘날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더 큰 공동체를 만들려면 과거의 적대적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전쟁 기억과 한국전쟁을 예로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남과 북이 언젠가 다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전쟁에서 서로 죽고 죽였던 원한을 영원히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기억을 지운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런 비극을 다시 만들지 않으려면 오히려 잘 기억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혀야 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기억을 지워버린 뒤 훗날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머리를 긁적여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원한의 대물림을 멈추는 일이다.

역사는 기억하고, 잘못은 인정하되, 그 증오까지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이 더 큰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은 저자가 던진 문제에는 공감했지만 그가 선택한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7. 저자가 지나친 또 하나의 카탈루냐 ― 조지 오웰

카탈루냐 이야기를 읽는 동안 계속 떠오른 책이 있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다.

책의 제목만 보면 카탈루냐 민족주의나 독립운동을 찬양한 책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웰은 카탈루냐 독립을 위해 스페인으로 간 사람이 아니었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 진영에서 직접 총을 들었다.

그래서 내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느끼는 것은 카탈루냐 분리주의보다는 국경을 넘어 자유를 지키려 했던 국제적 연대에 더 가깝다. 동시에 오웰은 그 전쟁 속에서 같은 편끼리 서로를 적으로 몰아붙이고 진실마저 정치에 따라 왜곡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민음사판 『카탈로니아 찬가』의 표지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국제여단 병사들이 걸어오는 흑백사진이다. 오른쪽 끝에는 유난히 체격이 큰 병사가 힘차게 걷고 있고, 왼쪽 끝에는 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병사가 있다. 그 사이로 총을 든 병사들이 이어진다. 실제 역사 속의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인데도 구도가 기막히게 좋다. 오래전에 본 책의 표지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유다.

저자가 카탈루냐의 역사와 정치적 정체성을 이만큼 이야기하면서 오웰과 『카탈로니아 찬가』를 지나친 것은 내게는 조금 아쉽다. 물론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바르셀로나를 읽는 방식에는 오웰도 분명히 들어 있다.

8. 그리고 몬주익 ― 나는 황영조를 한 문장으로 지나칠 수 없다

바르셀로나 편에서 가장 섭섭했던 대목은 몬주익이었다.

저자는 몬주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지나간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언덕 오르막에서 치고 나와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

그게 전부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황영조를 폄하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한 문장이 못내 섭섭했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스페인과 바르셀로나의 역사의 일부이다. 한국인 저자로서 이를 좀더 비중있게 다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다. 한국인이었지만 자기 나라의 태극기를 가슴에 달 수 없었다. 그리고 56년이 지난 1992년, 황영조는 대한민국의 이름과 태극기를 달고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오르막을 넘어 올림픽 마라톤 정상에 섰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한 나라에서 몇십 년을 기다려도 다시 나오지 않을 수 있는 성취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4년에 한 번 모여 42.195km를 달리고, 그 가운데 단 한 사람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다. 황영조 개인이 훗날 어떤 구설에 올랐는지는 그날의 성취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몬주익의 황영조를 한 문장으로 지나칠 수 없다.

다른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서는 여러 문단을 써가며 의미를 찾아내던 저자가 이 대목에서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이것을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고 단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국인 독자로서는 적어도 한 문단 정도는 황영조가 그 언덕에서 만들어낸 엄청난 성취와 그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해주었으면 했다.

섭섭했다.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며 저자와 내 시선이 가장 분명하게 갈린 대목 가운데 하나였다.

9.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반대로 저자가 여행을 이야기한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친밀한 사람과 함께하면 즐거움은 두 배가 된다고도 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조금 걸리는 데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멀리 갈 이유가 있는가. 책이 좋으면 집에서 읽으면 되고, 맛있는 음식이 좋으면 가까운 곳에서도 먹을 수 있다.

내게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문장을 조금 바꾸고 싶다.

“내게 여행은 멀리 가서,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내게 여행은 좋아하는 것을 만나기 위해 일상의 자리를 떠나는 일이다.”

역사유적을 직접 찾아가고, 책에서 읽었던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고, 웅장한 자연 앞에 서서 걷는 것. 그래서 멀리 떠나는 것이다.

저자의 여행법과 내 여행법이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내가 어떤 여행을 좋아하는지가 더 분명해졌다.

10. 저자를 따라 걷되, 내 눈으로 보는 도시

『유럽 도시 기행 3』의 스페인편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시선을 많이 따라갔다.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 고야와 피카소를 만났고,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와 카탈루냐의 오랜 기억을 만났다.

좋았던 이야기도 많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바라보는 시선도 좋았고, 가우디의 안타까운 마지막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카탈루냐의 역사에서 ‘기억과 공동체’라는 문제를 끌어낸 것도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건너뛴 것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여행에는 언제나 시간의 제약이 있다. 다만 그것을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으로 설명하고 곧바로 다른 성당에는 예외를 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표현에는 처음 공감했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카탈루냐를 읽으며 저자가 지나간 조지 오웰을 나는 다시 불러냈고, 몬주익에서는 저자가 한 문장으로 지나친 황영조 앞에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이 재미있다.

저자의 판단에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읽다가 “그건 좀 아닌데”, “왜 거기를 건너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고 멈춰 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책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는 책일 수도 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저자를 따라 걸었지만 곳곳에서 내 생각으로 멈춰 섰다. 프랑코와 고야, 피카소와 가우디, 카탈루냐의 기억과 오웰의 국제여단, 그리고 몬주익의 황영조까지.

도시는 저자가 보여주었지만, 그 도시에서 무엇을 오래 바라볼지는 결국 내가 결정했다.

그것이 『유럽 도시 기행 3』 스페인편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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