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리아가 리스본의 대표 가수라면 대표 작가는 누구일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라마구 아닐까 싶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난해함을 넘어 기괴함에 이른 텍스트를 남긴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1935)를 리스본 시민들은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라마구는 기념관에서만 보았지만, 페소아는 리스본 어디에나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여행자가 보아야 할 리스본(Lisboa, what the tourist should see)』을 샀다. 페소아가 1925년 영어로 쓴 텍스트에 사진을 곁들여 만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여러 판본이 나와 있다

페소아의 정신은 외모보다 더 특이했다. 연금술·신비주의·마법·비밀결사·점성술에 심취했고, 셰익스피어와 나폴레옹 같은 역사 인물의 별자리 운세 모음집을 만들었으며, 바이런 스타일의 영국 낭만주의부터 보들레르가 대표하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엘리어트의 모더니즘까지 온갖 문예사조를 섭렵했다. 1935년 가을 복통과 고열 증세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그는 영어로 된 책 네 권과 포르투갈어책 한 권밖에 출간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원고와 스케치를 남겼다. 포르투갈 국립도서관은 나무 트렁크에 들어 있었던 원고를 시민들에게 공개했고 정부는 페소아의 관을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겼다.

나는 페소아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팬이 많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도 취향 차이일 것이다. 페소아는 무엇보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몇 달이 걸려도 쓰기 어려웠을 법한 분량의 글을 하루에 생산했다.

1914년 3월 8일, 서랍장 앞에 종이를 놓고 가상 캐릭터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이름으로 서른 편 넘는 시를 썼고 자신의 이름으로도 여섯 편을 쓴 것이다. 작가 스스로 ‘승리의 날’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한다.

페소아가 만든 이명 캐릭터를 알고 싶다면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과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같은 책을 읽으시기 바란다. 나는 독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페소아의 집’을 보아도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집을 본 건 좋은 선택이었다. ‘내면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과 꿈이 차오르면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 봐. 들어주는 이가 많지 않아도 괜찮아.’ 페소아는 그렇게 나를 격려해 주었다.

리스본 전차는 특이하다. 차체가 작고 짧아서 비탈의 좁고 휘어진 골목을 다닐 수 있고 전조등은 아래쪽에 하나만 달려 있다. 원색을 칠해서 장난감처럼 보이는데 노란색이 가장 인기가 있다. 전차는 주로 관광객이 이용하고 리스본 시민들은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탄다.

수신기를 목에 건 단체 관광객이 대부분이라 전차가 정류장에 멈추어도 내리는 이가 별로 없었다. 전차 골목 투어를 여유롭게 즐기려면 아침 일찍 또는 밤늦게 타야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 시인과 작가 여덟 명의 조각상을 받침대에 놓고 위에 루이스 드 카몽이스(Luis de Camoes, 1524~1580)의 청동상을 올린 광장의 조형물은 주변의 범선 모양 바닥 장식과 함께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리스본에서 죽은 그가 ‘국민시인’의 영예를 얻은 것은 1572년 출판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서사시라고 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내용이 어떤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리스본에서 죽은 그가 ‘국민시인’의 영예를 얻은 것은 1572년 출판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서사시라고 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내용이 어떤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종이책을 많이 읽는지 리스본에는 서점이 흔했다. 오래된 책방은 예쁘고 책이 많았으며 헌책방에는 책 말고도 오래된 물건을 팔았다. 우리는 오래된 서점에서 페소아가 영어로 쓴 리스본 가이드북을 구입했다.

14세기 후반 게릴라전으로 까스띠야 왕국의 침략을 물리쳤던 독립 영웅 페레이라(Nuno Alvares Pereira, 1360~1431)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 나라의 독립을 지킨 전사였던 페레이라는 나이가 들어 종교 지도자로 살면서 까르무 성당 신축을 이끌었고 죽은 다음에는 거기에 묻혔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임진왜란 후에 스님이 되어 서울 경복궁 가까운 곳에 절을 세웠고 죽어서 거기 묻혔다고 가정해 보라. 민중은 그 절을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고고학 유물이 아니라 폐허를 만나고 싶어서 까르무에 갔다. 대성당이나 상 조르즈성처럼 겉보기에 멀쩡한 건물로 복원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까르무 성당은 복원 작업을 중단한 덕에 새로운 가치를 획득했다. 완전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2025년 9월 탈선 사고로 열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 푸니쿨라다. 구간이 짧은 데다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우리는 걸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리스본에서 올랐던 모든 전망대 중에서 경치는 단연 최고였다. 발아래 바이샤지구 시가지가 펼쳐졌고 건너편 알파마지구와 상 조르즈성이 보였으며 멀리 타구스강의 드넓은 하구까지 눈에 들어왔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덕분에 널리 알려진 그 전망대는 유원지 같았다.

벨렝지구의 마누엘 1세
세 번째 날은 벨렝지구에서 보냈다. 중년의 운전기사가 부탁하지도 않은 관광 안내를 열심히 하기에 스마트폰 번역 앱을 켜고 실시간 이동 경로를 보면서 내용을 짐작해 보았다

벨렝지구는 지진이 덜했던 덕에 크고 오래된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관광객이 붐빈다고 해서 서둘렀지만, 우리는 부지런한 여행자에 끼지 못했다. 벨렝 타워(Torre de Belem)부터 발견기념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까지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벨렝 타워는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 밖에서만 보았다. 볼만한 집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다른 어떤 건물보다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벨렝지구는 지진이 덜했던 덕에 크고 오래된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관광객이 붐빈다고 해서 서둘렀지만, 우리는 부지런한 여행자에 끼지 못했다. 벨렝 타워(Torre de Belem)부터 발견기념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까지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벨렝 타워는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 밖에서만 보았다. 볼만한 집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다른 어떤 건물보다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벨렝 타워는 20세기 후반 들어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군사시설의 흔적을 지우고 내부에 회랑을 만들어 문화 행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최근에는 신기술을 적용해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고 안팎을 새로 꾸며 집 자체를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체현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외양은 이슬람 스타일인데 곳곳에 십자가와 성모상을 비롯한 기독교의 상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군사 요새의 특징과 대항해 시대의 정서를 보여주는 장식이 많으며, 군주제의 흔적인 왕실 문장과 공화정의 상징인 내부 회랑이 공존한다. 그래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넘쳐나는 것이다.

마누엘 양식이라는 말이 생기게 한 마누엘 1세의 별칭은 ‘행운왕’이다. 그는 평생 운이 좋았다. 왕의 사촌이라서 왕위 계승권이 없었는데 왕세자가 죽는 바람에 왕이 되었다. 그때 포르투갈은 사회가 평온했고 스페인과 관계가 원만했으며 정부에 유능한 인재가 많았다.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신항로를 개척한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그의 행운은 타인의 불운이었다. 인도 일부 지역과 브라질 원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학살당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짐승처럼 붙잡혀 노예로 팔려나갔다. 마누엘 1세는 스페인 왕에게 아부해 공주와 혼인할 목적으로 리스본 유대인을 학살하고 추방했다. 페스트에 걸려 죽은 것이 인생에서 겪은 유일한 불운이었다.

아치·회랑·기둥·문·창문 등 건축물의 기본 요소에 돈을 많이 들여 크고 복잡한 장식을 함으로써 왕의 권력과 부를 과시했다. 둘째, 장식에 배·닻·돛·밧줄·조개 등 바다와 관련이 있는 모티브를 썼다. 셋째, 힌두 사원 문양이나 이슬람 세공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위세를 보여주려 했다. 넷째, 십자가·성모·천사 같은 기독교 상징을 두드러지게 배치해 도덕적 이념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침략과 약탈 행위를 정당화했다.

누가 보든, 어떻게 보든, 마누엘 양식 건축물은 ‘졸부의 교만과 과시욕’을 드러낸다. 스페인의 압박에 시달리는 약소국가였다가 갑자기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던 포르투갈 권력자의 자아도취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런 문화양식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며 널리 퍼질 수도 없다. 마누엘 양식은 북아프리카와 브라질, 인도의 고아, 마카오 등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곳에서만 잠깐 존재했다.

엔히끄 왕자는 포르투갈의 역사 영웅이지만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납치해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한 일과 최초의 노예 매매 시장이 생긴 것이 그와 관련이 있다. 칙명을 내려 포르투갈 왕에게 이교도를 노예로 삼을 권리를 부여한 가톨릭 교황청의 잘못도 크지만 직접 책임은 엔히끄에게 물어야 맞을 것이다.

그 시대에 스페인만 ‘개가 두 발로 걷는 기적’을 연출한 게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더 극적으로 떠올랐고 더 허망하게 가라앉았다. 엔히끄는 포르투갈 국민의 마음에 남은 대항해 시대 전성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사 인물이다.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벨렝지구에서는 다들 에그 타르트를 찾는다. 여행 책자에 빠지지 않는 유명한 점포에 가면 홀에서 먹으려고 줄을 서기보다는 포장 판매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 큰 기대는 하지 말기 바란다. 적당히 달고 식감이 부드러운 간식일 뿐이다. 나는 제과점보다 식당이 많아 좋았다.

신이 언어를 다르게 해서 인간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독교 구약의 이야기는 효력이 다한 것 같았다. 우리는 영어도 신통치 않고 프랑스말이나 포르투갈말은 아예 몰랐지만, 인공지능 번역기 덕분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굴벤키안은 ‘세계시민’이라고 할 만한 인생을 살았다. 오스만제국에 복속한 아르메니아 귀족의 후손으로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공학박사가 되었다. 가업인 석유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러시아 유전을 연구하고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을 탐사했다. 1896년 오스만제국 군대가 아르메니아인 수십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가족을 이끌고 런던에 망명해 영국 국적을 얻었으며 로열 더치 셸의 대주주로 이라크 석유회사를 설립했다.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굴벤키안은 리스본에 굴벤키안 재단을 설립해 재산과 예술품을 관리하면서 교회·학교·병원에 거액을 지속적으로 기부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회사에 아르메니아 사람을 고용하려고 노력했고 런던 아르메니아교회에 묻혔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관적으로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리스본을 떠나왔다.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도 다른 어느 도시에서보다 마음이 편했다. 자연이 아름다웠고 도시는 정겨웠으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고 음식과 음악이 훌륭했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모든 풍경이 기억에 또렷하고 파두의 멜로디와 해물 밥 냄새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기회가 생긴다면 기쁜 마음으로 갈 것 같다. 리스본은 그런 곳이다.

뽀르투는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에 합류하는 도루강(Douro) 하류의 북쪽 비탈과 언덕에 들어선 도시다. 포르투갈에서는 리스본 다음으로 큰 도시라지만 면적은 서울 강서구와 비슷하고 상주인구는 25만 명밖에 되지 않으며, 도루강 남쪽 가이아(Gaia)지구를 비롯해 행정구역 뽀르투에 속하지 않는 인근 도시들을 다 묶어야 150만 명 정도다. ‘광역 뽀르투’는 정유·조선·코르크·자동차부품·식품 등 다양한 산업을 안고 있지만 세계시장 경쟁력은 없어서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하며 일부를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 수출한다. 뽀르투(porto)는 지명인 동시에 ‘항구’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다. 국호 포르투갈(Portugal)이 라틴어 지명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이렇다 할 유적은 없지만 고대부터 중요한 항구도시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딱 하루 뽀르투에 머문다면 어디를 어떻게 다니면 좋을까? 내가 찾은 답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이틀 있다면 같은 경로를 더 여유 있게 다니면 된다. 아침 일찍 시청사에서 출발해 강을 향해 걸으면서 이름난 서점과 기차역과 성당 같은 명소를 본다. 한낮에 히베이라(Ribeira, 강변)지구에 도착하면 간단히 점심을 먹고 유람선을 탄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유람선을 탄 다음 건너편 가이아지구에서 늦은 점심을 먹어도 된다. 도루강 양안에는 식당이 즐비하고 메뉴와 가격대는 다양한데, 목이 좋은 식당이라고 해서 음식값이 특별히 비싸지는 않다. 우리가 들렀던 식당들은 음식 맛이 다 다르게 좋았고 값도 적당했다.

책에 넣을 사진을 찍느라 우리는 이렇게 다니는 데 이틀을 썼다. 젊은이라면 하루에 다 해도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뽀르투는 리스본보다도 더 마음 편하게 다녔다는 말을 덧붙인다. 소매치기 따위는 걱정할 필요 없었고 경찰관이나 순찰차를 만난 기억도 없다. 발을 들인 순간부터 떠나온 때까지, 우리가 본 사람들은 다 친절했다.

가헤뜨는 낭만파 시인이자 민주주의 혁명가이고 문화운동가였다. 뽀르투 시가 청사에 하필 그의 흉상을 세운 것은 뽀르투에서 태어났고 포르투갈 국민이 카몽이스만큼이나 좋아하는 시인이라서다. 꼬임브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가헤뜨는 무신론자임을 숨기지 않고 글을 쓴 탓에 숱한 필화(筆禍)를 겪었으며 1820년 뽀르투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크게 활약했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시와 희곡을 발표했고, 후일 돌아와 민담집을 편찬하고 역사소설을 썼으며, 만년에는 귀족 작위를 받았고 왕립극장 신축을 주도했다. 리스본이 자랑하는 카몽이스와 나란히 국립 판테온에 묻힌 그를 뽀르투 시민들은 지금도 사랑한다.

시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렐루서점(Livraria Lello)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책방’이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책방’이라는 건 확실하다. 포르투갈에는 문을 연 지 백 년 넘은 서점이 드물지 않다고 하는데 렐루서점도 그런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렐루서점은 책방이라고 하기 어렵다. 소설가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의 마법학교를 구상할 때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사람이 끝없이 밀려드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며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산다. 리스본도 서점이 많았는데 뽀르투도 그랬다. 우리가 묵은 호텔 바로 옆에도 있었고 렐루서점 가는 뒷골목에도 조그만 쇼윈도를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으로만 채운 헌책방이 있었다

포르투갈은 오래된 출판 선진국이다. 대항해 시대의 항해 기록과 탐사 보고서를 쌓아나갔던 15세기부터 그랬다. 언론의 자유를 혹심하게 탄압했던 살라자르 시대에도 출판 산업은 생명력을 유지했고 시민들은 서점에서 정치 정보를 나누었다. 언덕과 비탈이 많은 리스본과 뽀르투에서 서점은 커피와 음악을 즐기는 쉼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포르투갈 사람들은 작가를 높이 받든다. 리스본의 가장 중요한 광장에 카몽이스의 이름을 붙였고 뽀르투 시청사 정문 앞에 가헤뜨의 흉상을 세웠다.

책과 서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이 총포와 같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총포처럼 위력 있는 것은 새롭고 유용한 지식과 정보이지 문자 텍스트를 인쇄한 종이책이 아니다. 세상은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 책은 지성의 상징이 아니며 숭배할 대상 또한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나는 책을 전성기가 지난 전통 미디어로 여긴다. 서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통념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상벤투역의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의 역사를 구현한 작품이다. 딱 보면 바로 무서워지는 그림이 있었다. 국가의 탄생을 확정한 1140년의 발데베즈 전투 장면이다. 아폰수 1세는 이 전투에서 레온-까스띠야 왕국 군대를 제압해 포르투갈 왕국의 출발을 알렸다. 그것 말고도 포르투갈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지배자와 사건들이 나왔다. 레온-까스띠야 왕국 알폰소 7세의 포르투갈 공식 외교사절 접견, 주앙 1세 부부의 뽀르투 입성, 엔히끄 왕자의 북아프리카 세우타 정복 같은 것이다. 종교축제·농사·시장과 마을 풍경은 그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 가장자리에는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반복 사용하는 이슬람 양식을 적용했다. 대합실 중앙에 서서 벽과 천장을 휘둘러보았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본 최고 수준의 아줄레주였다.

세계 모든 곳에서 온 여행자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면서 저마다의 언어로 감탄사를 내뿜었다.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그렇게 한국인을 많이 본 적은 없었다. 뽀르투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힙한 여행지’로 떠올랐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배를 채운 다음 뽀르투 대성당(Sé do Porto)을 거쳐 강변으로 걸었다. 뽀르투 대성당은 리스본 대성당보다 더한 시골 교회였다.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긴 세월이 걸려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에 나중 고딕 회랑과 바로크 스타일의 제단을 추가했다고는 하지만 크게 볼 것은 없었다. 0층과 1층의 아줄레주도 크기만 했을 뿐 상벤투역에는 견줄 수 없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리만큼은 명당이었다. 성당의 탑에 오르자, 시내와 도루강 넘어 바다까지 보였다. 고층 건물이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을 가렸지만, 앞마당에서 보는 경치가 나쁘지 않았고 성당 아래편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는 시민들의 일상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당 떨어진’ 느낌이 들어 해가 저물기 전에 숙소로 복귀했다. 체력을 회복하려고 고칼로리 저녁밥을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포트와인은 ‘뽀르투 와인’의 영국식 표현이다. 영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맥주와 위스키뿐 아니라 포도주도 좋아했는데, 영국은 위도가 높아 포도를 재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포도주를 프랑스에서 들여왔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국이 15세기 중반 백년 전쟁에서 패하면서 보르도를 비롯한 대륙의 영토를 상실했다. 잔 다르크가 전세를 역전해 프랑스에 승리를 안겨주었던 바로 그 전쟁이다. 그때부터 프랑스 민중은 잉글랜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고 두 나라는 끝없이 외교 분쟁을 벌였다

나도 그날 오후의 햇살에 잔을 비추어 보면서 포트와인을 마셨다. 내 인생에 제일 많이 마신 날이었지만 긴 시간 동안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우버를 불러 숙소로 돌아오는데 운전사의 영어가 심상치 않아 물어보았더니 미국 사람이었다. 농구 관련 일로 뽀르투에 왔다가 너무 좋아서 눌러앉았고 뽀르투 여인과 혼인했으며 자녀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다들 미국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에서 기술 발전으로 이룬 거대한 물질적 풍요보다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이 아름답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뽀르투 국립 미술관은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웠다. 마드리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오디오 가이드 해설을 들으면서 거장들의 대작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뽀르투의 예술가들이 자신과 세상에 관한 생각과 감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을 마주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곳을 다녀온 뒤로 나는 국내여행을 할 때도 미술관이 있으면 들러보는 습관이 생겼고, 광주시립 미술관의 청년 작가 초대전과 영암군 하정웅 미술관의 이우환 작품 시리즈를 보았다. 강원도 양구군에 박수근 미술관이 있고 양평·진천·청송 등도 군립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슈마허 선생의 견해를 절반은 예술에 적용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중심과 변방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나름대로 다 멋질 수 있고, 중심과 변방이 저마다 아름다울 수 있다. 이런 배움을 얻었으니 그만하면 훌륭한 미술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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