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미술 이야기 8 - 바로크 문명과 미술 : 시선의 대축제, 막이 오르다 ㅣ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8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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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스페인 바로크
― 지워지지 않은 이슬람, 제국의 영광, 그리고 바로크라는 이름에 대한 의문


스페인 바로크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슬람의 흔적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뒤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가 무너진 1492년까지, 이슬람 정치세력과 문화는 700년 넘게 이 땅에 존재했다. 지역에 따라 실제 지배기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긴 세월 동안 만들어진 건축과 도시, 장식과 색채의 기억이 레콩키스타가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

스페인 건축을 보고 있으면 황토와 모래를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색조가 눈에 들어온다. 성채처럼 묵직한 벽체와 반복되는 창, 안뜰과 장식을 보고 있으면 북아프리카와 이슬람 세계가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다.

그래서 스페인 바로크를 읽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따라다녔다.

레콩키스타는 1492년에 끝났지만, 스페인 미술에서 이슬람은 그날 끝나지 않았다.


1. 분류는 르네상스인데, 눈은 자꾸 알함브라 쪽으로 간다

엘 에스코리알은 미술사적으로 이슬람 건축이 아니다.

펠리페 2세가 1563년부터 세운 거대한 왕궁이자 수도원으로, 장식을 극도로 절제한 스페인 르네상스, 에레라 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다.

그런데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 내 눈에는 이슬람의 분위기가 먼저 들어왔다.

그것이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이베리아반도에는 700년 넘게 이슬람 정치와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왕조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긴 세월 동안 쌓인 건축과 색채, 공간의 기억까지 없어질 수는 없다.

거대한 성채 같은 덩어리와 반복되는 작은 창, 넓은 벽면이 주는 묵직함, 그리고 이베리아반도 특유의 따뜻한 색감을 보고 있으면 가톨릭 왕권의 건축에서도 그 이전 이슬람 세계의 흔적이 겹쳐 보였다.

엘 에스코리알 자체를 이슬람 건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페인의 미술과 건축을 이슬람의 오랜 흔적과 완전히 떼어놓고 보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분류는 르네상스인데, 눈은 자꾸 알함브라 쪽으로 간다.


2. 왕은 건물을 남겼고, 돌을 나른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엘 에스코리알 같은 거대한 옛 건축물을 볼 때면 감탄보다 먼저 불편함이 든다.

지금처럼 크레인과 굴착기, 운반장비와 안전시설이 있던 시대가 아니다.

저 많은 돌을 캐고, 다듬고, 나르고, 들어 올려 쌓은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그 공사가 반드시 강제노동이었다거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근거 없이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 정도 규모의 건축에 막대한 자재와 돈, 수많은 노동자의 시간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왕의 이름은 수백 년 뒤에도 남는다.

건축가의 이름도 남는다.

그러나 돌을 캔 채석공, 수레를 끈 사람, 비계를 세운 목수, 벽을 쌓은 석공의 이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로마 바로크를 읽을 때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그 돔 아래에서 밤까지 일했던 노동자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엘 에스코리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은 건물을 남겼고, 민중은 노동을 남겼다. 그런데 역사는 왕의 이름을 더 오래 기억한다.


3. “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호걸이 아니다”

엘 에스코리알을 보다가 마오쩌둥의 말이 떠올랐다.

“不到长城非好汉.”

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호걸이 아니다.

이 말은 마오가 실제 만리장성에 올라 즉석에서 한 말이 아니라, 1935년 장정 중 육반산을 넘으며 쓴 「청평악, 육반산」에 나오는 구절이다.

마오는 인민을 앞세운 혁명의 지도자였다. 홍군을 이끌고 긴 싸움 끝에 중국 대륙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장성을 자신의 의지와 호걸됨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전에, 저 거대한 성벽을 만들기 위해 돌을 나르고 흙을 다지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백성부터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장성을 명령한 황제의 이름은 남았다.

장성을 쌓은 사람들의 이름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오의 말을 이렇게 뒤집어 보고 싶다.

장성에 올라 호걸을 말하기 전에, 장성을 만든 백성을 먼저 보았어야 했다.

엘 에스코리알도 다르지 않다.

거대한 건축물을 볼 때 내가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왕의 권력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들의 손이다.


4. 정복은 업적이고, 제국에 손해를 끼치면 실책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작품 못지않게 저자의 역사관이 걸리는 대목도 있었다.

펠리페 2세를 설명하면서 잉카제국 정복과 포르투갈 합병은 “큰 업적”으로 표현하고, 신교도를 탄압해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부추긴 것은 “뼈아픈 실책”이라고 평가한 부분이다.

이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평가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잉카제국을 무너뜨리고 영토를 넓힌 것은 스페인 제국에 이익이 되었으니 업적이고, 신교도를 탄압하다 네덜란드를 잃은 것은 스페인 제국에 손해가 되었으니 실책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피정복민이나 종교적으로 박해받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잉카제국 정복의 본격적인 과정은 펠리페 2세 이전 카를로스 1세 시기에 이미 진행되었다. 펠리페 2세 시대에 마지막 신잉카 세력까지 제거되기는 했지만, “펠리페 2세가 잉카제국을 정복했다”고 뭉뚱그리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이런 질문이 남았다.

정복은 ‘업적’이고, 탄압은 제국에 손해를 끼쳤을 때에야 ‘실책’이 되는가.

『난처한 미술이야기』의 미술 설명은 여전히 재미있고 뛰어나지만,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는 순간에는 그 기준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5. 세비야 대성당, 모스크 위에 올라선 고딕

스페인에서 이슬람의 흔적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축 가운데 하나가 세비야 대성당이었다.

본체는 15세기부터 세워진 거대한 고딕 성당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원래 알모하드 왕조의 대모스크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의 히랄다 탑 아래 부분은 바로 그 모스크의 미나레트였다.

기독교 세력이 세비야를 차지한 뒤 그 탑을 없애지 않고 종탑으로 바꾸었고, 나중에 그 위에 기독교식 종루를 더했다.

말 그대로 한 건물 속에 역사가 층층이 겹쳐 있다.

아래에는 이슬람의 미나레트가 있고, 그 위에는 기독교 종탑이 있으며, 옆에는 거대한 고딕 성당이 붙어 있다.

레콩키스타가 이슬람 왕조를 몰아냈다고 해서 이슬람이 만든 도시와 건축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미나레트는 종탑이 되었고, 모스크의 자리에는 고딕 성당이 올라섰다.

내가 스페인 미술에서 계속 이슬람의 흔적을 느꼈던 것이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6. 엘 그레코, 나는 줘도 안 가질 것 같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도 그렇고, 「오르가스 경의 매장」도 그렇고, 「라오콘」도 그랬다.

사람은 지나치게 길게 늘어나 있고, 화면에는 인물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으며, 색도 서로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후대 미술사에서는 그 비현실적인 인체와 색채, 강한 영적 긴장을 독창성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내 눈에는 우선 어수선했다.

특히 「오르가스 경의 매장」은 엘 그레코의 명성을 확립한 대표작이지만, 나는 솔직히 줘도 집에 걸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엘 그레코가 못 그리는 화가라는 말은 아니다.

「오르텐시오 펠릭스 파라비시노 수도사」 같은 초상화는 오히려 좋았다.

사람이 빽빽하게 몰리지 않고 색을 절제하니 얼굴과 눈빛이 살아났다.

결국 내가 싫어했던 것은 엘 그레코 자체라기보다 그의 종교화에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와 복잡한 화면, 색채였던 것 같다.


7. 내가 좋아하지 않는 두 화가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

「라오콘」을 보면서 피카소가 떠올랐다.

몸을 늘이고, 공간을 비틀고, 현실적인 색에서 멀어지는 방식에서 20세기 그림 같은 느낌이 났다.

그런데 책을 더 읽으니 실제로 엘 그레코가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특히 엘 그레코의 「성 요한의 환시」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나란히 놓으면 늘어난 인체와 V자형 배치, 파편화되는 공간 사이에 연결이 보인다.

나는 피카소의 그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피카소를 초현실주의 화가라고만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고, 입체주의가 그의 중심이지만, 어쨌든 사람이 깨지고 비틀어지는 그의 그림 역시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연결이 잘 이해됐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두 화가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은 납득이 갔다.

엘 그레코가 없었다면 피카소가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과 조금 달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8. 벨라스케스와 카라바조, 닮았다고 곧 영향은 아니다

벨라스케스에서는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책은 그가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법한 사람들을 성경 속 인물로 그렸다는 점에서 카라바조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건 너무 빨리 결론으로 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사람을 성경 이야기 속에 등장시켰다는 사실만으로 카라바조의 영향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런 자연주의적 인물 표현은 카라바조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물론 벨라스케스 초기 그림에는 강한 명암 대비, 어두운 배경, 이상화하지 않은 인물, 가까이 당겨놓은 구도 등 카라바조 계열의 특징이 분명히 보인다.

「세비야의 물장수」만 보아도 어두운 배경 속에서 인물과 물항아리가 튀어나오듯 보이고, 유리잔과 토기의 질감까지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니 카라바조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설명에는 동의할 수 있다.

다만 순서가 중요하다.

“평범한 사람을 그렸다, 그러므로 카라바조의 영향이다”가 아니라, 명암법과 자연주의, 비이상화된 인물 표현까지 함께 보아야 영향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

닮은 소재와 영향관계는 같은 말이 아니다.


9.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를 닮은 데서 멈추지 않았다

벨라스케스가 흥미로운 것은 결국 카라바조풍을 벗어났다는 점이다.

세비야 시절에는 어둡고 엄숙한 화면과 강한 명암법이 중심이었지만,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고 루벤스와 교류하며 이탈리아를 다녀온 뒤 그림이 달라졌다.

티치아노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색채와 붓질을 받아들이면서 화면은 더 밝아지고 붓질은 자유로워졌다.

책의 2장 요약에서도 이 변화를 “유학 전, 강한 명암 대비와 엄숙한 분위기”에서 “유학 후, 화사한 색채와 역동적인 분위기”로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녀들」에 도달한다.

거울과 시선을 이용해 화면 안과 밖을 뒤섞고, 보는 사람에게 “지금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가”를 계속 묻게 만든다.

벨라스케스가 위대한 이유는 카라바조를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영향에서 출발해 결국 자기 그림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10. 그런데 이게 정말 모두 같은 ‘바로크’인가

스페인 바로크를 읽으면서 자꾸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나는 바로크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화려함을 떠올린다.

베르니니의 조각, 보로미니의 건축, 포초의 천장화처럼 공간 전체를 압도하는 움직임과 장식, 극적인 빛, 과잉에 가까운 화려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바로크라는 양식의 원형은 결국 로마에 가장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는 훨씬 소박했고, 스페인의 엘 그레코와 초기 벨라스케스 역시 내가 떠올리는 바로크풍과는 거리가 있었다.

같은 17세기에 활동했다는 이유로 모두 바로크라는 이름 아래 넣는다면, 그때의 ‘바로크’는 하나의 양식이라기보다 시대를 묶는 넓은 우산에 가까워 보였다.

로마를 읽을 때는 “바로크란 이런 것이구나” 했는데, 북유럽과 스페인까지 오니 “이걸 모두 같은 바로크라고 불러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11. 세비야가 무너지자 그림은 가난한 사람을 바라봤다

3장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1649년 세비야에는 대규모 전염병이 닥쳤고, 책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기근과 경제난까지 겹치며 한때 스페인의 경제 중심지였던 도시가 크게 쇠퇴했다.

이때 등장하는 화가가 무리요다.

무리요는 거지 소년과 거리의 아이들을 그렸다.

「거지 소년」이나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거지 아이들」에는 왕과 성인 대신 가난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세비야의 자선병원도 빈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동시에 화려한 종교미술을 통해 신앙적 위안을 제공했다.

여기서는 로마 바로크와 다른 의미의 종교미술이 보였다.

로마에서는 교황의 권력과 가톨릭의 승리를 보여주는 화려함이 강했다면, 몰락해가는 세비야에서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종교와 미술이 위로의 공간이 된 것처럼 보였다.


12. 현실이 어두울수록 제단은 더 화려해졌다

그리고 3장에서 비로소 내가 아는 ‘바로크’가 나타난다.

울트라 바로크다.

벽을 빈틈없이 채우는 장식, 꼬이고 솟구치는 기둥, 금빛 제단, 소용돌이치는 형태.

특히 추리게라 가문에서 이름을 딴 추리게레스코는 장식의 과잉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오벨리스크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기둥과 끊임없이 겹치는 장식은 내가 로마에서 느꼈던 바로크의 과잉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조금 우습게 말하면 스페인 바로크 3장에 와서야 비로소,

“아, 인제사 바로크 같네.”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생각할 거리가 있다.

세비야는 가난해지고 제국은 쇠퇴하는데 미술은 더 화려해졌다.

현실이 무너지는데 제단은 더 빛났다.

그 화려함은 자신감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불안과 쇠퇴를 가리기 위한 장식이었을까.

책은 울트라 바로크를 위기에 놓인 사회가 더욱 화려한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 미술로 설명한다.

나는 후자 쪽이 조금 더 눈에 들어왔다.

현실이 어두워질수록 장식은 더 밝아졌다.


13. 스페인의 바로크가 아메리카와 아시아까지 갔다

스페인의 울트라 바로크는 아메리카 식민지로 퍼졌고, 그곳에서 현지 문화와 섞이며 훨씬 복잡한 장식으로 발전했다.

멕시코의 대성당과 교회들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바로크가 아메리카의 색과 장식을 만나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바로크는 아시아에도 도착했다.

책은 마카오의 성 바오로 성당 유적처럼 가톨릭 성인과 중국 문화의 요소가 한 건물에 함께 등장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서양식 성당과 천장화를 접하고 놀라움을 기록한 사실도 소개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같은 기록도 그 접촉의 흔적이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바로크가 조선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까지 확대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조선 사람들이 서양의 종교화와 원근법, 천장화를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조선 미술 전반을 바꿀 만큼 직접적인 영향으로 이어졌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그래도 로마에서 시작한 바로크가 유럽을 넘어 멕시코와 마카오, 중국을 거쳐 조선 지식인의 눈앞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는 흥미롭다.


14. 스페인 바로크를 읽고

스페인 바로크는 하나의 양식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려웠다.

첫머리에는 이슬람이 있었다.

가톨릭 왕국은 1492년에 그라나다를 정복했지만, 이슬람이 만든 도시와 건축, 색과 공간의 기억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오히려 700년 넘게 쌓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 위에 가톨릭 왕권과 제국이 올라섰다.

엘 에스코리알 같은 거대한 건축물은 왕의 권력을 보여주었고, 그 뒤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 노동자들이 있었다.

역사책은 정복을 업적이라 부르기도 했고, 제국의 손해를 실책이라 부르기도 했다.

엘 그레코는 내 취향과 맞지 않았지만 후대 피카소까지 이어지는 길을 만들었고,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결국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스페인이 쇠퇴하던 시기에는 오히려 울트라 바로크라는 극단적인 화려함이 등장했다.

로마 바로크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함과 극적인 공간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었고, 북부 네덜란드처럼 시민의 일상으로만 향하지도 않았다.

이슬람의 흔적, 가톨릭 왕권, 제국의 팽창과 쇠퇴, 빈곤과 신앙, 사실주의와 과잉 장식이 한곳에 겹쳐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는 미나레트에서 종탑이 되었고, 엘 에스코리알은 왕의 이름을 남겼지만 돌을 나른 사람들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다.

세 지역을 모두 읽고 나니 내게 ‘바로크’는 하나의 모양을 가리키는 말보다, 같은 시대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얼마나 다른 미술을 만들어냈는지를 묶어 보는 이름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내가 바로크라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릴 미술은 여전히 로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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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무결한 예술 작품.˝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가장 위대한 소설 세 편,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
-윌리엄 포크너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 소설이자 반사회 소설.˝ 
- 토마스 만

1. 작가를 말하다-레프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위대한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의 야스나야 몰라나에서 태어났다.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그만두고 고향으로돌아와 농지를 경영하고, 농노 계몽을 위해 일했다. 크림 전쟁에 참전하고,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영지에 학교를 세우고, 농노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평화 사상의 설파 금욕 생활과 빈민 구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톨스토이는 특히 민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상가로도 알려져 있다. 자기완성과 사적소유 부정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기초해 그가 살던 시대의 러시아 사회와 종교를 비판했다. 러시아 정교에서 파문을 당하고 정부의 압박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러시아 황제는 모든 걸 가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아무것도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러시아 황제다˝라고 할 만큼 살아 있는동안에도 사랑받는 슈퍼스타였다. 1910년 여행 중 세상을 떠나 고향 야스나야 폴라나숲에 묻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크로이처 소나타부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세기 비평가 매튜 아놀드가 ‘그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라는 평가를 남길 정도로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방대한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2. 작품을 말하다-안나 카레니나
Анна Каренина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 「부활과 더불어 톨스토이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8부작 239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작품으로,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당대 러시아의 시대상과 개인의 내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고전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와 브론스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삼각관계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위 공직자의 아내인 안나가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해 이상적인 가정을이루려는 농촌 귀족 지주 레빈의 이야기 두 축으로 전개된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비되는 레빈과 키티의 사랑 이야기를 교차시켜 엮어 놓았다. 레빈의 이야기가 안나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지는설정은 작품에 긴장감을 더하면서 작가가 제시하는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한 연애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다양한 주제, 여러 인물 유형을 담은 광범위한 작품이다. 귀족층의 위선과 허위의식, 종교와 교육 문제, 가족 문제와 농업전쟁과 일상 등 사회 구조적인 모순부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기쁨, 불안과 고통, 질투와 증오, 광기의 감정들이 가져오는 인간적 고뇌, 심리적 통찰까지 꿰뚫는다.
톨스토이가 ˝나는 모든 것을 ‘안나 카레니나 속에 썼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정도로 톨스토이의 모든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고민을 녹여 낸 대표작이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가 겪은 역사적 과도기를 다양한등장인물과 사실적인 묘사로 생생히 그려 낸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3. 세계를 말하다

작품에 들인 시간
안나 카레니나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잡지 <러시아통보>에 연재되었다. 2년 반가량의 긴 시간 동안 톨스토이는 아동 교육용 원고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이 작품에만 몰두했다. 소설 구상에서 수정, 출간까지 1870년대 대부분을이 작품의 창작에 매달렸다고 한다.

실제 사건
톨스토이는 실제 사건에 착안해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적 죽음을 그려 냈다. 1872년 안나 피로고바라는 여성의 화물 열차 투신 사건이 일어났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야스나야 폴랴나 근처기차역에서 달리는 화물 열차에 몸을 던진 사건이었다. 톨스토이는 당시 기차역 막사에 안치된 안나 피로고바의 사체를 일부러 찾아가 살펴볼 정도로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배우들이 사랑한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 중가장 아름다운 부인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손꼽힌다. 소설 원작을 토대로 다양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 아름답지만 불행한여인 안나 카레니나를 연기했다.

톨스토이의가출
톨스토이도 마냥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톨스토이가 살아생전 작성한 유언장을 둘러싸고 그의 가족들끼리 겪었던 갈등도 깊었다. 톨스토이는 가족의 불화도견디기 힘들었지만, 그가 사유 재산을 부정하면서 자신이누리던 모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고통을 느껴 집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심정을 유일하게이해하는 딸 알렉산드라와 결국 가출했다. 모든 신문이 그의 가출 소식을 전했고, 그가 탄 기차마다 탐정과 기자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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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무결한 예술 작품."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가장 위대한 소설 세 편,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
-윌리엄 포크너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회 소설이자 반사회 소설." 
- 토마스 만 - P-1

작가를 말하다-레프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위대한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의 야스나야 몰라나에서 태어났다.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그만두고 고향으로돌아와 농지를 경영하고, 농노 계몽을 위해 일했다. 크림 전쟁에 참전하고,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영지에 학교를 세우고, 농노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평화 사상의 설파 금욕 생활과 빈민 구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톨스토이는 특히 민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상가로도 알려져 있다. 자기완성과 사적소유 부정이라는 철학적 관점에 기초해 그가 살던 시대의 러시아 사회와 종교를 비판했다. 러시아 정교에서 파문을 당하고 정부의 압박을 받았지만,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러시아 황제는 모든 걸 가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아무것도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걸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러시아 황제다"라고 할 만큼 살아 있는동안에도 사랑받는 슈퍼스타였다. 1910년 여행 중 세상을 떠나 고향 야스나야 폴라나숲에 묻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이반 일리치의 죽음」 「크로이처 소나타부활」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세기 비평가 매튜 아놀드가 ‘그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삶의 파편이다"라는 평가를 남길 정도로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방대한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 P-1

작품을 말하다-안나 카레니나
Анна Каренина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 「부활과 더불어 톨스토이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8부작 239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작품으로, 사랑과 결혼, 가족 문제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당대 러시아의 시대상과 개인의 내면을 생생하게 묘사한 고전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와 브론스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의 삼각관계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위 공직자의 아내인 안나가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해 이상적인 가정을이루려는 농촌 귀족 지주 레빈의 이야기 두 축으로 전개된다.
톨스토이는 의도적으로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비되는 레빈과 키티의 사랑 이야기를 교차시켜 엮어 놓았다. 레빈의 이야기가 안나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으로 다루어지는설정은 작품에 긴장감을 더하면서 작가가 제시하는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한 연애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다양한 주제, 여러 인물 유형을 담은 광범위한 작품이다. 귀족층의 위선과 허위의식, 종교와 교육 문제, 가족 문제와 농업전쟁과 일상 등 사회 구조적인 모순부터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기쁨, 불안과 고통, 질투와 증오, 광기의 감정들이 가져오는 인간적 고뇌, 심리적 통찰까지 꿰뚫는다.
톨스토이가 "나는 모든 것을 ‘안나 카레니나 속에 썼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정도로 톨스토이의 모든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고민을 녹여 낸 대표작이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가 겪은 역사적 과도기를 다양한등장인물과 사실적인 묘사로 생생히 그려 낸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P-1

세계를 말하다

작품에 들인 시간
안나 카레니나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잡지 <러시아통보>에 연재되었다. 2년 반가량의 긴 시간 동안 톨스토이는 아동 교육용 원고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이 작품에만 몰두했다. 소설 구상에서 수정, 출간까지 1870년대 대부분을이 작품의 창작에 매달렸다고 한다.

실제 사건
톨스토이는 실제 사건에 착안해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적 죽음을 그려 냈다. 1872년 안나 피로고바라는 여성의 화물 열차 투신 사건이 일어났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야스나야 폴랴나 근처기차역에서 달리는 화물 열차에 몸을 던진 사건이었다. 톨스토이는 당시 기차역 막사에 안치된 안나 피로고바의 사체를 일부러 찾아가 살펴볼 정도로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배우들이 사랑한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에 등장하는 인물 중가장 아름다운 부인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주인공으로 손꼽힌다. 소설 원작을 토대로 다양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레타 가르보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 아름답지만 불행한여인 안나 카레니나를 연기했다.

톨스토이의가출
톨스토이도 마냥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톨스토이가 살아생전 작성한 유언장을 둘러싸고 그의 가족들끼리 겪었던 갈등도 깊었다. 톨스토이는 가족의 불화도견디기 힘들었지만, 그가 사유 재산을 부정하면서 자신이누리던 모든 것에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고통을 느껴 집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심정을 유일하게이해하는 딸 알렉산드라와 결국 가출했다. 모든 신문이 그의 가출 소식을 전했고, 그가 탄 기차마다 탐정과 기자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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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을 지녔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불행을 안고 산다.

모스크바의 오블론스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스티바는 아내 돌리를 두고 부적절하게 처신했다.
풀기 어려운 문제에 삶이 제시하는 해답은 그에게 하나였다.
바로 그날그날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었다.

절망에 빠진 돌리 앞에 전보가 도착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스티바의 동생 안나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집으로 와 달라는 스티바의 요청에 안나가 응한 것이었다.

스티바가 안나를 맞이하러 기차역으로 나갔다.
안나와 여행길에 마주친 브론스카야 백작 부인은 아들인 브론스키가 마중 나왔다.
안나와 청년 장교 브론스키는 역 플랫폼에서 스치듯 인사를 나누었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다.

스티바와 여러모로 달랐지만,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던 레빈도 모스크바에 왔다.
용기를 내 스티바의 막내 처제인 키티에게 청혼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키티는 레빈이 아닌 브론스키의 청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절당한 레빈은 상심에 빠져 영지로 돌아갔다.
레빈은 고독 속에 머물렀다.

안나와 인사를 나눈 뒤로 브론스키는 그녀를 다시 만날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오빠 부부를 화해시킨 안나는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나타났다.
키티는 안나의 매력이 옷차림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론스키는 안나만 보고 있었다.
키티가 받은 상처는 컸고, 안나는 저녁을 마다하고 자리를 떠났다.

안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브론스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기쁨과 죄책감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결연히 모스크바를 떠났다.
하지만 기차가 잠시 머문 사이, 거센 눈보라 속에서 브론스키와 마주쳤다.
그가 안나를 따라 페테르부르크행 기차를 탄 것이다.

안나는 놀라면서도 알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기차역에는 남편 카레닌과 아들 세료자가 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의 친구이자 브론스키의 사촌 벳시가 여는 살롱은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핵심이었다.
돌리와 스티바는 벳시의 살롱에서도 다투었고, 이들 부부와 다르게 안나와 브론스키는 서로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아름답고 정결한 여인으로 칭송받던 안나의 평판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카레닌은 아내와 브론스키의 관계가 거슬렸지만 체면을 차리기 위해 애써 모르는 척했다.
부부는 거리를 두었고, 어색해졌다.
사교계에서 평판이 나빠질수록 안나와 브론스키의 감정은 깊어져 갔다.
브론스키의 사랑만 있다면, 안나는 위선과 기만으로 지켜 온 결혼 생활을 망가뜨린 죄책감과 수치심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군 복무와 사교계 말고도 브론스키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승마였다.
장교들의 경주에 브론스키도 참가했다.
안나와 카레닌, 스티바와 돌리, 벳시와 브론스카야 백작 부인을 비롯한 명문가 사람들이 승마장에 가득 모였다.
전력 질주하며 선두를 달리던 브론스키가 승리를 확신하던 순간, 말이 비틀대며 쓰러졌다.

브론스키는 다치지 않았고, 말의 허리가 부러졌다.
안나가 주저앉아 부채로 얼굴을 가리더니 가슴을 들썩이며 소리 내 울었다.
정숙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냉담한 표정으로 처신을 나무라는 카레닌에게 안나는 자신이 브론스키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레빈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풀베기를 거들며 마음의 상처를 잊어 갔다.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고, 브론스키의 무관심에 상심했던 키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내면을 가득 채운 키티가 레빈이 잠시 머물던 곳을 지나가면서, 두 사람은 마주쳤다.
키티의 꾸밈없는 두 눈동자를 알아본 레빈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깨달았다.
레빈과 키티는 가까워졌다.

레빈과 키티는 결혼식을 올렸다.
레빈은 자신의 행복을 믿어도 될지 두려웠다.
두 사람은 시골에 머물며 평범한 일상에 실망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다.
레빈과 키티는 몇 번의 위기를 함께 넘기며 서로를 보듬었다.
형의 죽음 앞에 무너진 레빈을 키티가 위로해 주었고, 새 가족도 생겨났다.

안나를 벌주려는 마음과 체면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카레닌은 브론스키의 딸을 낳고 위독해진 안나와 불안에 떠는 브론스키를 용서했다.
건강을 회복한 안나는 아들까지 포기하고, 브론스키는 안나와 함께하기 위해 군 복무를 그만두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함께하는 행복을 누렸지만, 안나는 아들이 그리웠다.
브론스키는 장교로 복무하며 자유롭게 지내던 예전의 삶이 그리워졌다.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에서 지내던 두 사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안나는 남몰래 아들을 보러 갔다.
아들을 만나는 기쁨도 잠시, 안나와 카레닌은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안나는 피폐해졌다.
친구 벳시조차 등을 돌릴 정도로 아예 사교계에서 쫓겨났다.
안나는 자신을 향한 브론스키의 사랑까지도 의심했다.
브론스키는 안나의 집착과 질투로 고통스러웠다.

심한 말다툼을 벌이던 날,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사과하며 매달리려 했지만 상황이 엇갈렸다.
마음 붙일 곳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안나는 기차역의 플랫폼에 서 있었다.
화물 열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기 저 한가운데. 모두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거야."
안나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며 열차 밑으로 뛰어들었다.

안나가 죽고, 브론스키는 6주 동안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다.
삶의 기쁨을 모조리 잃어버린 뒤,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하러 떠났다.
안나가 낳은 브론스키의 딸은 카레닌이 맡았다.
부모가 된 키티와 레빈은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누리며 지냈다.
레빈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평생이, 자신의 매 순간이 의미 있다고 믿으며, 자신 안에서 느끼는 선의 법칙을 이해하고, 신의 존재를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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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는 세비야에서 활동하며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가기 직전 스페인 궁정에서 그린 작품에서도 카라바조 스타일이 열보입니다. 바로 앞 페이지의 작품, 바쿠스의 승리죠.
그림 속 인물은 당장이라도 스페인에 가면 만날 법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술의 신 바쿠스도 신이라기보다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죠. 그림 속 인물들의 사실적인 모습에서 카라바조의 바쿠스가 떠오르지 않나요? - P550

이 작품은 1625년에 벌어진 전투 장면을 담아냈는데요.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스페인군이 네덜란드 도시 브레다를 함락시킨 사건을 그렸습니다. 네덜란드의 장군이 도시의 열쇠를 스페인 장군에게 바치면서 항복하는 장면에서 스페인 군대의 권위가 잘 드러납니다. - P552

스페인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었을까요.
1640년에는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프랑스와 연합하면서 카탈루냐의 반란군 세력이 커지고, 설상가상으로 포르투갈까지 독립을 시도합니다. 이베리아반도 안팎으로 반란이 일어나자1648년 스페인은 결국 네덜란드 독립을 인정하고 맙니다. - P553

공주의 시중을 깍듯하게 드는 시녀와 달리 화면 오른쪽의 난쟁이는 여유로워 보입니다. 심지어 개의 등을 발로 툭 차고있지요. 화면 중앙의 시녀와 시종은 왕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난쟁이는정적인 그림에 움직임을 넣어 단조로움을 깨고 있습니다. - P557

그림 속 벨라스케스는 캔버스에 무엇을 그리고 있었을까요? 프랑스 철학자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이 그림에 주인공은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그림의 거울 앞에 가장 오래 서 있던 사람은 화가 자신일 겁니다.
그러나 정작 거울 속에 그의 모습은 없는데요. 거울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결국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 P561

카를로스 2세와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종말다시 스페인 왕가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마르가리타 공주가 태어났지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펠리페 4세는 1661년 기대하던 아들을 품에 안습니다. 바로 카를로스 2세죠. 이토록 귀한 아들을 얻고 4년후 펠리페 4세가 죽음을 맞이하고, 4살이었던 카를로스 2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 P562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촌이나 조카끼리 결혼하는 근친혼이 흔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6세기 중반 카를로스 1세의 양위 과정에서 스페인계와 오스트리아계로 나뉘는데요. 이후 양쪽 집안이 근친혼을 더 강하게맺어나갑니다. 다른 가문과 결혼할 경우 영토나 권력이 분산될 우려가 있어 근친혼을 통해 양쪽 가문의 이익을 보호하려 했던 겁니다. - P562

펠리페 4세를 기준 삼으면 1621년부터 1665년까지를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골든 에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 궁정에서일한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1623년부터 1660년까지고요.  - P565

결국 황금기는 40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스페인 미술은 1660년 이후 다시 화려하게 날아오릅니다. 이 재도약은 세비야에서 펼쳐집니다. - P566

세비야라면 이장을 시작한 곳이네요. 벨라스케스의 고향이기도 하고요그렇습니다. 17세기 후반 세비야는 마드리드를 이어 스페인 미술의 새로운 도전을 이어 나갑니다. 이후 스페인 미술의 발전 과정은 더 감동적인니다. 이와 맞물려 동시에 펼쳐진 바로크 미술의 전 지구적 확산은 다음장에서 알아보겠습니다. - P566

1600년의 세비야는 파리나 런던에 견줄 만큼 큰 도시였다. 세비야 출신 벨라스케스는 스승인 파체코의 전폭적인 지지로 스페인이 배출한 최고의 화가로거듭난다. 궁정 화가로 활동한 그는 초기에 카라바지즘을 추구했으나, 로마유학 후 화려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다. - P567

바로 무리요입니다. 부드럽고 우아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강렬한 바로크회화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입니다. 그는 벨라스케스의 뒤를 이어 17세기후반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세비야 미술관입니다. 이름에서알 수 있듯이 중세부터 현대까지 세비야의 다양한 미술 세계를 감상할 수있는 곳이지만 핵심 컬렉션은 17세기 바로크입니다. - P569

이러한 연유로 빈민 문제가 큰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때부터 무리요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거리에서 음식을 주워 먹는 거지, 가난한 아이들의 비참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 P575

당시 세비야의 지배층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합니다. 1674년 세워진 세비야 자선병원 Hospital de la Cariclad도 이중 하나인데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병원에서 살게 해주고, 환자를 돌보는 데서 나아가 경제적 문제로 장례를 치르기 힘든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줍니다. 심지어 사형수들의 장례까지 치르는 등 세비야 사회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P576

추리게라 양식에는 기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690년부터 상당히 독특한 기둥이 스페인에 출현하는데요. 왼쪽처럼 오벨리스크를 거꾸로 집어넣은 혹은 옥수수 모양의 기둥이 나타납니다. - P581

요즘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서양화를 사다가 대청에걸어 놓는다. 처음에 한 눈을 감고 다른 한 눈으로 오랫동안 주시하면 건물 지붕의 모퉁이와 담이 모두 실제 형태대로 튀어나온다.
이익,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 - P587

천주당 가운데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 구름과 인물들은 보통 생각으로는 헤아려 낼 수 없었고, 또 보통의 언어, 문자로는 형용할수도 없었다. 천장을 우러러보니 수없는 어린아이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살결을만지면 따뜻할 것만 같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쪘다.
갑자기 구경하는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 어찌할 바를모르며 손을 벌리고서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박지원, 열하일기, 양화 - P589

처음 천주당 안에 들어가 얼굴을 들어 언뜻 보니, 벽에 커다란 감실이 있고, 그 안에 구름이 가득하고 구름 속에 대여섯 사람이 서 있어아른하고 황홀한 것이 신선과 귀신이 환상으로 변한 것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본즉 벽에 붙은 그림이었다.
이기지, 일암연기 - P590

이기지는 북경 천주당에서 만난 서양 선교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견문을 넓힙니다. 서양 문물을 마주한 놀라움과 신선함은 그림에서 그치지 않는데요. 서양 디저트를 처음 맛본 느낌을 고스란히 담은 기록도 함께 전해집니다.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고 했다.
이기지, 「일암연기』 - P591

포도주 석 잔을 내왔는데 지난번에 마신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많이 취하였다. 입에 들어갈 때는 상쾌하고 목으로 넘어갈 때는 부드러워 그 맛을 형언할 수 없었다. 선인의 음료라 하더라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지,『일암연기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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