핼러윈 데이 축제에서 진짜 귀신을 본다면 어떨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을 제 친구들이나 지인들한테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그러다 어느 건물 옆 구석에 있는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어떤 여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는 다른 요란한 분장도없었어요. 그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에 한줄기 피눈물뿐이었는데, 분장인데도 왠지 처연해 보이더군요. 게다가 곧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까지 느껴졌죠.
‘와, 나랑 같은 피눈물인데 분위기 쩌네........ 배우인가?"

진짜 귀신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그 심각성과 공포를 모르고 내뱉는 말일 뿐입니다. 저는 그때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줄기가 오싹하고 손이 떨려 옵니다. 아니, 공포와 두려움에 치를 떨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북적거리는 제 주변과 달리, 그 여자 주변으로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거든요. 저도 발을 돌리려던 그때, 여자가 제 쪽을 쳐다봤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여기가 한국 맞아?"
갑자기 영화 속에 떨어진 것 같은 비현실적인 마을, 그곳에 좀비와 귀신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사람들 사이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꺼림칙한 느낌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는 아는 척까지 하고 말았죠. 쉬는 걸 들켜서 그런가 싶어 저는 웃어 보이며 사진 좀 찍겠다는 의미로 제 핸드폰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뒤돌아서 그 여자가 제 배경에 나오도록 셀카를 찍었습니다.

진짜 이상함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가는 동안 어떤 시선이 느껴졌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와 더불어 뼈를 에는 듯한 한기가 한 번씩몸을 스치는데, ‘감기 기운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오한이 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속삭이는 음성 같기도 한 게 희미하게 들려왔어요.
"보인다......."
"찾았다..

솔직히 들어갈까 말까 살짝 고민했는데요. 안 들어간다고 했다가는 쫄보로 낙인찍혀서 졸업할 때까지 고생할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옆에서 제 팔을 홱 잡아당겼습니다. 그런데 붙잡힌 팔에서, 아까 오면서 느꼈던 뼈에 사무치는 한기가 옷을 뚫고 느껴지는 겁니다.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아, 이거 사람 아니다!"
화들짝 놀란 저는 팔을 뿌리치며 고함을 쳤습니다.

잡고 있던 줄도 놓치고 말았어요. 승재 커플도 제가 떨어져 나간 걸 알았는지, 다급히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넘어짐과 동시에, 누군가 저의뒷덜미를 잡아끄는데 반항할 틈도 없이 질질 끌려갔습니다. 제가 80kg이 넘는데 말이죠.

도저히 못 가겠다, 더 이상은 죽어도 못 간다!‘ 하시는 분은 머리 위로 손을 X자로 들어 주시면, 저희 직원이 안내를 도와드립니다."

뒷덜미를 붙잡고 있는 건 아까 벤치에서 본 그 붉은색 원피스의 여자였습니다.
그때,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서릿발 낀 목소리가 제 귓가에 꽂히듯 들렸습니다.

"봤잖아. 나 봤잖아."
"나랑 가! 넌 나랑 가야 해!"
그 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말을 안 듣는 지경이 되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으아아아악!"
"넌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제 코앞에서 기괴하게 웃으며 소리치는 그 여자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저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호러 하우스 밖에 나와 있었고, 승재 커플과 호러 하우스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절대 핼러윈 분장을 하지도, 핼러윈 축제를 가지도 않습니다.

아까 그 여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생각났거든요. 되찾은 제 핸드폰에서 사진을 찾아본 저는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분명 첫 번째 사진에서 여자는 배경처럼 제 뒤쪽에 멀리 있었는데, 불과 1초도 안 되는 시간 뒤에 찍은 두 번째 사진에서는 그 여자가 제 어깨 바로 뒤에 와 있었습니다.

별명은 ‘마라탕 중독자‘입니다. 언제부터였더라. 6~7년쯤 된 것 같네요. 저놈의 음식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게 말이에요. 요즘처럼 마라탕이 유행하기 몇 년 전,
그날 이후부터 저는 마라탕에 미쳐 있습니다.

마라탕이 마라탕 맛이지 뭐 별다를 게 있겠냐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그 마라탕 맛을 본 사람이라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아, 같이 먹어 본 제 동료는그날 이후로 마라탕의 ‘마‘자도 보기 싫다고 아예 끊어 버렸네요.

평소에도 매운 음식을 좋아하던 저는 스트레스도 풀 겸 주말마다 매운 음식으로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야근이 확정된 어느 날, 중국 유학 시절에 쓰촨성에 가서 먹어 봤던 마라탕이 생각났습니다.

중국에서 먹었던 마라탕보다 맵기는 덜했지만 훨씬 입맛에 맞았습니다.

쓰촨성에서 먹었던 그 맛이 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죠. 한 40분쯤 지났을까, 배달 기사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주문하려고 배달 앱을 켤 때마다 ‘준비 중‘ 상태인 겁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넘게 먹고 싶은 걸 못 먹으니 그건 그것대로 스트레스더라고요.

그날 이후부터 이상할 정도로 그 마라탕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무슨 강력한 마약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전에 먹었던 마라탕 집 찾아가 볼 건데 같이 갈래요?"
"오~. 마라탕에 고량주 한잔?"
"콜!"

그런데 줄 서서 먹는다는 후기와 달리 홀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직 영업시간이었는데 말이죠. 들어가 보니 안내하는 종업원도 하나 보이지 않았어요. 심지어 주방쪽은 어두컴컴했습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조용히 귀를 곤두세웠어요. 칼날을 긁는 듯한 괴이한 소리가 이어졌고, 저는 그 쇳소리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아 몸서리를 쳤습니다.

인적마저 사라진 관악산 어귀 근처까지 가서야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는 안내 멘트가 나오는 겁니다.

잘못왔나 싶어 짜증이 나려던 찰나, 그 구옥에 간판이 있었는지 불이 반짝 들어왔습니다. 상호도 없이 ‘마라탕‘이라고만 쓰인 간판이 깜박이다 곧 꺼지더라고요.

"영업 안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갈까요?"
"문 다 열려 있었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앉아 있어 보죠."

어두컴컴한 주방을 둘러보니, 대형 가마솥이 얹힌 화덕이 있었고 그 주변에 촛불이 몇 개 켜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건 가마솥 위쪽 벽에 부적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등이 구부정하고 기력이 없어 보이는 어떤 아저씨가 혼자 서 있었는데, 양손에 네모난 중식도를 하나씩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홀의 조명이 불길하게 깜박거리기 시작했고, 두둑두두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그 순간 주방 안을 보던 동료가 입을 틀어막는 거예요. 주방 안을 다시 돌아봤죠.

부러지는 소리는 아저씨의 등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구부정하던 척추를 하나하나 펴듯이 기괴하게 꺾다가 고개를 확 젖히자 등이 일자로 펴지는 겁니다. 게다가 덩치가 아까보다 훨씬 커진 것 같았어요.

아저씨가 가마솥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중얼중얼하더라고요. 자세히 들어 보니.
"부족해...... 아직도 부족해......."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그 뒤에 이어진 아저씨의 행동에 우리는 기겁하고 말았습니다. 중식도를 내팽개친 아저씨는 울컥울컥 새빨간 피가 흐르는 팔뚝을 그대로 가마솥 위로 가져가는 겁니다. 그러고는 주르륵 흐르는 피를 그대로 가마솥 안으로 떨어트렸습니다.

‘빌어먹을.......
재빨리 일어서는데, 먼저 문 앞에 도착한 동료가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문을 흔들어 댔습니다.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던 겁니다!

그건 강령술에 쓰이는 부적이고, 제 입에서 훼손되면서 그 기운이 저에게 스며들었다는 겁니다.

그 이후로 가끔 정신을 잃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집에 마라탕 재료가 잔뜩 쌓여 있거나 마라탕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요리를 할 줄 모르는데말입니다. 결국 그때 살려 냈던 부적을 들고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무당은 저를 보자마자 호통을 치더라고요.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노란 뭉치를 꺼내더니 발악하는 제 입에 쑤셔 넣으며 흉측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마치 저주하는 것처럼요. 그가 내뿜는 악의에 죽을 것같아 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직접 만들어 보고자 온갖 마라탕 레시피를 섭렵해서 따라 만들어 보고, 부적을 태운 재도 넣어봤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 맛을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정말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강령술로 만들어진 마라탕인 걸까요?

시선 쪽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왼쪽 끝에 앉은 남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퀭한 눈에 거무튀튀한 안색이었고, 검은 후드티에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검은 바지에 검은 신발...... 온통 시커먼 차림이었어요. 눈이 마주치면 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눈을 부릅뜨고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지 뭐예요.

2014년 5월 2일.
저에게 그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것 같거든요. 대낮에, 그것도 다수가 이용하는 지하철에서2026.08.30 오전 8시 12분14%문에 있는 유리창으로, 아까 그 검은 후드 티의 남자가 저를 따라 이쪽 칸으로 걸어오는 게 보이는 거예요!

칸을 지나오는 동안 어느 누구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여기까지는 그냥 ‘오늘 정말 재수가 없구나 할 수 있는데, 정말 이상한 건 이때부터였어요. 늦진 않겠지 하며 핸드폰 시계를 힐끗 봤어요. 그런데........
시간이 왜 아직도 3시 13분일까요? 제가 10분쯤에 탄 것 같은데?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지던 그때, 제 등 뒤로 누군가가 몸을 바짝 붙이고 서는 거예요. 유리창에 비친 걸 보니, 뒤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졌고 그 검은 후드티의 남자가 제 뒤에 붙어 있었어요.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점인 상왕십리, 상왕십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종점이라니요? 이 전철은 순환선인데....... 저는 성수역까지 가려고 분명히 순환선을 탔는데? 뭔가 잘못됐다 싶었던 저는 기도만 했어요.

"흐흐흐.
넌 죽을 거야."
‘이게 무슨!‘
반사적으로 돌아서서 남자를 밀치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저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굳어 버리고 말았어요. 열차 칸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같이 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망갈 수가 없자, 절망보다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수많은 손들이 저를 덮치려는 찰나, 악을 써 대며 검은 후드티의 남자에게 미친 듯이 발길질을 했어요. 그 순간, 번쩍 눈이 떠졌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멀쩡한 눈의 승객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어요. 몽유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그때, 안내 방송이 들려왔어요.
"이번 역은 상왕십리, 상왕십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알고 보니 열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뒤에서 다른 열차가 들어와 미처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받은 거였어요. 제가 타고 있었던 열차, 그 마지막 칸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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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대학의 로고 
라틴어로 ‘A.D.1088ALMA MATER STUDIORUM‘이라고 적혀 있다. ‘모든 학문의 젖줄인 어머니‘라는 뜻이다. - P149

작자미상, 안니발레·루도비코·아고스티노 카라치의 초상, 17세기 
아고스티노는 판화가로 활동했고, 루도비코는 일찍부터 그림을 그렸다. 세 형제의 초기 화풍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보통 카라치라고 언급할 때 안니발레 카라치를 말한다. - P150

진격의 미술학교는 도메니키노, 귀도 레니, 구에르치노같은 뛰어난 화가를배출했습니다. 제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이른바 볼로냐 화파가 탄생합니다. 결과적으로 카라치 형제의 아카데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양성소이자미술 교육기관이었습니다. 나아가 이탈리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학교였습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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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작품은 환상에 현실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지닌 것이다.
・막스 자코브 - P142

환상의 세계를 열어젖힌
카라치

#안니발레 카라치 #안드레아 포초 #팔라초 파르네세#프레스코화 #천장화 #몰입형 전시 - P143

이제부터 만날 화가는 우리를 몽환적인 꿈의 세계로 이끌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크 미술의 정수를 맛보게 될 겁니다. 카라바조는 으스스한악몽이었지만 이번 꿈은 아름답고 달콤해서 아마 깨어나고 싶지 않을 겁니다. 기대해도 좋을 만큼 환상적인 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텐데요.
이곳으로 우리를 데려다줄 첫 번째 화가는 바로 안니발레 카라치입니다. - P143

이탈리아 교육과 학문의 중심 
볼로냐는 이탈리아 북부 주요 도시인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사이에위치합니다. 세 도시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볼로냐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볼로냐는 중세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립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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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역사를 읽으며] 『난처한 미술이야기』 존중(尊重)이라는 한 단어 앞에서

※ 존중(尊重)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
‘尊’은 높일 존, ‘重’은 무거울 중이다.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일이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난처한 미술이야기』를 어느덧 여덟 권째 읽고 있다.

한두 권 읽다 말 책이었다면 굳이 저자의 생각까지 붙들고 씨름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시리즈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무엇보다 도판이 풍부하고 설명이 쉽다. 작품 하나를 던져놓고 미술사적 용어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정치와 종교, 사회와 권력을 함께 끌어온다. 고대에서 중세로, 르네상스에서 종교개혁과 바로크로 이어지는 서양미술사의 큰 흐름을 이만큼 재미있게 보여주는 대중서는 흔치 않다.

그래서 계속 읽었다.

그런데 1권의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미술의 가치를 설명하려는 저자의 열정이 때때로 미술에 너무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미술은 인류의 역사이고 과거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는 데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인간은 문자를 만들기 훨씬 전부터 동굴 벽에 동물을 그리고, 돌과 뼈를 깎으며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표현했다. 음악과 춤 역시 문자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인간의 삶과 함께했을 것이다. 문자가 생긴 뒤에는 문학이 인간의 생각과 삶을 기록했고, 과학과 수학 또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해 온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미술은 분명 인류의 역사를 읽는 중요한 통로다. 그러나 그것이 미술만의 특권은 아니다.

그러다 저자가 선진국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에 적극 투자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는 선진국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해 세계와 인류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의 깊이와 폭’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굳이 틀렸다고 할 생각이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이해’라는 말이다.

그 이해가 얼마나 깊었는지, 얼마나 넓었는지, 그리고 누구의 시선에서 세계와 인류를 바라본 이해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제국주의 시대의 서구가 세계를 바라보는 과정에는 자신들을 중심에 놓고 다른 문명과 문화를 분류하고 평가했던 태도도 분명히 존재했다. 다른 문화를 동등한 주체로 바라본 이해도 있었겠지만, 힘을 가진 쪽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한 이해 역시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신들의 이해’이기는 하다.

그 이해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고 폭이 얼마나 넓었는지는 따로 따져볼 일이다. 편협한 이해였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이해이고, 거대한 박물관과 미술관은 오히려 그들이 세계와 인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들의 이해의 깊이와 폭을 보여준다’는 말 자체에는 굳이 시비를 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이어서,

“인류의 업적에 대한 존중까지 담아냅니다.”

라고 말한다.

존중.

나는 그 단어에서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런던과 파리와 뉴욕의 거대한 박물관과 미술관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문화재와 미술품이 있다. 그것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연구하며 보존해 온 역사가 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문화재와 미술품이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복잡해진다.

정당한 거래와 기증으로 건너간 것도 있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 팔려나간 것도 있다. 그리고 전쟁과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와 불평등한 힘의 관계 속에서 본래 있던 곳을 떠난 문화재도 적지 않다.

그 복잡한 역사를 한마디로 ‘존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존중했다면 꼭 가져와야 했을까.

여기에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서구의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옮겨진 뒤 체계적인 보존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문화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개발과 훼손 속에서 사라졌을 문화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미술품이 새로운 연구를 통해 인류의 역사와 미술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사실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반출된 뒤 잘 보존되고 연구되었다는 사실과, 애초에 그것을 가져갈 권리가 있었느냐는 문제는 전혀 다르다.

결과적으로 얻어진 효용을 앞세워 그 이전의 행위까지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위험해진다. 식민지 지배 이후 철도와 산업시설, 근대적 제도가 남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식민지 지배 자체를 정당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행위 이후 긍정적인 결과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 행위의 정당성을 거꾸로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가져왔기 때문에 보존되었다.”

이 말 역시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문화재를 가져갈 수 있었던 힘의 관계는 지워버린 채, 가져간 사람에게 다시 보존자의 공로와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하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호쿠사이가 떠올랐다.

『내 손 안의 미술관, 호쿠사이』를 읽으며 작품 설명 아래 적힌 소장처를 따라가다 보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비롯한 서구의 미술관 이름이 거듭 나타난다. 호쿠사이의 우키요에 대부분을 약탈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상당수는 근대 일본에서 거래되고 수출되어 서양의 수집가들에게 넘어갔다.

그럼에도 일본 미술의 걸작을 보기 위해 일본이 아니라 뉴욕과 보스턴, 런던과 파리의 미술관을 찾아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한 생각이 든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이다.

근대 일본은 자신의 수많은 미술품과 문화재가 서양으로 빠져나가는 일을 겪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힘을 갖게 되자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자신의 문화가 힘센 나라로 흘러가는 경험을 했다고 해서 다른 민족의 문화에 대한 존중을 배우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문화재를 ‘소유한다’는 것과 그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

세계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많이 모았다는 사실은 그 나라의 힘과 경제력, 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을 연구하고 분류한 기록은 그들이 세계와 인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미술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의 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말에도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다.

다만 거기에는 미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수학이 있고, 철학과 문학이 있으며, 음악과 스포츠도 있다. 수많은 인간의 지적·문화적 성취가 함께 한 사회의 역량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 역시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라고 말한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존중’이라는 말 앞에서는 자꾸 발이 멈춘다.

수집했다고 해서 존중한 것은 아니다.
연구했다고 해서 존중한 것도 아니다.
보존했다고 해서 처음의 소유가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름답다고 감탄했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사람들까지 존중했다는 뜻도 아니다.

어쩌면 박물관과 미술관은 인류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인 동시에, 힘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연구하고, 보존하고, 또 소유해 왔는지를 함께 보여주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과 미술관 역시 하나의 역사다.

그 안에 놓인 작품의 역사만이 아니라, 그것을 누가 만들었고 누가 가졌으며, 어떤 힘의 관계를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는 역사다.

『난처한 미술이야기』를 여덟 권째 읽으면서 나는 이제 그림만 보고 있지 않다. 그림을 설명하는 저자의 시선도 함께 보고 있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며 감탄하기도 하고, 어느 문장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어느 문장 앞에서는 책장을 덮고 한참 생각한다.

좋은 책은 반드시 저자에게 동의하게 만드는 책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한 단어를 붙잡고 저자에게 따져 묻게 만드는 책도 좋은 책이다.

『난처한 미술이야기』에서 내가 붙잡은 그 한 단어는,

존중(尊重)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존중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견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그 문화재가 지금 있는 자리를 원래 있던 사람들도 동의했는가. 기증과 정당한 거래로 건너간 것과, 힘의 우위 속에서 가져간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다. 존중은 그 출발점의 차이를 지우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둘째, 그 문화를 만든 사람들을 지금도 대등한 주체로 대하고 있는가. 유물을 유리 상자 안에 넣어두고 감탄하면서도, 그 문화를 낳은 사람들의 후손을 여전히 낙후된 존재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존중이 아니라 소유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진짜 존중은 ‘가지고 있으면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돌려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의궤를, 영국이 파르테논 마블을 돌려달라는 요구 앞에서 매번 머뭇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보존의 공로는 내세우기 쉽지만, 반환의 결단은 그렇지 않다.

존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쪽이 그 힘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증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묻고 싶다.

그렇게 존중했다면, 왜 그토록 많은 것들을 가져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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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들이 박물관과 미술관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통해 세계와 인류에 대한 자신의 이해의 깊이와 폭을보여주며, 인류의 업적에 대한 존중까지도 담아냅니다. 그들에게미술은 세계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의 원천인 셈입니다. - P5

그간 많은 미술품을 보아왔지만 나의 질문은 언제나 ‘인간에게미술은 무엇일까‘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찾은 대답이 바로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미술 이야기가 여러분의 눈과 생각을 열어주는 작은 계기가 된다면 너무나 행복하겠습니다.
책을 만들면서 편집 방향, 원고 구성과 정리에 있어서 사회평론 편집팀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기록해둡니다.

2016년 두물머리에서 양정무 - P5

이 시기는 ‘작가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카라바조, 베르니니 등 굵직굵직한 작가들이 유럽 곳곳에 등장합니다. 8권에서는 보로미니, 안니발레 카라치, 프란스 할스, 페르메이르, 무리요를더해 개성 넘치는 10명의 작가를 집중 조명하여 바로크 미술이 어떻게펼쳐졌는지 살피고자 합니다. - P6

바로크 시대에 유럽의 지도가 완성되면서 나라마다 미술의 성격도 분명해집니다. 이 책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의 바로크 미술을 순서대로살펴봅니다. 처음 등장하는 이탈리아 바로크는 거침이 없습니다. 구도와움직임, 색채와 명암 등 모든 조형적인 표현이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 P6

네덜란드의 경우 남부 지역은 가톨릭 세계에 묶이면서, 북유럽 특유의 섬세한 표현을 자랑하던 이곳 미술은 이탈리아 바로크와 융합합니다. 루벤스가 이 같은 미술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면 네덜란드 북부 바로크 미술이 이룬 눈부신 성과는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P6

한편 스페인은 16세기부터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자기 통제 아래 두며미술 역시 두 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강력한 가톨릭 신앙에 기반한 엄격하고 절제된 미술, 동시에 화려한 이슬람과 중세 미술의 전통이이어지면서 스페인의 미술가들은 극도로 장식적인 후기 바로크 미술 세계를 이끌어냅니다. - P7

바로크는 르네상스와 함께 유럽 근대 미술의 양대 산맥입니다. 르네상스가 고전적 균형과 안정적 조화를 강조했다면, 바로크는 탈고전적 화려함과 빠른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 P7

바로크 미술은 너무나 화려하고 강렬한 세계이기에 도리어 거부감을 줄정도로 표현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 시각 문화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의 세계를 접하다 보면 시선의 움직임을 극적으로강조하는 바로크가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 P7

결국 바로크 미술로의 여행은 현대 시각 문명의 시원을 찾아가는 흥미진진한 노정입니다. 이제부터 강렬한 바로크 미술에 빠져볼까요. - P7

태양처럼 강렬한 바로크 미술은 혼란스러운 로마의 새벽으로부터 떠올랐다. 바스러진 영광을 되찾으려는 간절함은 끝을 모르는 화려함을 낳았으나, 그 이면에는 미처 물러가지 못한 어둠이 잔재했다. 로마의 중심을굳건히 지키는 성 베드로 광장, 그 찬란하고 위태로운 시대의 흔적 위로뜨거운 햇빛이 선명히 타오른다.
- 성 베드로 광장, 바티칸 시국 - P12

바티칸,
강렬하고 뜨거운바로크 세계의 중심
#바로크 #바티칸 #천사의 다리 #성 베드로 대성당 #베르니니

바티칸은 이탈리아 심장부에 있는 단검이다
ㅡ 토마스 페인 - P15

로마 및 바티칸 시국 
테베레강을 건너면 바로크 미술의 심장 같은 바티칸이 성큼다가온다.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순례자와 관광객 모두의 마음을설레게 한다. - P16

산탄젤로성과 천사의 다리, 135~139년, 로마 
산탄젤로 성은 로마 제국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과 가족 묘지로 지었다. 성 앞에 놓인 다리의 정식 이름은 폰테 산탄젤로Ponte Sant‘Angelo다. 폰테는 다리, 산탄젤로는 성스러운 천사를 뜻한다. - P17

베르니니, ‘유대인의 왕‘ 십자가 명패를 든 
천사(왼쪽), 가시 면류관을 든 천사(오른쪽), 1667년,천사의 다리 
천사의 휘어질 듯 흔들리는 자세와 일렁이는 옷자락이 인상적이다. 현재 다리에는후대에 다시 제작한 작품이 자리하고, 원작은 로마의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 있다. - P20

바로크라는 용어는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에서 유래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17세기 미술 경향에반감을 품은 후대 사람들이 ‘기괴하다‘ ‘이상하다‘ ‘터무니없다‘는 의미를 담아 바로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P24

이제 이해돼요. 로마를 찾아오는 이에게 좀 더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려고한 결과가 바로크 미술이었다는 거네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천사의 다리는 고된 여정을 거쳐 바티칸을 찾은 순례객이나 여행객을 환영하는 적극적인 시각 장치였습니다. 베르니니는 환상적인 천사 조각상으로 바티칸에 막 들어선 이들에게 당신은 이제 천국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축복하려던 겁니다. 그러면 이제 발길을 성 베드로광장으로 옮겨볼까요? - P25

베르니니, 성 베드로 광장, 1656~1667년, 바티칸 시국 
산 피에트로 광장Piazza San Pietro이라고도 한다. 베르니니가 1656년 설계해 11년 후 1667년에 완공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이며, 베르니니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 P26

성 베드로 광장 콜로네이드, 1660~1667년, 바티칸 시국

맨 위에는 140명의 성인 조각상이 올라가 있다. 이 조각상들은 1662~1673년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완성했다. - P28

다시 보니 콜로네이드가 양팔로 보이기도 하고, 열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황이었던 베드로성인 이후 교황의 상징은 천국의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면서 천국의 열쇠를 내려줍니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열쇠는 교황을 상징하는데, 베르니니가 광장을 설계할 때 중요하게 고려한겁니다. - P30

사실 베르니니를 잘 몰랐는데 위대한 미술가였네요.

미켈란젤로가 16세기를 대표하는 로마의 작가라면, 베르니니는 17세기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17세기 로마를 ‘베르니니의 세계‘라고 부를 정도로 베르니니는 건축, 조각, 회화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발휘했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다음 페이지 같은 장면이 펼쳐집니다. - P31

지금은 이어폰만 꽂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는성 베드로 대성당 옆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비밀스럽게 연주된 곡이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천사의 음악‘처럼 아름다운 이 곡을 독점하기 위해 복사를 금하고 악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에 1770년대까지는 바티칸을 찾아야만 겨우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1770년14살의 모차르트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방문해 이 곡을 딱 한 번 듣고 외워서 악보로 적어낸 다음부터 널리 연주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 P33

성 베드로 대성당이 처음부터 호화롭게 꾸며진 건 아니었습니다. 준공 당시에는 텅 비어 있었다고 해요. 혹시 ‘장엄하다‘라는 표현을 아세요? 우리에겐 씩씩하고 웅장하다라는 형용사로 익숙하지만, 성스럽고 종교적인 건축물을 꾸밀 때 장식하다 대신 ‘장엄하다‘라는 동사로도 표현합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텅 빈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장엄한 주인공입니다. - P34

베르니니, 다키노, 1624~1635년, 성 베드로 대성당 

천개‘라는 뜻의 발다키노는 제대나 설교단 주위에 세워진 네 개의 기둥과 윗부분에 장치되는 덮개를 말한다. - P36

베드로 성인의 무덤, 성 베드로 대성당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고 초대 교황이된 베드로 성인의 무덤 위에는 중앙 제대가 있고, 그 위에 발다키노가 설치되어 있다. - P38

판테온도 역사적인 건축물인데 함부로 뜯어도 되나요?

그럴 리가요. 판테온의 청동을 끌어다 쓴 걸 보고 "바바리안(야만인)이 못한 일을 바르베리니가 했다!"라며 조롱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바르베리니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가문을 말합니다. 우르바노 8세의 본명은마페오 바르베리니입니다. 우르바노 8세가 야만인만도 못한 문화재 파괴범이라고 비꼰거죠. 말이 나온 김에 다음 페이지에 우르바노 8세 가문의 문장 coat of arms이 담긴 대리석 받침대를 볼까요? - P38

화려한 바로크의 천재 기획자 
베르니니가 교황의 무덤까지 만들었나요?
‘베드로의 의자‘에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의자 바로 왼쪽에는 바오로 3세의 무덤 기념물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우르바노 8세의 무덤 기념물이 자리합니다. 16세기에 제작된 바오로 3세의 무덤은 르네상스와바로크 사이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다소 기교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면 베르니니가 만든 우르바노 8세의 무덤은 바로크 미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교황의 자세만 보아도 차이가 느껴지지 않나요? - P50

크고 화려하면 멋있지만, 그것이 정작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죠.

그렇습니다. 이 때문에 후대 비평가들은 바로크 미술을 난잡하고 일그러진 양식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가톨릭 세계가 겪은 위기를떠올리면 17세기 바로크 미술이 왜 그렇게 과장된 표현에 집착했는지 이해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화려함의 배경에는 위기와 도전의 시간이 있었던 거죠.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가 바로크 미술이 연출한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어지는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P54

예술은 혼돈에 대한 승리다.
-존 치버 - P56

16세기 초반부터 로마는 엄청난 사건을 두 번이나 겪었습니다. 첫 번째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라는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활동하던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로마 교황청에 일종의 공개서한인 『95개조 반박문을 보내 교회의 타락을 낱낱이비판합니다. 때마침 금속활자가 발명되면서 반박문이 유럽 전역에 퍼지자교회의 권위는 크게 흔들립니다. 영원히 하나일 것만 같던 가톨릭 세계는루터를 지지하는 쪽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갈라섰습니다. - P57

트리엔트 공의회에 모인 학자들은 논의 끝에 종교 미술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세부 지침을 내립니다. 바로크 미술을 당시 사람들의 시선으로감상하는 데 매우 중요한 대목이니 눈여겨봐주세요.
첫째, 종교 미술은 명쾌하고 명확하며 이성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둘째, 사실적인 해석을 나타내야 한다.
셋째, 종교 미술은 신앙을 감성적으로 고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 P64

언어로 된 지침을 적절하게 해석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미술가들이 종교 미술의 새로운 조건에 적응한 이시기는 매너리즘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매너리즘은 미술사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있는 미술을 뜻합니다. 이 용어는 양식 style,
manner을 뜻하는 마니에라maniera에서 온 말입니다. 이탈리아어로는 마니에리스모manierismo라고도 하죠. - P64

이 적응기가 없었더라면 바로크도 탄생하지 못했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매너리즘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창조력을 잃고 과거의 미술을 따라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의 슈퍼스타보다 이 시기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해서 매너리즘 양식이 생겼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 P65

1571년에는 책을 검열하는 기관까지 만들었습니다. 이후금서목록은 계속 늘어나 수천 권에 이르렀는데요. 여기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존 밀턴의 『실낙원』은 물론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등 뛰어난 학자들의 책이 올랐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시작된 가톨릭의 금서 지정은 1966년까지 계속됩니다. - P74

교회에서 진리라고 굳게 믿었던 지식을 다시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군요.

맞습니다. 더는 과학을 부정할 수 없는 시대가펼쳐진 거죠.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혼돈의 와중에도 인간은 진리에 한 발짝 다가섰습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이 강렬하게 교차한시대가 바로 17세기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요? 여기에 첫 번째 답을 내놓은 작가가 있습니다. - P88

인생의 모든 다양성, 모든 매력, 모든 아름다움은빛과 그림자로 구성된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 P90

빛과 어둠으로
현실을 겨눈 카라바조
#바로크 #카라바조 #콘타렐리 예배당 벽화 #테네브리즘#카라바지즘 - P91

바로크 시대의 미켈란젤로
로마의 뒷골목을 그린 화가라고요?
바로 카라바조입니다. 카라바조는 어둠의 화가로 불립니다. 그의 그림 속에 로마의 어두운 뒷골목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로마의 깊은 그림자로부터 영감을 얻어 미술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선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 P96

카라바조는 어떤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굴곡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일구었습니다. 그는 비록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동시대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쳤고 결국미술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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