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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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도시기행3 부록 2] 억지로 하는 유시민의 심부름 2
― 『우스 루지아다스』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1. 경주 출신 작가가 시킨 두 번째 숙제

『유럽 도시 기행 3』에서 유시민은 리스본의 카몽이스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대표작 『우스 루지아다스(Os Lusíadas)』를 소개한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국민서사시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 자신도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슬쩍 넘어간다.

페소아의 70여 개 이명에 이어 두 번째 숙제다.

경주 출신 작가가 이번에는 16세기 포르투갈 국민서사시를 나보고 알아서 찾아 읽으라는 모양이다.

그래서 찾아봤다.

그런데 알아보니 이 작품은 단순히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갔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포르투갈의 건국과 전쟁,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그리스·로마 신화, 포르투갈 제국에 대한 찬양과 경고가 뒤엉킨 거대한 역사서사시였다.


2. 『우스 루지아다스』는 어떤 작품인가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의 국민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Luís de Camões)가 쓴 서사시로 1572년 리스본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의 ‘루지아다스(Lusíadas)’는 대략 ‘루수스의 후예들’, 곧 ‘포르투갈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작품의 주인공이 바스쿠 다 가마 한 사람이라기보다 포르투갈 민족 전체라는 뜻이 제목부터 드러나는 셈이다.

작품은 모두 10곡(Canto)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이야기의 중심축은 1497년 리스본을 출발한 바스쿠 다 가마 함대의 인도항로 개척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현재의 항해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 가마가 항해 도중 포르투갈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과 역대 왕, 전쟁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작품 속에 다시 펼쳐진다.

거기에 그리스·로마 신들까지 등장한다.

그러니 형식만 놓고 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같은 고대 서사시의 형식을 빌려 포르투갈의 역사를 새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은 자신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서사와 같은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던 것이다.


3. 제1곡 ― 포르투갈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다

이야기는 바스쿠 다 가마 함대가 이미 아프리카 동쪽 해안을 항해하고 있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신들이 끼어든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회의를 열어 포르투갈 사람들의 항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한다.

비너스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돕는다. 반대로 바쿠스는 이들이 인도까지 진출하면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해 방해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포르투갈 선원들이 바람과 파도, 낯선 항구와 싸웠지만 『우스 루지아다스』에서는 신들까지 편을 갈라 싸운다.

처음부터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를 평범한 탐험이 아니라 신화적 영웅의 모험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4. 제2곡 ― 신들의 싸움과 동아프리카 항해

바쿠스는 계속해서 포르투갈 함대를 속이고 위험에 빠뜨리려 한다.

그러나 비너스가 개입해 이들을 구한다.

다 가마 일행은 동아프리카의 여러 항구를 거쳐 말린디에 도착한다. 말린디의 지배자는 다 가마 일행을 환대하고 포르투갈이 어떤 나라인지, 그들이 왜 그 먼 바다까지 왔는지를 묻는다.

여기서부터 작품의 시간이 뒤로 돌아간다.

다 가마가 포르투갈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5. 제3곡 ―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다 가마의 입을 통해 포르투갈의 건국과 초기 역사가 펼쳐진다.

아폰수 1세를 비롯한 초기 국왕들의 전쟁과 왕국의 성립,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이루어진 영토 확장이 영웅적인 이야기로 묘사된다.

여기에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특별한 운명을 지닌 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대목을 오늘날 읽으면 다른 모습도 함께 보인다.

포르투갈 왕국의 성장 과정은 결국 이베리아반도에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의 탄생’과 ‘영토 회복’이라는 이야기를 다른 쪽에서 보면 패배와 추방의 역사일 수도 있다.


6. 제4곡 ― 왕국의 위기와 새로운 시대

포르투갈 왕국의 역사가 계속된다.

특히 1383~1385년 왕위계승 위기와 주앙 1세의 즉위, 알주바호타 전투 등이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에 흡수되지 않고 독립국가로 살아남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 리스본편을 시작하면서 지도를 보고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거대한 스페인 옆에 붙어 있으면서 포르투갈은 끝내 살아남았다.

만약 이때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에 완전히 흡수되었다면 이후의 세계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브라질에서 아프리카·인도·동남아시아·마카오까지 이어진 포르투갈의 해상망도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야기는 마침내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으로 이어진다.


7. 레스텔루의 노인 ― 잠깐, 이 항해가 정말 좋은 일인가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가 리스본의 벨렝을 떠나려는 순간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다.

레스텔루의 노인(Velho do Restelo)이다.

그는 출항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예와 권력, 부를 얻기 위해 먼 나라로 전쟁과 정복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욕망을 비판한다. 해외에서 새로운 적을 찾아 싸우는 동안 정작 자기 나라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 대목이 흥미로웠다.

나는 처음에 『우스 루지아다스』가 포르투갈의 해외팽창을 찬양하는 일종의 ‘대항해시대 만세’ 서사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품 안에 이미 그 반대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거기까지 가서 꼭 남의 땅을 차지하고 싸워야 하는가.”

16세기의 카몽이스가 자기 작품 안에서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몽이스는 포르투갈의 영광을 노래했지만 그 영광을 무조건 찬양하기만 한 시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8. 제5곡 ― 희망봉에서 나타난 거인 아다마스토르

다 가마는 다시 자신의 항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희망봉을 돌아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스 루지아다스』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 가운데 하나인 아다마스토르(Adamastor)가 등장한다.

거대한 폭풍구름 속에서 나타난 거인이다.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감히 자신이 지배하는 바다를 침범했다고 분노하며 앞으로 이 바다에서 수많은 재난과 죽음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다마스토르는 희망봉 주변의 거친 바다와 자연의 공포를 인격화한 존재다.

동시에 인간의 끝없는 팽창에 대한 경고처럼도 보인다.

인간은 새로운 바다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바다는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

유럽인의 지도에 없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발견’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보게 된다.

유럽인이 처음 보았다는 것과 인류가 처음 발견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9. 제6곡 ― 인도양을 건너 마침내 인도로

말린디를 떠난 다 가마 함대는 인도양을 건넌다.

바쿠스는 다시 함대를 없애려고 바다의 신들을 선동해 폭풍을 일으킨다.

그러나 비너스의 도움으로 포르투갈 함대는 위기를 넘긴다.

그리고 마침내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캘리컷 도착은 유럽과 인도양을 직접 연결하는 해상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린 사건이었다.

포르투갈에는 엄청난 기회였다.

하지만 인도양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역사의 시작이었다.

포르투갈은 이후 단순한 무역상으로 머물지 않았다. 무력을 이용해 항구와 해상교역로를 장악하려 했고 인도양 곳곳에 군사거점을 만들었다.

한쪽에서 ‘항로 개척’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다른 쪽에서는 무장한 외부세력의 진입이었다.


10. 제7곡 ― 인도에 도착한 포르투갈인

다 가마 일행은 캘리컷의 지배자 자모린과 접촉한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들의 등장을 경계하는 세력도 있다.

바쿠스의 방해 역시 계속된다.

여기서 현실의 무역과 외교, 작품 속 신화가 다시 뒤섞인다.

다 가마의 항해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과 경제권이 처음으로 강하게 충돌하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1. 제8곡 ― 포르투갈 영웅들의 역사

다 가마는 포르투갈 국기에 그려진 인물과 상징을 설명하면서 다시 포르투갈 역사를 이야기한다.

왕과 장군, 기사와 영웅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우스 루지아다스』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바스쿠 다 가마가 아니다.

포르투갈이다.

다 가마의 인도항해는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세계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기 위한 중심축이다.

그래서 『우스 루지아다스』는 한 탐험가의 모험담이라기보다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2. 제9곡 ― 사랑의 섬, 영웅들에게 내려진 보상

인도에서 일을 마친 포르투갈 함대는 귀국길에 오른다.

비너스는 고생한 포르투갈 선원들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한다.

‘사랑의 섬(Ilha dos Amores)’이다.

섬에는 아름다운 님프들이 기다리고 있고 선원들은 그들과 사랑을 나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노골적인 남성 영웅서사의 보상처럼 보인다.

바다를 건너고 폭풍과 싸우고 인도까지 갔으니 아름다운 여성들이 기다리는 섬을 상으로 준다는 것이다.

16세기 남성들의 판타지가 아주 거창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단순한 성적 보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포르투갈의 영웅들이 신화적 존재로 인정받고 그들의 항해가 역사적 위업으로 승인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13. 제10곡 ― 세계를 보여주고 미래를 예언하다

사랑의 섬에서 테티스는 다 가마에게 ‘세계의 기계(Máquina do Mundo)’를 보여준다.

우주의 구조와 세계의 여러 지역, 포르투갈이 앞으로 진출하게 될 장소들이 펼쳐진다.

미래의 포르투갈 역사도 예언된다.

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이루어질 포르투갈의 활동과 승리가 미리 제시된다.

이 장면에서 『우스 루지아다스』는 과거를 노래하는 서사시를 넘어 미래의 제국을 예언하는 작품이 된다.

다 가마의 항해가 끝났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항해를 시작으로 포르투갈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주며 작품을 마무리한다.


14. 신들은 왜 포르투갈 항해에 끼어들었나

처음에는 조금 우습기도 했다.

기독교 국가 포르투갈의 국민서사시에 제우스·비너스·바쿠스 같은 그리스·로마 신들이 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유는 분명하다.

카몽이스는 포르투갈의 항해를 고대 그리스·로마 영웅들의 모험과 같은 수준의 서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에게 신들이 개입했다면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에도 신들이 개입해야 한다.

다 가마와 포르투갈 사람들을 새로운 시대의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이아스로 만든 셈이다.

포르투갈은 작은 변방 왕국이 아니라 고대 영웅들의 뒤를 잇는 새로운 세계사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하고 싶었던 것이다.


15. 신화 뒤에 있었던 힘 ― 포르투갈의 해양기술

『우스 루지아다스』에서는 비너스가 포르투갈 함대를 돕고 바쿠스가 방해하며, 희망봉에서는 아다마스토르라는 거인이 나타나 폭풍과 죽음을 예고한다.

문학으로 읽으면 충분히 멋진 장면이다.

그러나 실제 바다를 건넌 것은 신들이 아니었다.

바스쿠 다 가마와 포르투갈 선원들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까지 갈 수 있었던 데에는 15세기 동안 축적한 선박기술과 항해술, 바람과 해류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포르투갈은 초기 아프리카 연안 탐사에서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카라벨(Caravel)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바스쿠 다 가마가 1497년 인도로 출항할 때의 함대는 카라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기함 São Gabriel과 São Rafael은 더 큰 나우(nau)였고, Bérrio가 카라벨이었으며 별도의 보급선도 있었다.

장거리 대양항해에는 기동성만으로는 부족했다. 긴 항해를 감당할 적재능력과 선체, 식량과 물을 실을 공간이 필요했다.

항해 방식도 중요했다.

포르투갈 항해자들은 바람과 해류를 거슬러 해안선만 붙잡고 내려간 것이 아니다. 대서양의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기 위해 때로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멀리 서쪽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항로를 택했다. 흔히 ‘볼타 두 마르(Volta do mar)’라고 부르는 항해 원리가 이런 축적된 경험을 보여준다.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 역시 남대서양에서 크게 호를 그리며 희망봉 쪽으로 접근했다. 직선으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처럼 보여도 바다에서는 바람과 해류가 길을 결정한다.

천문항법 역시 빠질 수 없다.

항해자들은 아스트롤라베 같은 관측기구와 태양의 고도를 이용해 위도를 추정했고, 해도와 항해일지, 먼저 항해한 선원들의 경험을 계속 축적했다.

오늘날의 위성항법처럼 정확한 위치를 즉시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대양을 건너기 위한 중요한 기술이었다.

결국 아다마스토르가 상징하는 거대한 바다의 저항을 실제로 넘어선 것은 비너스의 도움보다 인간이 쌓아올린 기술과 경험이었다.

이 대목을 생각하니 『우스 루지아다스』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카몽이스는 포르투갈인의 용기와 신들의 도움을 노래했지만 그 배 아래에는 당대의 응용과학과 해양기술이라는 보이지 않는 뼈대가 있었다.

작은 포르투갈이 세계의 바다로 나갈 수 있었던 힘은 영웅의 용기만도, 왕의 명령만도 아니었다.

배를 만들고, 바람과 해류를 읽고, 별과 태양으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며, 수많은 항해의 실패와 경험을 다음 항해의 기술로 바꾸어낸 축적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포르투갈의 해양팽창은 제국주의의 역사인 동시에 기술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16. ‘대항해시대의 찬가’라고만 보기 어려운 이유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우스 루지아다스』가 포르투갈의 항해와 제국, 민족적 자부심을 찬양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묘한 균열도 있다.

레스텔루의 노인은 명예와 부를 찾아 먼 곳으로 나가는 인간의 욕망을 비판한다.

아다마스토르는 바다를 침범하는 포르투갈인들에게 죽음과 재앙을 예언한다.

카몽이스 자신도 인간의 탐욕과 권력욕, 무모한 정복욕을 경계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제국주의 선전문으로만 읽기에는 조금 복잡하다.

포르투갈의 영광을 누구보다 크게 노래한 사람이 그 영광의 위험까지 작품 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이 점이 오히려 『우스 루지아다스』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17. 그래도 ‘대항해시대’라는 말은 불편하다

그렇다고 내가 ‘대항해시대’라는 말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항로를 개척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인도양의 사람들에게는 어느 날 무장한 유럽인들이 바다를 건너온 사건이었다.

포르투갈은 이후 인도양의 주요 항구와 해상교역로를 군사력으로 장악하려 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거점을 만들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를 정복했고 포르투갈은 브라질과 아프리카·인도양으로 뻗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노예가 되었으며 기존 사회와 문명이 파괴되었다.

그러니 유럽인의 입장에서 ‘대항해시대’였던 시기는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침략과 식민화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다.

『우스 루지아다스』를 읽을 때도 그 두 얼굴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몽이스가 노래한 바다의 영웅담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배들이 도착한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18. 『우스 루지아다스』가 보여주는 포르투갈의 자기인식

결국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작은 나라였다.

유럽의 서쪽 끝에 있었다.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이웃과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다.

그런 나라가 바다로 나가 아프리카를 돌고 인도에 도착했으며 브라질과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느꼈을 자부심이 얼마나 컸을지는 이해할 수 있다.

카몽이스는 그것을 문학으로 만들었다.

왕과 장군과 항해자를 고대의 영웅들과 같은 자리에 올려놓고 포르투갈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판 건국신화이면서 역사서이고 항해기이며 제국의 서사시다.

그리고 그 안에 제국을 향한 경고까지 함께 들어 있다.


19. 경주 출신 작가가 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지 알겠다

여기까지 찾아보고 나니 유시민군이 『우스 루지아다스』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 이유도 조금은 이해한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바스쿠 다 가마만 알아서는 안 된다.

포르투갈 건국사를 알아야 하고, 레콩키스타를 알아야 하며, 주앙 1세와 알주바호타 전투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도 알아야 하고, 희망봉과 인도양 항로도 알아야 한다.

거기에 포르투갈 제국과 식민주의까지 붙는다.

그리고 실제 바스쿠 다 가마가 어떻게 그 바다를 건널 수 있었는지 알려면 선박과 항법, 바람과 해류에 대한 포르투갈의 해양기술까지 들여다봐야 한다.

리스본 여행기에서 이걸 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여행기가 아니라 포르투갈 역사책에 해양기술사까지 붙어버린다.

그래서 그냥 한국어 번역본이 없다고 하고 슬쩍 넘어간 모양이다.

이해는 한다.

그래도 궁금한 독자는 어쩌라고.

결국 내가 찾아봤다.


20. 두 번째 심부름을 끝내며

처음에는 『우스 루지아다스』를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을 찬양한 포르투갈 국민서사시 정도로 생각했다.

찾아보고 나니 훨씬 복잡한 작품이었다.

포르투갈의 건국과 왕조의 역사,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그리스·로마 신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 앞으로 펼쳐질 제국의 미래가 한 작품 안에 들어 있었다.

동시에 레스텔루의 노인과 아다마스토르를 통해 인간의 명예욕과 탐욕, 무모한 해외팽창에 대한 경고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화 속 영웅들의 용기 뒤에는 선박기술과 항법, 바람과 해류를 읽는 경험과 지식이라는 현실의 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단순히 ‘제국의 찬가’라고만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한쪽에서는 바다로 나가라고 등을 떠밀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그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얻으려는가”라고 묻는다.

바로 그 모순이 16세기 포르투갈이 바라본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날의 나는 거기에 질문 하나를 더 붙인다.

그 영광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시대는 무엇이었는가.

포르투갈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있었고 카몽이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배가 도착했던 아프리카·아메리카·인도와 아시아에도 원래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에게도 자신들의 역사와 문명이 있었다.

한쪽의 발견은 다른 쪽에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한쪽의 영광은 다른 쪽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스 루지아다스』를 읽는 일은 포르투갈의 영광을 이해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영광의 반대편을 생각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유시민군이 던져놓은 두 번째 숙제도 끝냈다.

페소아 70여 명도 찾아봤고 『우스 루지아다스』 10곡도 훑어봤다.

경주 출신 작가 양반.

시켜놓은 심부름은 다 했수다.


[참고자료]

1. Luís de Camões, 『Os Lusíadas』, Lisboa, 1572.
- 작품의 기본 원전.
- 전체 10곡으로 구성된 포르투갈 국민서사시.

2. Biblioteca Nacional de Portugal(포르투갈 국립도서관), Camões 및 『Os Lusíadas』 관련 자료
- 1572년 초판과 작품의 역사적·문학적 배경 확인.
- 사랑의 섬, ‘세계의 기계’ 등 작품 후반부의 상징과 관련 연구 참고.

3. Camões ― Instituto da Cooperação e da Língua / Centro Virtual Camões
- 『Os Lusíadas』 작품 소개 및 카몽이스 관련 자료.
- 작품의 10곡 구성, 바스쿠 다 가마 항해, 포르투갈 역사와 고전신화의 결합 등에 관한 자료 참고.

4. Encyclopaedia Britannica, 「The Lusiads」
- 『우스 루지아다스』의 출간연도와 서사시적 성격,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해를 중심으로 한 작품구조 참고.

5.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ões·『Os Lusíadas』 관련 연구
- 레스텔루의 노인이 제기하는 명예욕·해외팽창·정복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 참고.
- 아다마스토르와 포르투갈 해외팽창의 양가적 의미에 관한 연구 참고.

6. 포르투갈 및 카몽이스 연구자료의 Velho do Restelo 관련 연구
- 레스텔루의 노인이 단순한 반전 인물을 넘어 해외팽창과 명예·탐욕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담당한다는 해석 참고.

7. 포르투갈 및 영미권 Camões 연구의 Adamastor 관련 자료
- 희망봉과 자연의 공포를 의인화한 아다마스토르의 문학적 기능 및 포르투갈 팽창서사의 양면성 참고.

8. Marinha Portuguesa / Museu de Marinha, Vasco da Gama의 제1차 인도항해 관련 자료
- 1497년 함대가 나우 São Gabriel·São Rafael, 카라벨 Bérrio, 보급선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
- 함대가 남대서양을 크게 우회하여 희망봉으로 접근한 항로와 당시 축적된 해양·기상 지식 참고.

9. Academia de Marinha, Vasco da Gama의 항해 관련 연구
- 포르투갈이 15세기에 축적한 대서양의 바람·해류와 해양·기상 조건에 대한 지식이 인도항해에 활용된 사실 참고.

10. 포르투갈 해양사·항해사 관련 연구자료
- 카라벨과 나우의 역할, 볼타 두 마르(Volta do mar), 아스트롤라베와 태양 고도 관측을 통한 위도 추정 등 포르투갈 해양기술의 발전과 관련한 자료 참고.

※ 주의
이 부록은 『우스 루지아다스』 전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1572년 원전과 포르투갈·영미권의 작품소개 및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10곡의 주요 줄거리와 작품의 구조를 요약·정리하고,
그 위에 『유럽 도시 기행 3』을 읽으며 생긴 개인적인 감상과 문제의식을 덧붙인 것이다.

또한 ‘대항해시대’, 식민지 팽창, 레콩키스타 등에 대한 평가는 원작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과 역사적 사실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읽으며 덧붙인 감상과 해석임을 밝혀둔다.


『우스 루지아다스』 관련 자료 조사·정리: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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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도시기행3 부록 1] 억지로 하는 유시민의 심부름 1
― 페소아의 이명,준이명,필명,가상인물 72명

1. 경주 출신 작가가 결국 일을 만들었다

『유럽 도시 기행 3』에서 유시민은 페르난두 페소아가 70개가 넘는 이명을 사용했다고 소개하면서, 그것들이 궁금한 독자에게는 관련 책을 찾아보라는 식으로 슬쩍 넘어간다.

폼발 후작의 본명도 내가 찾아봤고, 주제 1세의 이름도 내가 찾아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70명이 넘는다.

경주 출신 작가가 독자를 아주 제대로 부려먹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문제가 하나 있었다. 흔히 ‘페소아의 70여 개 이명’이라고 하지만 그 모두가 알베르투 카에이루나 히카르두 헤이스처럼 완전한 인격을 갖춘 이명은 아니었다. 후대 연구자들이 페소아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이명(heteronym), 준이명(semi-heteronym), 필명(pseudonym), 문학적 인물과 어린 시절에 만들어낸 가공인물까지 함께 집계한 결과였다.

페소아 자신이 엄밀한 의미의 핵심 이명으로 설정한 인물은 알베르투 카에이루·히카르두 헤이스·알바루 드 캄푸스 세 사람이다.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는 페소아 스스로 ‘준이명’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여기서는 ‘페소아의 이명 72명’이라고 단정하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페소아가 만들어낸 72개의 이름과 인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이명은 필명과 무엇이 다른가

보통 작가가 본명 대신 다른 이름을 쓰면 필명이라고 한다. 이름만 달라질 뿐 글을 쓰는 사람은 그대로다.

페소아의 이명은 다르다.

그는 이명을 단순히 자신의 다른 이름으로 만들지 않았다. 태어난 날짜와 장소, 직업, 외모, 성격, 사상, 문체를 따로 부여했다. 서로 다른 이명이 상대방의 작품을 평가하기도 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말 그대로 한 사람의 머릿속에 여러 작가가 살았다.

페소아 자신도 본명으로 쓴 작품과 이명으로 쓴 작품을 구분하면서, 필명 작품은 이름만 다른 자기 자신의 작품이지만 이명 작품은 자기 밖에 만들어낸 독립된 인격의 작품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래서 페소아의 이명을 단순한 필명으로 이해하면 이 사람의 문학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을 놓치게 된다.


3. 먼저 기억해야 할 핵심 인물

가. 알베르투 카에이루(Alberto Caeiro)

페소아가 만든 세계에서 다른 주요 이명들의 ‘스승’이다. 1889년에 태어나 1915년에 죽은 것으로 설정했으며 자연과 사물을 생각으로 해석하거나 철학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했다.

히카르두 헤이스와 알바루 드 캄푸스가 카에이루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긴다는 설정까지 만들었다.

결국 페소아가 만들어낸 사람이 또 다른 페소아가 만들어낸 사람들의 스승이 된 셈이다.

나. 히카르두 헤이스(Ricardo Reis)

1887년생 의사로 설정된 고전주의적 시인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와 스토아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절제와 운명에 대한 수용을 중시했다.

재미있는 것은 주제 사라마구가 이 가상의 인물을 진짜 사람처럼 끌어내 소설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페소아가 만든 가짜 작가를 사라마구가 다시 자기 소설의 진짜 주인공으로 데려온 것이다.

다. 알바루 드 캄푸스(Álvaro de Campos)

1890년생으로 설정된 조선공학자이자 시인이다. 초기에는 기계·속도·산업문명을 열광적으로 노래했지만 뒤로 갈수록 허무와 고독, 권태를 드러냈다.

카에이루와 헤이스가 비교적 절제된 인물이라면 캄푸스는 감정의 진폭이 크다.

페소아가 연애하던 오펠리아에게 캄푸스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기도 했으니, 이제는 작품 속 인물이 현실세계까지 튀어나온 셈이다.

라. 베르나르두 소아레스(Bernardo Soares)

『불안의 책』의 주요 저자로 설정된 인물이다.

그러나 페소아는 그를 카에이루·헤이스·캄푸스와 똑같은 완전한 이명으로 보지 않고 ‘준이명’으로 설명했다. 페소아 자신의 성격과 상당 부분 겹치지만 일부를 덜어낸 인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에이루·헤이스·캄푸스가 페소아에게서 독립한 별개의 작가라면, 소아레스는 페소아 바로 옆에 서 있는 또 하나의 페소아에 가깝다.


4. 페소아가 만들어낸 72개의 이름과 인격

※ 아래 목록은 엄밀한 의미의 이명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이명·준이명·필명·가상작가·가상인물·매개적 인물을 포괄한 정리이다.

01. Dr. Pancrácio
― 가상신문 『A Palavra』와 『O Palrador』의 기자·단편작가·시인·수수께끼 작가.

02. Luís António Congo
― 『O Palrador』의 연대기 필자. Eduardo Lança를 소개하는 역할.

03. Eduardo Lança
― 포르투갈계 브라질 시인으로 설정된 인물.

04. A. Francisco de Paula Angard
― 과학적 글을 쓰는 필자.

05. Pedro da Silva Salles(Pad Zé)
― 농담과 유머를 담당한 인물.

06. José Rodrigues do Valle(Scicio)
― 수수께끼 작가이자 문학부장 역할.

07. Pip
― 유머시·농담·수수께끼 담당 인물.

08. Dr. Caloiro
― 기자·리포터로 설정된 인물.

09. Morris & Theodor
― 수수께끼 작가.

10. Diabo Azul
― 수수께끼 작가.

11. Parry
― 수수께끼 작가.

12. Gallião Pequeno
― 수수께끼 작가.

13. Accursio Urbano
― 수수께끼 작가.

14. Cecília
― 수수께끼 작가.

15. José Rasteiro
― 속담과 수수께끼를 쓰는 인물.

16. Tagus
― 남아프리카 더반 시절 영어권 글에서 사용된 이름.

17. Adolph Moscow
― 가상소설 『Os Rapazes de Barrowby』의 저자로 설정.

18. Marvell Kisch
― 『A Riqueza de um Doido』의 가상저자.

19. Gabriel Keene
― 『Em Dias de Perigo』의 가상저자.

20. Sableton-Kay
― 『A Lucta Aerea』의 가상저자.

21. Dr. Gaudêncio Nabos
― 『O Palrador』 후기 편집자. 영국계 포르투갈 기자·유머작가로 설정.

22. Nympha Negra
― 수수께끼 작가.

23. Professor Trochee
― 젊은 시인들에게 조언하는 유머 에세이의 저자.

24. David Merrick
― 시인·소설가·극작가.

25. Lucas Merrick
― 단편작가. David Merrick과 가족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정.

26. Willyam Links Esk
― 서툰 영어로 편지를 쓰는 허구인물.

27. Charles Robert Anon
― 시인·철학자·소설가. 젊은 페소아의 중요한 영어권 인격.

28. Horace James Faber
― 에세이스트·단편소설가.

29. Navas
― Faber의 작품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는 인물.

30. Alexander Search
― 영어 시와 소설을 쓴 페소아 초기의 중요한 가상저자.

31. Charles James Search
― Alexander Search의 형제이자 번역가·에세이스트로 설정.

32. Herr Prosit
― 번역가로 설정된 인물.

33. Jean Seul de Méluret
― 프랑스어 시인·에세이스트.

34. Pantaleão
― 시인·산문가.

35. Torquato Mendes Fonseca da Cunha Rey
― 이미 죽은 작가로 설정되고 Pantaleão가 그의 글을 출판한다는 설정.

36. Gomes Pipa
― 정치소설을 쓰는 작가.

37. Íbis
― 어린 시절부터 말년까지 장기간 등장한 가상인물. 시에도 서명했다.

38. Joaquim Moura Costa
― 풍자시인·공화주의 활동가.

39. Faustino Antunes(A. Moreira)
― 심리학자로 설정된 인물.

40. António Gomes
― 철학자로 설정된 유머러스한 인물.

41. Vicente Guedes
― 번역가·시인·단편작가. 『불안의 책』 초기 단계와도 연결되는 인물.

42. Gervásio Guedes
― Vicente Guedes의 형제로 설정된 인물.

43. Carlos Otto
― 시인이자 격투 관련 저술의 저자로 설정.

44. Miguel Otto
― Carlos Otto의 형제이자 번역가 역할을 맡은 인물.

45. Frederick Wyatt
― 영어 시인·산문가.

46. Rev. Walter Wyatt
― Frederick Wyatt의 성직자 형제로 설정.

47. Alfred Wyatt
― 파리에 거주하는 또 다른 Wyatt 형제로 설정.

48. Bernardo Soares
― 『불안의 책』의 주요 저자이자 페소아가 ‘준이명’이라고 설명한 인물.

49. António Mora
― 철학자·사회학자·신이교주의 이론가. 카에이루의 제자로 설정.

50. Sher Henay
― 영어 감각주의 선집의 편집자·서문 작성자로 설정.

51. Ricardo Reis
― 의사·고전주의자·군주주의자로 설정된 핵심 이명.

52. Alberto Caeiro
―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인. 다른 주요 이명들의 스승.

53. Álvaro de Campos
― 조선공학자이자 시인. 기계문명과 감정의 폭발을 노래한 핵심 이명.

54. Barão de Teive
― 산문가. 『스토아인의 교육』의 저자로 설정.

55. Maria José
― 「꼽추 여인이 자물쇠공에게 보내는 편지」의 화자로 설정된 여성 인물.

56. Abílio Quaresma
― 탐정소설 계열의 인물·작가.

57. Pero Botelho
― 단편소설가·편지 저자로 설정된 인물.

58. Efbeedee Pasha
― 유머러스한 영어 이야기의 저자.

59. Thomas Crosse
― 포르투갈 문화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비평가·번역가적 인물.

60. I. I. Crosse
― Thomas Crosse와 함께 카에이루·캄푸스 등을 영어권에 소개하는 인물.

61. A. A. Crosse
― 수수께끼와 퍼즐을 푸는 인물.

62. António de Seabra
― 감각주의 문학 비평가.

63. Frederico Reis
― 히카르두 헤이스의 형제 또는 친척으로 설정된 에세이스트.

64. Diniz da Silva
― 문학작품의 저자이자 잡지 필자로 설정된 인물.

65. Coelho Pacheco
― 『Orpheu』 계열과 관련된 시인으로 등장하는 이름.

66. Raphael Baldaya
― 점성술사·신비주의 저술가.

67. Claude Pasteur
― António Mora의 신이교주의 문헌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번역가.

68. João Craveiro
― 정치기자로 설정된 인물.

69. Henry More
― 자동기술·심령통신과 관련해 등장한 이름.

70. Wardour
― 자동기술·심령통신에서 나타난 시인으로 기록된 이름.

71. J. M. Hyslop
― 심령통신 과정에서 나타난 시인으로 기록된 이름.

72. Vadooisf
― 심령통신에서 나타난 시인으로 기록된 이름.


5. 도대체 몇 명이었던가

여기서부터 숫자가 복잡해진다.

페소아 연구자들이 그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확인한 이름의 숫자는 연구자의 분류기준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 연구에서는 수십 명 수준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연구범위가 넓어지면서 72개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 뒤에도 유고 연구가 계속되어 80명이 넘는 목록이 제시되기도 했고, 더 넓은 기준을 적용한 연구에서는 100명을 훌쩍 넘어섰다.

2013년 제로니무 피사루와 파트리시우 페라리는 페소아가 남긴 방대한 유고를 다시 조사해 136명의 ‘허구적 저자’를 정리했다.

그러니 “페소아에게 이명이 정확히 몇 명 있었는가?”라는 질문에는 하나의 숫자로 답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를 독립된 이명으로 보고 어디부터를 준이명·필명·가상작가·문학적 인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엄밀한 핵심 이명은 알베르투 카에이루·히카르두 헤이스·알바루 드 캄푸스 세 사람이다.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는 준이명이다.

넓은 의미에서 페소아가 만들어낸 이름과 인격은 과거 72개가 널리 알려졌고, 후대 연구에서는 100명이 훨씬 넘는 허구적 저자가 확인되었다.


6. 이 많은 사람 가운데 누구를 기억해야 하나

솔직히 72명을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페소아 자신이 완성도 높은 이명으로 특별히 구분한 중심인물은 알베르투 카에이루·히카르두 헤이스·알바루 드 캄푸스였고, 여기에 『불안의 책』의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를 더하면 페소아의 이명문학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심은 어느 정도 잡힌다.

나머지 수십 명은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재미있다.

페소아가 어느 날 갑자기 세 명의 이명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기자·시인·소설가·비평가·철학자·점성술사·탐정소설가 같은 수많은 가공의 인물을 끊임없이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에게 형제와 스승과 제자를 만들어주고, 서로의 글을 번역하고 비평하게 했다.

한 사람이 문학동인을 만든 정도가 아니었다.


7. 결국 인간 챗GPT가 맞았다

리스본편을 읽으면서 농담처럼 페소아를 ‘20세기 초 리스본의 인간 챗GPT’라고 불렀다.

그런데 72개의 이름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나니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

카에이루 모드에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인이 되고, 헤이스 모드에서는 절제된 고전주의 의사가 된다. 캄푸스 모드에서는 기계와 속도에 흥분하는 조선공학자가 되고, António Mora가 되면 철학자가 되며, Raphael Baldaya가 되면 점성술사가 된다. Abílio Quaresma의 세계에서는 탐정소설로 들어간다.

질문에 따라 말투만 조금 바꾼 정도가 아니다.

작가의 생애와 직업, 성격과 철학, 문체까지 새로 만들었다.

그들이 서로의 작품을 읽고 비평하고 번역하도록 만들었고, 서로 형제이거나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까지 설정했다.

한 사람이 혼자 문학동인 하나를 만든 정도가 아니다.

출판사 하나를 혼자 차리고 작가·평론가·번역가·편집자·철학자·점성술사까지 전 직원 역할을 혼자 한 셈이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의 머리와 손은 결국 하나였다.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는 혼자서 하나의 문학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혼자서 하나의 문학사회를 만들어버렸다.

유시민군이 “궁금하면 관련 책을 읽어보라”고 슬쩍 넘긴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다. 이걸 다 설명하기 시작하면 리스본 여행기가 페소아 연구서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시켜놓은 심부름은 했다.

경주 출신 작가 양반, 다음부터는 70명짜리 숙제는 좀 직접 해주시라.


[참고자료]

1. Casa Fernando Pessoa, 「Tábua Bibliográfica」
- 페르난두 페소아가 1928년 잡지 『Presença』 제17호에 발표한 글.
- 알베르투 카에이루·히카르두 헤이스·알바루 드 캄푸스를 이명(heteronym)으로 명시하고, 필명과 이명의 차이를 직접 설명한 자료.

2. Casa Fernando Pessoa, Fernando Pessoa 및 Heteronymy 관련 공식 자료
- 페소아의 주요 이명 체계와 알베르투 카에이루·히카르두 헤이스·알바루 드 캄푸스의 관계 확인.
- 베르나르두 소아레스가 준이명(semi-heteronym)으로 분류되는 근거 확인.

3. Teresa Rita Lopes의 페소아 이명 연구
- 페소아가 만들어낸 다수의 이명·필명·가상인물을 발굴·분류한 연구.
- 넓은 의미에서 ‘72개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 연구.

4. Jerónimo Pizarro·Patricio Ferrari 편, 『Eu Sou Uma Antologia』, Tinta-da-China, 2013.
- 페소아의 유고를 바탕으로 136명의 ‘허구적 저자(autores fictícios)’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연구서.
- 각 인물의 서명과 관련 텍스트를 함께 정리한 후대 연구자료.

5. Modernismo.pt, Fernando Pessoa 관련 디지털 아카이브
- 포르투갈 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된 페소아 유고를 바탕으로 여러 이명·가상저자 및 관련 문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6. Casa Fernando Pessoa 및 페소아 연구자료의 『불안의 책』 관련 자료
- Vicente Guedes와 Bernardo Soares의 관계, 베르나르두 소아레스의 준이명적 성격 확인.

※ 주의
이 부록에서 사용한 ‘72명의 이명’이라는 표현은 엄밀한 의미의 이명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명·준이명·필명·가상작가·문학적 인물·매개적 인물 등을 넓게 묶어 정리한 것이다.
페소아 자신이 명시한 핵심 이명은 알베르투 카에이루·히카르두 헤이스·알바루 드 캄푸스 세 사람이며,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는 준이명으로 분류된다.
후대 연구에서는 분류범위를 더욱 넓혀 136명의 ‘허구적 저자’까지 정리되었다.


페소아 관련 자료 조사·정리: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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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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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3』 ― 도시를 걸으며, 역사와 사람을 생각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를 지나며

『유럽 도시 기행 3』을 따라 마드리드·바르셀로나·리스본·뽀르투를 걸었다. 실제로 그 거리를 걸은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동안 네 도시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저마다의 역사와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유시민의 안내를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 서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도 했다.

마드리드에서는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그리고 민주화의 역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왕궁과 미술관 뒤에는 권력을 둘러싼 오랜 갈등과 상처가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건축보다 더 깊은 곳에 카탈루냐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구엘공원의 아름다움만 보고 지나가기에는 이 도시가 겪은 정치적·역사적 굴곡이 너무 컸다.

포르투갈로 넘어가면서 생각은 이베리아반도 전체로 넓어졌다. 한때 세계의 바다를 양분하다시피 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광은 누구에게나 영광이었을까. ‘대항해시대’라는 이름 뒤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벌어진 침략과 수탈, 노예무역이 있었다. 한쪽의 발견과 기적이 다른 쪽에는 재앙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빼놓고 그 시대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리스본에서는 폼발 후작이 가장 많은 생각거리를 던졌다. 대지진으로 무너진 도시를 다시 일으킨 유능한 개혁가였지만 권력을 집중시키고 반대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한 인물이기도 했다. 유시민은 그를 ‘시대를 앞서간 인문주의자’로 평가하고 그의 동상 앞에서 국가의 기능과 리더의 역할을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를 떠올렸다. 두 사람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역사적 인물의 공과 과를 어떻게 함께 평가할 것인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사라마구와 페소아를 통해서는 한 도시가 작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생각했다.

뽀르투에서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상벤투역의 아줄레주와 이슬람 건축을 떠올리게 한 아랍 홀, 도루강과 히베이라의 풍경은 작은 도시가 지닌 매력을 보여주었다. 책과 서점은 더 이상 지성의 상징이 아니라는 유시민의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웠고, 제국의 실패를 경험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 때문에 여유와 환대의 태도를 갖게 되었다는 해석에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와 제법 자주 티격태격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얻은 것은 네 도시의 여행정보만이 아니었다. 좋은 여행기는 어디를 가야 하는지만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생각에 모두 동의할 필요도 없다. 공감하고, 의심하고, 따져보고, 때로는 다른 답을 찾는 과정까지가 독서다.

나는 네 도시를 아직 직접 걷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 간다면 건물과 풍경만 보고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다. 아름다운 것 뒤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누가 그것을 만들었고 그 시대의 영광 뒤에서 누가 대가를 치렀는지 찾아볼 것이다.

결국 내가 여행에서 알고 싶은 것은 늘 그 질문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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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안쪽을 향하는 그림자가 스치고 간 자리에서 코에 익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고묘지 미코토의 몸에서 났던 그 향수의 향이다.

이런 시간에 혼자,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이 긴 복도 끝은 예의 ‘진자의 방’이다. 더구나 그 방은 잠겨 있을 텐데…….

가와미나미는 걸음을 서둘렀다. 바닥에 끌리는 ‘영의’ 자락을 밟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쪽 어둠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진자의 방’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인 듯하다.

소리들은 당황과 의문, 그리고 떨쳐버릴 수 없는 공포를 문지르듯 짙은 안개가 서린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속의 사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묘한 정당성을 지니고 솟아올랐다.

마침내 시계 소리가 사그라들자,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제대로 생각도 못하고 가와미나미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방향을 바꾸어 걸었다.

10년 전에 왔을 때에는 저런 탑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의 현관도 아까 본 모양과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봐서는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시계탑이라고 와타나베가 말했었다. 시계의 문자판은 뒤뜰을 향하도록 지어져 있다. 게다가 묘한 일은, 이 점은 최근에 들었지만 그 문자판에는 바늘이 없다고 한다.

‘바늘이 없는 시계탑이란 말이지.’

정면에서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에 멍하니 서 있는 후쿠니시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숲의 나무들이 조잘조잘 바람에 술렁인다. 그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주위의 어둠에서, 갑자기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후쿠니시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어두웠고, 거리도 꽤 떨어져 있었으니까, 거기까지는 잘……."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군."
시시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조금만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래요. 《카오스》의 기사만 해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며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진짜가 존재할 거라고 믿고 싶어 하죠. 과학이 그것을 부정하면 할수록 그 과학을 넘어서는 곳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역시 일종의 현실 도피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무의식적인 반항인지도 모르겠군요. 학교에서 강요하는 어른들과 기존의 과학이라든가 질서에 대한."

"반항이라, 흥미로운 의견이로군."

"글쎄, 난 아주 무책임하게 그저 재미있어야 할 뿐이야. 믿느니 안 믿느니 하는 것보다, 유령이란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고 싶다, UFO가 있다면 타 보고 싶다……. 그런 식으로 말이야. 호기심 덩어리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요는 아무 쓸모도 없는 구경꾼인 셈이지."

"그렇군. 뭐 아무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지.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의 배경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을 거야."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군. 미스터리 마니아인 젊은 학생과 신진 미스터리 작가가 묘한 인연으로 이렇게 알게 되었는데, 오늘 밤 무슨 약속 있나? 없으면 우리 어디서 식사라도 함께 하지."

"요코하마의 가나가와 현 경찰본부에 다녀왔었어."
꼼꼼한 손놀림으로 잔에 맥주를 따르면서 시시야는 말을 이었다.

고다카 씨―오늘 내가 찾아간 형사인데―그도 그 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다 다소 관심도 갖고 있는지 관할서에 물어보기까지 하면서 조사를 해 주더군. 그 조사에 의하면 고가 미치노리를 포함해, 10년 동안에 적어도 일곱 명의 관계자가 죽었다는 거야.

"우선 고가 미치노리의 딸, 유령으로 나타난다는 문제의 소녀야. 10년 전, 그러니까 1979년 8월에 14살 어린 나이로 죽었어. 병사로 되어 있더군. 그 다음이 당시 고가 저택에 살면서 일했던 데라이 아키에라는 여자야. 도와가 죽은 지 얼마 안 돼 숲 속에서 목을 매 자살, 27살."

"그 다음은 현관에 나온 그 여자……. 이나미 사요코라고, 현재 그 집의 관리를 총책임지고 있는 모양인데, 그녀에게는 유사쿠라는 남편이 있었어. 원래는 둘이서 고가 저택에 살면서 일을 했대. 부부 사이에는 교코라는 딸이 있었지. 그 아이가 같은 해 8월에 아홉 살로 죽었어. 이 아이도 병사로 되어 있더군. 그로부터 한 달 후, 이번에는 아버지인 유사쿠가 죽었지. 마흔 살, 사고사."

"고가 미치노리가 죽은 것은 이듬해 80년 9월. 63세. 마찬가지로 병사. 도와가 죽은 후에 저택의 증축을 시작해서 그 일이 완성된 직후였다더군. 이렇게 해서 다섯 명이 되었지. 나머지 두 명. 한 명은 고가 가문의 주치의였던 하세가와 도시마사라는 남자. 81년 12월, 52살로 죽었어. 개업 중인 병원에 불이 나서……. 또 한 사람은 핫토리 이쿠오라고, 미치노리가 은퇴한 후, 고가 정계사의 전무로 일했던 남자야. 미치노리에게 꽤나 신임을 얻었는지 언젠가는 사장이 될 인물이었다는데, 82년 3월에 마흔다섯 살 나이로 죽었어. 이것도 교통사고."

"병사가 세 명에 사고사가 세 명, 한 명은 자살이로군요. 아, 고맙습니다."

좀 더 자세한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하고 눈을 감아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예쁘지만 어딘가 모르게 병약해 보이는 그 소녀의 얼굴. 숲 사이에 서 있는 그 집의 어두컴컴한 현관. 그리고…….

불쑥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함몰된……) 희미하게 꿈틀거리며, 후쿠니시를 당황케 했다. 무얼까 (……구멍에 처박혀) 이것은.

"그 책을 읽고, 나한테 탐정 소질이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지. 의논할 일이 있다는데, 죽은 고가 미치노리와 관계된 일인 것 같아."
아아, 그래서 시간을 말한 거로군요."
"귀가 밝기도 하군."
시시야는 또 싱긋 입술을 비틀었다.
"내일―아니 오늘 밤 9시, 정식으로 그 집에 초대되었는데, 어떤가? 자네도 함께 가지 않겠나?"

7월 31일 월요일.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와미나미 다카아키는 문 옆에 걸린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의’ 주머니를 뒤지자, 어젯밤 홀에서 슬쩍한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것으로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다. 역시 2시 전이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잠을 자다니,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말이야. 뭐랄까, 공기가 이상해. 고여 있고 투명하지가 않아. 왠지 탁한 색처럼…….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유난히 그런 느낌이 더 든단 말이야. 아무래도 난 기분이 나빠서 못 참겠어."

"그러고 보니, 그런데."
"어째서 일부러 저런 식으로 만들었느냐 말이야. 언뜻 보기에도 아주 복잡하고 튼튼하잖아. 왠지 마치."
말을 끊고 우류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가와미나미가 예상했던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가와미나미는 순간 한기가 들었다.
"안에다 사람을 가두기 위한 건물 같잖아."

고묘지 미코토가 사용한 침실을 들여다보았지만, 사키코가 말한 대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는 누웠던 자국이 있고 그 옆에는 그녀가 갖고 들어온 가방이 남아 있었지만, 본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두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은 잘 정돈돼 있는 그 가구 사이로 흩어져 있는 정밀 기계의 잔해였다. 부서진 시계가 바닥에 깔린 짙은 갈색 카펫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고바야가와가 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나뒹구는 시계 하나로 다가갔다.
"도무지 손쓸 여지가 없군, 이거야."

세면실이었다. 미코토의 모습은 없었지만, 대리석 화장대 앞에 깨진 시계가 하나 나뒹굴고 있다는 점이 역시 이상했다. 옆방의 시계 여섯 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부순 것이 분명하다. 깨져 조각조각 떨어져나간 문자판의 유리. 멈춘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각은 3시 50분.

가와미나미는 몸을 구부리고, 고바야가와가 가리키는 장소를 들여다보았다. 바닥에는 털이 긴 진주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검붉게 얼룩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고바야가와의 얼굴을 보았다.
"이건."
"핏자국처럼 안 보이나? 더구나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어."

"설마 고묘지 씨가 어젯밤 이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당했다……."
가와미나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내가 들은 소리는 이 시계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거나 어떻게 한 소리였다는 셈이로군요."

황망한 시간이 흘렀다.
침실, 거실, 세면실, 화장실, 욕조 등을 다시 한 번 빈틈없이 조사를 한 다음, 고바야가와와 가와미나미는 서둘러 홀로 돌아가 모두에게 사태를 보고했다. 그리고 전원이 흩어져 ‘구관’ 전체를 수색하기로 했는데…….
약 한 시간에 걸쳐 관내를 샅샅이 수색한 결과, 확인된 것은 이 건물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저 말이지, 고즈에. 너 정말 어디까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그럼 어떻게 해."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미사오. 살인이니 시체가 없어졌느니 하는 것도 별로 현실적으로 생각되지 않는데."
약간은 비꼬는 투로 가와라자키가 말했다.

"밖에 알리고 싶어도 열쇠가 없어."
"무슨 소리입니까? 열쇠 꾸러미는 고바야가와 씨가 맡고 있잖아요?"
"그걸, 그녀에게 건네줬었거든."
고바야가와는 점점 더 숨이 막히는 듯한 몸짓으로 말했다.
"그녀라뇨? 고묘지 씨 말입니까?"
"으응."
"왜요?"
"고묘지 씨가 그러라고 해서 말이지. 이 집의 과거를 탐색하기 위해서 열쇠 꾸러미가 필요하다고 했거든."

"내 생각이 옳았다는 말이야. 말하자면 이건 전부 고묘지 선생 한 사람의 연극이었다는 거야."
"흐음, 그도 일리가 있는 말인데."
대항하듯 우류도 입술에 미소를 띠었다.
"온 집을 다 뒤져도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왜냐?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지. 현관 열쇠를 갖고 있으니 아무런 문제없잖아."
"명쾌한 설명이로군. 그런데 왜 그녀가 그런 일을 한 거지?"

"자세하게 말하자면, 가위나 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닥치는 대로 갈가리 자른 느낌이었어. 가슴 있는 데가 이렇게 얼룩져 있었고."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사키코가 느닷없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 이야기,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우류가 묻자, 사키코는 하얀 두 볼을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짧은 한숨을 쉬며 우류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그가 도와의 죽음과 관련해 무슨 꺼림칙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와미나미는 생각했다.

어젯밤의 말소리, 그리고 방에서 난 소리. 가와미나미는 그것들이 미코토 혼자만의 연극이었다고 순순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가와라자키나 우류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있는 8명 중에 누군가가 그녀를 살해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타당성이 없다. 그렇다. 문제는 이 시계관이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은 건물이라는 바로 그 점이다.

"무슨 소리죠? 지금 저 소리는?"
"소리? 글쎄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녀는 오른쪽 귀에 꽂힌 이어폰에 손을 갖다댄다.
"저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지금 들렸어요. 어디선가 중국 요리할 때 쓰는 프라이팬을 바닥에 떨어뜨린 듯한 소리가 났는데. 후쿠니시, 자네도 들었지?"
"네, 분명히."
"그렇습니까?"
사요코는 미안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보시는 대로, 요즘엔 귀가 안 좋아서요."
"보청기입니까?"
"네. 그래서 안 들렸는지도 모르죠."
"아주 작은 소리였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좀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이라서 먼 데 소리가 잘 울리거든요. 밤에는 특히."

"말씀대로, 거기에는 가면이 하나 더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제 오후부터 없었어요."
"어제 오후부터? 없어졌다는 걸 안 것은 언제입니까?"
"6시에 여러분이 ‘구관’으로 들어간 다음이었어요. 선생, 아니 시시야 씨가 오셨을 때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불행한 집입니다."
얼굴을 약간 숙이고 사요코는 절절하게 말했다.
"저주를 받았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과거에 일어난 불행을 생각하면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저주를 받았다,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원칙적으로 ‘구관’을 거주 명목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문을 잠그고, 지금 그대로의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 특히 ‘진자의 방’ 그러니까 따님인 도와 아가씨가 사용했던 방은 살아 계셨을 때와 똑같이 해 두고,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외에는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관’에 있는 시계, 그쪽 건물에는 자료실에 진열돼 있는 수집품 외에, 작동하고 있는 시계가 전부 108개 있습니다. 그것들 모두를 가능한 한 늘 손질해서 정확하게 움직이게 할 것."

"번뇌의 수로군요. 그것들을 전부, 오늘까지 당신이 관리하셨나요?"
"몇 개 고장이 난 것도 있지만, 대충 사흘에 한 번은 태엽을 감고 시각을 조정합니다."
"야, 그것도 힘든 일이겠군요."

"노노미야 야스히토 씨라고, 주인어른이 젊은 시절부터 내내 의논 상대로 삼으셨던 점쟁이입니다."

"점이라고요? 그런데 그 분이 무슨?"

"올해 벌써 84살이 되신 분인데, 주인어른의 배려로 이곳의 별채에 살고 계십니다. 별채는 이 ‘신관’이 서기 전부터 있었던 건물을 말하는 것이죠. 저희 관리인과 그 외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주인어른이 돌아가신 후에도 노노미야 선생님은 이 집에 살도록 하고, 잘 보살펴 드리라고."

"한 가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요.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염두에 둘 필요도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9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상태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어요."

여신은 침묵의 감옥에 이어져 있다

1992년 8월 5일 처형의 그 날

시간은 끝이 나고 성당에 일곱 가지 색이 비치고

땅을 뒤흔드는 외침 속에서 너희들은 들으리라

침묵의 여신의 단 한 번의 노랫소리

아름다운 단말마의 선율을

그것은 한탄의 노래 그것은 기도의 노래

죄 많은 짐승들의 뼈와 함께

우리들의 비석에 바쳐지리라

"정시법이 자연을 관리하려는 시스템인 데 비해, 부정시법은 자연의 리듬을 중심으로 해 시간을 가변적으로 설정한 것인 셈이지. 한 각의 길이가 낮과 밤의 길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시각제도였어. 그래서 계절에 따라서 혹은 장소에 따라서 시간의 길이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지."

"사신死神이야. 사신을 보았어."
겁을 먹은 듯한 눈으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돌아보면서, 그는 그런 말을 했다.
"죽음의 신이야, 사신을 보았어."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시시야를 상관하지 않고, 노인은 쉰 목소리로 계속한다.
"검은 망토를 입은 놈이야. 창백하고 납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우선, 이 저택에 ‘구관’이 세워진 것은 정확하게 언제였습니까?"
"15년 전입니다. 1974년 8월 5일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요. 따님의 열 번째 생일에 맞춰 주인어른이 이 집으로 이사를 오셨어요."
"8월 5일. 그날이 도와 씨의 생일입니까?"
"네."
"돌아가신 유사쿠 씨와 당신은 그 당시부터 이 집에?"
"그보다 훨씬 전이에요. 주인어른이 도쿄에 사실 때부터 우리들은 고가의 집안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데루미 씨의 남편, 아다치 모토하루 씨의 친구가 나카무라 씨의 은사라고 하던데요. 그런 관계로 알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그래서 특별히 의뢰를 수락했다, 그런 얘긴가요. 데루미라는 여동생이 유키야 도련님의 후견인이라고 아까 들었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이오. 남편 분의 일 관계로, 거기 산 지 오래됩니다."
"멜버른이라면 지금쯤 한겨울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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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엊그제 밤, 갑자기 부음을 받았다. 후지사와에 사는 사촌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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