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시 내리는 보슬비가 에도 거리를 덮는다.

달력상의 추분이 지나고 특이한 괴담 자리가 맞이한 이야기꾼은 자그마한 몸집의 남자로, 다리가 약간 불편한 것 같았다.

고소데
일본의 전통 복식에서 통소매로 지은 평상복

모모히키
일본 전통 복식의 하의로, 속옷으로도 입었다. 허리에서 발꿈치까지 약간 붙게 입는 바지로, 허리는 끈으로 묶게 되어 있다

두꺼비처럼 얼굴도 배도 뚱뚱한 직업 소개꾼은 왠지 이 특이한 괴담 자리의 청자를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으로, 오치카도 실컷 밉살스러운 말을 들었고 도미지로도 만나자마자 대뜸 ‘밥벌레’라고 욕을 먹었다.

"다만 열한 살 때 웃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후로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아양을 떨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호지차
반차番茶를 불에 쬐어 말려서 만든 차

"아무래도 이야기하기가 어려우시면 저와 잠시 차를 마시며 잡담이나 하시다가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 특이한 괴담 자리는 미시마야의 엉뚱한 취미니까요. 그냥 취미로 손님을 괴롭히는 일이 있어서야 장사꾼의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생각나는 대로 한 말이었지만 이야기꾼의 귀에는 울림이 컸던 모양이다.

"――장사꾼의 지옥."

"그렇다면 무사에게는 무사의, 직인에게는 직인의 지옥이 있을까요."

농사꾼의 지옥, 기예꾼의 지옥에 사창가의 지옥, 여관이나 여인숙의 지옥도 있는 것일까요. 남자의 지옥, 여자의 지옥, 아기들만 모인 지옥에 할아버지 할머니투성이인 지옥. 입술을 비슬비슬 떨면서 그렇게 말하고 이야기꾼은 또 수건으로 얼굴을 눌렀다.

매년 이렇게 조용한 가을비가 내리면.

그 빗방울이 뺨에 떨어지면.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면.

이 모치타로 씨는 울고 싶어진다.

큰 소리로 고함치고 싶어진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발을 구르며 날뛰고 싶어진다.

겐이치로는 오린을 사랑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보고 첫눈에 반했을까. 그 수수께끼를 풀자면 놀랍게도 모치타로의 봇짐 장사가 인연이었다.

"하타마아, 무라 마을의, 마쓰이치~, 마쓰타로~."

부르고 있다. 어라? 우리 아버지와 형의 이름이 아닌가.

"오린이~, 돌아왔다~."

"오린에게~, 등에가, 씌었다아."

거기까지 듣고 모치타로는 입을 딱 벌렸다.

뭐라고?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누이에게 등에가 씌었다고?

"제 고향에서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서 저주를 당하는 것을 그렇게 말하거든요."

"그 상대가, 등에의 신이었지요."

그러나 등에의 신은 받아들였다.

"등에의 신은 완전히 바보라 이해득실을 몰랐으니까요."

애초에 등에의 신이 승부에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머리로는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름에는 종종 그런 때가 있고 그래서 무섭고 재미있는 것이다.

육면 님의 신자들은 육면 님에게는 빌 수 없는 꺼림칙한 일, 옳지 않은 일을 등에의 신에게 빌게 되었다.

시기, 질투, 원한, 증오.

누군가를 괴롭혀 주고 싶다,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빼앗고 싶다, 누군가를 불행의 밑바닥으로 떨어뜨려 주고 싶다.

그렇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못된 소원이다.

등에의 신은 바보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들어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도 들어주고 만다.

――등에의 신께 전해 주십시오, 소원이 있습니다, 전해 주십시오.

계속해서 호소하며 피를 빨게 한 등에의 수가 99마리가 되었을 때, 사악한 소원은 신에게 전해지고 저주는 이루어진다.

"등에 신의 저주는 저주한 사람이 아니라 저주를 당한 상대방 쪽에 ‘표식’이 나타나는데요."

"저주를 당한 사람이 무언가 먹으려 하거나 마시려고 하면,"

그 속에서 등에가 나오는 것이다.

막 퍼놓은 밥그릇 속에 등에. 갓 찐 감자를 가르면 등에.

매미로 착각할 만큼 통통하고 새까만 날개를 번쩍이는 커다란 등에.

"시, 시, 시."

"죽어 가는 등에입니다. 지직, 지직 하고 소리를 내면서 다리를 움직이는."

하오리
일본 전통 복식에서 고소데 위에 걸쳐 입는 길이가 짧은 겉옷

"비가 오고 있어. 이런 걸 가을비라고 하나? 누나는 그런 걸 잘 알지."

"야, 이 커다랗고 멍청한 등에 자식아,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 하고 물어보았지만."

등에는 붕붕거릴 뿐이었다.

――이 녀석한테는 육면 님이 아주 좋아하시는 떡을 이름으로 붙여 줘요. 육면 님한테 사랑받아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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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철학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나를 나로 인식하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자아‘는 달라졌고 더달라질 것이다. 내 철학적 자아를 어떻게 특정할 것인가. 어느 시점의 내가 다른 시점의 나와 다르다면 어느 것이 나인가? 오직 현재 시점의 자아만 의미가 있다면 과거에 내가 한일을 이유로 지금의 나를 비판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라고 말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 P45

외모를 꾸미는 데 돈 쓰기를 주저한다. 기도를 들어주는 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후 세계, 지옥과 천국, 윤회, 육체와 분리된 영혼, 구원, 영생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 지성을 뽐내는 사람은 부러워하지만 돈과 권력을자랑하는 사람은 경멸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나는안다. 그러면 나를 아는 것인가? - P46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인문학의 표준 질문이다. 그러나인문학 지식만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먼저 살펴야 할 다른질문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다. 묻고 대답하는 사유의 주체를 ‘철학적 자아‘라고 하자. 철학적자아는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인 몸에 깃들어 있다.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 P47

사람 뇌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한다. 그래서 1.4킬로그램 안팎으로 평균 체중의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도혈액의 25퍼센트와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쓴다. 사람만큼 뇌가 발달한 동물은 없다. 뇌의 주름을 펴면 쥐는 우표한 장, 원숭이는 엽서 한 장, 사람은 신문지 한 장 정도다. - P49

아리스토텔레스는 뇌과학의 역사에도 등장한다. 플라톤의 제자였고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의 과외교사였던 그는 인류 역사의 가장 두드러진 ‘인문학 천재‘다. - P52

어느 대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직원 평균 연봉의 1,000배를 가져가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연봉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있기 때문이지 생산에 1,000배 더 기여해서가 아니다.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가 똑같은 작업을 하는 원청 소속 노동자의 절반 수준 시급을 받는 것은 중간착취와 불평등을허용하는 제도 때문이지 생산 기여도가 낮아서가 아니다. 한계생산력분배이론의 오류는 신경세포의 작동 원리를 물리법칙 형식으로 만들어 신경세포와는 무관한 경제현상에 적용한 데서 생겼다. - P62

따뜻한 심성과 훌륭한 인격을가진 학자도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앨프리드 마셜 교수가 그런 사람이었다. 걸출한 경제학자인 동시에 온화한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제자들한테 "찬 이성 더운 가슴"cool headwarm heart을 주문하곤 했다. 냉철한 이성으로 합리적 경제정책을 추진하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연민을 가지라는말이었다. - P63

아리스토텔레스는 얼마나 대단한가. 명백한 오류임을과학자들이 분명하게 밝혔는데도, 두뇌는 계산하고 심장이느낀다는 관념은 지식인의 언어습관에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내가 다녔던 대학 경제학과의 마지막 소절 가사도 "찬 이성 더운 가슴"이었다. 심장은 그저 뛰기만 하는 근육 덩어리임을, 냉철한 손익계산도 따뜻한 연민도 모두 뇌가하는 일임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그 노래를 불렀다. 나도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였다. 당연하다. 경제학은 인문학이고, 나는 문과니까. - P63

칸트는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칸트만 그런 게아니다. 어떤 천재도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불가지론사물이 우리의 주이다.
관과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 알았다. 그런 점에서 남달랐다.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 P71

별개의 현상인 줄 알았던 전기와 자기가 서로를 유도하는 결합 현상임을 밝힌 영국 물리학자 패러데이 Michael Faraday(1791~1867)와 몇 개의 방정식으로 빛이 전자기파라는 사실을정리한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맥스웰James Maxwell(1831~1879) 덕분에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안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이 무슨 효용이 있을지 짐작하지 못했지만 전기부터 전화·라디오·텔레비전 · 인터넷과 휴대전화까지 우리가 쓰는 모든 전기·전자기기는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발견에서 비롯했다. - P73

진동수에작은 상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빛의 에너지를 알아냈다. 그 상수는 6.6260755를 104로 나눈 극히  작은 값이다.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플랑크 상수‘라고 한다. 플랑크는 빛의복사가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의 방출 · 전달·흡수 현상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발견한 불연속적인 에너지 덩어리가 바로 ‘양자‘量子(quantum)다. - P74

칸트는 옳았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옳았다. 그의 시대에는 망원경만 있었고 현미경이 없었다. 고전역학은 있었지만 양자역학은 없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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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p.
밝은 달 하얗게 빛나는 밤
귀뚜라미는 동쪽 벽에서 운다.
옥형성은 초겨울을 가리키는데
뭇 별들 어찌 저리도 반짝이는가.
흰 이슬은 들판의 풀을 적시고
시절은 어느덧 다시 바뀌었네.
가을 매미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우는데
제비는 어디로 가는가.
옛날 나와 함께 하던 벗들은
드높이 날아올라 날개를 떨치면서도,
손잡고 지내던 좋은 정리 생각지 않고
남겨진 발자취처럼 나를 버렸네.
남쪽엔 기성 북쪽엔 두성 있지만
견우성도 멍에를 메지 않는구나.
반석 같은 튼튼한 우정 진실로 없나니
헛된 명성 또 다시 무슨 이익 있으랴.

明月皎夜光 促織鳴東壁
玉衡指孟冬 眾星何歷歷
白露霑野草 時節忽復易
秋蟬鳴樹間 玄鳥逝安適
昔我同門友 高舉振六翮
不念携手好 棄我如遺跡
南箕北有斗 牽牛不負軛
良無盤石固 虛名復何益

작자불명,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중에서 <문선>


183p.
낙타털옷 사이로 이슬 스미며 새벽 찬 기운 살짝 느끼는데
비껴 있는 별들은 너무도 밝아라.
고요한 작은 다리 꿈속에서 지나는데
깊숙한 저쪽에서 가을 벌레가 운다.

露侵駝褐曉寒輕 星斗蘭干分外明
寂嘆小橋和夢過 稻田深處草蟲鳴
진여의陳與義, <이른 아침에 길을 가며早行>

明月皎夜光 促織鳴東壁
玉衡指孟冬 眾星何歷歷
白露霑野草 時節忽復易
秋蟬鳴樹間 玄鳥逝安適
昔我同門友 高舉振六翮
不念携手好 棄我如遺跡
南箕北有斗 牽牛不負軛
良無盤石固 虛名復何益

작자불명,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중에서 <문선>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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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
백로白露
들판 가득
흰 이슬 내리고 - P178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더니, 바람 한번 설핏 불자 가을이 발치에서 맴돈다. 입추 지나 저서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백로 지나 추석을 보냈다. 농경사회의 절기가 요즘 같은 새로운 유목의 시대에 가당키나 하겠는가마는, 때가 되면 절기에 눈길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오래도록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는 선조의 숨결때문일 것이다. - P178

밤 열시, 강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뛰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한참을 뛰고 난 뒤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초사흘 밤 눈썹달이 어두운 산허리 저편으로 빛을 흘린다. 밤 날씨는 제법 차가운데,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길섶에 달맞이꽃이 한 송이 피어 있다. 여름밤을 뛰다보면 온밤을 화사하게 수놓던 달맞이꽃이다. - P179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별은 보이지 않는다. 밤안개가 내리는지우둑한 하늘 저편에서 흰빛이 몰려온다. 아니면 밤이 깊어지자 흰이슬이 하늘 가득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80

오행五行으로 보면 가을은 금金에 속한다. 모든 기운을 죽이는숙살지기자신의 근간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는를형벌을 관장하는 기관과 연결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수많은 관계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것들을 매정하게가지치기를 해서 나의 근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절, 그게 가을이다. 가을이면 마음이 왠지 모르게 엄숙해지기도 하고 무겁게가라앉기도 하는 건 아마도 이런 탓일 게다. - P181

계절의 변화를 짐작조차 못하다가 뒤늦게나마 깨닫는 건 오로지자연 속에서 뭔가를 하는 덕분이다. 작은 풀잎의 색깔이 변화하는걸 보면서도 우주의 변화를 짐작하는 것은, 아마도 내 몸속에 여전히 천지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이라 풀벌레 소리가 잦아든 줄 알았는데, 발길 멈추고 희뿌옇게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어디선가 가늘고 희미하게 풀벌레가 운다. - P182

낙타털옷 사이로 이슬 스미며 새벽 찬 기운 살짝 느끼는데
비껴 있는 별들은 너무도 밝아라.
고요한 작은 다리 꿈속에서 지나는데
깊숙한 저쪽에서 가을 벌레가 운다.

露侵駝褐曉寒輕 星斗蘭干分外明
寂嘆小橋和夢過 稻田深處草蟲鳴
진여의陳與義, <이른 아침에 길을 가며早行> - P183

옛 어른들은 이른 저녁에 잠이 들어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보통새벽 네 시나 다섯 시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에 낮은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 새벽별을 보면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네들은 언제나 별자리를 보고 천기를 짐작했다. 요즘은 밤늦도록 일을하다가 새벽이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벽 별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다 새벽 별을 보게 되면 그 맑고 천연한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 P183

한밤중이 되어 뜰을 거닐어도 좋은 시절이 바로 백로 무렵이다.늦더위가 기승을 부린다지만 밤이 되면 제법 선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책을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쯤이면 뜨락을 거닌다. 맑은 하늘에 별이 무수히 빛날 때도 있지만, 더러는 하늘 가득 흰 이슬이 내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고개를 쳐들고 계절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인다. 달빛이라도 밝을 양이면 더더욱 좋다. - P184

책을 덮고 뜰로 내려오니
달빛은 물처럼 넘실거린다.
가을 기운 서늘하게 옷깃에 가득하고
소나무 그늘 빽빽하게 땅을 덮었다.
온갖 벌레는 밤이 가기를 재촉하고
기러기 한마리에 추운 계절 시작될 것을 안다.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 번뇌 잊었으니
이 아름다운 맛을 뉘와 함께 할거나 - P184

捲卷下中庭 月色浩如水
秋氣凉滿襟 松陰密鋪地
百蟲催夜去 一雁領寒起
靜念忘世粉 誰同此佳味
문동文侗, <달빛 아래를 거닐며步月> - P185

무더위로 떠들썩했던 여름은 처서를 지나 백로에 이르면 거의 사라진다. 이제는 뭔가 고요한 생활로 진정되는 듯하다. 차분한 자세로 책을 읽고, 순선한 마음으로 달빛 아래를 거닐며, 세상의 온갖 명리와 번뇌를 잊는 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이상적 삶이다. 그럴 때 느끼는 ‘아름다운 맛佳佳‘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 P185

무더위에 처져 있던 온갖 물상들이 겨우 몸을 세우자 서늘한 가을 기운이 한해의 살림살이를 정리하라고 재촉한다. 이따금씩이라도 집 주변을 거닐어보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지 감동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그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이, 우리는 나이를 먹고 머리는 서서히 흰빛으로 변해간다. 흰빛 이슬이 어느새 달빛과 함께 온 천지를 슬며시 적셔놓듯이.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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