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 이즈 미국 서부 This Is Western USA - 2027~2028년 최신판 ㅣ 디스 이즈 여행 가이드북
제이민.민고은 지음 / TERRA(테라출판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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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여행, 둘째 날(2026.9.24.)

— LA 할리우드 사인, 게티센터, 베니스 운하, 베니스 비치, 비버리힐스

1. LA에서 맞는 첫 아침

오전 7시 30분, 잠에서 깼다.

미국에서 맞는 첫 아침이다. 어제는 대전에서 출발해 인천공항으로 이동하고, 태평양을 건너 LA에 도착한 다음 그리피스 천문대 야경까지 보고 왔다. 긴 하루였다. 시차도 있고 몸도 피곤했지만, 오늘은 LA의 주요 명소를 둘러볼 생각에 다시 움직일 준비를 했다.

오늘 일정은 할리우드 사인, 게티센터, 베니스 운하와 베니스 비치, 그리고 비버리힐스다. 하루에 돌아보기에는 제법 빡빡한 일정이다.

우선 아침부터 먹어야겠다.

숙소인 옥스퍼드팰리스 호텔 바로 근처에는 파리바게뜨가 있다. 미국까지 와서 아침을 파리바게뜨에서 해결한다니. 어제 북창동순두부에서 저녁을 먹은 데 이어 오늘 아침도 한국 식당이다.

빵과 음료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호텔이 구식이고 주변 분위기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런 편리함은 확실히 좋다. 한국 음식이 그리울 틈도 없고 영어로 주문하느라 신경 쓸 일도 별로 없다. LA 한인타운에 숙소를 잡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오전 8시 55분, 우버를 타고 첫 번째 목적지인 레이크 할리우드 공원으로 향했다.

2. 할리우드 사인, 화려한 꿈과 그 뒤편의 비극

우버 기록을 확인하니 오전 8시 55분 승차, 오전 9시 21분 하차다. 요금은 팁을 포함해 27.95달러였다. 기사 이름은 투멘(Tumen).

도착한 곳은 레이크 할리우드 공원(Lake Hollywood Park)이다. 할리우드 사인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산비탈 위로 거대한 흰색 글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HOLLYWOOD.

어제 그리피스 천문대로 올라가는 길에 멀리서 보았던 바로 그 간판이다. 오늘은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본다. 영화와 방송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글자를 실제로 마주하니 비로소 할리우드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그런데 이 간판의 유래를 알고 나니 이야기가 제법 재미있다.

1923년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HOLLYWOOD가 아니라 HOLLYWOODLAND였다. 영화산업을 홍보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주택단지를 분양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광고판이었다.

그야말로 부동산 분양 광고가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간판은 낡아갔고, 1949년 보수하면서 뒤의 LAND를 떼어냈다. 그렇게 오늘날의 HOLLYWOOD가 되었다.

영화산업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원래는 부동산 광고판이었다니.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간판에는 어두운 역사도 있다.

1932년 9월,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왔던 영국 출신 배우 페그 엔트위슬(Peg Entwistle)이 이 간판의 H자 위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는 경력을 쌓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배우다.

수많은 사람이 성공을 꿈꾸며 모여드는 도시. 누군가는 스타가 되었지만, 누군가는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할리우드 사인은 그런 성공과 좌절의 역사를 함께 지켜본 셈이다.

새파란 하늘 아래 하얀 글자들은 여전히 눈부시다. 그러나 그 화려한 간판을 올려다보면서 그 아래에 쌓인 수많은 사람의 꿈과 좌절도 생각해 본다.

여행이라고 즐거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전 9시 57분, 다시 우버를 탔다. 다음 목적지는 게티센터다. 요금은 팁 10.43달러를 포함해 57.95달러. 기사 이름은 세사르(Cesar)다.

할리우드 사인에서 게티센터까지 이동하는 데 34분이 걸렸다.

3. 게티센터, 예술과 건축과 정원이 어우러진 곳

오전 10시 31분, 게티센터에 도착했다.

게티센터(The Getty Center)는 미국의 석유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J. 폴 게티(J. Paul Getty)의 유산을 바탕으로 설립된 대규모 문화예술 공간이다.

현재의 게티센터는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가 설계하여 1997년 문을 열었다. 미술관뿐 아니라 연구소와 도서관, 보존 관련 기관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우버에서 내린 곳은 산 아래쪽이다. 여기서 트램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간다.

트램 이용료는 무료다. 미술관 입장료도 무료다.

미국에서 관광지 몇 군데 돌아다니다 보면 입장료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이 정도 시설을 무료로 개방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트램을 타고 올라가니 흰색 건물들이 나타난다. 건물은 큼지막한 석재와 유리,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그냥 그림만 전시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건물 자체도 볼거리다.

반 고흐의 《아이리스》

미술관에 들어가 인포메이션센터에 들렀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한국인 안내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반가운 일이다.

게티센터는 규모가 크고 전시 작품도 많으니 모든 것을 다 보려고 하기보다 관심 있는 작품이나 주제를 정해서 관람하는 것이 좋다고 알려주었다.

특히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Irises)》를 추천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보았을 작품이다.

1889년에 그린 그림이다.

고흐가 프랑스 생레미의 정신요양원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작품으로, 요양원 정원에 피어 있던 붓꽃을 소재로 했다.

고흐는 그곳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생애 마지막 시기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화가의 불행했던 생애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림 속 붓꽃들은 그런 사연과는 달리 생명력이 넘친다.

보라색과 푸른색의 꽃잎, 굽이치는 초록 잎들, 붉은 흙이 강렬한 색채로 어우러져 있다.

책이나 화면으로 보던 그림을 실제로 마주한다는 것은 역시 다른 경험이다.

한국인 안내자 덕분에 넓은 미술관에서 무엇부터 볼 것인지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낯선 나라의 미술관에서 한국말로 친절한 안내를 받으니 반가웠다.

작은 당나귀 한 마리와 사진사였던 화가들

여러 전시실을 돌아다니며 그림들을 구경했다.

그런데 어느 그림을 보다가 작은 당나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숲길을 배경으로 당나귀를 탄 사람과 그 곁을 걷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전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아주 작았다. 그런데 그 조그만 부분에도 사람들의 옷차림과 당나귀의 모습이 제법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흥미로워서 카메라로 그 부분을 확대해 사진까지 찍었다.

미술관에 와서 이름난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이런 작은 장면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또 다른 그림에는 옛 베네치아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운하를 따라 들어선 건물들과 수로, 배와 사람들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에는 화가가 사진사 역할도 했겠구먼.

오늘날에는 어디를 가든 카메라나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으면 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순식간에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의 도시와 건축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남기려면 누군가 직접 그려야 했다. 화가들은 풍경을 묘사하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물론 모든 화가가 기록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상상력과 해석도 들어간다.

하지만 옛 도시를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들은 미술품인 동시에 당시의 풍경을 전하는 귀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수백 년 전의 건물과 운하, 사람들의 옷차림을 지금도 그림을 통해 살펴볼 수 있지 않은가.

오늘날 사진이 담당하는 역할의 상당 부분을 당시에는 그림이 담당했던 셈이다.

생각해 보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당대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는 기록자이기도 했겠다.

그렇게 화가들이 남겨 놓은 그림을 나는 수백 년 뒤에 카메라로 다시 찍고 있었다.

옛날 화가가 정성껏 그린 작은 당나귀 한 마리를 오늘날의 사진사가 카메라로 확대해 기록하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일이다.

회화뿐 아니라 조각과 장식미술, 인물 흉상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인물의 얼굴을 정교하게 조각한 흉상 하나도 사진에 담았다.

그림과 조각을 둘러보면서 미술관 관람이라는 것이 꼭 작품의 이름이나 화가의 명성을 기억하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그림에서는 색채가 눈에 들어오고, 어떤 그림에서는 수백 년 전 도시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또 어떤 그림에서는 아주 작은 당나귀 한 마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그런 것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재미 아니겠는가.

점심은 햄버거로

미술관을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프다. 점심은 게티센터 안의 카페에서 해결했다.

햄버거를 먹었다.

미국까지 왔으니 햄버거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제저녁 순두부, 오늘 아침 파리바게뜨에 이어 드디어 미국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또 하나의 미술품, 게티센터의 정원

게티센터는 야외 정원도 유명하다.

특히 중앙정원(Central Garden)은 예술가 로버트 어윈(Robert Irwin)이 설계한 공간으로, 단순한 조경시설이 아니라 정원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든 곳이다.

건물에서 내려다보면 둥글게 펼쳐진 정원과 수로, 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으로 각종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정원 곳곳에는 빨간 장미와 노란 꽃들이 피어 있다. 분홍색과 붉은색 꽃이 둥글게 퍼진 나무들도 인상적이다. 강렬한 햇빛 아래 꽃들이 유난히 선명하다.

그런데 나무 아래를 보니 사람들이 양산을 쓰고 다닌다. 게티센터에서는 방문객들을 위해 양산도 제공하고 있었다.

햇살이 워낙 강하니 그럴 만도 하다.

양산을 쓰고 정원을 걷는 마님과 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 뒤로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들이 펼쳐진다.

정원 한가운데는 물이 흐르고, 둥글게 조성된 식재 공간을 따라 다양한 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볼 때와 아래에서 걸으며 볼 때 풍경이 달라진다.

정원으로 내려가는 길도 잘 꾸며 놓았다. 꽃을 가까이서 보다가 고개를 들면 흰색 건물이 나타나고, 건물 사이로는 LA 시가지가 펼쳐진다.

건축과 미술품, 정원을 따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어우러져 있다.

게티센터는 작품만 보고 서둘러 나올 곳이 아니다. 건물을 둘러보고, 정원을 산책하고, 멀리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는 과정 전체가 하나의 관람이다.

오전 10시 31분에 도착해 오후 2시 2분까지 머물렀으니 세 시간 반가량 있었다. 그래도 더 둘러볼 만한 곳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음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오후 2시 2분, 게티센터에서 다시 우버를 탔다. 목적지는 베니스 운하다. 요금은 팁 5달러를 포함해 35.96달러. 기사 이름은 루이스(Luis)다.

4. 베니스 운하, 미국에 만들어 놓은 작은 이탈리아

오후 2시 31분, 베니스 운하(Venice Canals)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베네치아 운하라고 불렀는데, 이곳 지명은 베니스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영어로 Venice라고 부르니 결국 같은 이름이기는 하다.

그런데 미국 LA에 웬 베니스 운하인가.

역사를 알아보니 사연이 있었다.

1905년 부동산 개발업자 애벗 키니(Abbot Kinney)가 이곳에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본뜬 휴양도시를 만들면서 운하를 조성했다.

당시에는 운하를 따라 곤돌라가 다니고,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휴양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동차가 보급되고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운하의 상당 부분은 도로로 메워졌다. 현재 남아 있는 운하는 그때 조성했던 시설의 일부다.

그러니까 이곳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운하가 아니라 개발사업으로 조성한 인공운하다.

운하 옆으로 산책로가 있고, 그 건너편에는 주택들이 줄지어 있다. 집마다 형태도 다르고 정원도 제각각이다. 작은 배를 운하에 띄워 놓은 집도 있다.

중간중간 하얀색 보행교가 운하 양쪽을 연결한다. 운하와 주택들 사이로 야자수가 높이 솟아 있어 풍경이 꽤 이쁘다.

사진으로 보면 참 근사한 동네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운하 물이 썩 깨끗하지 않다. 물빛이 탁하고 냄새도 좀 난다.

아무리 경치가 좋다지만 이런 물을 집 바로 앞에 두고 살면 어떨까.

모기는 없나 모르겠다.

아침저녁으로 창문을 열어 놓으면 운하 냄새가 들어오지는 않을까. 이쁜 풍경을 즐기는 관광객과 실제 이곳에 사는 사람의 사정은 다를 수도 있겠다.

다행히 산책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운하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집과 정원들을 구경하기에 좋다.

다만 걷다 보니 중간중간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개줄도 묶어 놓지 않은 놈들이 있어 좀 거시기하다.

개 주인에게야 사랑스러운 반려견이겠지만, 남에게까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운하는 아름답고 산책길도 좋은데, 물 냄새에 개 짖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마냥 낭만적인 곳은 아니다.

그래도 이런 인공운하를 중심으로 주택가를 조성해 놓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도시개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도 한번 둘러볼 만한 곳이다.

운하를 따라 산책했다. 이제 바다 쪽으로 향한다.

5. 베니스 비치, 태평양을 바라보다

베니스 운하에서 베니스 비치(Venice Beach)까지는 걸어갔다.

가는 길에 목이 말라 스타벅스에 들렀다.

셋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마셨다.

그런데 미국 스타벅스는 우리나라 스타벅스보다 영 못하다.

매장 분위기부터 그렇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타벅스 하면 제법 고급스러운 카페라는 느낌이 있는데, 이곳은 그냥 평범한 동네 커피숍 같다.

커피 맛도 내 입맛에는 우리나라 것이 더 낫다.

미국에서 시작한 스타벅스인데, 정작 한국 스타벅스가 더 고급스럽고 커피도 더 맛있다니. 이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다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가 나타났다.

태평양이다.

야, 역시 태평양은 태평양이구먼.

눈앞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수평선이 멀리 펼쳐져 있다.

하늘도 넓고 바다도 넓다.

모래사장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바닷가를 따라 키 큰 야자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한국에서도 바다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고향인 보령에는 대천해수욕장도 있고, 서해안 바다도 익숙하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 서부 해안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니 기분이 또 다르다.

저 바다 건너편에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 넘게 건너온 바다를 이제 반대편에서 바라보고 있다.

가슴이 탁 트인다.

내 마음도 태평양만큼 넓어지는 기분이다.

이럴 때는 세상 걱정이 별것 아닌 것 같다. 물론 여행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현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좋다.

베니스 피어 끝에서

베니스 피어(Venice Pier)를 따라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바다 위로 길게 뻗은 구조물이다. 양쪽으로 난간이 있고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피어 끝까지 걸어가니 사방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멀리 수평선 위로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다. 요트인지 작은 범선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얀 돛을 세우고 한가롭게 떠 있다.

햇빛을 받은 바닷물이 반짝인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태평양 한가운데 저렇게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는 모습을 보니 평화롭다. 바다가 워낙 넓으니 배가 더 작아 보인다.

난간에는 갈매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그런데 이놈이 짝다리를 짚고 서 있다.

싸가지 없게. ㅋㅋ

사람이 가까이 있는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한쪽 다리를 접어 올리고 태평양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아주 여유롭다.

갈매기도 태평양에 살면 저렇게 느긋해지는 모양이다.

피어 한쪽에서는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다. 검은 모자를 쓰고 앉아 전기기타를 연주한다.

드넓은 바다와 햇빛, 기타 소리가 어우러진다.

관광지에서 만나는 이런 거리 공연은 참 좋다. 거창한 무대나 화려한 조명도 없다. 바닷가에서 기타 하나 들고 연주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파도를 따라 달리는 작은 새들

피어에서 내려다보니 모래사장과 파도 사이로 작은 새들이 돌아다닌다.

갈매기보다 훨씬 작은 놈들이다.

이놈들이 참 재미있다.

파도가 밀려오면 후다닥 육지 쪽으로 달아났다가, 파도가 다시 바다로 빠져나가면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간다.

다시 파도가 올라오면 또 후다닥 도망간다.

파도에 발이 젖을까 봐 그러는 것인지, 물이 빠진 모래사장에서 먹이를 찾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움직임이 아주 재빠르다.

파도가 오면 달아나고, 물러가면 따라가고.

몇 번이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저 작은 새들이 파도와 경주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동영상으로도 찍었다.

드넓은 태평양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지만, 해변을 쏜살같이 달려 다니는 작은 새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큰 풍경은 큰 풍경대로 좋고,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은 또 그것대로 재미있다.

산타모니카까지 걸어가려다가

베니스 비치를 구경하고 나니 산타모니카까지 걸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해안선을 따라 계속 걸으면 산타모니카로 이어진다.

지도에서 보면 걸어갈 만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날씨다.

햇빛이 엄청나게 따갑다.

그늘도 별로 없는 해변을 한참 걸었더니 더위가 만만치 않다. 오전부터 할리우드 사인과 게티센터를 돌아다녔고, 베니스 운하까지 걸었으니 체력도 제법 썼다.

시간도 많이 지났다.

에라, 오늘은 여기까지다.

산타모니카까지 걸어가려던 계획은 포기했다.

여행이라는 것이 계획한 곳을 전부 다 가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몸이 고단하면 쉬기도 하고, 시간이 부족하면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오후 4시 13분, 다시 우버를 탔다.

다음 목적지는 비버리힐스다.

6. 비버리힐스, 교통질서는 선진국인데 차는 왜 이렇게 많아

오후 4시 13분 베니스 비치 인근에서 우버에 올랐다.

기사 이름은 호반네스(Hovhannes). 비버리힐스까지 요금은 팁 10달러를 포함해 42.93달러였다.

차창 밖으로 야자수가 늘어선 주택가와 LA의 여러 거리들이 지나간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차를 타고 다니며 감탄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교통질서다.

특히 일시정지 표지판이 있는 교차로에서 운전자들이 차를 세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시정지 표지판이 있어도 슬금슬금 지나가는 차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정지선에서 차를 세우고 다른 차량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 출발한다.

사방에 일시정지 표지판이 있는 교차로에서는 먼저 도착한 차가 먼저 지나가는 원칙도 잘 지키는 편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더 인상적이다.

사람이 건너려고 하면 차가 멈춰 선다. 보행자에게 통행을 양보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 운전자들이 정말 배워야 한다.

우리나라도 도로교통법에 규정은 다 있다. 문제는 지키지 않는 운전자가 많다는 것이다.

일시정지는 정지하라는 뜻이지, 속도를 조금 줄이라는 뜻이 아니다.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의 안전이 우선이다.

이런 기본적인 교통질서를 지키는 모습을 보니 미국이 선진국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물론 미국 운전자들이 전부 잘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LA에서 우버를 타고 다니며 관찰한 모습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만했다.

우리나라에서 일시정지 위반이나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태료를 1,000달러씩 물려야 하나.

금융치료가 제일 확실한 치료라고 하지 않는가. 법을 지키지 않으면 호주머니가 아파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길에는 테슬라 사이버트럭도 보이고, 도로 옆에 전시된 커다란 프로펠러 항공기도 보였다.

항공기에는 ‘DOUGLAS’와 ‘Spirit of Santa Monica’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미국은 도로변 풍경도 참 다양하다. 평범한 상가와 주택들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오래된 항공기가 나타나고, 또 조금 지나면 고층 건물들이 늘어선다.

그런데 비버리힐스에 가까워질수록 차가 많아졌다.

아이고, 차가 왜 이렇게 많은겨.

신호를 한 번에 통과하지 못하고 몇 번씩 기다리는 구간도 있다. 좌회전 한 번 하기도 쉽지 않다.

우버 기사는 차가 덜 막히는 길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비버리힐스 일대의 정체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오후 4시 57분, 비버리힐스에 도착했다.

비버리힐스 사인과 연못

목적지는 비버리힐스 사인(Beverly Hills Sign)이 있는 비버리 가든스 공원(Beverly Gardens Park)이다.

이름만 들어도 부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비버리힐스는 1914년 시로 편입된 도시로, 이후 미국의 부유층과 영화계 인사들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역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우리가 찾은 것은 고급 주택가가 아니라 공원에 있는 비버리힐스 사인이다.

커다란 철제 구조물에 BEVERLY HILLS라는 글자가 설치되어 있고, 앞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수련이 자라고 보라색 꽃들이 피어 있다. 주변으로 나무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이 연못은 릴리 폰드(Lily Pond)라고 한다.

이곳의 연못도 비버리힐스의 초기 개발 역사와 관계가 있는 시설이다. 부동산 개발 초기, 사람들에게 이곳을 매력적인 주거지역으로 알리기 위해 조성한 경관시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부동산 개발의 역사가 등장한다.

아침에 본 할리우드 사인도 주택단지 분양 광고였는데, 비버리힐스의 상징적인 연못 역시 초기 주택지 개발과 관계가 있다.

부동산 광고와 도시개발의 흔적이 오랜 세월을 거쳐 관광명소가 되었다.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연못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것만 봐서는 비버리힐스가 왜 그렇게 유명한 부촌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로 꾸며 놓은 공원은 많이 있다.

부촌의 진면목을 보려면 고급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곳을 돌아봐야 하는데, 우리는 간판과 공원 주변만 둘러봤다.

내가 본 비버리힐스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물론 내가 그 유명한 동네를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주변에는 월리스 아넨버그 공연예술센터(Wallis Annenberg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도 있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옛 비버리힐스 우체국 건물을 활용한 문화시설이다.

옛 건물의 외관과 주변 거리 풍경도 사진에 담았다.

사진도 몇 장 찍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났다.

오후 5시 49분, 우버를 다시 불렀다.

오늘 관광은 여기까지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자.

7. 또 북창동순두부, 그리고 H마트

비버리힐스에서 코리아타운까지는 우버 블랙을 이용했다.

기사 이름은 아돌프(Adolph). 요금은 팁 13달러를 포함해 42.97달러다.

오후 5시 49분에 출발해 오후 6시 35분에 도착했으니 46분이 걸렸다.

목적지는 다시 북창동순두부다.

어제저녁에도 왔는데 오늘 또 왔다.

미국까지 와서 이틀 연속 순두부집이라니. ㅋㅋ

그렇다고 꼭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할 이유가 있나. 입에 맞고 편하면 그만이지.

오늘은 순두부찌개에 LA갈비도 주문했다.

어제는 순두부로만 저녁을 해결했지만, 오늘은 갈비까지 곁들여 제대로 한 상 먹을 생각이다.

뜨끈한 순두부찌개와 흰쌀밥, 김치와 반찬들, 그리고 갈비가 한 상 가득 놓였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먹는 저녁이니 반갑다.

아침부터 할리우드 사인에 갔다가 게티센터를 돌아보고, 베니스 운하를 산책하고, 태평양 바닷가를 걸었다. 거기에 비버리힐스까지 다녀왔으니 다리도 피곤하고 배도 고프다.

이럴 때는 역시 한국 음식이 좋다.

뜨끈한 순두부찌개에 밥을 먹고 갈비까지 뜯으니 속이 든든하다.

미국 여행에서 현지 음식을 맛보는 것도 좋지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저녁을 먹고는 숙소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H마트에 들렀다.

한국 식품을 파는 마트다.

생수도 사고 환타도 샀다.

LA에 와서 한국 식당에서 밥 먹고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본다. 한인타운이 아니었다면 이런 편리함을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숙소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위치 하나는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8. 고단했던 LA의 둘째 날

밤 9시쯤 옥스퍼드팰리스 호텔에 돌아왔다.

아, 편하다.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닌 탓에 몸이 고단하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참 여러 가지를 보고 느꼈다.

할리우드 사인에서는 화려한 영화산업의 역사와 그 이면의 비극을 생각했고, 게티센터에서는 예술과 건축, 정원이 어우러진 풍경을 즐겼다.

고흐의 《아이리스》도 좋았지만, 그림 속 아주 작은 당나귀 한 마리와 옛 베네치아의 풍경도 기억에 남는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화가들이 남긴 그림을 오늘날의 카메라로 다시 찍으며, 그림이 가진 기록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베니스 운하에서는 아름다운 주택가와 함께 탁한 물과 냄새도 경험했다.

베니스 비치에서는 드넓은 태평양을 바라보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피어 난간에 짝다리를 짚고 서 있던 갈매기, 파도를 따라 쏜살같이 달리던 작은 새들도 기억에 남는다.

비버리힐스에서는 유명한 부촌의 실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오가는 길에 본 미국의 교통질서는 인상적이었다.

여행은 유명한 관광지에 가서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고,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책이나 인터넷으로 보던 미국과 실제로 와서 겪는 미국은 다르다.

어제는 LA의 지저분한 거리에 실망했고, 오늘은 태평양의 넓은 바다에 감탄했다. 미국의 교통질서에는 감탄하면서도 스타벅스에서는 우리나라 커피가 더 낫다고 투덜거렸다.

그것이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LA다.

오늘 우버 이용 기록을 보니 모두 다섯 번 탔고, 팁을 포함해 207.76달러를 썼다. 관광지 입장료보다 이동하는 데 돈이 더 많이 드는 것 같다.

이래저래 미국 여행은 돈이 많이 든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알차게 보냈다.

내일도 돌아다니려면 이제 좀 쉬어야겠다.

이렇게 LA에서의 둘째 날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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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 이즈 미국 서부 This Is Western USA - 2027~2028년 최신판 ㅣ 디스 이즈 여행 가이드북
제이민.민고은 지음 / TERRA(테라출판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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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여행, 첫째 날(2026.9.23.)

— 대전에서 LA로, 옥스퍼드팰리스, 북창동순두부, 그리피스 천문대

1. 캐리어 세 개를 끌고, 인천공항으로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항공권은 지난해 11월에 일찌감치 예매해 두었다. 하지만 아들의 시험 일정 때문에 취소하고 다시 예매하는 소동을 겪었다. 예약을 바꾸면서 추가로 들어간 돈이 1,152,900원이다. 출발하기도 전에 백만 원이 넘는 돈이 더 들었다. 미국 땅은 밟아 보기도 전에 여행 경비부터 늘었다. 그래도 취소와 재예매를 거쳐 잡은 출발일이 드디어 왔다.

이날 출발하는 사람은 마님과 딸,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다. 아들놈은 시험 일정 때문에 일단 낙오다.

캐리어는 28인치 두 개에 25인치 하나다. 사람 셋에 큰 캐리어가 세 개니 일반 택시 한 대로는 어림없다. 정부청사 선사유적지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타고 갈 벤티를 예약했다.

그런데 기사님이 목적지로 정류장을 잘못 찍었다고 알려주셨다.

“아아, 그럼 제대로 가 주세요.”

기사님께 제대로 된 정류장으로 가 달라고 부탁드렸다. 미국 가는 길에 첫 번째로 바로잡은 것이 동네 버스정류장이다. 태평양 건너갈 사람이 집 근처 정류장부터 잘못 찍었다. 시작부터 이러니 헛웃음이 난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다. 익숙한 대전의 거리를 지나 정류장에 도착했다. 벤티 요금은 25,400원. 이제 캐리어 세 개를 버스에 싣고 인천공항으로 가면 된다.

오후 1시 15분, 중부고속 우등버스에 올랐다. 목적지는 인천공항 제2터미널이다. 세 사람의 버스 요금은 78,300원, 예상 소요 시간은 2시간 59분이었다.

고속도로에 오르니 승용차와 화물차가 길게 늘어선 구간이 보인다. 버스전용차로 옆으로 차량 행렬이 이어진다. 차창 밖을 내다보며 인천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려 바다와 갯벌이 보이고, 공항으로 들어가는 안내표지판이 나타났다. 오후 3시 56분,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대전에서 출발한 지 2시간 41분 만이다. 명절 연휴 시작 전이라 좀 밀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18분 일찍 왔다. 길에서 시간을 잡아먹을까 하던 걱정을 내려놓으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2. 면세점에서 마련한 은혼식 선물

캐리어를 끌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수속하는 곳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큰 짐들을 부치고 출국 절차를 마쳤다.

면세점에서는 은혼식 기념 선물을 샀다. 결혼한 지 25년이다. 마님에게는 목걸이, 나에게는 몽블랑 브램 스토커 만년필이다. 만년필과 함께 잉크도 마련했다.

결혼 25년이라는 숫자를 다시 생각해 본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싶다. 여행길에 은혼식 선물까지 마련하고 나니,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도 조금 특별해진다.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사고 잠시 쉬며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LA로 가는 대한항공 KE011편. 출발 예정 시각은 오후 7시 40분, 탑승구는 233번이다.

저녁이 되자 탑승구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전광판에 ‘탑승 중’이라는 안내가 뜨고, 우리도 줄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으니 앞의 화면에 ‘탑승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공항 청사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그런데 예정된 출발 시각이 지나도 비행기는 바로 떠나지 않았다. 결국 오후 8시 10분경 출발했다. 예정보다 30분쯤 지연이다.

공항까지는 예상보다 18분 일찍 왔는데, 비행기에서 다시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11월에 처음 예매했던 미국행 항공권을 취소와 재예매 끝에 이제야 쓴다.

3. 태평양을 건너

태평양을 건너 북미로 가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16년에는 2주 동안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요세미티를 찾았다. 이듬해인 2017년에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갔다. 밴쿠버와 로키산맥, 옐로나이프를 둘러본 2주간의 가족여행이었다.

미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때는 샌프란시스코, 이번에는 LA. 두 번 모두 캘리포니아로 입국한다. 미국은 서부만 오는구만.

세 번째 태평양을 건너지만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설렘은 여전하다. 출장으로 갔던 미국과 가족이 함께 가는 미국은 또 다를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풍경과 일을 만나게 될까.

기내식으로 나온 야채죽과 과일을 먹으며 태평양을 건넌다. 한참 뒤 기내 화면을 보니 도착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지도 속 비행기는 미국 서부 해안 가까이 와 있다.

창밖으로 긴 해안선이 보인다. 바다와 육지가 나뉘고, 반듯하게 구획된 땅과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낮은 주택들과 넓은 지붕의 건물들이 점점 또렷해진다. 도로를 따라 시가지가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지도에서 보던 LA가 이제 창밖에 있다. 그 넓은 도시 안으로 우리도 들어간다.

4.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냐

10시간 15분 남짓 비행한 끝에 LA 국제공항, LAX에 도착했다. 현지 시각으로 9월 23일 오후 2시 26분이다. 한국에서는 저녁에 출발했는데, 여기서는 아직 같은 날 오후다. 한국에서 시작한 하루를 미국에서 계속 보낸다.

우리는 맨 앞쪽 좌석에 앉아 있어 비행기에서 일찍 내렸다. 덕분에 입국심사도 비교적 빨리 받을 수 있었다.

마님과 딸, 나, 셋이 함께 심사대 앞으로 갔다. 한 사람씩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셋이 한꺼번에 심사를 받았다. 이렇게 같이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질문이 많다. 하나를 대답하면 또 묻고, 대답하고 나면 다시 묻는다. 얼른 통과해서 나가고 싶은데 문답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급기야 현지 여행투어를 얼마에 예약했느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예약하면서 결제야 했지만, 여러 투어의 금액을 그 자리에서 어떻게 다 기억하나.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이런, 그걸 어떻게 기억허냐.”

혼잣말로 중얼중얼하고 있는데, 심사관이 여행 잘하라며 들여보내 주었다. 그렇게 우리 셋의 입국심사가 끝났다. 질문에 답하느라 붙들려 있던 마음도 그제야 풀린다. 이제 짐을 찾고 호텔로 가면 된다.

5. 옥스퍼드팰리스, LA 여행의 전초기지

짐을 찾아 우버를 불렀다. 목적지는 한인타운에 있는 옥스퍼드팰리스 호텔. 우리 LA 여행의 전초기지다.

오후 3시 8분, 공항에서 우버 블랙 SUV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파란 하늘과 키 큰 야자수들이 보인다. 넓은 도로 위로 차들이 오가고, 영어로 적힌 도로표지판과 상점 간판들이 지나간다. 공항 밖으로 나와 길을 달리니 미국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저 야자수와 넓은 도로를 보려고 긴 비행을 견뎠나 보다.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2분. 공항에서 54분 걸렸고, 우버 요금은 116.14달러였다. 여기에 팁으로 20달러를 더 준 것 같다. 내가 미쳤지. 차비도 만만치 않은데 팁까지 떠올려 보니 첫 이동부터 돈을 제법 썼다.

호텔은 좀 구식이다. 꿉꿉한 냄새도 나고, 엘리베이터도 그렁그렁 소리를 낸다. 주변 동네까지 둘러보니 우리나라 시골 읍내 같은 분위기다. 마님에게 이런 데 숙소를 잡았느냐고 쿠사리를 먹었다. 긴 비행 끝에 도착한 숙소인데 첫인상이 이러니 나도 썩 흡족하지는 않다. 예약한 사람이 나니 달리 할 말도 없다.

그런데 지내보니 여기가 엄청나게 편리하다. 영어를 쓸 일이 없다. 파리바게뜨도 있고, 순두부집도 있고, 갈비탕집도 있다.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왔는데, 대천 시내에 나온 기분이다. 낯선 나라에서 말과 밥 걱정을 덜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는 금방 알겠다.

6. 첫 저녁은 북창동순두부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목적지는 북창동순두부다.

호텔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아직 하늘이 파랗다. 길에는 주황색 메트로 버스가 다니고, 상가에는 한글 간판들이 붙어 있다. 보석점과 전당포 간판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명동교자 주차’라는 안내판까지 나온다.

다만 거리는 깔끔하지 못했다. 길에는 쥐가 죽어 있기도 했다. 좀 거시기한 냄새가 나는 곳도 있었다. 마리화나를 피워서 나는 냄새인가 싶었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쓰레기통을 뒤져 남은 음료수를 마시는 홈리스도 보았다.

말이 통하고 먹을 것이 익숙한 편리함과는 별개로, 거리를 걸으며 받는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죽은 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쓰레기통 속 남은 음료수를 마시는 사람의 모습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파란 하늘과 야자수만 보고 좋아하기에는 발밑의 거리가 영 깔끔하지 못했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보도를 따라 마님, 딸과 함께 걸었다. 길가에는 분홍색 꽃이 핀 나무도 있다. 그렇게 북창동순두부에 도착했다. ‘BCD TOFU HOUSE’ 옆으로 ‘북창동순두부’라는 한글이 나란히 붙어 있다.

자리를 잡으니 김치와 반찬들이 놓이고, 생선도 한 마리씩 나온다. 이어 빨간 국물의 순두부찌개와 흰쌀밥이 상에 올랐다.

미국에서 먹는 한국 음식이다. 첫날부터 밥과 순두부찌개를 먹으니 좋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뜨끈한 국물과 함께 먹는다. 한인타운에 숙소를 잡은 편리함을 첫 저녁부터 누린다. 첫날부터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먼 나라까지 와서도 익숙한 밥 한 상 앞에 앉으니 마음이 놓인다.

밥을 먹고 나와 다시 우버를 불렀다. 이번 목적지는 그리피스 천문대다. LA에 도착한 첫날, 야경까지 보고 들어갈 참이다.

7. 돌아서 올라간 그리피스 천문대

오후 6시 21분, 식당 앞에서 우버에 올랐다. 시가지를 지나 천문대 쪽으로 향하는 도중에 할리우드 간판도 보았다. 산 위에 서 있는 그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화면으로 보던 할리우드 사인이 정말 저 산에 있다. 호텔과 거리를 보며 조금 시들했던 여행 기분이 다시 살아난다.

그런데 천문대로 올라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다. 처음 가던 길로 쭉 올라갔는데 앞에서 길을 막는다. 무슨 행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량을 일방통행시키고 있었다.

차를 돌려 다시 내려왔다.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 다른 길로 돌아서 천문대로 향했다. 우버 이동 지도에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동선이 남았다. 다 와 가는 줄 알았더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아, 천문대 한 번 올라가는 데도 일이 제법 생긴다.

천문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7시 3분. 식당에서 출발한 지 42분 만이다.

천문대 주변에도 사람이 무척 많았다. 건물 앞과 전망을 볼 수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하늘에는 아직 주황빛 노을이 남아 있고, 그 아래로 LA의 불빛이 펼쳐진다.

난간 쪽으로 다가가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불빛이 길게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를 건물과 집들의 불빛이 채운다. 멀리에는 높은 건물들이 모여 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도시의 윤곽이 불빛으로 드러난다.

참 넓다. 저 불빛은 대체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인가. 낮에 차를 타고 지나올 때도 넓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내려다보니 도시의 크기가 새삼스럽다. 곧게 뻗은 불빛의 줄을 따라가다가, 다시 멀리 모여 있는 높은 건물 쪽으로 눈을 돌린다. 바라볼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고개를 돌리면 돔을 얹은 천문대 건물이 있고, 하늘에는 달도 떠 있다. 노을이 남은 쪽과 이미 어두워진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노을이 사라진 뒤에도 도시의 불빛은 멀리까지 이어졌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한쪽을 보고 나면 다른 쪽이 눈에 들어오고, 하늘빛이 달라지니 조금 전 보았던 풍경도 다시 보게 된다.

올라오는 길에는 통제 때문에 한 바퀴 돌아왔고 사람도 많았지만, LA 야경은 제대로 보았다. 올라오길 잘했다. 낮에 거리에서 느꼈던 실망과는 또 다른 감탄이 나온다. LA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이 광경을 보고 있으니, 이제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8. 돌아오는 길의 ‘굿 팁’

야경은 잘 구경했는데, 이제 호텔로 돌아가는 일이 걱정이다. 버스정류장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저 많은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쯤 탈 수 있을까 싶다. 차라리 천천히 걸어 내려가 볼까 하고 정류장을 지나 아래로 향했다.

조금 내려가니 택시 한 대가 서 있다. 몸도 노곤해 옥스퍼드팰리스 호텔까지 얼마냐고 물었다. 45달러를 달란다.

‘드럽게 비싸게 받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이미 타는 쪽으로 기울었다.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계속 걸어 내려가기도 고단하다. 이럴 때는 돈 아끼겠다는 마음보다 얼른 들어가 쉬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다.

“그류, 갑시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도착해서 내릴 때가 되니 기사가 자꾸 말한다.

“굿 팁, 굿 팁.”

노골적으로 팁을 달라는 소리다. 45달러도 비싸다고 생각하며 탔는데, 내릴 때까지 이 소리를 들어야 하나. 피곤한 참에 슬슬 짜증이 난다.

“굿 팁?”

되물으니 돌아오는 대답도 같다.

“오, 굿 팁.”

에라, 5달러를 더 주었다. 택시비 45달러에 팁 5달러, 돌아오는 데 모두 50달러가 들었다.

호텔에 돌아오니 밤 9시 30분쯤 되었다. 몸이 고단했던 것은 분명하다. 대전에서 큰 캐리어를 끌고 나와 인천공항으로 가고, 태평양을 건너 LA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천문대 야경까지 보고 왔다.

꿉꿉한 호텔에 실망하고, 거리에서 눈살을 찌푸리고, 순두부찌개 한 상에 반가워하다가, 천문대에서는 야경에 감탄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비와 팁으로 또 한 번 투덜거렸다. 하루 동안 기분도 여러 번 오르내렸다.

아, 고단한 하루였다.

이렇게 LA에서의 첫날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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