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광장은 내전의 참상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다. 1938년 1월 30일 프랑코의 공군이 바르셀로나를 폭격했을 때 민간인 마흔두 명이 거기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이 마드리드에서 피란 온 어린이였다. 광장과 성당 외벽에 포탄이 터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프랑코 추종자들은 아나키스트 집단이 성당 신부들을 총살한 흔적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렸지만,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속지 않았다.

이사벨 1세는 보석과 왕관을 팔아가면서까지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았던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투자했고 2차 항해 때는 더 큰돈을 썼다. 안달루시아 서부의 항구에서 1차 원정을 떠났던 콜럼버스는 ‘왕의 광장’에서 여왕을 알현하고 1차 항해 결과와 2차 항해 계획을 보고했다.

‘왕의 광장’은 또한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의 국가 범죄 현장이었다. 이사벨-페르난도 공동왕이 레콩키스타를 완료한 후 유대인과 무슬림을 쫓아낸 경위는 마드리드 편에서 살펴보았으니 여기서는 종교재판에 대해서만 짚어보겠다.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스페인 종교재판의 야만성이 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엄밀하게 보면 그것은 종교재판이 아니라 세속 권력의 비호를 받은 악당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한 조직범죄였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종교에도 명암이 있다. 종교는 삶의 도덕적 기초를 제공하며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이타 행동을 격려한다. 그러나 종교는 또한 사람의 생각을 옭아매어 권력자가 민중을 착취하는 도구로 쓰인다.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증오하고 죽이도록 부추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 집단에 종교가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종교 없이도 우리가 도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신앙심 없이도 이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구원이나 다음 생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도 삶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몬주익은 ‘산(mont)’과 ‘유대인(juic)’을 합친 말이다. 1992년 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가 언덕 오르막에서 치고 나와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 몬주익은 유대인 묘지가 있는 도시 바깥의 바위 언덕이었는데 엑샴쁠레지구가 생긴 뒤 고딕지구와 이어졌다.

나이 든 여자들이 표를 살 때는 계산대 모니터에 입장료 7유로가 찍혔는데 내가 살 때는 15유로가 떴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젊은 여자 직원이 눈치를 챘는지 말을 건넸다. "님, 65살 넘었음?" "아하, 경로 우대! 내년에 다시 와야겠네." "정말? 64로는 안 보이는 걸." 계산대 모니터에 37유로가 찍혔다. 동행한 여인 둘은 각각 15유로, 나는 7유로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쨌든 깎아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감사요." "별 말씀을!"

피카소는 자유분방하고 정력적인 스타 예술가로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떠들썩한 가십을 생산한 반면 미로는 조용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창작에 집중했다. 두 예술가의 작품은 스릴러 소설과 동화만큼이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피카소의 그림은 강렬한 호오(好惡)의 감정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미로의 작품은 편안하게 보는 이의 직관에 다가선다.

19세기 후반 모더니즘부터 1960년대의 낙관주의 작품까지 까딸루냐 미술 대표 작품들을 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가우디·피카소·미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가 아니야. 그들의 예술은 까딸루냐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핀 꽃이라고.’

까딸루냐 미술관 바로 아래편에 ‘몬주익 마법의 분수’가 있다. 1929년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만든 분수는 어둠이 깔린 직후 클래식 음악과 조명과 물줄기가 어우러지는 쇼를 한다. 관람객이 많아서 키 작은 동양인은 애로사항이 있기 때문에 까딸루냐 미술관 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큰길에 늘어선 분수들을 배경에 두고 보아도 나쁘지 않으며, 쇼를 본 다음 가까운 ‘스페인 마을’에서 저녁밥을 먹으면 편리하다. ‘스페인 마을’은 스페인 여러 지역의 대표 건축물을 실제 크기로 만든 테마파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색종이를 들고 일어나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도 영문도 모른 채 일어섰다. 맞은편 관중석을 보니 카드섹션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 바르셀로나 구시가를 탐사하면서 알았다. 바르사 팬들은 경기 시작 17분 14초에 이벤트를 한다. 왜 하필 17분 14초인가? 앞에서 말했지 않은가. 1714년 바르셀로나 공방전의 참혹한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까딸루냐 독립운동이 최고조에 올랐던 2017년에는 ‘independencia(독립)!’이라는 구호를 외쳤다는데, 우리가 갔던 날 관중들이 뭐라고 소리 질렀는지는 모른다. 까딸루냐를 힘으로 정복하고 민족 지도자를 학살했던 일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는 구호였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팀 경기에도 늘 하는 이벤트라서 레알 팬들도 문제 삼지는 않는다고 한다.

스포츠가 전쟁 대용이라는 말이 있는데 축구가 특히 그런 것 같다. 축구는 격렬한 신체 접촉을 동반하는 단체 경기다. 손과 팔을 제외한 몸 전체를 쓰고 어깨싸움을 관대하게 용납한다. 물리적인 힘과 스피드가 경기의 흐름을 좌우하며, 적절한 전술과 선수들의 협동력으로 팀의 잠재 능력을 최대로 발현하면 더 강한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다. 전쟁과 가장 비슷한 스포츠여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게 아닌가 싶다.

호전성을 부추긴다고 스포츠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전쟁보다는 스포츠가 낫다. 그날 바르사가 홈에서 졌지만 죽거나 다친 이는 없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흩어졌던 바르사 팬들은 마음에 복수의 칼날을 품었을 뿐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오늘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스포츠는 전쟁보다 훌륭하다. 바르사가 레알을 이기는 것으로 마드리드의 왕이 1714년 바르셀로나에서 저질렀던 대학살에 대한 복수심을 충족한다는 것, 이 얼마나 평화로운 해법인가.

요즘은 서울 거리에서 외국인 여행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경복궁 근처에는 한복을 입고 무리지어 다닌다. 북촌 한옥마을 골목에서는 한국 사람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남산-숭례문-독립문-인왕산-북악산-혜화동-낙산-동대문-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안이 모두 북촌이나 인사동 같은 형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보라. 바르셀로나 구시가는 그런 곳이다. 옛길이 그대로 있고 사람들은 옛집을 고쳐가며 산다. 코엑스가 있는 강남과 여의도는 신시가지 엑샴쁠레에 해당한다. 사대문 밖의 마포·영등포·연신내·청량리 같은 곳을 그라씨아지구로 보면 된다. 바르셀로나는 서울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데 구조는 비슷한 데가 있다는 말이다.

서울이 경복궁에서 홍대를 거쳐 코엑스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시라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매력적이겠는가. 바르셀로나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구엘 공원에서 그라씨아와 엑샴쁠레와 고딕지구를 거쳐 바르셀로네따 해변까지 걸으면 로마 시대부터 서고트 왕국과 무슬림 왕조를 거쳐 스페인 왕국과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까지 모든 시대의 역사를 품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현지인은 현지인대로 여행자는 여행자대로 자신이 선택한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머무를 수 있다. 몇몇 관광 ‘핫 스폿’을 제외하면 어디서나 현지인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움직인다.

리스본 시내 어디서든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면 초록빛 가파른 비탈 위로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 비슷한 조형물이 보인다. 폼발 후작의 동상이다. 어째서 왕도 아닌 일개 후작의 동상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을까?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지금 모습으로 되살린 사람이라서다. 우리는 리스본 여행을 거기서 시작했다

1755년 11월 1일 가톨릭 만성절(萬聖節) 오전 시간이었다. 신실한 교인들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지진은 왕궁과 귀족 저택부터 대성당과 수녀원까지 성과 속을 가리지 않고 땅 위에 선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예나 지금이나 리스본의 중심은 대서양에 합류하는 타구스(Tagus) 강변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평지 바이샤(Baixa)지구다

당시 기록을 근거로 추정하면 리히터 규모 9가 넘는, 지형 변화를 일으키는 수준의 초강력 지진이었다. 리스본은 언덕과 비탈이 많아 피해가 더 커졌다. 첫 본진이 5분 동안 땅을 흔드는 동안 바이샤의 건물이 대부분 무너졌고 좌우 비탈의 집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건물만 무너진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강변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물이 빠진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지진해일의 전조 현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사람과 선박과 무너진 궁전의 잔해를 쓸어갔고, 바닷물이 닿지 않은 곳은 무너진 주택의 화로에서 번져 나온 불길이 집어삼켰다

건물만 무너진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강변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물이 빠진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지진해일의 전조 현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사람과 선박과 무너진 궁전의 잔해를 쓸어갔고, 바닷물이 닿지 않은 곳은 무너진 주택의 화로에서 번져 나온 불길이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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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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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6년 스페인에 갔다. 처음부터 거창한 혁명가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총을 들었다.

바르셀로나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본 것은 이전에 알던 유럽의 도시와 달랐다. 노동자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고, 계급을 드러내던 옷차림과 호칭이 사라져 있었다. 상점과 호텔에는 노동자 조직의 깃발이 걸렸고, 사람들은 적어도 잠시 동안은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아라곤 전선에서 싸웠다. 총은 낡았고 탄약은 부족했으며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엉성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서로를 계급으로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파시스트와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편끼리 서로를 의심했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POUM이 서로를 적으로 몰았다. 어제까지 함께 싸우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었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사실이 바뀌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다. 진실도 함께 희생된다.

내가 카탈루냐에서 보고 기억한 것은 단순히 ‘카탈루냐 사람들이 독립을 원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꿈꾸었고, 그 꿈이 권력투쟁과 선전 속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카탈루냐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들이 언제나 옳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서 인간이 무엇을 꿈꾸었고, 정치가 그 꿈을 어떻게 뒤틀 수 있는지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지워서는 안 된다.

누군가 과거를 마음대로 고쳐 쓰기 시작하는 순간, 오늘의 진실도 함께 위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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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너그럽게 이민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북아프리카와 중남미에서 온 노동자를 흔히 볼 수 있다

날씨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좋았다. 밤은 춥지 않았고 낮은 덥지 않았다. 하늘은 바다만큼 푸르렀고 바다는 하늘처럼 고요했다.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마드리드를 잊었다. 스페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시내 북서쪽 카르멜 언덕의 구엘 공원(Parc Güell)에서 바르셀로나 탐사를 시작했다. 언덕 바로 아래 그라씨아(Gràcia)지구를 구경하면서 엑샴쁠레지구로 내려와 사그라다를 비롯한 명소를 본 다음 중세와 로마 시대를 품은 고딕지구와 라발지구를 거쳐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남동쪽 해변까지 걸어서 갈 생각이었다

비탈진 도시에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가는 게 체력 소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G가 그 계획에 맞추어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 입장권을 예매했다. 바르셀로나를 하루에 본다면 이렇게 다니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바르셀로나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이 일곱 개 있는데,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가 제일 유명하고 방문객도 많다.

건축학을 전공한 G의 설명 덕분에 가우디가 토목공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카르멜 언덕은 서울 남산처럼 도시 한가운데 있다. 그런데 왜 택지 분양에 실패했을까?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가 부자들의 교통수단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언덕 바로 아래 그라씨아지구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엑샴쁠레지구는 건설 중이었다. 시민들의 생활공간은 까딸루냐 광장과 해변 사이의 구시가지에 있었다. 카르멜 언덕은 아직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간 입구는 1992년 올림픽 때 관광객을 받으려고 언덕 중턱에 새로 만든 것이고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현관 앞 출구가 원래의 주택단지 입구였다는 사실을 모르면 가우디가 무슨 일을 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현관 위 전망대의 평면과 아래의 공간도 같은 방식으로 창조했다. 관람객들은 전망대에서 도시의 원경에 취해 시간을 보내다가 발아래 얼마나 대단한 공간이 있는지 모른 채 바삐 현관 분수대를 거쳐 출구로 간다. 그리스 스타일의 돌기둥들이 전망대를 떠받치면서 빗물을 내부의 좁은 통로에 끌어들여 지하 저수조로 보낸다. 저수조 수위가 높아지면 현관 중앙의 타일 조각으로 장식한 도마뱀이 입으로 물을 내뿜는다. 돌기둥 사이에 서니 파르테논 신전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이스탄불의 ‘예레바탄 사라이(지하 궁전)’가 떠올랐다.

건축은 물리학과 예술을 아우른다. 건축가는 예술적 영감과 미학적 자유를 추구하지만, 정역학(靜力學)의 원리를 철저히 따라야만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다. 구엘 공원은 예술가 가우디와 엔지니어 가우디를 다 보여주었다. 그는 사그라다를 지을 때 적용할 여러 예술적 아이디어를 주택단지 토목공사와 현관 건축에서 먼저 실험했다. 그렇지만 구엘 공원을 지배하는 것은 미학이 아니라 역학이었다. 예술가 가우디는 여러 군데에서 만났지만, 엔지니어 가우디를 뚜렷하게 본 것은 그곳뿐이었다

엑샴쁠레는 신시가지를 가리키는 까딸루냐 말이다. 19세기 후반까지 고딕지구는 건물이 빼곡했고 그라씨아는 듬성듬성 집이 있었다. 까딸루냐 산업혁명이 일어나 인구가 급증하자 시정부는 직선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두 지구 사이의 빈 땅을 특이한 방식으로 개발했다

엑샴쁠레는 구엘 공원과 마찬가지로 마차 시대에 만들었기 때문에 마부와 보행자의 시야를 넓혀 사고를 예방하려고 교차로를 낀 건물의 모서리를 깎게 했다.

고딕지구를 빠져나오면 콜럼버스 기념탑 너머로 몬주익 언덕이 보인다. 몬주익 언덕에는 볼 것과 놀 것이 많다. 시내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출발점인 에스빠냐 광장, 밤마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마법의 분수, 스페인 여러 지역의 대표 건축물을 모아둔 스페인 마을, 미로 미술관, 까딸루냐 미술관, 깜 노우 경기장 보수공사 때문에 FC 바르셀로나가 임시 홈구장으로 쓰는 올림픽 스타디움, 꼭대기의 성과 전망대 등이다. 그 모두를 보려면 하루를 다 써도 부족하다.

『유럽도시기행』 1권과 2권의 도시를 다닐 때 이스탄불 말고는 가이드를 고용한 적이 없었다. 유능한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이 두 배 즐거워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여러 건축가가 참여해 속도를 올렸으며 컴퓨터를 이용해 세부 설계를 하고 석재를 가공하게 된 이후 속도가 빨라졌다. 전체 완공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중앙탑 공사가 마무리되어 2026년 6월 가우디 사망 100주년에 맞춰 축복식과 공식 개관 행사를 열었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현장에 살다시피 하면서 미사는 고딕지구의 작고 오래된 성당에서 보았는데, 1926년 6월 7일 그 성당에 가다가 노면전차에 치였다. 운전사는 옷차림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방치했고 택시 기사는 승차를 거부했으며 병원은 진료를 기피했다. 공공 구빈 병원으로 옮긴 다음에야 의료진이 신원을 확인하고 친지들에게 연락했다. 가우디는 큰 병원으로 옮기자는 권유를 거절하고 그 병원에 머물다가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수많은 시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가우디의 관은 사그라다 지하에 놓였다.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처럼 뒤꿈치를 들고 걷게 하지도 않았다. 나는 두려움도 경건함도 느끼지 않았다. 내게 사그라다는 ‘건축으로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의 최고 수준’이었을 뿐이다. 가우디 자신은 심오한 종교적 감정과 예술적 열정을 다 표현했겠지만, 나는 예술적 열정만 받아들였다.

최후의 만찬부터 골고다 언덕 행진을 거쳐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재현한 ‘수난의 파사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중심인데 수비라치가 가우디의 얼굴을 넣은 탓에 또 논란이 일었다.

바다와 하늘이 나눠지지 않아서 배가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바르셀로나가 바다를 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그라다에서 본 지중해가 사그라다보다 나는 더 좋았다

바다와 하늘이 나눠지지 않아서 배가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바르셀로나가 바다를 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그라다에서 본 지중해가 사그라다보다 나는 더 좋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처형당한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만은 예외였다. 프랑코는 프랑스에서 독일군에 붙잡힌 그를 데려와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반란 혐의로 몬주익성에서 총살했다. 쿰빠니스는 총살을 당할 때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하고 앞을 보며 외쳤다. ‘까딸루냐를 위하여!’

조형물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민중의 소망을 이루어준 리더도 귀하지만 현실에서 패배한 리더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민중은 그보다 더 귀하다. 민주사회의 주권자한테는 목숨 바쳐 충성한 공무원을 보듬을 책임이 있다.’ 백범 선생과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선생을 떠올렸다. 백범은 민족의 분단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남북을 오가면서 분투했으나 현실 정치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고 암살당했다. 장준하 또한 가슴에 품은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타살 정황이 뚜렷한 의문사로 삶을 마감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로서 이룬 것이 없었다. 민중에게 무엇인가 베풀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았다. 많은 시민이 지금도 존경한다. 전쟁의 폐허뿐이었던 대한민국을 풍요로운 민주사회로 발전시킨 동력은 유능한 리더가 아니라 실패한 리더까지도 기억하고 보듬는 국민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시떠델러 공원을 지나 바르셀로나의 가장 오래된 구역인 보른지구의 역사문화센터(El Born Centre de Cultura i MemÒria) 고고학 발굴 현장을 잠깐 살핀 다음 고딕지구로 향했다. 사그라다를 보았으니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건너뛰었다. 한 도시에서 성당이나 교회를 하나만 본다는 나만의 규칙을 지켰다. 그렇지만 ‘바다의 성모 성당(Basilica de Santa Maria del Mar)’은 예외로 했다. 14세기 지배자와 귀족과 부자들이 고딕지구 한복판에 대성당을 지었던 시기에 바르셀로나의 가난한 어부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바다 가까운 곳에 자기네 성당을 세웠다.

까딸루냐 민중은 9월 11일을 ‘그날(la Diada)’이라고 하며 지금까지 국경일로 삼고 있다.

2017년 실시한 주민투표에서는 투표자 대부분이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고 주의회는 까딸루냐 공화국 창립을 선포했다. 스페인 정부가 주의회를 해산하고 주요 인사를 반역 혐의로 기소해 무위로 끝나기는 했지만 시민들은 각급 선거에서 분리주의 성향의 정당에 더 많은 표를 주는 방식으로 독립 의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까딸루냐의 독립을 허용하면 갈리시아와 바스끄 등 다른 주들도 독립하려 할지 모르기 때문에 스페인 정부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음식과 축구 말고는 스페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없다고 한 마드리드 가이드 E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스페인은 아직 망각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

시위대는 스타벅스 매장 앞을 지날 때 특히 큰 함성을 지르면서 ‘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지중해 건너편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연대감을 표현하려고 거리에 나온 시민이 그렇게 많다는 게 놀라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에 섞여 걷는 동안 밤이 깊었다. 까딸루냐 광장 근처는 큰길과 골목 모두 사람으로 넘쳤다. 식당 피크타임인 아홉 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바르셀로나는 스테이크지!’ 다른 도시의 다른 식당에서도 먹어보았지만, 내 취향으로는 60일 숙성 갈리시아 안심구이가 최고였다.

첫날 2만 보 넘게 걸었고 돌아오는 길에 시위 구경을 하느라 평소 기준으로는 매우 늦게, 그러나 바르셀로나 기준으로는 제때 저녁밥을 먹었다. 까딸루냐 광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의 예약을 받지 않는 ‘동네 맛집’에 20분 넘게 줄을 서 기다렸다.

세 번째는 돼지 다리를 염장 건조한 하몬(jamÓn)이다. 한글로 하몬이라 쓰지만 실제 소리는 하몬과 카몬의 중간쯤 된다. 전용 칼로 얇게 저며 접시에 담아낸 하몬은 빵에 올리거나 멜론을 싸도 괜찮았지만 그 자체로 먹는 게 더 좋았다.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서 손이 가지 않았던 하몬을 마음껏 즐겼다. 굳이 도토리를 먹인 흑돼지 하몬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스페인 하몬 생산량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최고급은 값이 보통 하몬의 몇십 배나 된다. 사료를 먹여서 기른 백돼지의 뒷다리로 만든 하몬도 충분히 맛있다.

넓은 도자기 접시에 종잇장처럼 저민 생아귀 살을 펼쳐 놓은 ‘생아귀 쎄비체’는 기대한 것보다 더 훌륭했다. 그런데 양이 너무 적어서 화가 났다. ‘돈을 더 받더라도 배불리 먹을 만큼 줘야지!’ 서울에 돌아와 분을 풀려고 직접 만들었다

‘읽는 것은 마음이 되고 먹는 것은 몸이 된다.’ 나는 이야기와 음식을 다 좋아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더 즐겁다. 유럽 도시를 여행하면서 나는 길과 건축물과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그곳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을 먹는다. 아내와 함께, 여행 친구와 함께한다. 어떤 이는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또는 ‘자아를 찾으려고’ 여행을 한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게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친밀한 사람과 함께하면 두 배 즐겁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좌우에 직립한 집들을 밀쳐내면서 푸른빛이 골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다가 덮쳐온 것 같아서 숨을 멈추고 위를 보았다.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었다. 지중해의 하늘!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말을 잃은 우리에게 G가 말했다. ‘늦은 오후에는 석양이 들어와요.’

고딕지구의 낡은 집 한 채로 문을 열었던 피카소 미술관은 집 다섯 채를 연결한 전시 공간으로 성장했다. 피카소는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만년에는 남프랑스 소도시 앙띠브에서 살았다. 그래서 말라가·파리·앙띠브에 모두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바르셀로나는 청소년기에 몇 해 정도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피카소를 대표하는 전시공간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미술관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소장한 작품의 수량이 많아서가 아니라어린 시절 습작을 포함해 예술가 피카소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미술관이라서다.

왜 그런 미술관이 바르셀로나에 생겼을까? 피카소의 친구이고 비서였던 바르셀로나 태생 시인 하우메 사바르테스(Jaume Sabartés, 1881~1968)가 한 일이다. 그는 프랑코가 피카소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1963년 자신의 이름으로 피카소 작품 컬렉션을 선보였다. 피카소는 나중 보관하고 있던 작품을 기증함으로써 사바르테스의 기획을 승인했다. 그저 친구가 하는 일이라서가 아니다. 피카소는 자신이 화가로 태어난 곳이 바르셀로나라고 생각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회화는 자연을 모사하는 일이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작업이지.’ 나 같은 사람은 어떤 대상을 모사하는 일만 잘해도 만족한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렇지 않았다. 자연을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일렁이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대상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존재하지 않았던 시각적 질서를 창조해 경험적 인식이 만든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현상 너머에 놓인 대상의 본질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에 변화를 일으켰다. 괜히 천재 예술가라고 하는 게 아니다.

피카소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전통적인 미술 형식과 작별했고, 시대 상황이 달라지거나 삶이 곡절을 겪을 때마다 화풍을 크게 바꾸었다. 대작을 여럿 보유한 파리의 미술관이나 만년에 그린 소품을 주로 전시하는 앙띠브의 미술관에서는 그런 변화를 볼 수 없었는데 바르셀로나의 미술관은 달랐다. 예술가 피카소와 인간 피카소를 다 만날 수 있었다.

<과학과 자비>는 당대의 기독교인이, 권력자가, 문화계 권위자가 좋아했을 그림이다. 힘없이 누운 여인은 인간, 맥박을 재는 의사는 과학, 환자의 아이를 안은 수녀는 신의 자비를 상징한다. 그림의 분위기는 신의 자비 쪽에 무게를 싣는다

<과학과 자비>는 당대의 기독교인이, 권력자가, 문화계 권위자가 좋아했을 그림이다. 힘없이 누운 여인은 인간, 맥박을 재는 의사는 과학, 환자의 아이를 안은 수녀는 신의 자비를 상징한다. 그림의 분위기는 신의 자비 쪽에 무게를 싣는다.

둘째는 옥상에 커다란 성모상을 세우려 한 것이다. 가우디가 고집을 꺾지 않자 건축주가 소송을 냈다. 주택은 교회가 아니다. 인간의 삶에는 성(聖)과 속(俗)이 다 필요하다. 그 둘을 섞으면 안 된다.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이 결합하면 세상은 무서운 곳으로 변한다. 일상의 생활공간을 종교 율법이 침범하면 자유는 질식한다. 건축주만 건축가의 철학과 신념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도 건축주의 취향과 가치관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다. 결국 가우디는 패소해 성모상을 올리지 못했다.

관광산업에 초점을 두고 보면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피카소와 미로도 한몫하지만, 가우디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가우디도 자연을 당하지는 못한다. 까사 밀라가 문을 닫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몬주익 언덕 오른편 하늘에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조그맣게 붉은색이 나타나더니 점차 번져 남쪽 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옥상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말을 멈추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나도 모든 것을 잊고 노을을 보았다. 가우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예술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산 펠립 네리 광장은 두 가지 이유로 명소가 되었다. 첫째, 가우디가 바로크 스타일의 그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전차에 치였다. 성당 외벽 앞에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구엘 공원에서 시작한 ‘가우디 워킹 투어’를 거기서 마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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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의 숲은 중세 왕의 정원이거나 사냥터인 경우가 많은데 레티로 공원도 그렇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일상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가벼운 차림으로 뛰는 젊은이, 유모차를 미는 커플, 손자와 산책하는 노인, 뱃놀이하는 연인, 버스커, 저글러, 여느 도시의 공원과 다를 게 없었다.

공원을 나오면서 상상해 보았다. ‘똘레도를 떠다가 여기에 심으면 어떨까? 마드리드가 온전한 역사 도시가 되겠지.’

아토차역까지 5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랑비아역에서 메트로 1호선을 타고 네 정거장만 가면 아토차역 길 건너 예술역이었다. 길 찾기 앱을 무작정 따라갔다가 시간과 돈을 허비한 것이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면서 앱을 써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유럽 도시에서는 이동 시간 계산을 할 때도 길 찾기 앱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말아야 한다. 일찍 나서지 않았다면 보안 검사 시간 때문에 그날 바르셀로나행 기차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스페인은 한국만큼 대중교통이 편리하지 않다. 마드리드 시내 전철은 노선마다 요금 체계가 달랐고 환승 요금 할인도 없었다. 인터시티 열차도 그랬다. 2022년 서비스를 시작한 민간 고속철도회사(iryo)는 국영 철도회사(renfe)보다 요금이 약간 싸고 서비스가 좋다.

마드리드에 다시 간다면 뭘 할지 생각해 보았더니 세 가지가 떠올랐다. 미술관 감상, 똘레도 소풍, 플라멩코·재즈 공연이다. 미술관을 딱 한 곳만 볼 수 있다면 어디가 좋을까? 대가들의 작품을 최대한 넓게 감상하려면 TB가 좋겠지만 스페인 미술을 깊이 있게 보고 싶다면 프라도가 최선이다. TB와 비슷한 미술관은 다른 곳에도 있지만 프라도는 그렇지 않다. 프라도에는 마드리드에 가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작품이 많다.

마드리드가 어떤 도시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스페인의 수도이지만 제일 잘사는 도시도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도시 또한 아니다. 하지만 이 도시가 무엇을 바라면서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지는 분명했다.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수호했던 정치인의 이름을 국제공항에 걸었다. 폭력이 난무한 시대에 인간의 이성을 깨웠던 예술가를 잊지 않았다. 실패했지만 옳은 길을 가려 했던 지도자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제국의 영광이 사라진 광장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사랑을 나누는, 먹고 마시며 늦은 밤까지 함께 웃는 삶의 터전으로 바꾸었다. 죽은 왕들의 권위를 과시하는 왕궁보다 벨라스케스와 고야 같은 예술가를 품은 미술관을 더 높이 자랑한다. 한국 여행사들이 스페인·포르투갈 관광 일정에 마드리드를 스치고 지나가듯 끼워 넣은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마드리드는 깊게 들여다보아야 멋을 알 수 있는 도시다.

까딸루냐의 주도(州都)인 바르셀로나는 중세 아라곤 왕국의 수도였으나 이사벨-페르난도 공동왕의 스페인 왕국 창설 이후 줄곧 마드리드에 억눌렸고 때로는 짓밟혔다.

무역의 중심지였고 근대 스페인 산업화를 주도했으며 제일 잘 사는 지역인 까딸루냐 주민들은 이런 역사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까딸루냐 말을 제1 공용어로 쓴다. ‘스페인 국민’이기에 앞서 ‘까딸루냐 시민’임을 자처한다.

카를로스 1세 왕이 국가의 통합에 기여한 공으로 작위를 내렸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스페인의 정치인이기에 앞서 까딸루냐의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바르셀로나시는 2019년 따라데야스의 이름을 공항에 넣음으로써 ‘스페인의 도시’이기에 앞서 ‘까딸루냐의 수도’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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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EOS 60D 활용가이드 - 매뉴얼도 알려주지 않는
니콜 S.영 지음, 공민희 옮김, 윤우석 감수 / 멘토르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독서사진에세이]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와 함께한 나의 첫 DSLR
― 아이들의 성장과 남도 답사, 그리고 첫 해외여행까지


필름카메라와 작은 디지털카메라들을 거쳐 처음으로 큰맘 먹고 장만한 DSLR. 아이들과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따라 남도를 답사했으며, 마흔을 넘겨 처음 떠난 해외여행까지 함께했다. 지금 옛 사진을 다시 보면 촬영 장소가 어디였는지 한참 기억을 더듬어야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EOS 60D에는 우리 가족의 한 시절과 내가 여행하고 답사하는 방식을 만들어가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들어가며 ― 필름카메라에서 DSLR까지

내 카메라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처음에는 삼성 필름카메라가 있었다. 정확한 모델명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많이 찍었다.

지금처럼 셔터를 누르고 곧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필름 한 통을 다 찍어 사진관에 맡기고, 현상과 인화를 거쳐 사진을 받아봐야 제대로 찍혔는지 알 수 있었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필름값과 현상비, 인화비가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디지털카메라의 시대가 찾아왔다.

Canon PowerShot A70도 한동안 사용했다. 기억으로는 이 카메라를 가족사진용으로 샀다기보다 사무실에서 공사현장에 가지고 다니며 현장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마련했던 것 같다. 공사현장을 다니다 보면 글과 도면만으로는 남길 수 없는 그 순간의 상태를 사진으로 기록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아이들이 정말 똥강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많이 담아준 카메라 가운데 하나는 Sony Cyber-shot DSC-W1이었다. 지금 그 시절 사진을 들여다보면 몇백만 화소였는지, 렌즈가 어떠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조그만 아이들의 얼굴과 몸짓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돌이켜보면 내게 카메라는 일찍부터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족의 시간을 남기는 도구이자, 내가 직접 본 현장을 기록하는 도구였다.

2008년 11월에는 Canon DIGITAL IXUS 870 IS도 구입했다. 작고 가벼워 어디든 들고 다니기 편한 컴팩트 디지털카메라였다.

그 사이 잠깐 캠코더에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인 2003년 무렵이었다. 아이가 생기면 동영상도 많이 찍게 될 것 같아 당시 형편에는 조금 무리해서 캠코더를 할부로 샀다.

그런데 캠코더를 사 온 바로 그날 새벽이었다.

아내가 새로 산 캠코더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았다. 당시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그 물건에 들어간 돈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결국 캠코더를 반품했다.

지금 생각하면 반납하길 잘했다. 이후 디지털카메라가 사진뿐 아니라 동영상 촬영까지 상당 부분 해결해 주었고, 나중에는 스마트폰까지 그 역할을 떠맡았다. 내 캠코더 생활은 사 온 날 새벽에 사실상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크게 아쉬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메라에 대한 욕심은 끝나지 않았다.

2010년 11월.

나는 큰맘을 먹고 Canon EOS 60D를 장만했다.


1. 내 손을 거쳐 간 카메라들

돌이켜보면 내 손을 거쳐 간 카메라가 제법 많다.

삼성 필름카메라로 아내와의 연애시절을 찍었고, Canon PowerShot A70으로는 공사현장의 모습을 기록했다. Sony Cyber-shot DSC-W1은 똥강아지 같던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많이 남겨주었고, Canon DIGITAL IXUS 870 IS는 가족의 일상을 부담 없이 담아주었다.

그리고 2010년 11월 EOS 60D를 구입하면서 작은 디지털카메라에서 본격적인 렌즈교환식 DSLR로 넘어갔다.

그 뒤 공사현장에서 좀 더 작고 간편하게 사용할 카메라로 Sony Cyber-shot DSC-RX100 II도 마련했다. 작은 몸집에 비해 화질이 좋았고 활용도도 높아 지금도 참 잘 만든 카메라로 기억한다. 이 카메라는 나중에 딸에게 넘겨주었다.

2016년에는 EOS 5D Mark IV, 이른바 오막포를 샀다.

그때부터 내 카메라의 무대는 국내 가족여행과 답사를 넘어 캐나다와 미국, 일본과 중국 등 더 넓은 세계로 본격적으로 확장되었다.

작은 카메라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지 2021년에는 Sony Cyber-shot DSC-RX100 VII도 다시 샀다.

2024년 6월에는 DSLR에서 미러리스로 넘어가 EOS R6 Mark II를 장만했고, 2026년 3월에는 다시 EOS R6 Mark III로 바꾸었다.

정리하면 내 카메라의 시간은 대략 이렇게 흘렀다.

삼성 필름카메라
→ Canon PowerShot A70
→ Sony Cyber-shot DSC-W1
→ Canon DIGITAL IXUS 870 IS
→ Canon EOS 60D
→ Sony Cyber-shot DSC-RX100 II
→ Canon EOS 5D Mark IV
→ Sony Cyber-shot DSC-RX100 VII
→ Canon EOS R6 Mark II
→ Canon EOS R6 Mark III

정확한 구입 시점이 희미해진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도 있지만, 지금 옛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면 기종보다 더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그 카메라를 사용하던 시절의 내 삶이다.

그리고 그 변천사에서 EOS 60D는 꽤 중요한 자리에 서 있다.

60D부터 사진의 범위가 가족의 일상에서 여행과 답사의 기록으로 본격적으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2. 처음 손에 넣은 본격 DSLR

작은 디지털카메라들을 사용하다 EOS 60D를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느낌은 지금도 남아 있다.

크고 묵직한 몸체부터 달랐다.

렌즈를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것도 새로웠고, 셔터를 누를 때 들리는 소리부터 작은 디지털카메라와는 전혀 달랐다.

당시 내 눈에는 거의 신의 병기였다.

아이들을 찍어도 사진이 달라 보였다.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찍던 사진보다 피사체가 훨씬 또렷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고, 배경이 부드럽게 흐려지는 사진을 보면서 DSLR이라는 물건의 매력을 처음 제대로 느꼈다.

카메라를 사고 나서는 렌즈에도 욕심이 생겼다.

지금도 15년이 훌쩍 넘은 당시의 렌즈 구매 메모가 남아 있다.

시그마 18-250mm, 탐론 18-270mm, 캐논 EF-S 18-200mm 등 여러 렌즈를 적어놓고 무게와 가격까지 비교해 놓았다. 1번 시그마 렌즈에는 동그라미를 치고 ‘구입’이라고까지 적어놓았지만 실제로 구입한 것은 그 렌즈가 아니었다.

실제로 산 것은 메모의 4번에 적혀 있던 Tamron AF 28-300mm XR Di VC 계열의 고배율 줌렌즈였다.

이 렌즈는 훗날 DSLR을 쓰는 막내 동생에게 넘겨주었다.

지금 그 메모를 다시 보면 15년이 넘도록 크게 달라지지 않은 내 여행사진의 습관도 보인다.

당시에도 여러 렌즈를 갈아 끼우기보다 광각에서 망원까지 한 렌즈로 해결할 수 있는 28-300mm를 골랐다. 여행에서는 사진 한 장을 위해 멈춰 서서 렌즈를 바꾸는 것보다 계속 움직이며 눈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놓치지 않는 쪽이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지금 R6 Mark III에 Canon RF24-105mm F4 L IS USM을 주로 물려 다니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다.

화각은 달라졌고 카메라도 몇 세대나 바뀌었지만, 여행에서는 하나의 렌즈로 최대한 많은 장면을 담고 싶어 하는 내 방식은 60D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사면 나는 또 책을 샀다.

그때 함께 읽었던 책이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였다.


3.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 ― DSLR을 처음 배우다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쓸 때는 복잡하게 생각할 일이 많지 않았다.

카메라를 켜고 화면을 보고 셔터를 누르면 됐다.

그런데 DSLR은 달랐다.

조리개가 나오고, 셔터속도가 나오고, ISO가 나오고, 노출과 측광, 초점 방식까지 알아야 할 것이 갑자기 많아졌다.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는 그런 내게 DSLR이라는 새로운 카메라를 이해하게 해준 책이었다.

카메라에는 왜 이렇게 버튼이 많은지, 각각의 기능은 무엇인지, 조리개와 셔터속도를 바꾸면 사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하나씩 읽어 나갔다.

책을 읽을 때에는 이해한 것 같았다.

며칠 지나면 또 헷갈렸다.

그래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적어도 카메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필요할 때 어떤 기능을 찾아봐야 하는지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훗날 『캐논 EOS 5D Mark IV 완벽가이드』와 『캐논 EOS R6 Mark II/R8 완벽가이드』를 읽게 되었지만, 내게 카메라 공부라는 것을 처음 본격적으로 시켜준 책은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였다.


4. 아이들과 함께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EOS 60D와 함께한 시간에는 아이들의 성장기가 그대로 들어 있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던 시절도 아니었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국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여행에는 거의 늘 60D가 따라다녔다.

사진 속 아이들도 조금씩 자랐다.

여행지에서 뛰어다니고, 절집 마당에 서 있고, 산길을 걷고, 바닷가에서 장난치는 모습이 차곡차곡 남았다.

그래서 지금 60D로 찍은 옛 사진들을 보면 풍경보다 아이들부터 보게 된다.

“야, 이때는 니가 이렇게 쪼끄맸었구나.”

카메라는 그대로였지만 사진 속 아이들은 계속 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EOS 60D는 내게 단순한 첫 DSLR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을 오랫동안 바라본 카메라 가운데 하나다.


5. 유홍준의 답사기를 들고 남도로

그 시절 국내 가족여행의 또 하나의 중심에는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있었다.

책을 읽고 나면 책 속에 나온 장소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기에 나온 길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남도 쪽을 참 많이 다녔다.

강진은 세 번이나 찾아갔다.

강진의 유명한 한식집 해태식당에서 밥을 먹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영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래전 남도 여행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강진을 지나 장흥으로, 다시 해남으로 내려갔다.

해남에서는 두륜산과 대흥사를 찾았다.

대흥사 입구의 유선관도 참 기억에 남는다.

두륜산 아래 오래된 절집을 찾아가고, 그 앞의 옛 한옥에서 머물며 아이들과 남도의 시간을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장소 하나하나보다 그곳을 찾아가던 길과 함께했던 가족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당시의 여행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는 가족여행이면서 동시에 내 답사여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책에서 읽은 장소를 직접 찾아간다.

그곳을 걷는다.

문화유산을 보고 주변의 산과 마을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진으로 남긴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책을 펼쳐보고 사진을 들여다본다.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다시 생각하고, 책과 자료를 찾아보고, 사진 속에 담긴 장소를 다시 이해하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여행을 하는 방식이 그 무렵부터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막포를 들고 세계 곳곳의 역사유적과 자연을 찾아다니기 훨씬 전, 그 출발점에는 아이들과 남도를 돌아다니던 EOS 60D가 있었다.


6. 사진은 남았는데 여기가 어디더라

60D로 찍은 옛 사진을 지금 다시 들여다볼 때 가장 아쉬운 점도 하나 있다.

위치정보다.

EOS 60D 바디 자체에는 촬영 위치를 자동으로 기록해 주는 GPS 기능이 없었다.

당시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강진에서 찍으면 강진 사진이고, 해남에서 찍으면 해남 사진이니 당연히 나중에도 기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문제가 생겼다.

사진 한 장을 연다.

산도 있고 오래된 절도 있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한참을 들여다본다.

“강진인가? 장흥인가? 해남인가?”

겁나게 생각해야 한다.

사진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처럼 위치정보까지 사진에 함께 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래서 장소를 알아내려고 오래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런데 화면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정작 장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그때의 어린 아이들과 아내의 모습이다.

위치정보가 없어서 불편한 것은 분명하지만, 오래된 사진을 그렇게 한 장 한 장 다시 들여다보는 동안 잊고 있던 가족의 모습까지 함께 되살아난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위치정보는 남아 있는 편이 낫다.

“여기가 어디여?” 하고 매번 머리를 쥐어짜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7. 2016년 2월, 마흔을 넘겨 처음 국경을 넘다

2016년 2월.

EOS 60D와 함께 내 여행에서 중요한 일이 하나 생겼다.

마흔을 넘겨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난 것이다.

아내와 두 아이가 함께였다.

목적지는 일본 오사카와 교토였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첫 해외여행이니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빠질 수 없었다. 우리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바로 앞의 유니버설 포트 호텔에서 4박을 했다.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며 신이 났고, 나는 그 모습을 60D에 부지런히 담았다.

하지만 첫 해외여행에서 내 눈을 더 오래 붙잡은 곳은 교토였다.


8. 처음 만난 교토 ― 청수사에서 아라시야마까지

교토에서 가장 먼저 기억에 남은 곳 가운데 하나가 청수사였다.

오토와산 자락에 자리한 청수사에 올라 본당 앞으로 돌출된 넓은 목조 무대에 서니 교토의 풍경이 아래로 펼쳐졌다.

사진과 책에서 수없이 보았던 바로 그 ‘청수의 무대’였다.

한국에서 책으로만 보던 오래된 일본의 사찰에 내가 직접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웠다. 단순히 유명한 절 하나를 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람들이 찾아왔던 장소의 공간감과 주변의 산세, 그곳에서 바라보는 교토를 처음 내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청수사를 내려오면서는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걸었다.

돌계단과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청수사 관람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교토의 옛 거리 속으로 이어졌다.

마루야마공원을 지나 쇼렌인과 지온인도 찾았다.

지금 돌아보면 첫 해외여행부터 절과 오래된 거리를 참 열심히도 찾아다녔다.

그리고 아라시야마로 향했다.

도게츠교를 건너며 강과 산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바라보고, 양쪽으로 높게 솟은 대나무가 길을 감싸는 치쿠린을 걸었다. 덴류지도 찾아가 그곳의 정원과 오래된 공간을 둘러보았다.

아라시야마는 당시에도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지금은 도게츠교와 치쿠린을 찾아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교토의 대표 명소가 되었다.

2016년의 나는 그저 눈앞에 펼쳐진 교토가 새로웠다.

청수사의 무대에 서보고,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를 걷고, 아라시야마의 대나무숲 속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여행은 거듭될수록 보는 눈을 조금씩 바꾸어놓았다.


9. 9년 뒤 다시 찾은 교토역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25년 1월.

나고야 여행 중 나는 다시 교토역에 섰다.

이번에는 청수사나 아라시야마를 다시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백제계 도래인들의 흔적을 찾아 비와호 일대로 가기 위해 교토역을 찾은 것이었다.

2016년에는 교토의 오래된 절과 거리를 보았다면, 2025년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 한반도와 일본 사이를 오간 사람들과 문화의 흔적을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여행을 계속하면 세상을 조금씩 더 알게 된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같은 장소를 바라보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2016년의 나는 교토라는 오래된 도시를 처음 만나는 데 마음을 빼앗겼다.

9년 뒤의 나는 그 도시 너머에 있는 역사와 사람의 이동,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오래된 교류까지 생각하며 다시 교토역에 서 있었다.

카메라도 달라져 있었다.

첫 교토 여행에서는 EOS 60D가 내 손에 있었고, 9년 뒤에는 EOS R6 Mark II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바뀐 시간만큼 여행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달라져 있었다.


10. 오사카성, 그때는 몰랐던 윤봉길 의사의 흔적

첫 해외여행에서 오사카성 천수각에도 올랐다.

당시에는 그저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한 성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훗날 윤봉길 의사님이 가나자와로 압송되기 전 오사카성 일대의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6년의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당시 오사카성 사진을 다시 보면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윤 의사님, 그때는 제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26년 5월, 나는 가나자와에서 윤봉길 의사님의 마지막 흔적을 직접 찾아갔다.

노다야마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를 찾아가 먼저 주변을 빗자루로 깨끗이 쓸었다. 마님과 함께 순국기념비 앞에서 묵념하고, 암장지에서는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간 소주 ‘처음처럼’ 한 병을 올린 뒤 절을 했다.

2016년의 오사카성과 2026년의 가나자와 사이에는 10년의 시간이 있다.

그 사이 여러 나라와 도시를 여행했고, 책을 읽고 역사를 찾아보면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 세상을 더 알게 되고, 아는 만큼 같은 장소에서도 더 많은 것이 보인다.

2016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쳤던 오사카성을, 10년 뒤에는 윤봉길 의사님의 시간을 함께 생각하며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가나자와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를 직접 찾아 소주 한 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내게 답사는 그렇게 조금씩 깊어져 왔다.

그래서 여행은 다녀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직접 보고 사진으로 남긴 뒤, 다시 책을 읽고 역사를 알아가며 오래전 사진을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11. 도톤보리와 처음 맛본 일본 초밥

첫 해외여행이었으니 먹는 것도 모두 새로웠다.

도톤보리의 번잡한 거리를 걸었다.

커다란 간판과 네온사인,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일본 현지 초밥을 처음 제대로 먹어보았다.

한 점을 입에 넣고 깜짝 놀랐다.

“워매, 초밥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그 맛의 차이가 무엇 때문이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처음 먹었던 일본 초밥이 겁나게 맛있었다는 기억만은 아직도 또렷하다.

지금은 일본을 여러 번 다녀왔고 일본 음식도 익숙해졌지만, 처음이라는 경험은 다시 만들 수 없다.

청수사도 처음이었고,

아라시야마도 처음이었고,

도톤보리도 처음이었고,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어 며칠씩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 모든 첫 장면을 EOS 60D가 기록했다.


12. 첫 해외여행을 끝으로 오막포에게 자리를 내주다

공교롭게도 2016년 2월 오사카·교토 여행은 60D의 마지막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해 EOS 5D Mark IV가 출시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막포를 샀다.

주력 카메라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EOS 5D Mark IV로 넘어갔다.

오막포를 들고 캐나다와 미국, 홋카이도와 괌, 중국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60D는 점점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때는 가족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챙기던 카메라였는데 새로운 풀프레임 DSLR이 들어오자 순식간에 뒷방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바로 처분하지는 않았다.

사용 횟수는 크게 줄었지만 오랫동안 집에 남아 있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수많은 가족여행, 남도 답사와 첫 해외여행이 모두 그 카메라와 연결되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13. 2024년, 오래된 60D를 보내다

2010년 11월에 구입했던 EOS 60D는 그렇게 2024년까지 내 곁에 남아 있었다.

그해 6월 EOS R6 Mark II를 구입하면서 구형 카메라를 반납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는 행사가 있었고, 결국 60D를 반납했다.

13년 반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주력으로 사용한 기간은 그보다 짧았지만 내 카메라 역사에서는 참 오래 남아 있던 녀석이었다.

삼성 필름카메라와 작은 디지털카메라들을 거쳐 처음 손에 넣은 본격 DSLR.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찍었고,

가족과 전국을 돌아다녔고,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따라 남도의 문화유산을 찾아갔으며,

마흔을 넘겨 처음 떠난 해외여행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의 초입에는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가 있었다.


14. 돌아보며 ― 내 여행과 답사의 시작에 있었던 60D

『Canon EOS 60D 활용가이드』는 지금 내 책장에 없다. 오래전에 중고책으로 팔아버렸다.

하지만 그 책을 읽으며 처음 DSLR을 배우던 시절의 기억은 남아 있다.

60D는 내 첫 DSLR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서며 여행과 답사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시절을 기록한 카메라였다. 책에서 본 곳을 직접 찾아가 내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기는 지금의 여행 방식도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2016년 첫 해외여행까지 함께한 뒤 오막포에게 주력 자리를 내주었지만, 내 사진과 여행의 역사에서 60D가 차지하는 자리는 여전히 크다.

오막포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데리고 나갔다면, 60D는 그 세계를 찾아 나서는 방법을 처음 가르쳐준 카메라였다.

돌이켜보면 내 여행과 답사의 시작에는
EOS 60D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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