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너그럽게 이민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북아프리카와 중남미에서 온 노동자를 흔히 볼 수 있다
날씨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좋았다. 밤은 춥지 않았고 낮은 덥지 않았다. 하늘은 바다만큼 푸르렀고 바다는 하늘처럼 고요했다.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마드리드를 잊었다. 스페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시내 북서쪽 카르멜 언덕의 구엘 공원(Parc Güell)에서 바르셀로나 탐사를 시작했다. 언덕 바로 아래 그라씨아(Gràcia)지구를 구경하면서 엑샴쁠레지구로 내려와 사그라다를 비롯한 명소를 본 다음 중세와 로마 시대를 품은 고딕지구와 라발지구를 거쳐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남동쪽 해변까지 걸어서 갈 생각이었다
비탈진 도시에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가는 게 체력 소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G가 그 계획에 맞추어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 입장권을 예매했다. 바르셀로나를 하루에 본다면 이렇게 다니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바르셀로나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이 일곱 개 있는데,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가 제일 유명하고 방문객도 많다.
건축학을 전공한 G의 설명 덕분에 가우디가 토목공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카르멜 언덕은 서울 남산처럼 도시 한가운데 있다. 그런데 왜 택지 분양에 실패했을까?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가 부자들의 교통수단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언덕 바로 아래 그라씨아지구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엑샴쁠레지구는 건설 중이었다. 시민들의 생활공간은 까딸루냐 광장과 해변 사이의 구시가지에 있었다. 카르멜 언덕은 아직 거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간 입구는 1992년 올림픽 때 관광객을 받으려고 언덕 중턱에 새로 만든 것이고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현관 앞 출구가 원래의 주택단지 입구였다는 사실을 모르면 가우디가 무슨 일을 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현관 위 전망대의 평면과 아래의 공간도 같은 방식으로 창조했다. 관람객들은 전망대에서 도시의 원경에 취해 시간을 보내다가 발아래 얼마나 대단한 공간이 있는지 모른 채 바삐 현관 분수대를 거쳐 출구로 간다. 그리스 스타일의 돌기둥들이 전망대를 떠받치면서 빗물을 내부의 좁은 통로에 끌어들여 지하 저수조로 보낸다. 저수조 수위가 높아지면 현관 중앙의 타일 조각으로 장식한 도마뱀이 입으로 물을 내뿜는다. 돌기둥 사이에 서니 파르테논 신전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이스탄불의 ‘예레바탄 사라이(지하 궁전)’가 떠올랐다.
건축은 물리학과 예술을 아우른다. 건축가는 예술적 영감과 미학적 자유를 추구하지만, 정역학(靜力學)의 원리를 철저히 따라야만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지을 수 있다. 구엘 공원은 예술가 가우디와 엔지니어 가우디를 다 보여주었다. 그는 사그라다를 지을 때 적용할 여러 예술적 아이디어를 주택단지 토목공사와 현관 건축에서 먼저 실험했다. 그렇지만 구엘 공원을 지배하는 것은 미학이 아니라 역학이었다. 예술가 가우디는 여러 군데에서 만났지만, 엔지니어 가우디를 뚜렷하게 본 것은 그곳뿐이었다
엑샴쁠레는 신시가지를 가리키는 까딸루냐 말이다. 19세기 후반까지 고딕지구는 건물이 빼곡했고 그라씨아는 듬성듬성 집이 있었다. 까딸루냐 산업혁명이 일어나 인구가 급증하자 시정부는 직선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두 지구 사이의 빈 땅을 특이한 방식으로 개발했다
엑샴쁠레는 구엘 공원과 마찬가지로 마차 시대에 만들었기 때문에 마부와 보행자의 시야를 넓혀 사고를 예방하려고 교차로를 낀 건물의 모서리를 깎게 했다.
고딕지구를 빠져나오면 콜럼버스 기념탑 너머로 몬주익 언덕이 보인다. 몬주익 언덕에는 볼 것과 놀 것이 많다. 시내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는 출발점인 에스빠냐 광장, 밤마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마법의 분수, 스페인 여러 지역의 대표 건축물을 모아둔 스페인 마을, 미로 미술관, 까딸루냐 미술관, 깜 노우 경기장 보수공사 때문에 FC 바르셀로나가 임시 홈구장으로 쓰는 올림픽 스타디움, 꼭대기의 성과 전망대 등이다. 그 모두를 보려면 하루를 다 써도 부족하다.
『유럽도시기행』 1권과 2권의 도시를 다닐 때 이스탄불 말고는 가이드를 고용한 적이 없었다. 유능한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이 두 배 즐거워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여러 건축가가 참여해 속도를 올렸으며 컴퓨터를 이용해 세부 설계를 하고 석재를 가공하게 된 이후 속도가 빨라졌다. 전체 완공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중앙탑 공사가 마무리되어 2026년 6월 가우디 사망 100주년에 맞춰 축복식과 공식 개관 행사를 열었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현장에 살다시피 하면서 미사는 고딕지구의 작고 오래된 성당에서 보았는데, 1926년 6월 7일 그 성당에 가다가 노면전차에 치였다. 운전사는 옷차림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방치했고 택시 기사는 승차를 거부했으며 병원은 진료를 기피했다. 공공 구빈 병원으로 옮긴 다음에야 의료진이 신원을 확인하고 친지들에게 연락했다. 가우디는 큰 병원으로 옮기자는 권유를 거절하고 그 병원에 머물다가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수많은 시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가우디의 관은 사그라다 지하에 놓였다.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처럼 뒤꿈치를 들고 걷게 하지도 않았다. 나는 두려움도 경건함도 느끼지 않았다. 내게 사그라다는 ‘건축으로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의 최고 수준’이었을 뿐이다. 가우디 자신은 심오한 종교적 감정과 예술적 열정을 다 표현했겠지만, 나는 예술적 열정만 받아들였다.
최후의 만찬부터 골고다 언덕 행진을 거쳐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재현한 ‘수난의 파사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중심인데 수비라치가 가우디의 얼굴을 넣은 탓에 또 논란이 일었다.
바다와 하늘이 나눠지지 않아서 배가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바르셀로나가 바다를 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그라다에서 본 지중해가 사그라다보다 나는 더 좋았다
바다와 하늘이 나눠지지 않아서 배가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바르셀로나가 바다를 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그라다에서 본 지중해가 사그라다보다 나는 더 좋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처형당한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만은 예외였다. 프랑코는 프랑스에서 독일군에 붙잡힌 그를 데려와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반란 혐의로 몬주익성에서 총살했다. 쿰빠니스는 총살을 당할 때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하고 앞을 보며 외쳤다. ‘까딸루냐를 위하여!’
조형물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민중의 소망을 이루어준 리더도 귀하지만 현실에서 패배한 리더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민중은 그보다 더 귀하다. 민주사회의 주권자한테는 목숨 바쳐 충성한 공무원을 보듬을 책임이 있다.’ 백범 선생과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선생을 떠올렸다. 백범은 민족의 분단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남북을 오가면서 분투했으나 현실 정치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고 암살당했다. 장준하 또한 가슴에 품은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타살 정황이 뚜렷한 의문사로 삶을 마감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로서 이룬 것이 없었다. 민중에게 무엇인가 베풀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았다. 많은 시민이 지금도 존경한다. 전쟁의 폐허뿐이었던 대한민국을 풍요로운 민주사회로 발전시킨 동력은 유능한 리더가 아니라 실패한 리더까지도 기억하고 보듬는 국민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시떠델러 공원을 지나 바르셀로나의 가장 오래된 구역인 보른지구의 역사문화센터(El Born Centre de Cultura i MemÒria) 고고학 발굴 현장을 잠깐 살핀 다음 고딕지구로 향했다. 사그라다를 보았으니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건너뛰었다. 한 도시에서 성당이나 교회를 하나만 본다는 나만의 규칙을 지켰다. 그렇지만 ‘바다의 성모 성당(Basilica de Santa Maria del Mar)’은 예외로 했다. 14세기 지배자와 귀족과 부자들이 고딕지구 한복판에 대성당을 지었던 시기에 바르셀로나의 가난한 어부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바다 가까운 곳에 자기네 성당을 세웠다.
까딸루냐 민중은 9월 11일을 ‘그날(la Diada)’이라고 하며 지금까지 국경일로 삼고 있다.
2017년 실시한 주민투표에서는 투표자 대부분이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고 주의회는 까딸루냐 공화국 창립을 선포했다. 스페인 정부가 주의회를 해산하고 주요 인사를 반역 혐의로 기소해 무위로 끝나기는 했지만 시민들은 각급 선거에서 분리주의 성향의 정당에 더 많은 표를 주는 방식으로 독립 의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까딸루냐의 독립을 허용하면 갈리시아와 바스끄 등 다른 주들도 독립하려 할지 모르기 때문에 스페인 정부는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음식과 축구 말고는 스페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없다고 한 마드리드 가이드 E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스페인은 아직 망각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했다.
시위대는 스타벅스 매장 앞을 지날 때 특히 큰 함성을 지르면서 ‘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지중해 건너편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연대감을 표현하려고 거리에 나온 시민이 그렇게 많다는 게 놀라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에 섞여 걷는 동안 밤이 깊었다. 까딸루냐 광장 근처는 큰길과 골목 모두 사람으로 넘쳤다. 식당 피크타임인 아홉 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바르셀로나는 스테이크지!’ 다른 도시의 다른 식당에서도 먹어보았지만, 내 취향으로는 60일 숙성 갈리시아 안심구이가 최고였다.
첫날 2만 보 넘게 걸었고 돌아오는 길에 시위 구경을 하느라 평소 기준으로는 매우 늦게, 그러나 바르셀로나 기준으로는 제때 저녁밥을 먹었다. 까딸루냐 광장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의 예약을 받지 않는 ‘동네 맛집’에 20분 넘게 줄을 서 기다렸다.
세 번째는 돼지 다리를 염장 건조한 하몬(jamÓn)이다. 한글로 하몬이라 쓰지만 실제 소리는 하몬과 카몬의 중간쯤 된다. 전용 칼로 얇게 저며 접시에 담아낸 하몬은 빵에 올리거나 멜론을 싸도 괜찮았지만 그 자체로 먹는 게 더 좋았다. 한국에서는 너무 비싸서 손이 가지 않았던 하몬을 마음껏 즐겼다. 굳이 도토리를 먹인 흑돼지 하몬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스페인 하몬 생산량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최고급은 값이 보통 하몬의 몇십 배나 된다. 사료를 먹여서 기른 백돼지의 뒷다리로 만든 하몬도 충분히 맛있다.
넓은 도자기 접시에 종잇장처럼 저민 생아귀 살을 펼쳐 놓은 ‘생아귀 쎄비체’는 기대한 것보다 더 훌륭했다. 그런데 양이 너무 적어서 화가 났다. ‘돈을 더 받더라도 배불리 먹을 만큼 줘야지!’ 서울에 돌아와 분을 풀려고 직접 만들었다
‘읽는 것은 마음이 되고 먹는 것은 몸이 된다.’ 나는 이야기와 음식을 다 좋아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더 즐겁다. 유럽 도시를 여행하면서 나는 길과 건축물과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그곳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을 먹는다. 아내와 함께, 여행 친구와 함께한다. 어떤 이는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또는 ‘자아를 찾으려고’ 여행을 한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게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친밀한 사람과 함께하면 두 배 즐겁다.
그런데 어느 순간 좌우에 직립한 집들을 밀쳐내면서 푸른빛이 골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바다가 덮쳐온 것 같아서 숨을 멈추고 위를 보았다.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었다. 지중해의 하늘!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말을 잃은 우리에게 G가 말했다. ‘늦은 오후에는 석양이 들어와요.’
고딕지구의 낡은 집 한 채로 문을 열었던 피카소 미술관은 집 다섯 채를 연결한 전시 공간으로 성장했다. 피카소는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만년에는 남프랑스 소도시 앙띠브에서 살았다. 그래서 말라가·파리·앙띠브에 모두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바르셀로나는 청소년기에 몇 해 정도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피카소를 대표하는 전시공간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미술관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소장한 작품의 수량이 많아서가 아니라어린 시절 습작을 포함해 예술가 피카소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미술관이라서다.
왜 그런 미술관이 바르셀로나에 생겼을까? 피카소의 친구이고 비서였던 바르셀로나 태생 시인 하우메 사바르테스(Jaume Sabartés, 1881~1968)가 한 일이다. 그는 프랑코가 피카소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1963년 자신의 이름으로 피카소 작품 컬렉션을 선보였다. 피카소는 나중 보관하고 있던 작품을 기증함으로써 사바르테스의 기획을 승인했다. 그저 친구가 하는 일이라서가 아니다. 피카소는 자신이 화가로 태어난 곳이 바르셀로나라고 생각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회화는 자연을 모사하는 일이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작업이지.’ 나 같은 사람은 어떤 대상을 모사하는 일만 잘해도 만족한다. 그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렇지 않았다. 자연을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 일렁이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대상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존재하지 않았던 시각적 질서를 창조해 경험적 인식이 만든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현상 너머에 놓인 대상의 본질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에 변화를 일으켰다. 괜히 천재 예술가라고 하는 게 아니다.
피카소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전통적인 미술 형식과 작별했고, 시대 상황이 달라지거나 삶이 곡절을 겪을 때마다 화풍을 크게 바꾸었다. 대작을 여럿 보유한 파리의 미술관이나 만년에 그린 소품을 주로 전시하는 앙띠브의 미술관에서는 그런 변화를 볼 수 없었는데 바르셀로나의 미술관은 달랐다. 예술가 피카소와 인간 피카소를 다 만날 수 있었다.
<과학과 자비>는 당대의 기독교인이, 권력자가, 문화계 권위자가 좋아했을 그림이다. 힘없이 누운 여인은 인간, 맥박을 재는 의사는 과학, 환자의 아이를 안은 수녀는 신의 자비를 상징한다. 그림의 분위기는 신의 자비 쪽에 무게를 싣는다
<과학과 자비>는 당대의 기독교인이, 권력자가, 문화계 권위자가 좋아했을 그림이다. 힘없이 누운 여인은 인간, 맥박을 재는 의사는 과학, 환자의 아이를 안은 수녀는 신의 자비를 상징한다. 그림의 분위기는 신의 자비 쪽에 무게를 싣는다.
둘째는 옥상에 커다란 성모상을 세우려 한 것이다. 가우디가 고집을 꺾지 않자 건축주가 소송을 냈다. 주택은 교회가 아니다. 인간의 삶에는 성(聖)과 속(俗)이 다 필요하다. 그 둘을 섞으면 안 된다.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이 결합하면 세상은 무서운 곳으로 변한다. 일상의 생활공간을 종교 율법이 침범하면 자유는 질식한다. 건축주만 건축가의 철학과 신념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도 건축주의 취향과 가치관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다. 결국 가우디는 패소해 성모상을 올리지 못했다.
관광산업에 초점을 두고 보면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다. 피카소와 미로도 한몫하지만, 가우디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가우디도 자연을 당하지는 못한다. 까사 밀라가 문을 닫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몬주익 언덕 오른편 하늘에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조그맣게 붉은색이 나타나더니 점차 번져 남쪽 하늘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옥상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말을 멈추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나도 모든 것을 잊고 노을을 보았다. 가우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예술이 자연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산 펠립 네리 광장은 두 가지 이유로 명소가 되었다. 첫째, 가우디가 바로크 스타일의 그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전차에 치였다. 성당 외벽 앞에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구엘 공원에서 시작한 ‘가우디 워킹 투어’를 거기서 마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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