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바로 이 시기에 야만적인 파시즘 시대에 저항하는 여린 시인의 다짐을 새겨놓은 절창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십자가」는 바로 이 시기에 야만적인 파시즘 시대에 저항하는 여린 시인의 다짐을 새겨놓은 절창이다. - P-1

"윤동주 시 「십자가」를 나레이션 하는 씬이 본래 있었습니다. 다만 시사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들이 있어서 편집되었습니다. 윤동주 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작품인데 영화에 들어가지 못하여 아쉽습니다." - P-1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종鍾소리도 들려오지않는데
휫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ㆍ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一九四一, 五, 三一) - P-1

견딜 수 없는 일은 "고리짝을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가는 법석"을 떨었다는 상황이다. 윤동주에게는 원고 하나, 편지 하나, 글 자체가 생명이었다. 파시즘 체제나 독재 국가에서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기록’이다. ‘기록’을 통해 ‘기억’하도록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저들은 ‘기억의 삭제’를 늘 노린다. 기록을 생명처럼 여기고, 일기 쓰듯 글을 써온 윤동주는 저 공간을 피하는 길을 선택한다. 1941년 9월 윤동주는 누상동 9번지에서 아현동 하숙집으로 이사한다. - P-1

1938년 1학년 연희전문 핀슨홀 기숙사(강처중ㆍ송몽규와 거주)
1939년 2학년 북아현동ㆍ서소문 일대 거주(정지용 집 방문)
1940년 3학년 연희전문 기숙사
1941년 4학년 신촌 하숙(정병욱과 1개월 거주 )
1941년 5~9월 ‘누상동 9번지’ 하숙(정병욱과 함께)
1941년 9~12월 북아현동(정병욱과 함께) - P-1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방은 1909년 11월 1일 남대문역에 일본인이 개업한 ‘킷사텐喫茶店’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로 ‘끽다점’으로 다방을 일컫는 일본식 표기를 간판에 달았다. 지금 남아 있는 다방 내부의 사진을 보면, 유럽식 내부 장식에 흰 식탁보를 씌워 깨끗이 정돈된 테이블 옆에, 흰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 모습이 보인다. - P-1

1933년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본명 김해경)도 기생 금홍과 종로1가 청진동 입구에 다방 ‘제비’를 개업한다. - P-1

커피 - . 좋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을 들여 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박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 이상, 『날개』, 1936 - P-1

예술가들이 다방을 경영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처럼 이어져 왔다. 극작가 유치진은 소공동에 ‘프라타나’를, 영화배우 복혜숙은 인사동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연다. - P-1

다방의 오후 두 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8 - P-1

구보는 이 날 하루 동안 다방에 세 번 들렀다가 돌아와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라고 다짐하며 다시 책상머리에 앉는다. 다방은 일탈의 공간이면서, 다시 충전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 P-1

"여기가 바로 다방茶房 허리웉이다"
허리웉, 일명 할리우드Holywood 다방이라는 말을 한자로 번역한 단어가 ‘성림聖林’다방이다. 사실 ‘할리’의 원뜻은 성스럽다의 ‘Holy’가 아니라 ‘홀리나무’의 ‘Holly’인데, 거룩한 숲으로 잘못 번역하여 성림다방이라고 했던 것이다. - P-1

"외솔 최현배 선생님의 『우리말본』 강의를 들었을 때 동주와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윤동주 시집의 출판 기념회를 성림다방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 P-1

1904년에 건설된 아현ㆍ의영터널은 경성에서 신의주까지 달리는 경의선을 위해 뚫은 국내 최초의 터널이다. 애오개 고개 아래를 달리는 터널이다. - P-1

지금 윤동주가 처해 있는 터널은 사회적으로는 "인류 역사의 암흑시대"이고, 개인적으로는 "인생행로의 고민상"이다. 윤동주가 살아가는 일상의 터널은 "바퀴소리만 요란"하고, "악질의 연기가 스며" 든다. 지금은 답답하지만, 터널 끝에는 "광명의 천지"가 있고 그 광명의 천지에 노동자가 등장한다. - P-1

산문 「종시」를 쓴 1941년, 일제는 1936~1941년 5개년 계획으로 ‘조선중앙철도부설계획’을 세우고 중앙선 등 내륙 종단 철도를 건설했다. ‘단선 철도’로는 빠른 수송을 할 수 없어서 오고가는 것이 동시에 가능한 ‘복선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으려 한 조선총독부는 1939년 이후에는 경원선과 함경선을 ‘복선화’했다. - P-1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지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誘惑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 윤동주, 「간」(1941. 11. 29) 전문 - P-1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지구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리스 앞바다를 지중해地中海, 곧 땅terrian의 한가운데mid에 있는 메디테레이니언the Mediterranean이라고 했다. 중심에서 보았을 때 캅카스 산맥은 유배지로 어울릴 지구의 최종 변두리였던 것이다. - P-1

함석헌 선생의 말대로, "싸움은 이겨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져도 졌다 하지 않음으로 이긴다."는 불굴不屈, 불사신의 정신을 보여주는 명화다. 1868년에 그린 캔버스 원본은 205×122cm으로 실물 크기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인다. - P-1

프로메테우스는 윤동주 자신이고, 그 프로메테우스를 날로 새롭게 뜯어먹으며 성찰하게 하는 독수리는 윤동주의 내면이다. 윤동주는 토끼처럼 순하면서도 프로메테우스처럼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 그 의지의 육체를 역시 자신의 분신인 독수리가 뜯어먹는 강력한 성찰, 무서운 다짐의 글이 「간」이다. - P-1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艱辛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追憶」(1942.5.13) - P-1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서울’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놀랍다. 당시에는 케이죠京城가 정식 명칭이었다. 윤동주는 어떻게 서울이란 단어를 썼을까. - P-1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기 전 해 겨울이었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3.1독립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폭발하기 직전의 조선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 P-1

중편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는 관부연락선과 남행열차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일본 국민이 아니라, 일본 식민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하게 깨닫는다. - P-1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윤동주, 「참회록」(1942. 1. 24) 전문 - P-1

윤동주는 왜 릿쿄대학에 입학했을까.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가르치는 수업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드문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희전문처럼, 릿쿄대학에서도 채플을 통해 성경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 P-1

불행하게도 윤동주가 입학하기 전에 릿쿄대학은 이미 다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다음날 12월 8일 릿쿄대학은 전교생을 모아놓고 대미영 선전포고를 따르는 천황의 조서詔書를 낭독하는 봉독식捧讀式을 거행한다. - P-1

기독교 교육은 사라지고 이미 군국주의 교육을 중심으로 했을 때, 군대와 다름없는 학교에 윤동주는 입학했던 것이다. 윤동주가 그리던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이나 채플과는 관계없는 군국주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 P-1

"이 장학금의 의미는, 단지 릿쿄의 10개 학부마다 1명씩 한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수여한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 다시는 윤동주처럼 좌절하는 청년을 만들면 안 된다, 다시는 젊은이들을 군사훈련으로 내모는 대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의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다시는 이 나라가 전쟁으로 치닫는 역사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고, 미래에 대한 다짐입니다." - P-1

"시인 윤동주의 희생과 그의 인생 자체가, 앞으로 릿쿄대학이 더욱 소중히 간직해야 할 역사적, 정신적 재산의 하나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거울로, 오늘의 역사를 생각하는 잣대로서 시인의 고결한 정신을 기념하는 이 모임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 P-1

소수자문학으로 읽을 수 있는 윤동주의 시는 한국, 중국(조선족), 일본에서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 시비가 세워진 시인이며 북한에서도 중요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디아스포라 소수자문학으로서 그의 시는 세계인이 대화 나눌 수 있는 소소하지만 큰 대지로 향하는 산책길을 열었다. - P-1

조선유학생의 무료 변론을 맡은 후세 다쓰지는 유학생들에게 ‘내란음모죄’라는 끔찍한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유학생들이 자국의 독립을 위해 선언문을 낭독한 게 무슨 내란음모죄냐?"라며 집회신고를 안 한 정도로 변호해 주어 주모자들을 모두 석방시키는 큰 역할을 한다. - P-1

쉽게 쓰여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줄 시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一九四二年六月三日
—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전문. - P-1

많은 한국인이 일본 정부의 우경화를 염려하고 있지만, 윤동주 시를 공부하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행하는 일본인들이 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윤동주 문학기행을 해야 한다. 그분들 가슴 속에 윤동주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를 만나는 문학기행은 그래서 다짐의 여행이 된다. - P-1

마지막 장소에서 <아리랑>을 부른 모습은 누군가의 최후를 예고하는 듯하다. 아마가세 현수교에서 사진을 찍은 한 달 후에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 P-1

윤동주를 기억하며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찰나의 권력을 뛰어넘어 영원한 평화를 희구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너무도 뻔하고 사소한 결말이 때로는 소름 돋도록 사무친다. 비루한 운명에 맞서는 우직한 노래 앞에서, 나도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 P-1

그날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했다. 강연을 마치고 내려왔는데 일본인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맑디맑은 조선인 청년을 죽인 겁니다. 저희들이 죽였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 P-1

2013년 10월 어느날, 고故 정병욱 교수의 차남 정학성 교수(인하대 명예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글쎄, 교학사에서 나온 왜곡 교과서에 일제가 한국어 교육을 필수화했다고 쓰여 있대요." - P-1

이 글에서 이양하 교수는 첫째 일본 관헌의 검열에 통과될 수도 없고, 둘째 신변에 위험이 따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이었다. 시인이 이렇게 한글로 불안하게 시를 쓸 때, 일제말 서정주, 이광수, 이찬, 김용제 등 많은 시인들은 일본어로 편안하게 친일의 시를 쓰고 있었다. - P-1

첫째, 윤동주와 정병욱을 생각하는 ‘인물의 공간’이다. - P-1

둘째, 장소애場所愛를 일으키는 ‘고향의 공간’이다. - P-1

셋째, 민족정신을 향한 ‘한국어의 공간’이다. - P-1

넷째, 한류를 향한 ‘국제적 공간’이 될 수 있겠다. - P-1

집은 비극을 이겨낸 두 청년의 영혼과 고난을 극복한 민족의 전설이 있는 판타지의 공간이다. 광양에 가면 반드시 저 허름한 영혼의 집, 윤동주와 정병욱의 영혼이 깃든 집에 찾아가자. - P-1

브로트가 없다면 카프카는 없다. 레비나스가 없다면 블랑쇼는 없다. 정병욱이 없다면 윤동주는 없다. 덮쳐오는 서늘한 불행을 이들은 ‘힘센’ 우정으로 맞짱떴다. 어설피 살지 않고, 서로 격려했다. - P-1

남로당 특수정보책으로 활동한 강처중은 언론계 비선책임자이자 이원조(이육사의 동생), 박치우와 함께 좌파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는 1950년대 ‘정국은 간첩사건’의 배후 주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6ㆍ25 직후 석방된다. 서울 집에서 두 달을 요양하다 1950년 9월 4일 소련으로 공부하러 간다며 아내 이강자 여사에게 말하고 집을 나섰지만 이후 소식이 두절된다. - P-1

1949년 ‘국가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엉뚱한 이유로 「별똥」은 교과서에서 삭제된다. 정지용은 좌익 시인이라는 지목을 받고 경향신문 주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녹번동 한 초가에 은둔하다가 한국전쟁 중 1950년 9월 납북된다. - P-1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월북작가 정○○’으로 표기되어 왔었다. 1953년 평양교도소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국방부 발표로 1987년 본래 이름을 찾고, 2019년 금관 문화훈장이 수여된다. - P-1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라는 새로운 이름을 적은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에 제출한다. 창씨개명을 해야 일본 유학이 가능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창씨를 하지 않고 조선어 이름으로 유학 간 학생도 적지 않다. 윤동주 일가가 먼저 창씨를 했고, 일본 대학 입학을 위해 가족과 호적이 같아야 하기에 윤동주는 어쩔 수 없이 창씨를 신고했다.
한글을 없애려 하고 성씨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총독부의 강요에 괴로워하는 윤동주의 번민은 「별 헤는 밤」, 「참회록」 등에서 볼 수 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송몽규에 대한 증언도 있어 조금 길게 인용해 보았다. 영화 <동주> 첫 장면을 보면, 한범(송몽규의 아명)이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장면이 나오고, 창고에서 윤동주와 대화하다가 문익환이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우리 익환이와 동주와 한범이는 절친한 친구"라는 증언을 영상화한 것이다. - P-1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새로운 길」(1938.5.10) 전문 - P-1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니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뿐
— 윤동주 산문, 「종시」 - P-1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춤을 추고, 바람이 자면 나무가 잠잠해야 하지 않는가. 동주는 거꾸로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가 바뀌어 있다. - P-1

관점의 전환은 다른 시에서도 보인다. 우리 집에는 닭도 없는데, "다만 애기가 젖 달라 울어서 새벽이 된다", 우리 집에는 시계도 없는데 "다만 애기가 젖 달라 보채어 새벽이 된다"(「애기의 새벽」)고 한다. 닭이나 시계 대신 새벽을 끌어오는 이 애기야말로 바람을 춤추게 하고 잠잠케 하는 나무, 곧 강력한 단독자 아닌가. - P-1

1931년 3월 30일 명동학교를 다니던 졸업생 14명은 졸업 선물로 김동환의 서사시집 『국경의 밤』(1925)을 받는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순이’가 윤동주가 만난 첫 번째 순이일 것이다. - P-1

이 서사시에서 ‘순이’는 33회 등장한다. 일제 치하 함경북도 두만강변의 S촌을 배경으로 ‘순이’와 남편인 밀수꾼 병남, 그리고 지난날 ‘순이’의 애인이었던 청년 사이의 사랑의 삼각 관계 이야기다. 밀수출 갔던 남편이 죽어 시체로 돌아오는 이 이야기는 식민지 시절 세 사람의 갈등을 통해 국경에 사는 변두리 사람들의 애절한 사랑과 어두운 현실을 노래한다. 겉으로 읽으면 국경에 사는 ‘순이’에 얽힌 사랑과 비련 이야기 같지만, 속으로 읽으면 식민지의 국경 지대를 통해 나라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드러내는 명작이다. - P-1

결국 윤동주 시에 등장하는 ‘순이’는 실제 이름이라기보다, 당시 여성을 상징하는 기표라고 해야 할 것이다. - P-1

오히려 일본의 도시샤대학은 두 시인의 시비를 모셔서 거대한 정신을 기리고 있건만, ‘지용소공원’이라는 좁은 놀이터 하나로, 노벨문학상 이상의 가치를 지닌 정지용이라는 우주와 윤동주라는 우주가 만난 이 장소를 이렇게 그냥 버려 두어야 쓰겠는가. - P-1

처음에는(「서시」가 되기 전)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病院’이라고 써넣어 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명동마을 정신의 핵심에는 김약연(1868~1942)이 있다. 김약연은 세 가지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유학자, 독립운동가,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 이 세 가지는 김약연의 삶을 요약할 수 있는 핵심어다. - P-1

첫째, 김약연은 본래 8세부터 유학儒學을 하여 통달한 유학자였다. - P-1

둘째, 김약연은 ‘간도의 모세’라 할 만큼 민족을 일제의 억압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였다. - P-1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그를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고 현재 명동학교 건물 앞에는 김약연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변두리에는 승리자들만 있을까. 아니다. 주변인The marginal들은 지지리도 고독한 설움을 겪어야 한다. 탱크와 흑인 병사가 수시로 지나는 기지촌에서 어린 내 친구들은 양색시 누이들, 때로는 상냥한 미군의 웃음, 반대로 참을 수 없는 야만을 보기도 했다. 사실 변두리에는 빈궁한 구석이나 욕설 섞인 폭력이 질펀하다. 많은 폭력도 변두리에서 탄생하니, 변두리는 격렬한 용광로다. - P-1

가장자리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진달래나 연꽃처럼 유명한 꽃을 기억하자는 뜻이 아니다. 라일락ㆍ루핀ㆍ작약ㆍ알리움ㆍ깽깽이풀처럼 주목받는 봄꽃에 앞서, 숫제 꽃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름도 없는 꽃이나 쓰러져 벌레에 먹히는 통나무야말로 숲을 환상의 숲답게 만든다. 국가는 변두리의 꽃들을 기억해야 한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