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리아가 리스본의 대표 가수라면 대표 작가는 누구일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라마구 아닐까 싶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난해함을 넘어 기괴함에 이른 텍스트를 남긴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1935)를 리스본 시민들은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사라마구는 기념관에서만 보았지만, 페소아는 리스본 어디에나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여행자가 보아야 할 리스본(Lisboa, what the tourist should see)』을 샀다. 페소아가 1925년 영어로 쓴 텍스트에 사진을 곁들여 만든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여러 판본이 나와 있다

페소아의 정신은 외모보다 더 특이했다. 연금술·신비주의·마법·비밀결사·점성술에 심취했고, 셰익스피어와 나폴레옹 같은 역사 인물의 별자리 운세 모음집을 만들었으며, 바이런 스타일의 영국 낭만주의부터 보들레르가 대표하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엘리어트의 모더니즘까지 온갖 문예사조를 섭렵했다. 1935년 가을 복통과 고열 증세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그는 영어로 된 책 네 권과 포르투갈어책 한 권밖에 출간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원고와 스케치를 남겼다. 포르투갈 국립도서관은 나무 트렁크에 들어 있었던 원고를 시민들에게 공개했고 정부는 페소아의 관을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겼다.

나는 페소아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팬이 많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도 취향 차이일 것이다. 페소아는 무엇보다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몇 달이 걸려도 쓰기 어려웠을 법한 분량의 글을 하루에 생산했다.

1914년 3월 8일, 서랍장 앞에 종이를 놓고 가상 캐릭터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이름으로 서른 편 넘는 시를 썼고 자신의 이름으로도 여섯 편을 쓴 것이다. 작가 스스로 ‘승리의 날’이라고 했지만, 나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한다.

페소아가 만든 이명 캐릭터를 알고 싶다면 『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과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같은 책을 읽으시기 바란다. 나는 독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페소아의 집’을 보아도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집을 본 건 좋은 선택이었다. ‘내면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과 꿈이 차오르면 어떤 형태로든 표현해 봐. 들어주는 이가 많지 않아도 괜찮아.’ 페소아는 그렇게 나를 격려해 주었다.

리스본 전차는 특이하다. 차체가 작고 짧아서 비탈의 좁고 휘어진 골목을 다닐 수 있고 전조등은 아래쪽에 하나만 달려 있다. 원색을 칠해서 장난감처럼 보이는데 노란색이 가장 인기가 있다. 전차는 주로 관광객이 이용하고 리스본 시민들은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탄다.

수신기를 목에 건 단체 관광객이 대부분이라 전차가 정류장에 멈추어도 내리는 이가 별로 없었다. 전차 골목 투어를 여유롭게 즐기려면 아침 일찍 또는 밤늦게 타야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 시인과 작가 여덟 명의 조각상을 받침대에 놓고 위에 루이스 드 카몽이스(Luis de Camoes, 1524~1580)의 청동상을 올린 광장의 조형물은 주변의 범선 모양 바닥 장식과 함께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리스본에서 죽은 그가 ‘국민시인’의 영예를 얻은 것은 1572년 출판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서사시라고 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내용이 어떤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리스본에서 죽은 그가 ‘국민시인’의 영예를 얻은 것은 1572년 출판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때문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중심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를 엮은 서사시라고 하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내용이 어떤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종이책을 많이 읽는지 리스본에는 서점이 흔했다. 오래된 책방은 예쁘고 책이 많았으며 헌책방에는 책 말고도 오래된 물건을 팔았다. 우리는 오래된 서점에서 페소아가 영어로 쓴 리스본 가이드북을 구입했다.

14세기 후반 게릴라전으로 까스띠야 왕국의 침략을 물리쳤던 독립 영웅 페레이라(Nuno Alvares Pereira, 1360~1431)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 나라의 독립을 지킨 전사였던 페레이라는 나이가 들어 종교 지도자로 살면서 까르무 성당 신축을 이끌었고 죽은 다음에는 거기에 묻혔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임진왜란 후에 스님이 되어 서울 경복궁 가까운 곳에 절을 세웠고 죽어서 거기 묻혔다고 가정해 보라. 민중은 그 절을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여길 것이다.

나는 고고학 유물이 아니라 폐허를 만나고 싶어서 까르무에 갔다. 대성당이나 상 조르즈성처럼 겉보기에 멀쩡한 건물로 복원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까르무 성당은 복원 작업을 중단한 덕에 새로운 가치를 획득했다. 완전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2025년 9월 탈선 사고로 열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던 바로 그 푸니쿨라다. 구간이 짧은 데다 대기 줄이 너무 길어서 우리는 걸어가는 쪽을 선택했다. 리스본에서 올랐던 모든 전망대 중에서 경치는 단연 최고였다. 발아래 바이샤지구 시가지가 펼쳐졌고 건너편 알파마지구와 상 조르즈성이 보였으며 멀리 타구스강의 드넓은 하구까지 눈에 들어왔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덕분에 널리 알려진 그 전망대는 유원지 같았다.

벨렝지구의 마누엘 1세
세 번째 날은 벨렝지구에서 보냈다. 중년의 운전기사가 부탁하지도 않은 관광 안내를 열심히 하기에 스마트폰 번역 앱을 켜고 실시간 이동 경로를 보면서 내용을 짐작해 보았다

벨렝지구는 지진이 덜했던 덕에 크고 오래된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관광객이 붐빈다고 해서 서둘렀지만, 우리는 부지런한 여행자에 끼지 못했다. 벨렝 타워(Torre de Belem)부터 발견기념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까지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벨렝 타워는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 밖에서만 보았다. 볼만한 집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다른 어떤 건물보다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벨렝지구는 지진이 덜했던 덕에 크고 오래된 건축물이 여럿 남아 있다. 관광객이 붐빈다고 해서 서둘렀지만, 우리는 부지런한 여행자에 끼지 못했다. 벨렝 타워(Torre de Belem)부터 발견기념탑과 제로니무스 수도원까지 가는 곳마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벨렝 타워는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어서 밖에서만 보았다. 볼만한 집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다른 어떤 건물보다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있다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벨렝 타워는 20세기 후반 들어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군사시설의 흔적을 지우고 내부에 회랑을 만들어 문화 행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최근에는 신기술을 적용해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고 안팎을 새로 꾸며 집 자체를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를 체현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외양은 이슬람 스타일인데 곳곳에 십자가와 성모상을 비롯한 기독교의 상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군사 요새의 특징과 대항해 시대의 정서를 보여주는 장식이 많으며, 군주제의 흔적인 왕실 문장과 공화정의 상징인 내부 회랑이 공존한다. 그래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넘쳐나는 것이다.

마누엘 양식이라는 말이 생기게 한 마누엘 1세의 별칭은 ‘행운왕’이다. 그는 평생 운이 좋았다. 왕의 사촌이라서 왕위 계승권이 없었는데 왕세자가 죽는 바람에 왕이 되었다. 그때 포르투갈은 사회가 평온했고 스페인과 관계가 원만했으며 정부에 유능한 인재가 많았다.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이르는 신항로를 개척한 것도 그때였다

그런데 그의 행운은 타인의 불운이었다. 인도 일부 지역과 브라질 원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학살당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짐승처럼 붙잡혀 노예로 팔려나갔다. 마누엘 1세는 스페인 왕에게 아부해 공주와 혼인할 목적으로 리스본 유대인을 학살하고 추방했다. 페스트에 걸려 죽은 것이 인생에서 겪은 유일한 불운이었다.

아치·회랑·기둥·문·창문 등 건축물의 기본 요소에 돈을 많이 들여 크고 복잡한 장식을 함으로써 왕의 권력과 부를 과시했다. 둘째, 장식에 배·닻·돛·밧줄·조개 등 바다와 관련이 있는 모티브를 썼다. 셋째, 힌두 사원 문양이나 이슬람 세공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위세를 보여주려 했다. 넷째, 십자가·성모·천사 같은 기독교 상징을 두드러지게 배치해 도덕적 이념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침략과 약탈 행위를 정당화했다.

누가 보든, 어떻게 보든, 마누엘 양식 건축물은 ‘졸부의 교만과 과시욕’을 드러낸다. 스페인의 압박에 시달리는 약소국가였다가 갑자기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던 포르투갈 권력자의 자아도취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런 문화양식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며 널리 퍼질 수도 없다. 마누엘 양식은 북아프리카와 브라질, 인도의 고아, 마카오 등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곳에서만 잠깐 존재했다.

엔히끄 왕자는 포르투갈의 역사 영웅이지만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납치해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한 일과 최초의 노예 매매 시장이 생긴 것이 그와 관련이 있다. 칙명을 내려 포르투갈 왕에게 이교도를 노예로 삼을 권리를 부여한 가톨릭 교황청의 잘못도 크지만 직접 책임은 엔히끄에게 물어야 맞을 것이다.

그 시대에 스페인만 ‘개가 두 발로 걷는 기적’을 연출한 게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더 극적으로 떠올랐고 더 허망하게 가라앉았다. 엔히끄는 포르투갈 국민의 마음에 남은 대항해 시대 전성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사 인물이다.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벨렝지구에서는 다들 에그 타르트를 찾는다. 여행 책자에 빠지지 않는 유명한 점포에 가면 홀에서 먹으려고 줄을 서기보다는 포장 판매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 큰 기대는 하지 말기 바란다. 적당히 달고 식감이 부드러운 간식일 뿐이다. 나는 제과점보다 식당이 많아 좋았다.

신이 언어를 다르게 해서 인간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독교 구약의 이야기는 효력이 다한 것 같았다. 우리는 영어도 신통치 않고 프랑스말이나 포르투갈말은 아예 몰랐지만, 인공지능 번역기 덕분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굴벤키안은 ‘세계시민’이라고 할 만한 인생을 살았다. 오스만제국에 복속한 아르메니아 귀족의 후손으로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공학박사가 되었다. 가업인 석유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러시아 유전을 연구하고 이라크와 시리아 지역을 탐사했다. 1896년 오스만제국 군대가 아르메니아인 수십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가족을 이끌고 런던에 망명해 영국 국적을 얻었으며 로열 더치 셸의 대주주로 이라크 석유회사를 설립했다.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굴벤키안은 리스본에 굴벤키안 재단을 설립해 재산과 예술품을 관리하면서 교회·학교·병원에 거액을 지속적으로 기부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회사에 아르메니아 사람을 고용하려고 노력했고 런던 아르메니아교회에 묻혔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관적으로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안고 리스본을 떠나왔다.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도 다른 어느 도시에서보다 마음이 편했다. 자연이 아름다웠고 도시는 정겨웠으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고 음식과 음악이 훌륭했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모든 풍경이 기억에 또렷하고 파두의 멜로디와 해물 밥 냄새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기회가 생긴다면 기쁜 마음으로 갈 것 같다. 리스본은 그런 곳이다.

뽀르투는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에 합류하는 도루강(Douro) 하류의 북쪽 비탈과 언덕에 들어선 도시다. 포르투갈에서는 리스본 다음으로 큰 도시라지만 면적은 서울 강서구와 비슷하고 상주인구는 25만 명밖에 되지 않으며, 도루강 남쪽 가이아(Gaia)지구를 비롯해 행정구역 뽀르투에 속하지 않는 인근 도시들을 다 묶어야 150만 명 정도다. ‘광역 뽀르투’는 정유·조선·코르크·자동차부품·식품 등 다양한 산업을 안고 있지만 세계시장 경쟁력은 없어서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하며 일부를 옛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 수출한다. 뽀르투(porto)는 지명인 동시에 ‘항구’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다. 국호 포르투갈(Portugal)이 라틴어 지명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이렇다 할 유적은 없지만 고대부터 중요한 항구도시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딱 하루 뽀르투에 머문다면 어디를 어떻게 다니면 좋을까? 내가 찾은 답은 다음과 같다. 시간이 이틀 있다면 같은 경로를 더 여유 있게 다니면 된다. 아침 일찍 시청사에서 출발해 강을 향해 걸으면서 이름난 서점과 기차역과 성당 같은 명소를 본다. 한낮에 히베이라(Ribeira, 강변)지구에 도착하면 간단히 점심을 먹고 유람선을 탄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유람선을 탄 다음 건너편 가이아지구에서 늦은 점심을 먹어도 된다. 도루강 양안에는 식당이 즐비하고 메뉴와 가격대는 다양한데, 목이 좋은 식당이라고 해서 음식값이 특별히 비싸지는 않다. 우리가 들렀던 식당들은 음식 맛이 다 다르게 좋았고 값도 적당했다.

책에 넣을 사진을 찍느라 우리는 이렇게 다니는 데 이틀을 썼다. 젊은이라면 하루에 다 해도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뽀르투는 리스본보다도 더 마음 편하게 다녔다는 말을 덧붙인다. 소매치기 따위는 걱정할 필요 없었고 경찰관이나 순찰차를 만난 기억도 없다. 발을 들인 순간부터 떠나온 때까지, 우리가 본 사람들은 다 친절했다.

가헤뜨는 낭만파 시인이자 민주주의 혁명가이고 문화운동가였다. 뽀르투 시가 청사에 하필 그의 흉상을 세운 것은 뽀르투에서 태어났고 포르투갈 국민이 카몽이스만큼이나 좋아하는 시인이라서다. 꼬임브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가헤뜨는 무신론자임을 숨기지 않고 글을 쓴 탓에 숱한 필화(筆禍)를 겪었으며 1820년 뽀르투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크게 활약했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시와 희곡을 발표했고, 후일 돌아와 민담집을 편찬하고 역사소설을 썼으며, 만년에는 귀족 작위를 받았고 왕립극장 신축을 주도했다. 리스본이 자랑하는 카몽이스와 나란히 국립 판테온에 묻힌 그를 뽀르투 시민들은 지금도 사랑한다.

시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렐루서점(Livraria Lello)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책방’이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책방’이라는 건 확실하다. 포르투갈에는 문을 연 지 백 년 넘은 서점이 드물지 않다고 하는데 렐루서점도 그런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렐루서점은 책방이라고 하기 어렵다. 소설가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의 마법학교를 구상할 때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사람이 끝없이 밀려드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며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산다. 리스본도 서점이 많았는데 뽀르투도 그랬다. 우리가 묵은 호텔 바로 옆에도 있었고 렐루서점 가는 뒷골목에도 조그만 쇼윈도를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으로만 채운 헌책방이 있었다

포르투갈은 오래된 출판 선진국이다. 대항해 시대의 항해 기록과 탐사 보고서를 쌓아나갔던 15세기부터 그랬다. 언론의 자유를 혹심하게 탄압했던 살라자르 시대에도 출판 산업은 생명력을 유지했고 시민들은 서점에서 정치 정보를 나누었다. 언덕과 비탈이 많은 리스본과 뽀르투에서 서점은 커피와 음악을 즐기는 쉼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포르투갈 사람들은 작가를 높이 받든다. 리스본의 가장 중요한 광장에 카몽이스의 이름을 붙였고 뽀르투 시청사 정문 앞에 가헤뜨의 흉상을 세웠다.

책과 서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이 총포와 같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총포처럼 위력 있는 것은 새롭고 유용한 지식과 정보이지 문자 텍스트를 인쇄한 종이책이 아니다. 세상은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 책은 지성의 상징이 아니며 숭배할 대상 또한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나는 책을 전성기가 지난 전통 미디어로 여긴다. 서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통념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상벤투역의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의 역사를 구현한 작품이다. 딱 보면 바로 무서워지는 그림이 있었다. 국가의 탄생을 확정한 1140년의 발데베즈 전투 장면이다. 아폰수 1세는 이 전투에서 레온-까스띠야 왕국 군대를 제압해 포르투갈 왕국의 출발을 알렸다. 그것 말고도 포르투갈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지배자와 사건들이 나왔다. 레온-까스띠야 왕국 알폰소 7세의 포르투갈 공식 외교사절 접견, 주앙 1세 부부의 뽀르투 입성, 엔히끄 왕자의 북아프리카 세우타 정복 같은 것이다. 종교축제·농사·시장과 마을 풍경은 그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 가장자리에는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반복 사용하는 이슬람 양식을 적용했다. 대합실 중앙에 서서 벽과 천장을 휘둘러보았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본 최고 수준의 아줄레주였다.

세계 모든 곳에서 온 여행자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면서 저마다의 언어로 감탄사를 내뿜었다.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그렇게 한국인을 많이 본 적은 없었다. 뽀르투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힙한 여행지’로 떠올랐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배를 채운 다음 뽀르투 대성당(Sé do Porto)을 거쳐 강변으로 걸었다. 뽀르투 대성당은 리스본 대성당보다 더한 시골 교회였다.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긴 세월이 걸려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에 나중 고딕 회랑과 바로크 스타일의 제단을 추가했다고는 하지만 크게 볼 것은 없었다. 0층과 1층의 아줄레주도 크기만 했을 뿐 상벤투역에는 견줄 수 없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리만큼은 명당이었다. 성당의 탑에 오르자, 시내와 도루강 넘어 바다까지 보였다. 고층 건물이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을 가렸지만, 앞마당에서 보는 경치가 나쁘지 않았고 성당 아래편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는 시민들의 일상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당 떨어진’ 느낌이 들어 해가 저물기 전에 숙소로 복귀했다. 체력을 회복하려고 고칼로리 저녁밥을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포트와인은 ‘뽀르투 와인’의 영국식 표현이다. 영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맥주와 위스키뿐 아니라 포도주도 좋아했는데, 영국은 위도가 높아 포도를 재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포도주를 프랑스에서 들여왔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국이 15세기 중반 백년 전쟁에서 패하면서 보르도를 비롯한 대륙의 영토를 상실했다. 잔 다르크가 전세를 역전해 프랑스에 승리를 안겨주었던 바로 그 전쟁이다. 그때부터 프랑스 민중은 잉글랜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고 두 나라는 끝없이 외교 분쟁을 벌였다

나도 그날 오후의 햇살에 잔을 비추어 보면서 포트와인을 마셨다. 내 인생에 제일 많이 마신 날이었지만 긴 시간 동안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우버를 불러 숙소로 돌아오는데 운전사의 영어가 심상치 않아 물어보았더니 미국 사람이었다. 농구 관련 일로 뽀르투에 왔다가 너무 좋아서 눌러앉았고 뽀르투 여인과 혼인했으며 자녀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다들 미국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에서 기술 발전으로 이룬 거대한 물질적 풍요보다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이 아름답고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뽀르투 국립 미술관은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웠다. 마드리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오디오 가이드 해설을 들으면서 거장들의 대작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지만 밖에는 알려지지 않은 뽀르투의 예술가들이 자신과 세상에 관한 생각과 감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을 마주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곳을 다녀온 뒤로 나는 국내여행을 할 때도 미술관이 있으면 들러보는 습관이 생겼고, 광주시립 미술관의 청년 작가 초대전과 영암군 하정웅 미술관의 이우환 작품 시리즈를 보았다. 강원도 양구군에 박수근 미술관이 있고 양평·진천·청송 등도 군립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슈마허 선생의 견해를 절반은 예술에 적용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중심과 변방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나름대로 다 멋질 수 있고, 중심과 변방이 저마다 아름다울 수 있다. 이런 배움을 얻었으니 그만하면 훌륭한 미술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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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보다 군인에 가까운 기질이어서 결단해야 할 때는 단호하게 결단했고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면 폭력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사회의 지배적인 관습과 규범까지 무시했다. 복잡한 가톨릭 장례 의식을 생략하고 시신을 신속하게 바다에 버리게 함으로써 전염병 확산을 막은 게 대표 사례다.

리스본 항구에 들어온 상선의 물품을 강제로 인수해 참사 이전의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폼발 후작은 리스본을 재건하자고 왕을 설득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직책은 총리였지만 실제로는 왕이나 다름없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발탁해 재건 계획을 신속하게 세웠다. 마차가 다니는 중심 도로를 넓고 반듯하게 만들고 여러 곳에 광장을 조성했으며 주변 건물의 높이와 형태를 규제하고 건축 자재의 종류를 지정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인문주의자였다.

죄 없이 죽은 이가 없었을 리 없다. 무자비한 독재자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리스본 시민과 포르투갈 국민은 그런 잘못을 용서한 듯하다. 잘못에 비해서 공이 월등히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폼발 후작 동상은 ‘역사의 법정’이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리스본을 재건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여 그에게 전권을 맡긴 것 말고 왕이 한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것도 공이라면 공이다. 그래서 해일이 잔해를 쓸어간 해변의 왕궁터에 광장을 조성하면서 왕의 기마상을 세운 것이리라. 왕의 이름을 꼭 알고 싶다면 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폼발 후작 동상 주변의 초록색 비탈은 에두아르두 7세 공원이고 호드리게스 공원은 그 북쪽 끝에 이어져 있다. 에두아르두 7세는 포르투갈 왕이 아니라 60년 가까이 왕세자로 살다가 늙어서야 즉위했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7세다. 그의 1902년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려고 그토록 잘 보이는 곳에 공원을 만들 정도로 두 나라는 가까웠다.

공원을 나와 폼발 후작한테 인사를 드렸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내게 말했다. ‘국가의 기능과 리더의 역할이 무언지 생각해 봐.’ 우리는 강을 향해 뻗은 ‘아베니다 다 리베르다드(Avenida da Liberdade)’를 걸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자유로’쯤 되는데 리스본 사람들은 줄여서 ‘아베니다’라고 한다.

‘헤스타우라도르’는 광복(光復)이라는 뜻이다. 누구의 지배를 받았기에 ‘광복 광장’을 만들었을까? 국경을 맞댄 건 스페인뿐이니 다른 나라일 수 없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강국이 되어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포르투갈이 외국의 지배를 받았으니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광복 광장’은 포르투갈의 주권 회복을 기념한다. 한가운데 설치한 오벨리스크 형태의 기념비에 여러 날짜를 새겨두었는데, 1640년 12월 15일이 제일 두드러져 보였다.

명목 국민소득은 서유럽 나라들보다 낮지만, 리스본이나 뽀르투에는 노숙자나 거지가 많지 않다. 물건을 도둑맞을까 걱정하면서 다니지 않아도 된다. 파리나 바르셀로나보다 물가 수준이 훨씬 낮다. 난민이나 불법 체류자 문제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이민을 비교적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포르투갈말을 쓰는 남미와 북아프리카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들어와 일한다.

오늘날의 포르투갈 영토는 로마제국 시대 ‘루시타니아’라는 행정구역이었는데 서로마가 무너진 뒤 서고트족과 무슬림이 차례로 지배했다.

리스본의 포르투갈 이름은 리스보아(Lisboa)다. 자체 인구는 50만 명, 주변을 포함한 광역 인구는 2백만 명 정도 된다. 상업과 무역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일찍부터 페니키아·그리스·로마의 영향을 받았는데 ‘리스보아’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뽀르투가 먼저 무슬림 지배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국호에는 리스본이 아니라 뽀르투가 들어갔다. 포르투갈 왕국이 13세기 중반 국경을 확정했을 때 수도가 된 리스본은 15세기 말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524)의 인도 항로 개척을 계기로 전성기를 맞았다.

세바스티앙 1세 왕이 모로코 원정에서 전사한 1578년 길지 않았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나라가 찢어지거나 정복 전쟁의 먹잇감이 되는 시대였다. 스페인 왕국의 펠리페 2세는 어머니가 포르투갈 공주였다는 사실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리스본의 귀족들을 회유하고 압박해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포르투갈을 합병했다.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섰던 포르투갈이 졸지에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헤스타우라도르 광장 오벨리스크에 제일 크게 새겨 놓은 ‘1640년 12월 15일’은 주앙 4세가 히베이라 궁전 옆 교회에서 대관식을 한 날이다.

포르투갈 왕국은 광복을 이루었을 뿐 국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리스본 대지진의 상처를 다 치유하기도 전에 나폴레옹 군대에 점령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질이 독립해 나갔다. 포르투갈은 영향력 없는 유럽의 변방 국가로 되돌아갔다.

1910년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을 세웠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군사 쿠데타와 독재의 악순환에 갇혔다. 독재자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했던 시기에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살라자르(Antonio Salazar, 1889~1970)가 통치했다. 36년 지속한 살라자르 독재는 프랑코 독재보다 더 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살라자르는 초등교육을 장려한 반면 고등교육은 사실상 폐지했다.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는 정도로만 국민을 교육한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쓴 것이다. 그 결과 국민의 지적 수준은 하락했고 과학기술은 퇴보했다. 196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서도 총리 자리를 지킨 살라자르가 1970년 봄 죽었는데도 포르투갈 사회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혁신을 추진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6년 봄 새 헌법에 따라 실시한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중도 진보 성향 마리우 수아레스(Mario Soares)가 총리로 취임해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정부는 4월 25일을 ‘자유의 날(Dia da Liberdade)’로 지정함으로써 ‘카네이션 혁명’의 최종 승리를 선포했다.

국가 포르투갈과 도시 리스본은 지금도 살라자르가 저질렀던 저개발 정책과 우민화 정책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아무 준비 없이 지식정보화 혁명과 디지털 전환의 시대를 맞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반도체를 비롯한 기술 집약 고부가가치 산업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고학력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모든 독재는 나쁘다. 하지만 똑같이 나쁜 건 아니다. ‘개발독재’는 ‘저개발독재’보다 덜 나쁘다. ‘개발독재’도 다 같지는 않다. ‘성공한 개발독재’는 ‘실패한 개발독재’보다 낫다. 한국은 ‘성공한 개발독재’를 겪은 이후 독재는 끊어내고 개발을 이어갔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다 이루었고 지식정보화 혁명과 디지털 전환에 빠르게 적응했다. 포르투갈은 독재 중에서도 최악인 ‘저개발독재’를 겪었다. 독재는 극복했지만 ‘저개발’의 후유증을 치유하지는 못했다.

역사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개인의 삶도 사회의 역사도 필연적 법칙이나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한국이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고, 포르투갈은 특별히 불운했다고 생각한다. 살라자르가 저개발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기괴한 망상에 빠진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포르투갈은 무척 다른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통 음식을 파는 양편의 식당들은 손님맞이 준비에 분주했다. 광장 이름을 잘 지은 것 같았다. ‘꾸메르시우(comercio)’는 상업 또는 거래를 가리키는 말이다.

거기 있었던 궁전은 지진에 무너졌고 잔해는 해일에 휩쓸려 사라졌다. 왕은 두려움에 떨면서 벨렝지구의 목조 건물에 머무는 동안 폼발 후작은 왕궁의 폐허를 행정·경제 복합센터로 바꾸었다. 광장 좌우의 정부 청사 건물은 그가 직접 지었고, 시내와 광장을 가르는 개선문은 후임자가 세웠다. 시간이 가면서 주변에 민간 건물이 들어섰고 상인과 제조업자들이 영업을 시작했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광장에서 왕의 즉위식을 비롯한 국가 의전행사를 열었고 군 사령부가 전쟁을 지휘했다.

‘흠, 리스본은 해물 밥이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리스본에는 해물 밥 말고도 맛난 음식이 아주 많았다.

꾸메르시우 광장에서 알파마지구로 가다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 1922~2010) 기념관을 발견했다.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리스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노동자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사라마구는 번역가·평론가·기자 등 여러 직업을 거쳐 작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살라자르 시대에는 독재를 비판하는 정치 칼럼을 썼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창작에 전념하면서 시와 희곡까지 여러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사라마구 전집의 표지 디자인이 특이했다. 제목을 삐뚤빼뚤한 손 글씨로 썼는데 책마다 필체가 달랐다. 포르투갈어를 쓰는 창작자들이 손으로 쓴 글씨였다. 3층에 전집 세트를 진열해 두고 2층 서점에서 낱권으로 판매했는데 제목을 쓴 이들은 소설가부터 영화감독과 화가까지 직업이 다양했다.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다니!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기억하고 사랑할 만한 분이 있나?’ 왜 없겠는가. 내 기준으로는 박경리와 최인훈이 있다. 박완서와 황석영도 그럴 만하다. 한강은 이미 많은 작품을 썼고 앞으로 더 많은 소설을 낼 것이다.

산 감천 문화마을과 통영 동피랑 마을이 떠올랐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오래된 집, 강렬한 색을 칠한 벽화, 노점의 음식 냄새, 서로를 구경하는 사람들, 다른 유럽 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과 분위기였다. 하지만 알파마는 그저 오래된 곳이 아니라 긴 세월 가꾸고 다듬고 꾸민 동네여서 후미진 골목의 어느 귀퉁이도 버려진 데가 없었다.

폐허가 된 바이샤와 달리 알파마가 대지진을 견뎌냈다는 사실은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지진을 신의 징벌로 여긴 시대였다. 신은 왜 바이샤의 왕궁과 성당과 저택을 무너뜨려 왕족과 귀족과 성직자들을 죽이면서 알파마의 가난한 노동자와 선원과 몸 파는 여인들은 살려두었는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신학자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지진은 리스본의 성당만 무너뜨린 게 아니라 유럽의 종교 권력도 무너뜨렸다. 신의 자비에 기대지 않고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인간과 세상을 구하려는 새로운 사상에 힘을 불어넣었다.

파두는 슬프다. 멜로디와 노랫말과 창법이 다 애절하다. 어부·노동자·집시와 같은 이들이,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달콤하다. 듣고 나면 또 듣고 싶다. 비평가들은 ‘사우다드(saudade)’를 담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향수(鄕愁) 또는 그리움이라고 번역하는데 우리말 한(恨)과 통하는 데가 있는 것 같다.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나 영원히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사우다드’는 사람을 주저앉게 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 살아가게 한다. 조심하자. 이건 ‘리스본 파두’ 이야기다. ‘꼬임브라 파두’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

유럽 도시들은 ‘오버투어리즘’ 몸살을 앓고 있다. 명성 높은 박물관과 왕궁과 성당만이 아니라 이름난 레스토랑·와인 바·재즈클럽도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어렵다. 알파마지구도 그랬다. 파두 박물관 맞은편 길 건너 식당에 갔더니 빈자리가 없었다. 혹시 ‘노쇼’가 있을지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미련을 접고 이틀 후 자리를 예약한 다음 길 찾기 앱에서 제일 비싼 파두 레스토랑을 골랐다. ‘여긴 자리가 있을지 몰라. 비싸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키 크고 잘생긴 젊은이가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으시군요. 딱 두 자리가 남아 있거든요.’ 역사가 백 년 가깝다는 그 집은 실내 공간이 들쭉날쭉했는데 입구 반대편 끝의 쓰지 않는 벽난로 앞 조그만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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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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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문] 『유럽 도시 기행 3』 스페인편
―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저자의 시선을 따라 걷다가 내 생각으로 멈춰 서다

『유럽 도시 기행 3』의 네 도시 가운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읽었다. 두 도시는 모두 스페인에 있지만 책을 따라 걷다 보면 같은 나라의 도시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역사와 표정을 가지고 있다. 마드리드에서는 왕조와 내전, 프랑코 독재와 민주화의 역사가,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건축과 카탈루냐의 오랜 비극적 역사의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의 도시 여행은 유명 관광지를 차례로 찾아가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길과 건축물, 미술관과 광장에 남아 있는 역사를 찾아내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재의 도시와 연결한다. 내가 여행하면서 좋아하는 것도 이런 방식이다. 유적이나 건축물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가기보다 그것이 왜 그곳에 있고, 누가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1. 마드리드 ― 그림을 통해 읽는 스페인의 역사

마드리드에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역시 스페인의 근현대사와 미술이었다. 프랑코 독재와 스페인 내전, 민주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프라도 미술관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특히 고야가 인상적이었다. 궁정화가로 출발했지만 전쟁과 폭력, 인간의 잔혹함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미술작품이 한 시대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마찬가지다. 그림 한 점이 전쟁의 참혹함을 세대를 넘어 기억하게 한다.

그래서 미술관에서 그림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남긴 시선으로 그 시대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연결을 잘한다. 역사와 미술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한 도시 안에서 함께 읽게 만든다.

2. 바르셀로나 ― ‘성가족 성당’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에 들어오면서 책은 더욱 재미있어졌다. 무엇보다 가우디가 있었다.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성가족 성당’이라는 이름을 자주 접했지만 『유럽 도시 기행 3』에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쓴다. 처음에는 ‘사그라다’라는 말이 낯설었다. 파밀리아가 가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같은 건축물이라는 것은 바로 짐작했지만, ‘사그라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 책을 읽으며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뜻을 알고 보니 나는 오히려 ‘성가족 성당’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 번역해버리면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들리는 이름이 원어를 살리니 고유명사로서의 느낌도 살아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사그라다라는 표현을 꽤 오래전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무지의 소치다.

저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면서 종교적 경건함보다 예술적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가우디 자신은 깊은 종교적 감정과 예술적 열정을 모두 담았겠지만 자신은 그 가운데 예술적 열정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도 좋았다. 같은 건축물을 보더라도 누구나 똑같은 감정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종교 건축은 신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일 수 있다.

그런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놀라움은 눈에 보이는 장식에만 있지 않다. 가우디의 곡선과 기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현수선 원리를 뒤집은 아치와 가지처럼 갈라지는 수목형 기둥은 하중을 자연스럽게 분산시키고, 다양한 곡면의 기하학적 구조는 건축적 안정성과 공간의 개방감, 자연채광을 함께 만들어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예술적 상상력과 구조역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형태로 합쳐진 건축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건축물을 두고 ‘건축으로 구현할 수 있는 예술의 최고 수준’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3. 평생을 건축에 바치고 그곳에 잠든 가우디

가우디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가운데 가장 안타까웠다. 평생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에 매달렸던 사람이 미사를 보러 가던 길에 노면전차 사고를 당했고,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신원 확인과 적절한 구조가 늦어졌다. 그는 결국 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그라다 파밀리아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의 작품은 화려하고 거대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 쓸쓸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평생을 바친 성당에 잠들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한 인간의 삶과 건축이 마지막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이야기할 때 앞으로는 그 기괴하고 아름다운 외관만 떠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안에는 평생을 한 건축물에 바치다 길에서 쓰러진 한 사람의 삶도 함께 들어 있다.

4.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과 자기합리화

그런데 저자의 바르셀로나 여행 방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다.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았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건너뛰었다고 했다. “한 도시에서 성당이나 교회를 하나만 본다는 나만의 규칙”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바다의 성모 성당’은 예외로 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어이가 좀 없었다.

예외로 했으면 규칙을 지킨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여행에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일정이 빠듯하거나 다른 곳을 더 보고 싶어서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건너뛸 수도 있다. 그것은 여행자의 선택이고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나 역시 여행하면서 시간 때문에 보고 싶은 곳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내가 어이없어 한 것은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한 도시에서 성당은 하나만 본다’는 원칙으로 설명한 부분이다.

누가 한 도시에서 성당을 두 군데 보았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보고 싶은 곳이면 보면 되고 시간이 없으면 건너뛰면 된다. 그런데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을 지켰다고 말한 바로 다음에 다른 성당은 예외로 보는 것은 조금은 자기합리화처럼 느껴졌다.

더 중요한 것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단순히 ‘성당 두 개’로 묶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두 건축물은 지어진 시대도 다르고 건축양식도 다르며 도시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성격도 다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중세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대성당까지 이미 본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오히려 반대다. 멀리 왔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보고 싶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는 새벽 네 시, 다섯 시에도 일어난다. 사람이 몰려오기 전에 한가하게 장소를 보고, 사진을 찍고, 오전 일정을 일찍 시작해 오후에는 또 다른 곳을 찾아간다. 같은 종류의 유적이라도 시대와 역사와 이야기가 다르면 각각 볼 이유가 있다.

5. ‘귀족의 성당’과 ‘민중의 성당’이라는 선명한 구도

‘바다의 성모 성당’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저자 특유의 시선도 드러난다.

그는 지배자와 귀족과 부자들이 고딕지구에 대성당을 지었던 시기에 가난한 어부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바닷가에 자신들의 성당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쓰면 두 성당은 자연스럽게 권력과 부의 성당 대 가난한 민중의 성당이라는 구도로 나뉜다.

물론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성당 건축에 참여하고 힘을 보탠 것은 중요한 역사다. 그러나 실제 도시의 사회구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두 편으로 갈리지 않는다. 바닷가 지역에는 어부와 노동자뿐 아니라 상인과 다양한 계층이 함께 살았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저자의 글을 조금 거리를 두고 읽게 된다. 역사 자체와 저자의 해석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책에는 당연히 저자의 시선이 들어간다. 오히려 그것이 여행기를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다만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가도 독자는 어느 순간 자기 눈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6. 카탈루냐 ―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원한을 내려놓는 것

카탈루냐의 역사는 이 책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졌다. 1714년의 패배와 자치제도의 상실, 오랜 지역 정체성, 그리고 2017년 독립 주민투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으면 오늘날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더 큰 공동체를 만들려면 과거의 적대적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전쟁 기억과 한국전쟁을 예로 들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남과 북이 언젠가 다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려면 전쟁에서 서로 죽고 죽였던 원한을 영원히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기억을 지운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런 비극을 다시 만들지 않으려면 오히려 잘 기억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혀야 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기억을 지워버린 뒤 훗날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머리를 긁적여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기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원한의 대물림을 멈추는 일이다.

역사는 기억하고, 잘못은 인정하되, 그 증오까지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는 것.

나는 그것이 더 큰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은 저자가 던진 문제에는 공감했지만 그가 선택한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7. 저자가 지나친 또 하나의 카탈루냐 ― 조지 오웰

카탈루냐 이야기를 읽는 동안 계속 떠오른 책이 있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다.

책의 제목만 보면 카탈루냐 민족주의나 독립운동을 찬양한 책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웰은 카탈루냐 독립을 위해 스페인으로 간 사람이 아니었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 진영에서 직접 총을 들었다.

그래서 내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느끼는 것은 카탈루냐 분리주의보다는 국경을 넘어 자유를 지키려 했던 국제적 연대에 더 가깝다. 동시에 오웰은 그 전쟁 속에서 같은 편끼리 서로를 적으로 몰아붙이고 진실마저 정치에 따라 왜곡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민음사판 『카탈로니아 찬가』의 표지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국제여단 병사들이 걸어오는 흑백사진이다. 오른쪽 끝에는 유난히 체격이 큰 병사가 힘차게 걷고 있고, 왼쪽 끝에는 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병사가 있다. 그 사이로 총을 든 병사들이 이어진다. 실제 역사 속의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인데도 구도가 기막히게 좋다. 오래전에 본 책의 표지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유다.

저자가 카탈루냐의 역사와 정치적 정체성을 이만큼 이야기하면서 오웰과 『카탈로니아 찬가』를 지나친 것은 내게는 조금 아쉽다. 물론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바르셀로나를 읽는 방식에는 오웰도 분명히 들어 있다.

8. 그리고 몬주익 ― 나는 황영조를 한 문장으로 지나칠 수 없다

바르셀로나 편에서 가장 섭섭했던 대목은 몬주익이었다.

저자는 몬주익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지나간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언덕 오르막에서 치고 나와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

그게 전부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황영조를 폄하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한 문장이 못내 섭섭했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스페인과 바르셀로나의 역사의 일부이다. 한국인 저자로서 이를 좀더 비중있게 다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였다. 한국인이었지만 자기 나라의 태극기를 가슴에 달 수 없었다. 그리고 56년이 지난 1992년, 황영조는 대한민국의 이름과 태극기를 달고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오르막을 넘어 올림픽 마라톤 정상에 섰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한 나라에서 몇십 년을 기다려도 다시 나오지 않을 수 있는 성취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4년에 한 번 모여 42.195km를 달리고, 그 가운데 단 한 사람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다. 황영조 개인이 훗날 어떤 구설에 올랐는지는 그날의 성취와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몬주익의 황영조를 한 문장으로 지나칠 수 없다.

다른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서는 여러 문단을 써가며 의미를 찾아내던 저자가 이 대목에서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이것을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고 단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국인 독자로서는 적어도 한 문단 정도는 황영조가 그 언덕에서 만들어낸 엄청난 성취와 그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해주었으면 했다.

섭섭했다.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며 저자와 내 시선이 가장 분명하게 갈린 대목 가운데 하나였다.

9.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반대로 저자가 여행을 이야기한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여행은 ‘멀리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친밀한 사람과 함께하면 즐거움은 두 배가 된다고도 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조금 걸리는 데가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멀리 갈 이유가 있는가. 책이 좋으면 집에서 읽으면 되고, 맛있는 음식이 좋으면 가까운 곳에서도 먹을 수 있다.

내게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문장을 조금 바꾸고 싶다.

“내게 여행은 멀리 가서,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내게 여행은 좋아하는 것을 만나기 위해 일상의 자리를 떠나는 일이다.”

역사유적을 직접 찾아가고, 책에서 읽었던 장소를 눈으로 확인하고, 웅장한 자연 앞에 서서 걷는 것. 그래서 멀리 떠나는 것이다.

저자의 여행법과 내 여행법이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내가 어떤 여행을 좋아하는지가 더 분명해졌다.

10. 저자를 따라 걷되, 내 눈으로 보는 도시

『유럽 도시 기행 3』의 스페인편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시선을 많이 따라갔다. 마드리드에서는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 고야와 피카소를 만났고,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와 카탈루냐의 오랜 기억을 만났다.

좋았던 이야기도 많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바라보는 시선도 좋았고, 가우디의 안타까운 마지막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카탈루냐의 역사에서 ‘기억과 공동체’라는 문제를 끌어낸 것도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건너뛴 것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아니다. 여행에는 언제나 시간의 제약이 있다. 다만 그것을 ‘한 도시 한 성당’이라는 규칙으로 설명하고 곧바로 다른 성당에는 예외를 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기억을 지워야 한다’는 표현에는 처음 공감했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카탈루냐를 읽으며 저자가 지나간 조지 오웰을 나는 다시 불러냈고, 몬주익에서는 저자가 한 문장으로 지나친 황영조 앞에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이 재미있다.

저자의 판단에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읽다가 “그건 좀 아닌데”, “왜 거기를 건너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고 멈춰 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책이 아니라, 독자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는 책일 수도 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나는 저자를 따라 걸었지만 곳곳에서 내 생각으로 멈춰 섰다. 프랑코와 고야, 피카소와 가우디, 카탈루냐의 기억과 오웰의 국제여단, 그리고 몬주익의 황영조까지.

도시는 저자가 보여주었지만, 그 도시에서 무엇을 오래 바라볼지는 결국 내가 결정했다.

그것이 『유럽 도시 기행 3』 스페인편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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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광장은 내전의 참상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다. 1938년 1월 30일 프랑코의 공군이 바르셀로나를 폭격했을 때 민간인 마흔두 명이 거기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이 마드리드에서 피란 온 어린이였다. 광장과 성당 외벽에 포탄이 터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프랑코 추종자들은 아나키스트 집단이 성당 신부들을 총살한 흔적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렸지만,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속지 않았다.

이사벨 1세는 보석과 왕관을 팔아가면서까지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았던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투자했고 2차 항해 때는 더 큰돈을 썼다. 안달루시아 서부의 항구에서 1차 원정을 떠났던 콜럼버스는 ‘왕의 광장’에서 여왕을 알현하고 1차 항해 결과와 2차 항해 계획을 보고했다.

‘왕의 광장’은 또한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의 국가 범죄 현장이었다. 이사벨-페르난도 공동왕이 레콩키스타를 완료한 후 유대인과 무슬림을 쫓아낸 경위는 마드리드 편에서 살펴보았으니 여기서는 종교재판에 대해서만 짚어보겠다.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스페인 종교재판의 야만성이 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엄밀하게 보면 그것은 종교재판이 아니라 세속 권력의 비호를 받은 악당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재산을 강탈한 조직범죄였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종교에도 명암이 있다. 종교는 삶의 도덕적 기초를 제공하며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이타 행동을 격려한다. 그러나 종교는 또한 사람의 생각을 옭아매어 권력자가 민중을 착취하는 도구로 쓰인다.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증오하고 죽이도록 부추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 집단에 종교가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종교 없이도 우리가 도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신앙심 없이도 이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구원이나 다음 생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도 삶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몬주익은 ‘산(mont)’과 ‘유대인(juic)’을 합친 말이다. 1992년 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가 언덕 오르막에서 치고 나와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이름의 유래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 몬주익은 유대인 묘지가 있는 도시 바깥의 바위 언덕이었는데 엑샴쁠레지구가 생긴 뒤 고딕지구와 이어졌다.

나이 든 여자들이 표를 살 때는 계산대 모니터에 입장료 7유로가 찍혔는데 내가 살 때는 15유로가 떴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젊은 여자 직원이 눈치를 챘는지 말을 건넸다. "님, 65살 넘었음?" "아하, 경로 우대! 내년에 다시 와야겠네." "정말? 64로는 안 보이는 걸." 계산대 모니터에 37유로가 찍혔다. 동행한 여인 둘은 각각 15유로, 나는 7유로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쨌든 깎아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감사요." "별 말씀을!"

피카소는 자유분방하고 정력적인 스타 예술가로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떠들썩한 가십을 생산한 반면 미로는 조용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창작에 집중했다. 두 예술가의 작품은 스릴러 소설과 동화만큼이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피카소의 그림은 강렬한 호오(好惡)의 감정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미로의 작품은 편안하게 보는 이의 직관에 다가선다.

19세기 후반 모더니즘부터 1960년대의 낙관주의 작품까지 까딸루냐 미술 대표 작품들을 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가우디·피카소·미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가 아니야. 그들의 예술은 까딸루냐의 문화적 토양 위에서 핀 꽃이라고.’

까딸루냐 미술관 바로 아래편에 ‘몬주익 마법의 분수’가 있다. 1929년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만든 분수는 어둠이 깔린 직후 클래식 음악과 조명과 물줄기가 어우러지는 쇼를 한다. 관람객이 많아서 키 작은 동양인은 애로사항이 있기 때문에 까딸루냐 미술관 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큰길에 늘어선 분수들을 배경에 두고 보아도 나쁘지 않으며, 쇼를 본 다음 가까운 ‘스페인 마을’에서 저녁밥을 먹으면 편리하다. ‘스페인 마을’은 스페인 여러 지역의 대표 건축물을 실제 크기로 만든 테마파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색종이를 들고 일어나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도 영문도 모른 채 일어섰다. 맞은편 관중석을 보니 카드섹션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 바르셀로나 구시가를 탐사하면서 알았다. 바르사 팬들은 경기 시작 17분 14초에 이벤트를 한다. 왜 하필 17분 14초인가? 앞에서 말했지 않은가. 1714년 바르셀로나 공방전의 참혹한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까딸루냐 독립운동이 최고조에 올랐던 2017년에는 ‘independencia(독립)!’이라는 구호를 외쳤다는데, 우리가 갔던 날 관중들이 뭐라고 소리 질렀는지는 모른다. 까딸루냐를 힘으로 정복하고 민족 지도자를 학살했던 일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는 구호였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팀 경기에도 늘 하는 이벤트라서 레알 팬들도 문제 삼지는 않는다고 한다.

스포츠가 전쟁 대용이라는 말이 있는데 축구가 특히 그런 것 같다. 축구는 격렬한 신체 접촉을 동반하는 단체 경기다. 손과 팔을 제외한 몸 전체를 쓰고 어깨싸움을 관대하게 용납한다. 물리적인 힘과 스피드가 경기의 흐름을 좌우하며, 적절한 전술과 선수들의 협동력으로 팀의 잠재 능력을 최대로 발현하면 더 강한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다. 전쟁과 가장 비슷한 스포츠여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게 아닌가 싶다.

호전성을 부추긴다고 스포츠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전쟁보다는 스포츠가 낫다. 그날 바르사가 홈에서 졌지만 죽거나 다친 이는 없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흩어졌던 바르사 팬들은 마음에 복수의 칼날을 품었을 뿐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오늘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스포츠는 전쟁보다 훌륭하다. 바르사가 레알을 이기는 것으로 마드리드의 왕이 1714년 바르셀로나에서 저질렀던 대학살에 대한 복수심을 충족한다는 것, 이 얼마나 평화로운 해법인가.

요즘은 서울 거리에서 외국인 여행자를 흔히 볼 수 있다. 경복궁 근처에는 한복을 입고 무리지어 다닌다. 북촌 한옥마을 골목에서는 한국 사람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남산-숭례문-독립문-인왕산-북악산-혜화동-낙산-동대문-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안이 모두 북촌이나 인사동 같은 형태로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보라. 바르셀로나 구시가는 그런 곳이다. 옛길이 그대로 있고 사람들은 옛집을 고쳐가며 산다. 코엑스가 있는 강남과 여의도는 신시가지 엑샴쁠레에 해당한다. 사대문 밖의 마포·영등포·연신내·청량리 같은 곳을 그라씨아지구로 보면 된다. 바르셀로나는 서울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데 구조는 비슷한 데가 있다는 말이다.

서울이 경복궁에서 홍대를 거쳐 코엑스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시라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매력적이겠는가. 바르셀로나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구엘 공원에서 그라씨아와 엑샴쁠레와 고딕지구를 거쳐 바르셀로네따 해변까지 걸으면 로마 시대부터 서고트 왕국과 무슬림 왕조를 거쳐 스페인 왕국과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까지 모든 시대의 역사를 품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현지인은 현지인대로 여행자는 여행자대로 자신이 선택한 공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머무를 수 있다. 몇몇 관광 ‘핫 스폿’을 제외하면 어디서나 현지인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움직인다.

리스본 시내 어디서든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면 초록빛 가파른 비탈 위로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 비슷한 조형물이 보인다. 폼발 후작의 동상이다. 어째서 왕도 아닌 일개 후작의 동상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을까?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지금 모습으로 되살린 사람이라서다. 우리는 리스본 여행을 거기서 시작했다

1755년 11월 1일 가톨릭 만성절(萬聖節) 오전 시간이었다. 신실한 교인들이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지진은 왕궁과 귀족 저택부터 대성당과 수녀원까지 성과 속을 가리지 않고 땅 위에 선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예나 지금이나 리스본의 중심은 대서양에 합류하는 타구스(Tagus) 강변에서 북쪽으로 펼쳐진 평지 바이샤(Baixa)지구다

당시 기록을 근거로 추정하면 리히터 규모 9가 넘는, 지형 변화를 일으키는 수준의 초강력 지진이었다. 리스본은 언덕과 비탈이 많아 피해가 더 커졌다. 첫 본진이 5분 동안 땅을 흔드는 동안 바이샤의 건물이 대부분 무너졌고 좌우 비탈의 집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건물만 무너진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강변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물이 빠진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지진해일의 전조 현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사람과 선박과 무너진 궁전의 잔해를 쓸어갔고, 바닷물이 닿지 않은 곳은 무너진 주택의 화로에서 번져 나온 불길이 집어삼켰다

건물만 무너진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강변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물이 빠진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지진해일의 전조 현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사람과 선박과 무너진 궁전의 잔해를 쓸어갔고, 바닷물이 닿지 않은 곳은 무너진 주택의 화로에서 번져 나온 불길이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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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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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6년 스페인에 갔다. 처음부터 거창한 혁명가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총을 들었다.

바르셀로나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본 것은 이전에 알던 유럽의 도시와 달랐다. 노동자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고, 계급을 드러내던 옷차림과 호칭이 사라져 있었다. 상점과 호텔에는 노동자 조직의 깃발이 걸렸고, 사람들은 적어도 잠시 동안은 자신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아라곤 전선에서 싸웠다. 총은 낡았고 탄약은 부족했으며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엉성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서로를 계급으로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파시스트와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편끼리 서로를 의심했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POUM이 서로를 적으로 몰았다. 어제까지 함께 싸우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반역자가 되었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사실이 바뀌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다. 진실도 함께 희생된다.

내가 카탈루냐에서 보고 기억한 것은 단순히 ‘카탈루냐 사람들이 독립을 원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꿈꾸었고, 그 꿈이 권력투쟁과 선전 속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카탈루냐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들이 언제나 옳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서 인간이 무엇을 꿈꾸었고, 정치가 그 꿈을 어떻게 뒤틀 수 있는지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지워서는 안 된다.

누군가 과거를 마음대로 고쳐 쓰기 시작하는 순간, 오늘의 진실도 함께 위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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