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할릴 파샤 등 비잔티움 제국에 줄이 닿아 있는 오스만 궁정의 관료들로부터 얻어들은 정보와 세간의 평, 그리고 내가 직접 보고 겪고 느낀 점 등을 종합하여 메흐메드 2세란 이름의 별종 인간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인상 평가를 해보았다.

균형 잡힌 몸매에 골격이 튼튼하고 키는 보통이다. 아치형 눈썹 밑으로 상대를 집어삼킬 듯 쏘아보는 두 눈과 붉고 얇은 입술 위로 돌출된 매부리코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무술이 출중하다. 친근감보다는 위압감을 풍기는 첫인상이다. 웃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 냉철하고 냉담하며 잔인하고 잔혹하다. 호전적이면서 지배욕이 강하다. 독선적이고 카리스마가 남다르다. 이단이나 타 종교에 관대한 편이다.

이단이나 타 종교에 관대한 편이다. 중요한 군사적 판단과 결정을 점성술에 기대어 내릴 만큼 미신에 혹해 있다. 자기 분야에서 존중할 만한 일가견을 가진 학자나 예술가들에게는 친절한 편이다. 역발상이나 창조적 사고에 능하다.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라 행동한다.

회의에서 발언권은 허용하되 최종 결론은 이미 정하여져 있는 독불장군, 유일한 결정권자이다. 충동적이면서도 의외로 신중하며, 집착은 강하지만 어떠한 편견에도 매몰되지 않는다. 일단 결정하고 나면 무섭도록 곧바로 행동에 돌입한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물불을 안 가린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전쟁·전투에 앞장서기를 좋아하며 위험한 상황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면 이전까지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잊는다. 머릿속은 온통 음모와 술수로 가득 차 있다. 여우와 사자의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다. .

유도 심문을 할 적에는 보는 이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교묘하다. 나이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상대방의 의표를 날카롭게 찔러 주눅 들게 만든다. 사람을 못 믿고 의심이 많은 폐쇄적인 성격이다. 여간해서는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며 속내를 종잡을 수가 없다

요컨대 그는 자신 안에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의 얼굴과 마음을 숨기고 있는 자인 것이다.

힐름(Hilm: 잔꾀와 인내 그리고 협박으로 상대를 교묘하게 속이는 아랍의 오래된 외교술)

‘나는 돈으로 가능한 일에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고, 목소리로 해결할 일에 채찍을 쓰지 않으며, 채찍으로 통할 일에 칼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칼을 사용하여야 할 경우라면 그때는 그렇게 할 것이다’

Lesbos. 그리스 동부 에게 해에 있는 섬.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 섬에선 여성들끼리 사랑하는 풍습이 있었다 하여 ‘레즈비언(Lesbian: 여성 동성애자)’의 어원이 된 섬이다. 그 시대에는 덕망 있는 귀부인이 미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었다고 한다. 호메로스(Homeros)에 견줄 만큼 뛰어난 여류 시인 사포(BC 612~?년)도 이 섬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대리석 두상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일희일비는 금물이다. 적당함이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배척하고 추방하여만 할 적이다. 나는 우르반에게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포를 얻게 될 때까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며 개발 노력을 계속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전쟁은 있어왔다. 모든 동물도 서로 싸운다. 그러나 인간만큼 처절하고 끈질기게 집단적으로 싸우는 동물은 없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 승리의 대가는 엄청나고 패배는 처참하다. 전부(全部)가 아니면 전무(全無)다. 우리 인류는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여왔다. 분열되고 나약하고 준비 안 된 나라들은 사라졌다.

전지전능하신 유일신 알라여, 저에게 당신의 뜻이 임하게 하소서.

알라여, 이미 선지자께서 예언하신 대로 궁극적 세계 평화를 위하여, 세계 질서의 안정을 위하여 기필코 이 도시를 정복하겠나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법이다. 더욱이나 용병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황제의 군대는 돈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닌가. 소모전이 길어질수록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것은 비잔티움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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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우수雨水
겨울 그림자를 털어내며

겨울 끝자락에 서다
북한강에 청둥오리가 사라졌다. 떼를 지어 차가운 겨울바람 속을 유유히 유영하던 청둥오리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떠나간자리에 겨울 끝자락을 여미는 바람만이 쓸쓸하게 분다. - P26

그러고 보니 지난 겨울 초입에 북쪽에서 찾아왔던 철새들이 돌아가는 시절이 되었다. 봄이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다. 내 몸은 여전히 한겨울인데, 청둥오리들은 봄기운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북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 P26

우수 경칩이면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고 했다. - P26

강이 풀리면 님이 오리라는 희망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기나긴 겨울밤을 홀로  지새우며 봄과 함께 떠나간 님이 다시 돌아오리라 기다리는 희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한시에 흔히 등장하는 ‘왕손은 돌아오실까‘王孫歸不歸 하는 구절이 바로 그런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 P27

이미 굴원屈原이 <초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대는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으시지만王孫遊兮不歸,  봄풀은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春草生兮萋‘萋" 하는 노래는  이 무렵쯤에 참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 P27

기러기는 소식을 전하는 편지의 의미를 포함한다. 편지를 지칭하는 단어 중에 "안서雁書‘라고 해서 ‘기러기 안雁자가  들어가는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마도 멀리 변방으로 떠난 남편의 소식을가지고 남녘으로 날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 때문에 그런 말이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수 무렵이면 기러기는 다시 북으로 돌아가고, 여전히 내 님의 소식은 무망하다.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 내 고독감과 절망만이 크기를 더한다. - P27

野碧春天合 天青野色高
吾今適莽蒼 力足翔蓬蒿
已覺此身遠 亦憐歸雁勞
驚弦滿關塞 孤影墮江濤 - P28

외로운 그림자는 강물결에 떨어진다. - P28

내 몸 구석구석에 드리워져 있는 겨울 그림자를 떨어내기 전에는 결코 새봄을 맞기 힘들 것이다. 얼음이 풀리고 땅이 풀리는 우수 무렵이면 언제나 연례행사처럼 신열에 시달리는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 P29

유방평劉方平 <봄눈春雪>에서 읊은  것처럼, ‘날리는 눈도 봄바람을 띠고 있어飛雪帶春風, 서성거리며 어지러이  허공을 둘러싼다徘徊亂繞空‘고  했다. 차가운 눈 속에도 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땅이 풀리는 것을 보면 그 기미를 알아챌 수 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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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부분인 흑해와 몸통(위장) 부분인 지중해(에게 해)를 이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이 목구멍처럼 가늘게 연결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당시 튀르크족들은 루멜리 히사르를 술탄이 처음 명명한 ‘보아즈 케센(Boğaz-Kesen)’이란 별칭으로도 불렀다. ‘해협의 칼날(Strait-Blocker)’ 또는 ‘목구멍의 칼날(Throat-Cutter)’이란 살벌한 의미로 해석된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국경 지대에 자리 잡은 오스만은 처음에는 비잔티움과 사이가 좋았다. 우리는 안정과 평화를 원하였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산과 벌판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겨울이면 부락으로 내려와 비잔티움 백성들과 어울리고 상거래도 하였다. 외세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준 것도 우리였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비열하다.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자신들이 원하여 맺었던 휴전 협정을 스스로 파기한 적이 한두 번이던가. 9년 전 내가 첫 번째 술탄으로 취임하자마자 어리다(12세)는 이유로 나를 얕잡아본 너희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Karaman: 터키 중남부와 타우루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튀르크족 계열의 나라)을 사주하여 우리를 동쪽에서 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나의 아버지와 맺은 10년간의 휴전 협정을 폐기시키고 십자군을 결성, 다뉴브 강을 건너 침공해 왔다. 그것이 바르나 전투34다.QR코드 14 전쟁을 일으킨 쪽도, 패망한 쪽도 모두 너희 기독교도들이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은 기독교 신앙과는 너무나 다르게 행동하는 비열한 위선자들인 것이다. 그것이 약속을 지키는 우리와 그렇지 않은 너희가 명백하게 다른 점이다.

이 전쟁은 자위권의 정당한 발동이며, 너희의 기만정책에 대한 오스만의 반격인 것이다. 다시는 십자군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못된 짓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우리를 위협하는 자는 상대가 누구든 철저히 응징할 것이다. 너희가 존재함으로써 비열한 이간질이 조장되고 정의와 질서는 유린당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종식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제 우리는 너희의 악행(惡行)에 대한 응징으로 정당한 지하드(jihād: 성전)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하여 무너진다면 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너희나 그들이나 도시를 유지할 능력도 의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평화를 지켜낼 의지 또한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오직 신의 계시를 받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과업이다. 누가 나를 철부지라 하는가. 나는 세계 정복에 나섰던 알렉산더(Alexandros) 대왕보다 아침 해를 더 많이 보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병사를 갖고 있다. 나는 준비된 술탄이다.

알라여, 선지자 무함마드의 과업을 실현하려는 이 젊은 술탄 메흐메드에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신께 영광 바치겠나이다.

나는 특히 공성용(攻城用) 무기 개발에 주력하였다. 선대 술탄들이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성벽을 무너뜨릴 무기가 취약했던 탓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투석기나 파성퇴(Battering Ram: 성문이나 성벽을 두들겨 부수는 데 쓰던 거대한 공성용 망치)로는 역부족이다. 그리하여 나는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지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을 박살 낼 화력이 어마어마한 거포를 새로 개발, 완성하였다. 이름하여 ‘우르반(Urban)의 거포’이다.

신께 영광 바치겠나이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도다.

라오니코스는 현대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치리아코(앙코나 출신 여행가)가 1446년 미스트라(Mistra)를 방문했을 때 고대 스파르타의 유적지 등으로 그를 안내했다. 치리아코는 미스트라에 2년 남짓 머물며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방대하면서도 세세한 자료를 남겼다. 『The Immortal Emperor』의 저자인 도날드 M. 니콜은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며 치리아코가 남긴 기록물을 높이 평가했다.

주님, 장자도 아닌 저를 제국의 황제로 삼으신 뜻을 알고 싶습니다. 선왕인 큰형에게 아들이 없는 것은 무슨 연유이며, 다른 형들이 저보다 먼저 죽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이까. 오, 주여! 불쌍한 이 나라와 백성을 굽어살피소서. 주께서는 정녕 저에게서 대가 끊어지는 일을 바라시나이까.

일기가 변화무쌍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특히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내 머리와 군사들 머리를 삭발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교도들처럼 지저분한 머리는 청결은 물론 전투 수행과 정신 위생에 좋지 못하다. 적들이 장기전에 약한 이유는 그런 기본 상식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막사에 항상 온수를 비치하고, 담요 지급을 충분하게 할 것을 아울러 지시하였다. 병사들의 사기는 건강에서 나온다.

"튀르크군 1만 명의 행군보다 기독교 군대 100명이 움직이며 내는 소음이 더 요란하고 시끄럽다"(15세기 프랑스 여행가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의 1430년대 여행기에서 인용)고 하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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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아닌 한 사람의 비잔티움 병사로서 장엄하게 최후를 맞겠다는 결의였을까? 황제는 자줏빛 망토를 벗어던졌다.
제위(帝位)를 상징하는 문장(紋章)도 버렸다. 왕권을 표상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내 심장에 창을 꽂아줄 기독교도가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탄식하듯 혼잣말을 내뱉고 난 황제는 검을 뽑아들고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오스만군의 무리 한가운데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나갔다.

249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됐던 하기아 소피아는 그렇게 또 한 번의 수난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이 대성당에 가장 관용을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술탄 메흐메드 2세였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도다)!"
이때부터 메흐메드는 ‘파티(Fatih: 정복왕)’라는 경칭을 얻게 되었다. 오스만 623년(1299~1922년) 역사상 유일무이한 ‘정복자’ 칭호다.

"용을 죽이기 전까지 작은 뱀은 평화 속에 둔다"(두카스의 표현)는 것이 정복 전쟁 중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크리토불로스를 비롯해 이 분야에서 신뢰성을 확보한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그 수를 4000명 안팎으로 보고 있다. 전체 주민 수의 10분의 1가량이므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량 학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점령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강간 등이 빈번했던 아비규환의 도시로 묘사하고 있으나 사선(死線)을 넘은 사람들의 격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피정복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는 한, 칼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이 이슬람과 유목민의 불문율일뿐더러 또 불필요한 살생보다는 포로로 잡거나 노예로 파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라는 생각을 대체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라드 2세 시대의 대신 중 자아노스 파샤와 마흐무드 파샤, 이스하크 파샤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뒤 대다수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거나 요직에 기용된 대신들은 대부분 비(非) 튀르크 출신 개종자(改宗者: Proselyte)들이었다. 이로써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유목 시대부터 이어진 부족주의적 전통과 지방 호족 및 문벌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절대군주권을 확립하는 기틀을 닦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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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고대 로마 황제. 정적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꺾고 제국을 재통일, 단독 황제가 되었다. 313년 밀라노(Milano)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325년 니케아(Nicaea) 공의회에서 신성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를 존경했던 그는 자신의 끊임없는 행운을 신의 가호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거룩한 지혜’란 뜻을 지닌 교회. 1626년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최고의 교회 지위를 유지했다)

아르슬란: 만약 우리의 처지가 뒤바뀌어 내가 그대의 포로가 되었다면 그대는 나를 어찌하겠는가.
로마누스: 아마 죽이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 거리로 끌고 다녔을 거요.
아르슬란: 나의 처벌은 그보다 더 잔인하다오. 그대를 용서할 터이니 그대 나라로 돌아가시오.
황제는 대폭 할인된 배상금을 물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한다. 술탄은 2명의 장군과 100명의 호위대를 딸려 보내며 황제와 근위대에게 두둑한 선물까지 안겨준다. 평화 협정은 당초 아르슬란이 제안했던 대로 체결되었다.

그전까지 비잔티움의 지배 아래 있던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오스만은 이민족·타 종교에 대한 관용적 통치로 피정복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하며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대세는 완연히 기울었다. 건국 이래 500번 넘게 전쟁을 치르고, 20여 차례의 도성 직접 공격에도 꿋꿋이 버텨냈던 삼중 성벽과 이 도시의 운명은······. 오스만은 건국 이래 모두 일곱 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했다. 바예지드가 네 번(1391, 1395, 1397, 1400년), 무사(1411년)와 무라드 2세(1422년)가 각각 한 번이었고, 이제 막 또 한 차례의 결정타가 임박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시작한 이 제국은 개국시조와 이름이 똑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영속하리라 믿었던 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동시에 그 자리엔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문화도, 생활 방식도 전혀 다른 오스만 세력이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이 등장했다.

자, 그렇다면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인 1453년 5월 29일, 그 도시에선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백마를 탄 청년 술탄은 수만 대군 앞에서 장엄한 연설을 마친 다음 지휘봉을 높이 들고 외친다.
"가자, 도시로!"(To the City!: 이스틴 폴린-이스탄불!, İstanbul!***)

비잔티움 또는 비잔틴은 독일 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1557년 처음 쓴 이래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비잔티움’이란 이름의 여러 역사서가 출판되고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프랑스 작가들이 두루 사용했다. 19세기 이후 서방 세계에서는 일반 용어로 굳어져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어원은 기원전 660년 그리스 메가라의 비자스(βυζας, Byzas. 또는 비잔타스: Byzanthas)가 세운 나라라 하여 비잔티움(비잔티온: Byzantion)이라 불렀다. 터키에서는 ‘비잔스(Bizans, Bizantiniyye)’라 호칭된다.

"그대들 앞에는 현생의 전리품과 내세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약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가 새의 날개를 가졌다 할지라도 내 응징의 칼날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다."(술탄의 연설문, 부록 Ⅰ-4, 386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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