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난 고대 로마 황제. 정적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를 꺾고 제국을 재통일, 단독 황제가 되었다. 313년 밀라노(Milano)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325년 니케아(Nicaea) 공의회에서 신성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독실한 크리스천 어머니를 존경했던 그는 자신의 끊임없는 행운을 신의 가호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거룩한 지혜’란 뜻을 지닌 교회. 1626년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최고의 교회 지위를 유지했다)

아르슬란: 만약 우리의 처지가 뒤바뀌어 내가 그대의 포로가 되었다면 그대는 나를 어찌하겠는가.
로마누스: 아마 죽이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 거리로 끌고 다녔을 거요.
아르슬란: 나의 처벌은 그보다 더 잔인하다오. 그대를 용서할 터이니 그대 나라로 돌아가시오.
황제는 대폭 할인된 배상금을 물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한다. 술탄은 2명의 장군과 100명의 호위대를 딸려 보내며 황제와 근위대에게 두둑한 선물까지 안겨준다. 평화 협정은 당초 아르슬란이 제안했던 대로 체결되었다.

그전까지 비잔티움의 지배 아래 있던 기독교인들이었지만 오스만은 이민족·타 종교에 대한 관용적 통치로 피정복민들의 반발과 저항을 최소화하며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대세는 완연히 기울었다. 건국 이래 500번 넘게 전쟁을 치르고, 20여 차례의 도성 직접 공격에도 꿋꿋이 버텨냈던 삼중 성벽과 이 도시의 운명은······. 오스만은 건국 이래 모두 일곱 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했다. 바예지드가 네 번(1391, 1395, 1397, 1400년), 무사(1411년)와 무라드 2세(1422년)가 각각 한 번이었고, 이제 막 또 한 차례의 결정타가 임박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시작한 이 제국은 개국시조와 이름이 똑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영속하리라 믿었던 제국의 역사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동시에 그 자리엔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문화도, 생활 방식도 전혀 다른 오스만 세력이 지배하는 새로운 제국이 등장했다.

자, 그렇다면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인 1453년 5월 29일, 그 도시에선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백마를 탄 청년 술탄은 수만 대군 앞에서 장엄한 연설을 마친 다음 지휘봉을 높이 들고 외친다.
"가자, 도시로!"(To the City!: 이스틴 폴린-이스탄불!, İstanbul!***)

비잔티움 또는 비잔틴은 독일 사학자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1557년 처음 쓴 이래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비잔티움’이란 이름의 여러 역사서가 출판되고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프랑스 작가들이 두루 사용했다. 19세기 이후 서방 세계에서는 일반 용어로 굳어져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어원은 기원전 660년 그리스 메가라의 비자스(βυζας, Byzas. 또는 비잔타스: Byzanthas)가 세운 나라라 하여 비잔티움(비잔티온: Byzantion)이라 불렀다. 터키에서는 ‘비잔스(Bizans, Bizantiniyye)’라 호칭된다.

"그대들 앞에는 현생의 전리품과 내세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약 물러서거나 도망치려는 자가 있다면 비록 그가 새의 날개를 가졌다 할지라도 내 응징의 칼날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다."(술탄의 연설문, 부록 Ⅰ-4, 386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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