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아닌 한 사람의 비잔티움 병사로서 장엄하게 최후를 맞겠다는 결의였을까? 황제는 자줏빛 망토를 벗어던졌다.
제위(帝位)를 상징하는 문장(紋章)도 버렸다. 왕권을 표상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내 심장에 창을 꽂아줄 기독교도가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탄식하듯 혼잣말을 내뱉고 난 황제는 검을 뽑아들고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오스만군의 무리 한가운데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나갔다.

249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됐던 하기아 소피아는 그렇게 또 한 번의 수난을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이 대성당에 가장 관용을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술탄 메흐메드 2세였다.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도다)!"
이때부터 메흐메드는 ‘파티(Fatih: 정복왕)’라는 경칭을 얻게 되었다. 오스만 623년(1299~1922년) 역사상 유일무이한 ‘정복자’ 칭호다.

"용을 죽이기 전까지 작은 뱀은 평화 속에 둔다"(두카스의 표현)는 것이 정복 전쟁 중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크리토불로스를 비롯해 이 분야에서 신뢰성을 확보한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그 수를 4000명 안팎으로 보고 있다. 전체 주민 수의 10분의 1가량이므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량 학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점령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강간 등이 빈번했던 아비규환의 도시로 묘사하고 있으나 사선(死線)을 넘은 사람들의 격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표현으로 봐야 할 것이다.

피정복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는 한, 칼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이 이슬람과 유목민의 불문율일뿐더러 또 불필요한 살생보다는 포로로 잡거나 노예로 파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라는 생각을 대체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라드 2세 시대의 대신 중 자아노스 파샤와 마흐무드 파샤, 이스하크 파샤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뒤 대다수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거나 요직에 기용된 대신들은 대부분 비(非) 튀르크 출신 개종자(改宗者: Proselyte)들이었다. 이로써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유목 시대부터 이어진 부족주의적 전통과 지방 호족 및 문벌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절대군주권을 확립하는 기틀을 닦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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