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사람들은 영어도, 불어도, 독일어도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래서일까. 암스테르담 사람들, 나아가 네덜란드 시민들은 좁은 자기네 땅 안에서 복작거리며 심하게 다투지 않는다.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진출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그는 작중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포착하는 데서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렘브란트가 22세 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있다. 이 그림을 감상한 독일의 문호 괴테는 우울과 방황으로 세월을 보낸 자신의 청춘 시절이 떠올랐다고 고백했다. 과장된 표현일지 몰라도,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시킨 셈이었다.

"저를 움직이는 것은, 좀 더 나은 지위에 대한 열망이 아닙니다. 평안에 대한 사랑이 저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저는 공적 교육 활동과 거리를 둠으로써, 약간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자유와 관용을 중시하는 암스테르담이었으나 한계는 명백했다. 20세기 초에도 남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에서 현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인종차별은 암스테르담조차 여간해서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지금은 인종차별이 거의 사라졌으나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런던을 버리고 떠날 지식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런던이 싫다면 삶에 지친 것인데 이곳에는 인생의 무게를 견디게 할 모든 것이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 시인 새뮤얼 존슨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 영국에는 제1차 산업혁명 바람이 불었다. 성공한 부르주아가 많았다.

영국 친구 윌리엄은, 영국 사회의 특징이 무어냐고 묻는 나에게 간단히 대답했다. 실용주의에 기초한 합리성이라고. 그래서일까, 영국에는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계몽사상가는 많았으나 독일의 칸트나 헤겔에 견줄 만한 형이상학적 철학자는 없었다.

‘비틀즈’라는 대중음악의 달인은 있어도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고전적인 음악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하는 철학자요 수학자이자 실천적 행동가인 버트런드 러셀만 하여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글을 남겼을 뿐, 복잡하고 난해한 철학을 논하는 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의 영광도 사라질 때가 왔다. 20세기 초반,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의 위상에 엄청난 변화가 왔다. 한때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의 약진이 눈부셨다. 그러나 런던은 여전히 세계 최상급 대도시이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국제금융의 중심지이다. 뉴욕을 필두로, 싱가포르, 홍콩과 더불어 세상을 움직이는 돈줄인 것이다.

‘아편전쟁’ 개전을 결정했다. 아편 밀매에 종사하는 무역상들의 로비로 인해,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이 ‘더러운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전쟁으로 인하여 청나라는 제국주의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바람에 청나라라는 울타리를 믿고 의지했던 조선이 덩달아 무너지고 말았다. 다른 나라의 보호를 기대한다는 것은 한없이 어리석은 일이다.

사원 한쪽에는 3천 명도 넘는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있다. 각기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사회적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들이다. 아이작 뉴턴이라든가 찰스 다윈, 스티븐 호킹 같은 과학자도 있고, 윌리엄 피트, 파머스턴, 윌리엄 글래드스톤과 윈스턴 처칠 등 유명한 정치가의 이름도 발견된다.

비엔나는 선망의 도시다. 향기로운 문화도시다. 이곳은 화가 클림트가 활동한 곳이며, 심리학을 인류에게 선사한 프로이트의 고향이다.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한 곳이다.

비엔나를 가장 비엔나답게 만든 것은 고전음악이었다. 음악의 물결이 잔잔히 흐르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와 말러의 숨결을 이곳저곳에서 느낄 수 있다. 도심을 산책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음악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비엔나의 카페는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이 글을 고풍 있는 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끼적였다. 비엔나 시민에게 카페는 ‘제2의 거실’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시내에는 약 1,200개 카페가 성업 중이다. 2011년, 유네스코는 이 도시의 카페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먼저 잔에 커피를 반쯤 붓고 우유를 넉넉히 따른다. 그 위에 생크림을 얹고는 카카오 가루를 뿌린 것이다. 300년 넘게 이어진 전통의 비엔나커피이다. 본래는 ‘아인슈페너’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라는 뜻이다.

파리의 위대함은 무엇일까. 이 도시는 귀족과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파리가 상류층의 취향을 배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강조점은, 평범한 시민들도 이곳에서는 주인 행세를 하며 산다는 사실에 있다. 파리 시민들은 골목길에서 이웃을 만나 정답게 수다를 떤다. 또 아름다운 뤽상부르 공원으로 가서 귀족처럼 우아하게 피크닉을 즐긴다. 프랑스혁명의 도시답게 파리는 일반 시민의 것이다.

프랑스인 입장에서 보면 노트르담 대성당은 특정한 종교기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 1천 년 동안 프랑스가 겪은 역사적 경험의 총체가 응축된 역사의 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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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라 얘들아

[정산보고]
44,700
하루키 翁 노르웨이 숲 제외,
노인과 바다, 분노의 포도, 무기여~~
3권은 책 상태 불량 매입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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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대학교(University)는 어원상 일반인도 참여하는 ‘조합’이란 뜻이다. 카를대학교의 역사를 보아도 조합이란 표현이 맞는 거였다.

체코는 카를대학교를 통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발전한 새로운 이론과 주장을 수용했다. 얀 후스처럼 출중한 인물이 나온 것도 개방적인 국가 간 문물교류의 결과였다. 예부터 개방과 자유는 대학의 생명줄이었다.

이 대학의 졸업생 가운데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많았다. 특히 근현대의 탁월한 문인들이 많았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비롯해 프란츠 카프카, 카렐 차페크, 밀란 쿤데라가 대표적이다. 릴케와 카프카는 현대 독문학계의 큰 별이었다.

차페크는 사회비판 정신이 넘치는 작가였다. 쿤데라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로,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신음하는 인간존재의 비극을 탐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현대 문학계의 최고 거장으로 정평이 있다.

브라헤는 탁월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덴마크인으로 성격이 괴팍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 번은 사촌과 결투하다가 코가 잘렸단다. 그래서 황동으로 만든 코를 달고 다녔다. 브라헤는 최후의 순간도 극적이었다. 갑자기 방광이 터지는 바람에 운명했다고 전한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준비했다는데, "그는 현명하게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는 기이한 글귀였다.

프라하 시절, 청년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가 브라헤의 문하로 들어왔다. 케플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프라하로 온 것이었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했다. 또한, 스승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행성이 타원형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것이 ‘행성운동’의 제1법칙이다. 그 밖에도 그는 면적과 속도가 보존된다는 내용의 ‘행성운동’ 제2법칙도 발견했다. 또, 행성과 태양의 거리와 운동 주기에 관한 제3 법칙도 알아냈다. 케플러는 평생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다 쓸쓸히 사망했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재확인한 이는 영국의 뉴턴이었다.

프라하의 봄
자유를 향한 프라하의 행진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을 기억한다. 1968년 8월이었다. 소련군을 선두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탱크가 프라하를 침략했다.

체코 공산당은 공산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목표는 민주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었다. 동구 공산권의 맹주 소련은 당황했다. 그들은 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과 함께 체코를 압박했다. 이에 대항하여 체코 지식인들은 이른바 ‘2천어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시민운동으로 맞섰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얀 후스의 후계자임이 명백했다.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한 5개국이 20만 명의 연합군을 편성해 프라하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삽시간에 체코 개혁파를 숙청했다. 개혁파로 분류된 50여만 명의 당원도 체코 공산당에서 모두 제명되었다.

‘프라하의 봄’을 꽃피운 작가 출신 대통령 하벨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축구로 유명하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팀이 있어서다. 그런데 이 도시는 현대사의 깊은 암울을 간직하고 있다. 청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좀 든 시민들은 스페인의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1892~1975)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히틀러와도 거래한 인물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우파를 총동원해 스페인 내전(1936~1939)을 치르기도 하였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종군했다. 그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은 많은 이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드리드에서 교수형을 받고 죽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드리드에서는 도저히 제 명대로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끔찍한 혹평인가.

내가 가장 주목한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이 그림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이 유명한 걸작 앞에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게르니카는 지명이다. 그것도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바스크라면 스페인에서도 소수민족이 사는 특별한 지역이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군을 지원하던 히틀러의 독일 공군이 이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 삽시간에 2,000여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피카소는 사후에야 조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었던 이 화가에게도 이처럼 꼿꼿한 일면이 있었다. 조선 시대 선비를 떠올리게 하는 꼬장꼬장함이 아닌가.

역시 스페인 화가였던 고야는 조국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을 때를 잊지 못했다. 그는 침략군에게 직접 저항을 표시할 만큼 용기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침략군이 물러난 다음, 고야는 과거의 비참한 광경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그는 1808년 5월 3일에 벌어진 프랑스군의 학살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에서 무고한 양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역사책을 읽어보면 어디서나 끔찍한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고야와 피카소처럼 전쟁의 비극을 날카롭게 고발한 화가는 별로 없었다.

침략자들은 금과 은에 걸신이 들린 마귀처럼 아즈텍과 잉카의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수천만을 헤아리던 원주민을 강제노동으로 내몰았다. 금과 은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고통을 받던 원주민들이 몰사했고, 그에 더하여 유럽에서 건너온 각종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원주민들은 한두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거의 멸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스페인 사람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끌고 와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착취한 금은 보배를 이용해 새로운 산업을 육성한 것도 아니고, 전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스페인의 침탈로 인해 위대한 잉카 문명이 사라졌고, 그들이 앞장섰던 종교전쟁을 통해 유럽의 분열은 더욱 골이 깊어졌다.

1930년대에는 내전의 고통도 겪었다. 그때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스페인을 찾았다. 마침 그가 쓴 기행문이 남아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작가는 황량하고 쓸쓸한 스페인의 풍경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과 패잔병이 가득한 도시의 골목길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돈키호테가 말하고자 하는 것
때는 스페인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홀연 세르반테스라는 작가가 등장했다. 그는 작중 인물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 사회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예리하게 분석하였듯, 돈키호테와 그의 하인 산초는 곧 스페인의 원초적인 초상이었다.

돈키호테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저돌적인 행동파라고 분류하기 쉽다. 사람들은 사색적인 햄릿의 반대편에 돈키호테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세트의 평가는 달랐다. 그는 돈키호테야말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스페인의 혼이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라는 말이다.

첫째, 눈앞의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보이는 것도 지워야 한다. 그 대신에 보이지 않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 스페인 미술의 거장들이 걸어간 길에서 배운 바이다. 마드리드에 오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점이다.

둘째, 마드리드에서 내가 만난 역사의 거인들은 뚜렷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삶을 구속하는 기성체제의 비판자들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곤욕을 치렀고, 세상은 그들을 곧 망각했다. 그러나 얼마 뒤 새 세상이 밝아올 때면 그들은 다시 찬란하게 부활했다.

유럽에는 흥미로운 속담이 하나 있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창조했다." 많은 사람의 눈에 이 나라는 쓸모없는 땅덩어리로 보였다. 그래서 서양 중세의 탐욕스러운 귀족과 성직자들조차 외면했다.

덕분에 역사적 반전이 일어났다. 용감한 평민들이 암스테르담의 개펄을 일궈 옥토로 만들었다. 그들의 이마에서 흐른 구슬땀이 한 뼘 한 뼘 땅덩어리가 됐다. 말이 쉽지 바닷물을 뽑아내고, 파도를 막아 밭을 일구고 마을과 도시를 만드는 작업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시가 지켜온 관용의 전통 때문에 나는 이 도시를 특별하게 여긴다. 그들의 관용은 개방적인 문화 또는 자유의 정신과 안팎을 이룬다. 이야말로 암스테르담의 생명력이 아닐까 한다.

세상 풍조에 무조건 영합하기보다 자유로운 예술정신을 추구했던 렘브란트였다. 그는 성찰적인 화가였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화상은 그의 자서전이었다.

어느 모로 보든 렘브란트는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예술가의 삶이 있었기에, 관용과 자유는 암스테르담을 지배하는 정신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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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1907년에는 자연환경이 또다시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닷물이 이 도시와 북해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였다. 브뤼헤는 문자 그대로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도시 경제가 힘차게 회생하기 시작하였다. 중세 이래 그 물길이 막히고 트이고를 반복할 때마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였다. 역사에 보기 드문 사례였다.

프라하는 날씨가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습도도 낮아서 살기 편하다고 생각한다. 연간 강수량은 한국의 절반 이하인데 7월의 프라하는 기온이 지나치게 높지 않고 공기도 쾌적하다. 사철 다 좋지만, 여름의 프라하는 최상의 여행지가 아닐까 한다.

19세기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굴지의 공업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산품 중에는 정교한 무기도 포함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군도 체코제 기관총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68년 1월, 프라하에서 일어난 자유화 운동은 소련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되었다. 온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보다 10여 년 앞서 역시 동구권의 일부였던 헝가리에서도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1956년 10월). 김춘수 시인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지어 소련의 군홧발에 짓이겨진 헝가리 자유화 운동의 비극을 노래했다.

프라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분수령으로, 소련 다음으로 강성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 동독이 붕괴했다.

이어서 체코와 헝가리 및 폴란드 등 동구권 전체가 흔들렸고 곧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프라하는 소련의 지배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의 출발점이자 동구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종착지였다고 말해도 좋겠다.

얀 후스의 저항 정신이 살아 있는 곳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 앞에서 진실 즉, 정의를 결코 부정하지 말라!

후스의 옥중서신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불의한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서야말로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 점이 문제가 되어 결국 콘스탄츠공의회에 불려갔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1415년).

그런데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후스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추구했다. 『교회론(Deecclesia)』과 『강론집』 등의 저술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영혼의 구원은 신이 예정한 대로 이뤄진다. 따라서 돈을 주고 구매한 <면벌부>(면죄부) 따위로는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당연한 말이었으나, 당시에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후스는 <면벌부> 판매에 골몰하던 가톨릭교회와 정면충돌하였다.

루터와 후스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다행스럽게도 루터 곁에는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가 있었다. 루터는 활자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곧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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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유네스코는 브뤼헤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구시가지 전부, 곧 430헥타르(약 130만 평)가 그 영예를 누린다. 이 도시를 찾은 방문객으로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성모교회였다. 이 교회의 첨탑 높이는 무려 115미터이다. 혹자는 이 첨탑이야말로 브뤼헤 상인의 자존심을 상징했다고 말한다. 그럴 법한 주장이다. 사이먼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벽돌 건물이다.

한 마디로, 브뤼헤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유럽의 교차로였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브뤼헤의 훌륭한 입지 조건이 한몫했다.

1400년경 브뤼헤 인구는 최대 20만 명을 헤아렸다. 현재 인구가 12만 명 수준임을 고려할 때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시라도 5~6만 명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브뤼헤는 단연코 중세 최고의 도시라 해도 손색이 전혀 없었다.

인구로만 단순 비교를 하자면 그때 우리나라의 한양(서울)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다만 질적인 차이가 컸다. 한양은 통치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던 데 비해 브뤼헤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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