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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백제는 두 차례에 걸친 위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대륙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고, 국제 무대에서도 그 영유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1. 무령왕의 출생과 즉위 과정

『삼국사기』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차남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옳지 않다. 동성왕은 20대 초반인 479년에 왕위에 올라, 약 22년간 재위하다가 40대 중반에 죽었다. 그런데 이 때 무령왕의 나이는 이미 40살이었다. 따라서 동성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일 수 없다.

아이는 축자국의 각라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문에 아이의 이름을 도(島, 일본어로 시마 또는 사마)라 하여 도군(島君)이라고 불렀다. 무령왕을 ‘사마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2. 대국화(大國化)를 이끌어낸 무령왕과 백제의 위상 강화

(서기 462~523년, 재위기간:서기 501년 11월~523년 5월, 21년 6개월)

무령(武寧)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며, 곤지의 양자이다. 462년 왜로 가는 도상인 각라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융이며, 생시에는 주로 사마(斯麻)왕이라고 불렸다.

523년 5월, 그는 62세의 나이로 의욕에 가득 찼던 생을 접어야 했다. 백제의 대국화에 열정을 쏟던 그였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원래 ‘붕’은 황제의 죽음을 가리키고, ‘훙(薨)’은 왕의 죽음을 가리켰다. 따라서 무령왕에게 ‘붕’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자국의 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일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젠 그런 시각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역사는 감정의 대상이 아니고, 학문의 대상이다. 역사를 감정의 골 속에 가둬두면 둘수록 우리의 역사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임나에 대한 해석 문제는 이제 감정적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임나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1. 희대의 책략가 성왕의 불운과 추락하는 백제

(?~서기 554년, 재위기간:서기 523년 5월~554년 7월, 31년 2개월)

성(聖)왕은 무령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명농이다.

1. 위덕왕의 생존 전략과 국제 정세의 급변

(서기 525~598년, 재위기간:서기 554년 7월~598년 12월, 44년 5개월)

위덕(威德)왕은 성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창이다.

어쩌면 성왕과 위덕왕의 진짜 목적은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불교를 지렛대로 삼아 왜국 조정에 친백제파 세력을 키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백제가 왜에 불교를 전파한 행위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모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1. 늙은 혜왕의 왕위 찬탈과 짧은 재위

(?~서기 599년, 재위기간:서기 598년 12월~599년 12월, 1년)

혜(惠)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계(季)다. 그는 위덕왕과 함께 성왕을 보필하였으며, 왕자 시절부터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1. 왕권 강화를 위해 불제자를 자처한 법왕

(?~서기 600년, 재위기간:서기 599년 12월~600년 5월, 5개월)

법(法)왕은 혜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이다(『수서』는 그를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정황으로 봐서 혜왕의 아들이 맞을 것이다).

1. 한낱 서동에서 왕으로 등극한 무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북사』와 『수서』는 위덕왕의 아들로 쓰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 것이고, 『수서』는 『북사』의 기록을 따른 것이기에, 무왕의 혈통은 『삼국사기』와 『북사』의 내용 중에 어느 것을 옳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무왕은 여느 왕손과는 성장과정이 크게 달랐다. 대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요, 제왕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마를 캐는 서동(薯童)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는 무왕의 왕위 승계 과정이결코 평탄치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2.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 무왕과 격변하는 국제 정세

(?~서기 641년, 재위기간:서기 600년 5월~641년 3월, 40년 10개월)

무왕은 위덕왕의 서자이며, 이름은 장(璋)이다. 600년 5월에 법왕이 죽자,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고 쓰고 있다.

1. 해동증자 의자왕과 백제의 패망

(?~서기 660년, 재위기간:서기 641년 3월~660년 7월, 19년 4개월)

의자(義慈)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무왕 재위 33년(632년)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641년 3월에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중국의 현인증자(曾子)와 같다 하여 ‘해동증자’로 불리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성충은 부여씨로서 백제 왕족 출신이며, 문리에 깊고 병법에 밝아 가히 하늘이 낳은 재사라 할 만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꾀가 많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조선상고사』에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 동예)

백제사에 등장하는 낙랑은 대륙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으로 구분될 수 있다. 대륙의 낙랑군은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한 4군의 하나이고, 한반도의 낙랑국은 흔히 동예(東濊)로 불리던 나라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편자들은 대륙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을 혼동하여 서술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의 왜곡된 역사 서술에서 기인한 것이다.

1. 다루왕의 조직 정비와 영토 확장

(?~서기 77년, 재위기간:서기 28년 2월~77년 9월, 49년 5개월)

다루(多婁)왕은 온조의 맏아들로 이름과 태어난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0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어 도성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다가 서기 28년 2월에 온조가 죽자 백제 제2대 왕에 즉위하였다.

1.기루왕의 유화정책과 끝없이 이어지는 천재지변

(?~서기 128년, 재위기간:서기 77년 9월~128년 11월, 51년 2개월)

기루(己婁)왕은 다루왕의 장남이며, 언제 출생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다루왕 6년(서기 3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그로부터 44년 뒤인 77년에 왕위에 올라 51년 동안 재위한 사실을 감안할 때, 태어난 뒤 곧바로 태자에 책봉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용은 원래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사령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남겼지만,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용은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달랐다. 서양의 드래곤은 인간이 물리쳐야 할 괴물로 인식되는 반면, 동양의 용은 인간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왕의 상징으로 쓸 만큼 신령스럽게 여겨졌다. 그런 탓에 서양에선 용을 물리친 자가 왕이 되고, 동양에선 용의 힘을 빌린 자가 왕이 되었다. 즉, 동양에서의 용은 곧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용은 인충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구석을 가졌다. 즉 머리는 낙타와, 뿔은 사슴과, 눈은 토끼와, 귀는 소와, 목덜미는 뱀과, 배는 큰 조개와, 비늘은 잉어와, 발톱은 매와,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1.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딛고 왕위에 오른 개루왕

(?~서기 166년, 재위기간:서기 128년 11월~166년 모월, 약 38년)

개루(蓋婁)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며, 출생 연도와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서기 128년 11월에 기루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위 계승 과정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기루왕의 장남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기루왕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으로 보아 정실이 아닌 후실의 소생, 즉 서자일 것이다.

1. 초고왕의 영토 확장 노력과 신라와의 세력 다툼

(?~서기 214년, 재위기간:서기 166년 모월~214년 10월, 약 48년)

초고(草古)왕은 소고(素古)왕이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개루왕의 아들인 것은 분명하나 장자는 아니며, 서기 166년에 개루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1. 털북숭이 거인 구수왕의 20년 치세

(?~서기 234년, 재위기간:서기 214년 10월~234년 모월, 약 20년)

구수(仇首)왕은 귀수(貴須)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초고왕의 장남으로 214년 10월에 초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구수왕은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했다고 전한다.

1. 모래 반쪽 인생 사반왕

(생몰년 미상, 재위기간:서기 234~234년)

사반(沙半)왕은 구수왕의 맏아들이다. 구수왕이 234년에 죽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그는 왕위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의 묘호 사반은 ‘모래 반쪽’이라는 뜻인데, 그의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모래 반쪽에 비유될 정도로 짧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1. 고이왕의 왕위 찬탈과 왕실의 분란

사반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고이(古)왕에 대해 『삼국사기』는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의 동복 아우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

2. 고이왕의 대륙 진출과 백제의 위상 정립

(?~서기 286년, 재위기간:서기 234년 모월~286년 11월, 약 52년)

고이왕은 개루왕의 방계 후손이며, 이름과 출생 관련 기사는 남아 있지 않다. 234년에 구수왕이 죽고 어린 사반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1. 대륙백제의 영토 확장에 주력한 책계왕

(?~서기 298년, 재위기간:서기 286년 11월~298년 9월, 11년 10개월)

책계(責稽)왕은 청계(靑稽)라고도 불리었으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고이왕의 아들이기는 하나 장남은 아니었으며,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 분서왕의 짧은 치세와 안타까운 죽음

(?~서기 304년, 재위기간:서기 298년 9월~304년 10월, 6년 1개월)

분서(汾西)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298년 9월에 책계왕이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걸출하여 책계왕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전한다.

1. 비류왕의 한성 장악과 백제의 분열

고이왕 대 이후 백제는 대륙 정책을 가속화하여 산동 지역의 대방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고이왕의 대륙 정책은 그의 아들 책계왕과 손자 분서왕에게로 이어져 대륙에서의 백제의 힘은 한층 강화되었다. 고이왕이 대륙 진출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무엇보다도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행위를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를 통해 상쇄시키려는 의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계왕이 대륙에서 전사하고, 분서왕마저 낙랑의 자객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이왕 대에 시작된 대륙 정책은 힘을 잃고 만다.

2. 분단 상황에서 이어진 비류왕의 40년 치세

(?~서기 344년, 재위기간:서기 304년 11월~344년 10월, 39년 11개월)

비류왕은 구수왕의 방계 혈통으로 보이며,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낄 줄 알았다고 전한다. 그는 원래 평민이었다가 분서왕 재위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분서왕이 죽자 무력을 앞세워 한성을 장악하고 왕위에 올랐다.

1. 베일에 가려진 계왕의 즉위와 죽음

(?~서기 346년, 재위기간:서기 344년 10월~346년 9월, 1년 11개월)

계(契, 또는 설, 결, 글로도 발음됨)왕은 분서왕의 장남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무술이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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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운한 어린 군주 구이신왕과 팔수태후의 난정(亂政)

(서기 405~427년, 재위기간:서기 420년 3월~427년 12월, 7년 9개월)

구이신(久尒辛)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며, 팔수왕비 소생이다.

1. 비유왕의 전방위 외교와 나제동맹

(?~서기 455년, 재위기간:서기 427년 12월~455년 9월, 27년 9개월)

비유(毗有)왕은 전지왕의 둘째 아들이며, 왕후 해씨 소생이다.

곤지(?~477년)
곤지(昆支)는 비유왕의 셋째 아들이며, 누구 소생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462년, 개로왕 8년) 4월 기사에 처음 보이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개로왕에 의해 왜로 보내진 것으로 되어 있다

1. 개로왕의 파란만장한 삶과 한성시대의 종말

(?~서기 475년, 재위기간:서기 455년 9월~475년 9월, 20년)

개로(蓋鹵)왕은 비유왕의 맏아들로 근개루왕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이름은 경사(慶司)이다.

1. 위기의 백제와 살얼음판 위의 문주왕

(?~서기 477년, 재위기간:서기 475년 9월~477년 9월, 2년)

문주(文周, 혹은 汶洲)왕은 비유왕의 둘째 아들이며, 개로왕의 아우이다[『삼국사기』는 그가 개로왕 대에 재상격인 상좌평의 직위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태자나 왕자가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1. 세 근(斤)짜리 어린 왕 삼근왕의 서글픈 치세

(서기 465~479년, 재위기간:서기 477년 9월~479년 11월, 2년 2개월)

삼근(三斤, 혹은 임걸(壬乞)이라 하고, 『일본서기』엔 문근(文斤)으로 기록되어 있음)왕은 문주왕의 맏아들로 465년에 태어났다.

1. 왜에서 건너와 왕위에 오르는 모대

삼근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사람은 곤지의 아들 모대(牟大)였다. 『삼국사기』는 모대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 웅략천황 조에 그의 즉위와 관련한 기사가 보인다.

(?~서기 501년, 재위기간:서기 479년 11월~501년 11월, 22년)

동성(東城)왕은 비유왕의 아들이자 개로왕과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차남이며,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이다. 462년에 어린 나이로 아버지 곤지를 따라 왜에 갔으며, 478년 4월에 백제 조정의 요청을 받은 왜왕 웅략천황에 의해 백제 왕에 천거되어 귀국했다.

『삼국사기』는 이 때의 일을 동성왕 10년(488년) 기사에 ‘위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는 짧은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다. 중국 대륙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위나라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위치한 백제를 침략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편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위나라가 백제를 침략했다면, 당연히 배를 타고 공격해와야 하는데, 전혀 그런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위나라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그 경계 안으로 들어가니, 모대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군대를 통솔시켜, 오랑캐의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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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이 근초고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근구수왕의 이름을 들먹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내용은 371년의 평양성 공략을 주도했던 사람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모두 외척에게 정사를 맡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은 그들에게 정사를 맡겨두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 의문은 한반도 백제와 대륙백제로 나뉜 당시 백제의 영토 관리 체제를 이해해야만 풀린다.

한반도 백제는 당시 외척으로서 힘을 행사하고 있던 진씨 일족이 정사를 맡아 다스리고, 대륙백제는 왕이 직접 다스리는 형태를 이해해야만 『삼국사기』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근구수왕도 왕위에 오른 뒤로는 근초고왕이 그랬듯이 한반도 백제는 외척인 진씨 일족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대륙백제의 정사를 주관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1. 침류왕의 짧은 치세와 불교의 전파

(?~서기 385년, 재위기간:서기 384년 4월~385년 11월, 1년 7개월)

침류(枕流)왕은 근구수왕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근구수왕이 384년 4월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침류왕 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한 불교 전파이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도착한 것은 384년 9월이었다. 침류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크게 우대하고 공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는 마라난타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침류왕의 초청으로 왔다는 뜻이다.

1. 진사왕의 불행한 죽음과 백제의 위기

(?~서기 392년, 재위기간:서기 385년 11월~392년 11월, 7년)

진사(辰斯)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관미성은 대륙백제의 황하 이북 지역 최대 거점이었다. 때문에 관미성의 상실은 대륙백제의 힘이 황하 이남의 산동 지역으로 축소되었다는 의미였다(‘대륙백제의 위축과 관미성’ 참조).

이 한수 문제는 삼국사 전체의 구도를 바꿔놓을 수 있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때문에 한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곧 삼국사 자체를 다르게 해석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삼국사기』에 한수(漢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본기」 온조 편의 백제 도읍지와 관련된 부분이다. 여기서 이 책의 편찬자들은 한수를 지금의 한강으로 보도록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대륙백제에 대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능비문에서는 지금의 한강을 ‘아리수’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한수를 모두 한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하수(河水, 황하)를 모두 한반도의 한강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392년에 점령한 ‘한수’ 북쪽의 11개 성은 모두 하수(황하) 북쪽에 위치한 백제의 요서군에 속한 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 그의 수군 4만이 상륙한 곳이 아리수(한강) 이북이었다는 것은 396년 당시에도 한강 이북이 백제의 땅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392년에 광개토왕이 장악한 한수 이북의 10개 성이 한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392년에 광개토왕이 한수 이북을 장악했다면 굳이 396년에 한강 이북을 재차 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 굴욕의 왕 아신왕과 백제의 위축

(?~서기 405년, 재위기간:서기 392년 11월~405년 9월, 12년 10개월)

아신(阿莘)왕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며, 진사왕의 조카이다. 『일본서기』에는 아화왕(阿花王)이라고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아방(阿芳)’이라고도 불렀다고 하였고, 『양서』에는 이름이 ‘수(須)’라고 되어 있다.

왜에 전해진 백제의 문화는 비단 칠지도와 같은 상징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제가 일본사에 큰 의미로 남는 것은 백제의 발달된 선진문화와 학문의 전래였다. 거기에는 백제인으로서 일본에 건너가 학문과 기술을 전함으로써 일본인의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3. 아신왕과 광개토왕의 지속되는 라이벌전

아신왕과 광개토왕은 둘 다 391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광개토왕은 18세, 아신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모두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들은 젊은 혈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자를 자처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선제 공격을 가한 쪽은 광개토왕이었다.

2. 온건주의자 전지왕과 해씨 세력의 득세

(?~서기 420년, 재위기간:서기 405년 9월~420년 3월, 14년 6개월)

전지(腆支)왕은 아신왕의 맏아들로 『양서』에는 이름이 영(映)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직지왕(直支王)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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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서들을 살피면서 나는 정말 한숨을 쏟아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기록들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백제는 영원히 한반도 남부의 별 볼 일 없는 소국으로 기록될 것이고, 우리는 백제의 진면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역사와 문화와 영토를 논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백제의 진짜 모습은 이 책에서 그려진 백제보다 훨씬 크고 대단하다는 것이다.

백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인이다. 우리는 아직 그 거인의 발 크기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겨우 다리 한쪽을 발견하고 백제라는 거인을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떠벌려댄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한 일이다.

나는 그 거인을 초대하기 위한 초대장을 만드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백제인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1. 대국(大國)의 위업을 달성한 근초고왕

(?~서기 375년, 재위기간:서기 346년 9월~375년 11월, 29년 2개월)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차남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삼국사기』 편자들은 대륙백제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판단하여 고의로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근초고왕의 재위 20년까지의 기록이 전무한 것은 바로 그가 이 기간 동안 대륙백제의 안정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수 막고해가 진격을 만류하며 태자에게 말했다.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1. 호방한 성격의 근구수왕과 숙적 고구려

(?~서기 384년, 재위기간:서기 375년 11월~384년 4월, 8년 5개월)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며 왕비 진(眞)씨 소생으로, 375년 11월에 근초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죽은 이듬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이 11월에 죽었다면, 이듬해 1월을 원년으로 삼았을 수 있기 때문에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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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마침내 혁명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남쪽으로 진출한 견훤은 892년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고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요,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불성(또는 사벌, 상주)에 자리를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의 이름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만년에 그는 적장자인 장남 신검을 태자로 세워야 한다는 신하들의 중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넷째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는 무리한 행동을 강행했다.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935년 3월에 신검이 반정을 일으켰고, 그는 금산사에 유폐되어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태봉을 세운 궁예(857~918년)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제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고 한다.

1. 비운의 왕 경애왕과 서라벌로 진군한 견훤

(?~서기 927년, 재위기간:서기 924년 8월~927년 11월, 3년 3개월)

경애(景哀)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복 아우이고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위응이다.

1. 마지막 왕 경순왕과 천년왕국의 몰락

(?~서기 978년, 재위기간:서기 927년 11월~935년 11월, 7년)

경순(敬順)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경순왕은 곧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 항복을 알리는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개골산의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그가 삼베옷을 입고 지냈다 하여 마의태자라고 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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