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행자
짧은 글 긴 생각

상상 속에서 나는 누구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나만의 상상 속 여행을
자유롭게 떠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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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에서 나는 누구든 될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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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을 감고 나만의 상상 속 여행을 자유롭게 떠나 보세요.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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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화재와 개보수가 낳은 명성

도시 구획과 그 기본 틀은 다문화의 온실이 되기에 충분했지만 도시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 건설된 도시 조지타운에는 구하기 쉬운 나무로 지은 목조건물들이 들어섰다. 그 때문에 화재에 취약했다.

수상가옥에서 살아간 중국인 이주민들의 신산한 삶

여러 인종과 종족이 모여 살던 조지타운보다 뒤늦게 건설된 곳이 제티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페낭으로 몰려든 중국인 이주민들은 돈이 없어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라서 마땅한 거주지를 찾지 못했다. 그들 중 일부는 조지타운의 숍하우스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몰아닥친 이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숍하우스는 주로 2층에 있던 방을 쪼개서 임대를 주었다.

좁은 방에 여러 명이 살아야 할 정도로 주거 환경은 열악했고, 화재나 각종 재난에 취약했다. 더 늦은 19세기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수상가옥 집성촌인 ‘클랜 제티’로 모여들었다. 현지에서는 그들의 성을 따서 다양하게 부른다. 림 제티(Lim Jetty), 츄 제티(Chew Jetty), 옹 제티(Ong Jetty), 탄 제티(Tan Jetty) 같은 식이다. 주로 중국 푸젠성과 광둥성에서 온 사람들이기에 현재 베이징 중국어와는 발음이 다르다.

클랜 제티는 바닷속 깊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뗏목 같은 구조물을 올려 평평하게 만든 후에 지은 집들이다. 지상에서 보면 다른 집과 별 차이가 없다. 물결에 따라 살짝 움직이는 듯한 느낌은 있지만 전기도 끌어다 놓고 수도도 있어서 얼핏 보면 수상가옥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1957년까지는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고 하니, 그 물 위에서의 삶이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처럼 깊은 가난이라고 할까?

이들 중에는 대표적인 화인 거상으로 거듭나 페낭 지역사회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유럽인, 아랍계 거상들과 친분을 쌓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회관을 만들고 비밀결사를 유지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스스로 자치를 했다.

대표적인 이주민 가문 중 하나인 구씨 집안에서 만든 일종의 회관이 쿠콩시(Khoo Kongsi)다. 1906년에 완공된 뒤 지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정식 명칭은 용산당(龍山堂) 쿠콩시(邱公司)다. 외부적으로는 조상을 섬기기 위한 사당이자 모임 장소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비밀결사를 유지하기 위한 회합 장소로 쓰였던 회관이다.

아마도 중국인 화상(華商)의 유산 가운데 압권은 청켕퀴의 페라나칸 맨션과 총파츠의 블루맨션일 것이다. 청켕퀴는 중국인 사회의 수장을 의미하는 카피탄 시나이자 주석 광산 개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호였다.

1897년에 착공해서 1904년에 완공된 그의 저택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비싼 염료였던 인디고블루를 써서 짙푸른색으로 외벽 전체를 칠해 블루맨션으로 불린다. 원래는 대지 1490평에 건평 955평이었다고 하나, 그의 후손들이 이 저택을 지키지는 못해서 지금은 푸른 본채 건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세기 말 인도네시아 메단 부동산의 75퍼센트를 소유했던 거상 총아피의 딸 퀴니 창(Queeny Chang)이 페낭에 놀러왔을 때, 열세 살의 소녀는 페낭 거부들의 생활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 와서야 페낭 부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인생을 어떻게 즐기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이 모든 걸 보니 메단의 우리 집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라고 썼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쿠칭은 밀림으로 가득 찬 거대한 섬인 보르네오로 향하는 관문이다. 흥미롭게도 쿠칭은 ‘고양이의 도시’로 불린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고양이가 많기 때문이다. 거리와 상점을 활보하고 다니는 고양이들의 모습은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쿠칭(Kuching)’이라는 발음 자체가 말레이어로 고양이를 가리키는 ‘쿠칭(Kucing)’과 같다.

다만 이 이야기들은 그리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 말레이어라도 말레이반도의 말레이어와 쿠칭의 말레이어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쿠칭에서는 고양이를 ‘푸삭(pusak)’이라고 부른다. 그럼 쿠칭이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왔을까?

쿠칭이 크게 두 가지 사건을 기점으로 도시로서의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

첫 번째는 1820년대에 안티몬 광석이 발견되면서 유럽인들의 눈에 띈 것이고, 두 번째는 1819년 인근 싱가포르섬이 영국 동인도회사에 의해 자유무역항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브루나이의 왕자 마코타(Makota)가 1824년에 최초의 마을을 조성하게 되는데, 바로 쿠칭의 시작이다.

사원 건물이 중요한 이유는 19~20세기에 걸쳐 화인 공동체 간의 동질성과 소속감을 강화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화인 자녀들을 교육하는 기능, 새로운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직업을 알선하는 기능, 상인들 사이의 정보 교환 및 협상 공간을 제공하는 기능, 명절에 행사가 치러지는 광장의 기능 등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화인이 외지에 정착하게 되면 가장 먼저 짓는 것이 사원 건물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사원은 쿠칭의 전체 화인들을 통합하기 위한 ‘수산정 복덕사 대백공묘(Tua Pek Kong temple 壽山亭福德祠大伯公廟, 줄여서 대백공묘)’로 1820년대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어로 ‘뜨리마 까쉬(terima kasih)’는 ‘고맙습니다’라는 뜻이다. ‘마뚜르 누운(matur nuwun)’은 자바어로 ‘고맙습니다’라는 의미다. 족자카르타(Yogyakarta)에서 ‘뜨리마 까쉬’ 대신 ‘마뚜르 누운’이라고 말하면 현지 주민들은 여행객에게 좀 더 친근함을 표현할 것이다. 이렇듯 족자카르타는 자바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릴 만큼 과거 자바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한 도시 중 하나다.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지역에 자리 잡은 도시다. 도시의 북쪽에 위치한 메라피 화산의 영향으로 활화산의 위협이 상존하지만, 상대적으로 기름진 평야지대에 위치한 장점도 있다.

족자카르타는 신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다는 뜻의 ‘족자’와 도시를 뜻하는 ‘카르타’가 만나 ‘안전한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인구 40만 명의 작은 도시다.

족자카르타에는 26개의 종합대학이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 최고 명문대학이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가자마다대학(Universitas Gadjah Mada)과 유명 예술대학 중 하나인 족자카르타 예술대학(Institut Seni Indonesia Yogyakarta)이 있다. 더욱이 족자카르타는 물가가 저렴하고 우수한 교육 시설이 있어, 전체 인구의 20퍼센트가 학생일 만큼 ‘학생의 도시’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족자카르타 전통문화의 중심지, 말리오보로 거리

관광지로서 세계적 명성이 높은 발리섬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지역 중 하나다. 이에 비해 족자카르타의 별칭은 ‘인도네시아의 숨은 보석’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 곳곳에 자바의 전통문화와 연관된 문화자원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바섬 공예의 백미는 2009년 10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도네시아 바띡’이다. 바띡은 ‘점이나 얼룩이 있는 천’이라는 뜻의 자바어 암바띡(ambatik)에서 유래한다. 뜨거운 밀랍을 이용한 일종의 염색 기법이다.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의 불교와 힌두교 유적

환태평양 조산대, 즉 불의 고리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지진, 화산, 해일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나라다. ‘세계 최대 단일 불교 유적’,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불교 유적’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가진 보로부두르 사원은 사일렌드라 왕국의 멸망과 함께 약 1000년 동안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대나무 숲에 있는 사원’이라는 뜻의 믄둣 사원에는 자바 조각의 최고 걸작인 석불삼존상이 있다. 약 3미터 높이의 석가모니 본존불이 중앙을 차지하고, 오른편에 관을 쓴 관음보살상이 있다. 왼편에 있는 반가상은 문수보살로 추정된다. 사원 앞에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관계있는 수령 400년의 보리수나무가 우뚝 서 있다.

자바섬 힌두 사원의 백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프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이 있다. 프람바난 사원은 3개의 동심원 광장으로 설계되었고, 총 224개의 크고 작은 사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프람바난 사원은 중부 자바의 힌두 문화를 배경으로 한 산자야 왕국의 문화유산이다. 9세기 중반 산자야 왕국의 라카이 피카탄(Rakai Pikatan) 왕에 의해 축조되었다. 하지만 16세기 ‘불의 산’이라 불리는 머라피산의 분화와 화산재 그리고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 사실상 방치되어 있었다. 1918년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복원이 시작되었고, 주 신전을 비롯해 18개의 신전이 1953년에야 복원되었다. 하지만 2006년 5월 27일 지진으로 일부 신전이 다시 무너졌다.

종족별·지역별 분리와 차별로 인해 인도네시아는 ‘자바인의 나라’로 불린다. 따라서 족자카르타의 음식은 인도네시아 국민 음식으로 여겨지지만, 여전히 이 지역 음식은 중부 자바의 지역적 색채가 강하다. 앞서 소개한 구득 외에도 디저트와 간식으로 분류되는 자잔 파사르(Jajan pasar) 역시 족자카르타를 대표하는 지역 음식이다.

자잔 파사르는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파는 각종 간식이라는 의미다.

여행객 대부분은 이 섬의 주도인 덴파사르를 방문할 일이 거의 없다. 입국 시와 귀국 시 발권되는 티켓에 약자로 ‘DPS (DENPASAR)’로 기재되거나 기장의 안내방송에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덴파사르 국제공항이라는 명칭과 달리, 이 공항의 실제 위치는 발리 남부 지역의 투반(Tuban)에 위치한다. 관광객의 대다수는 덴파사르에 도착하지만 덴파사르를 방문한 적이 없는 이상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발리주는 8개 군과 1개 시로 구성되는데, 이 1개 시가 주도인 덴파사르다.31 덴파사르는 발리 전체 인구의 대략 4분의 1인 80만 명이 거주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에게 인식되지 않는 미지의 도시이기도 하다.

서구인들은 일찍이 이 섬을 ‘신들의 섬’으로 명명했고, 이는 발리의 신비한 풍경과 특색 있는 전통문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관광지로 성장하는 데 일조했다. 이에 반해 덴파사르는 공공시설, 상업시설, 교육시설 등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적재적소에 제공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신들의 섬에서 발리인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덴파사르다.

바둥 뿌뿌딴, 저항을 상징하는 국가 유산

인도네시아 말루쿠 군도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는 16세기 네덜란드와 영국 등 유럽 강대국이 아시아 지역에 눈을 돌리게 한 작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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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낭은 일찍부터 유럽 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가 이식된 것은 물론이고 인도, 중국, 아랍계 이주민들의 디아스포라가 짧은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척의 배로 페낭을 점령한 영국

1786년 8월 11일 영국은 페낭을 점령했다. 사실상 네덜란드나 스페인, 포르투갈에 비하면 영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영국은 당시 페낭을 지배하던 끄다(Kedah)의 술탄과 협약을 맺었다.

다인종, 다종족 도시의 형성

열대우림이 우거진 미개척지였던 페낭에서 비교적 먼저 건설된 곳이 조지타운이다. 조지타운 건설 초기의 과제는 늪지대를 메우는 것이었다.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 영국 해협식민지 정부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계약노동자들을 투입했다. 여기에 유럽 아르메니아인까지 들어가 다인종, 다종족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고푸라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종다양한 신과 동물, 자연물을 조각하고 명도가 높은 색으로 화려하게 색칠을 했다. 어쩌면 밋밋한 조지타운 도시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을 신전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누구나 쉽게 사원을 잘 찾아오라고 눈에 확 띄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호화찬란한 색은 역시 인도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스리 마하마리암만 사원의 고푸라 역시 페낭의 다문화적이고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데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

가톨릭이 처음 전해진 후 조정의 박해로 신학교를 개설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의 학생들도 페낭까지 와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페낭신학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양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12 1855년 이만돌, 김요한, 김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을 시작으로 1884년까지 여러 명의 신학생이 페낭에서 사제 교육을 받고 돌아갔으며, 이 중 12명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 페낭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으며, 교정에는 페낭신학교 교수였던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있다.

조지타운의 페낭교구박물관에는 박해를 받아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와 ‘황사영 백서’ 사본이 있다.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1775~1801)이 신유박해(1801)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소상히 적은 기록이다.13 지금은 페낭신학교의 옛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거니플라자와 거니파라곤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신학교의 일부였던 성요셉학교만 보존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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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처음에 베일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알 물라타민(al-mulathamin, 베일의 전사)으로 불렸다.

왕조의 수도요, 베르베르족의 활동무대인 마라케시의 상징성 때문에 모로코 왕가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마라케시의 베르베르족에게서 맞이한다고 한다. 이 땅의 원주민에 대한 배려이자, 국가 통합을 위한 정책으로 보인다.

쿠투비아 모스크

황토색 흙벽돌로 쌓아올린 가로와 세로 높이의 균형비가 1대 5인 직사각형 미너렛은 6층 구조이며 높이가 77미터에 이른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첨탑의 표준형으로 모로코 수도 라바트의 하산탑,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탑과 함께 알모하드 왕조의 3대 걸작 미너렛 중에서도 으뜸이다.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데하르 양식의 대성당 종탑의 원형이 바로 쿠투비아 미너렛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확인했다. 쿠투비아는 안달루시아에서 감탄하며 눈에 익혔던 소박하고 투박한 무데하르 건축 유행의 원조인 셈이다. 그러니 더욱 애착을 갖고 쿠투비아를 응시했다.

우주의 순환과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는 이슬람 철학을 명료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삶의 공간 그 자체가세계문화유산

쿠투비아 모스크를 돌아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가면 그 유명한 제마 엘프나(Jemaah al-fna) 광장이다. 오전에는 옥외시장이 열렸다가 천막이 걷힐 무렵부터 세계인이 즐기는 광장 무대가 된다. 위치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인 오후 느지막한 시각, 그저 인파의 물결을 따라가면 된다.

이곳은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곳이다.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삶의 역동성과 활력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무대. 민중 예술의 위대한 현장이다. 주변에 특출난 유적지나 진귀한 예술품이 없음에도 이렇게 삶이 살아 있는 공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의 안목에 찬사를 보낸다.

종교를 뛰어넘는포용력이 만들어내는 매력

사하라의 전통과 명예를 이어받은 마라케시의 강인함과 포용성은 도시 구석구석에서 보이지 않는 매력을 발산한다. 500년간 대대로 마라케시에 살고 있다는 유대인 보석상 유후디를 만났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신비와 애절함  
아라비아반도에서 도도한 새 물결로 출발해 지중해를 따라 북아프리카를 돌아온 이슬람의 파고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에 첫발을 내딛는다. 711년이었다. 이슬람은 비잔틴과 페르시아를 껴안고 아프리카 대륙에 상륙해 이집트 신화, 아프리카의 원초적 순수함까지 포용하며 코르도바에 둥지를 틀었다. 그 후 약 800년 동안 이슬람은 유럽 땅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빛깔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코르도바는 에스파냐 남부안달루시아 지방의 역사 도시다.
다양한 문화가 아프게 섞이면서 아름다운조화를 이룬 문명 공존의 현장이다.
152년부터 로마, 572년부터 서고트족의 지배를 받았다,
8세기 이후 약 800년간이나이슬람 왕조가 이 도시의 주인이었다.
15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600년간 가톨릭이 중심이다.
한때 코르도바는 이슬람의 도시로 세상의 중심이었다.
힘과 권위만을 내세우는 오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로맨스와 예술, 학문과 과학이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지식과 지혜의 심장이었다. 그리스·로마의 철학과학문적 성취를 집대성했으며,
이슬람의 수준 높은 과학을 유럽에 전해주었다.
이로써 유럽은 오랜 암흑에서 벗어나비로소 르네상스의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나는 지난 겨울에 코르도바를 다시 찾았다.
중세 도시 코르도바가 내뿜는 깊은 역사의 입김과진한 오렌지 향에 취해 오랫동안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슬람 예술가들에게 건축만큼 좋은 캔버스는 없었다. 넓디넓은 캔버스인 천장, 벽, 바닥에 한 줌의 여백도 남겨둘 여유가 없었다. 허용된 캔버스에 온 기량을 쏟아부었다. 천장에는 꾸란 서체 벽화를 그려넣고, 벽에는 아라베스크 타일을 붙이고, 바닥에는 아라베스크 카펫을 깔았다. 그래서 아라베스크 문양을 바라보면 신비와 절절함이 묻어난다.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할둔은 "지중해는 유럽인이 배 한 척 띄울 수 없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다"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안달루시아 문화 특유의 공존 정신인 ‘콘비벤시아Convivencia’ 전통의 결과였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주변 문화를 쉽게 받아들였고, 수준 높은 과학 기술과 절충의 미가 빛을 발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메스키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대표적인 건축물이 메스키타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다. 785년에 지어지기 시작해 11세기에 완공된 세계 최대 이슬람 사원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메스키타를 보기 위해 서둘러 과달키비르강 언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은 코르도바 주교좌 대성당이 되어 있는 곳이라 유럽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잇고 있었다.

두 문명과 종교의 화해와 충돌의 현장

1236년 6월 29일, 코르도바는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 3세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에스파냐 이슬람 왕조의 정신적 요람이었던 메스키타는 성당으로 탈바꿈했다. 그렇지만 500년간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사랑받던 메스키타 앞에서 정복자들마저 넋을 잃었다.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5세는 1523년 이교도의 정신적 상징을 헐어 없애는 대신 개조해서 대성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비록 영혼은 뺏겼지만, 메스키타 일부는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돔이 잘려나가고 세속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모스크 입구 아치문은 콘크리트로 막아버렸고, 천국을 상징하던 모스크 내부의 파티오와 정원의 분수도 헐리거나 모양이 바뀌었다. 새로운 천국을 만들기 위해 이교도의 천국을 막아버린 셈이다. 천국은 똑같은 천국일 텐데…

무엇보다 코르도바를 살찌운 것은 화해와 관용이었다. 당시 이슬람 왕정은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과 토착민에게도 종교 구분 없이 능력과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다른 생각과 가치를 받아들이는 문명은 번성하고, 자신의 가치만을 고집하며 소수민족을 억압한 문명은 소멸하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인류 사회에 가르쳐준 도시가 코르도바였다.

코르도바를 차지한 에스파냐 왕들은 과달키비르 강변에 있는 아랍식 목욕탕 자리에 아랍 궁전을 본떠 알카사르 요새를 짓고, 마지막 이슬람 왕조가 있던 그라나다를 함락했다. 1492년 1월의 일이었다. 이로써 에스파냐의 무슬림과 유대인은 쫓겨나거나 강제로 개종당했다. 바로 그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에스파냐의 시대가 열렸다.

그라나다라는 이름은 왠지 고급스럽고 꽤 낭만적으로 들린다. 어릴 때 최고급 국산 자동차 이름이었기 때문일까.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문화의 깊이와 현실의 풍요가 느껴지는 고도. 그 도시 가운데를 다로강이 동서로 흐른다. 아름다운 남부 유럽의 전형적인 풍광이다.

스페인 남부를 안달루시아라 부른다.
무어(Moor)라 불리는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이곳에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남겨놓았다. 약 800년간 이베리아반도에심어놓은 아랍 문화의 토양에 꽃을 피운 에스파냐 문화를안달루시아 문화라고 부른다. 두 문화가 공존할 때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인류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슬픈 역사가 도시 언저리마다 웅크리고 있기는 하지만.
안달루시아 문화의 중심 도시는 세비야, 코르도바,
그라나다 3대 역사 도시다. 지중해 안달루시아 문화를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그라나다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교도 조상들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그라나다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는 데 특별한 의미를 두는 시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미 그라나다 시민들의 재산이고 문화유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슬람 문명에 대한 존중이나 이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안달루시아에 머무는 동안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이다.

구시가를 형성하는 다로강 북쪽으로는 고풍스러운 멋을 뽐내는 무어풍 빌라와 저택이 잘 가꾸어진 정원과 과수원 사이로 줄지어 있다. 강 반대편 언덕에 보이는 것이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토록 꿈꾸어왔던, 그 이름만으로도 황홀한 알함브라다.

알함브라,인류 최고의 보석

그라나다는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조(1238~1492)의 수도였다. 13세기에 들어서자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국가들은 내분과 영토 분쟁으로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종교적 단합보다는 개별 권력이 앞서면서 군소 이슬람 국가들은 기독교 국가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다. 전세는 점차 역전되어갔다.

기독교 세력에 함락되어가던 무슬림들이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가 알함브라 궁전이다. 그래서 그라나다는 알함브라의 도시다. "그라나다라는 에메랄드에 알함브라라는 빛나는 오리엔트산 진주가 박힌 인류 최고의 보석." 15세기 한 아랍 시인의 표현이다.

역사는 보아브딜과 알함브라의 작별을 "무어인의 탄식(El Suspiro del Moro)"으로 기록하고 있다.

"알함브라를 잃은 자여, 불쌍하도다. 나 같으면 알함브라를 버리고 알푸하라스 언덕에서의 삶을 택하기보다는, 알함브라를 지키며 내 무덤으로 삼았을 텐데"라며 보아브딜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승승장구하던 기독교 세력이 시시각각 침략의 손길을 뻗쳐올 때, 최후를 앞두고 유언장을 쓰듯 비감한 손길로 빚어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다. 그래서인지 알함브라를 세세히 살펴보면 비감함과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유난히 붉은 낙조가 알함브라를 물들인다. 태양이 붉게 지던 그날, 그라나다도 어느 무명 시인의 통곡처럼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불운의 왕이여!

죽을 용기가 없어 그라나다를 떠나는 못난 왕이여!

남아 있는 인생이 무어 그리 대단할진데,

그까짓 왕관 하나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라나다를 떠나가느뇨!

이슬람의 궁성이 함락되던 그해, 1492년 이사벨 여왕이 후원하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는 에스파냐의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한편 이슬람의 술탄 보아브딜은 에스파냐에서 쫓겨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건너갔다. 711년, 그의 선조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할 때 의기양양하게 건넜던 바로 그 길이다. 모로코의 이슬람 도시 페즈에 정착한 뒤에도 보아브딜은 꿈에도 알함브라를 잊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 페즈의 초라한 궁전은 지금도 알함브라를 닮아 있다.

아프리카만큼 총체적 무지와편견에 갇혀 있는 대륙도 드물 것이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두려운가상 공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꼽으라면,
‘원시‘, ‘미개‘, ‘야만‘, ‘블랙(black)‘처럼문명의 반대편에 있거나 ‘말라리아’, ‘에이즈’, ‘에볼라‘ 같이불편하고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보라면,
제법 배운 사람들은 최초의 인류인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들먹이고 나서는,
‘21세기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무한한 자원의 보고‘라는말을 보탠다. 이런 편견을 바꿔줄 수 있는 곳이바로 아프리카의 자존심, 팀북투다.

문명(文明)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개념으로, 인류는 동일한 진보 과정을 겪는다는 지극히 유럽 중심적인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한다. 이어 19세기 사회진화론자에 의해 ‘발전’ 개념이 문명 담론에 적용되면서 백지 상태에서 ‘야만(구석기시대)-미개(신석기시대)-문명(청동기 이후)’으로 나아간다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오로지 사회·경제적 조건을 기준으로 인류의 가치와 삶의 수준을 측정했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19세기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갔다.

아프리카는 ‘기록의 역사’보다는 ‘기억의 역사’ 전통이 강한 사회다. 기록은 처음부터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큰 데다가 후일 권력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수정되고 미화되고 조작될 수 있지만, 공유된 기억은 가락 하나 숨소리 하나 틀릴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형·무형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통을 이어가는 수백 수천만 개의 공유되는 기억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젠네 대모스크,서아프리카의 랜드마크

젠네 모스크는 말리 왕국의 중심 도시 젠네에 13세기경에 세워진 이슬람 대사원이다. 말리 왕국의 이념적 성격과 국가 규모, 경제적 풍요를 짐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젠네 모스크 건립에 관한 기록은 팀북투의 연대기 작가 아브드 알사디(Abd al-Sadi)가 1655년경에 집필한 《수단의 역사(Tarikh al-Sudan)》라는 책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 유럽인들에게 이 도시는 실제 존재하는 도시라기보다는 전설과 신화 속 환상의 도시로 여겨졌다. 그래서 팀북투라는 말 자체가 ‘아주 머나먼 곳’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석재가 부족한 환경에서 진흙벽돌로만 이 거대한 모스크를 축조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젠네 모스크는 말리 왕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진흙벽돌 모스크다.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수단-사하라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며,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말리를 이은 서부 아프리카 문명의 전성기:송가이 왕국

송가이 왕국(1000~1591)은 원래 말리 왕국의 속국이었으나 말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서아프리카에서 번성했던 아프리카 이슬람 국가다. 말리 왕국을 멸하고 송가이 왕국을 세운 사람은 손니 알리였다.

가장 성스러운 장소와 가장 세속적인 장소, 가장 진보적인 담론의 장소가 공존하는 현장이 바로 이태원이다. 거리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언어가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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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바닷길로 불과 1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지중해가 오랫동안 유럽 남부 바다와 동의어로 쓰였지만, 튀니지를 보고 나면 북아프리카 지중해가 얼마나 아름답고 역사적으로 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지 확연히 깨닫게 된다.

한니발의 위엄과 포부가 살아 있는 카르타고가 특히 매혹적이다.

바브엘바하르, 즉 ‘바다의 문’이다. 아마도 지중해의 바닷물이 이 문을 통해 들락날락한다고 믿었던 시절에 붙여진 이름인 듯싶다.

부르기바는 튀니지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31년간이나 통치한 튀니지 현대사의 중심 인물이다. 용기와 지성을 겸비한 그는 오로지 조국 튀니지를 위해 존재한 인물이었다. 아랍 국가 최초로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남녀평등과 여성의 사회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지도자였다.

장기 집권은 스스로가 이룩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1987년 11월 7일,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치매 증세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산송장이나 다름없었음에도 의사가 통치 불능 판정을 내릴 때까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2001년 여름 다시 튀니스에 갔을 때 거리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11월 7일의 거리.’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날이었다.

아랍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이븐 할둔을 배출한 곳이 이 자이투나대학이다. 현대 사회학의 아버지이자 독보적인 역사 서술 체계를 확립한 이븐 할둔은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서양 인문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학자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 벤 알리는 일상적인 대화는 아랍어로 하지만, 정치적인 이슈나 학술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프랑스어가 편하다고 한다.

350년간 튀니지를 지배한 오스만튀르크의 영향보다 76년간(1881~ 1956) 식민 통치한 프랑스의 힘이 더 크다. 프랑스의 문화 이식 정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페니키아, 로마, 반달족, 초기 기독교, 비잔틴, 아랍, 오스만튀르크, 프랑스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며 끊임없는 부침을 겪었던 튀니지의 역사와 문화를 한번쯤 정리해볼 수 있는 곳이다.

바로도 박물관

시디부사이드,유럽 대문호들이 사랑한 지중해 해변 마을

시디부사이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지중해 언덕의 푸른 마을이다.

하얀 돔을 올린 자우이야 아부 사이드 모스크다. 시디부사이드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이 마을의 사연을 담고 있는 현장이다. 주인공은 바로 아부 사이드 칼라브 번 야프야 엘 타미미 엘 베지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슬람 성자다.

"아저씨, 총각이에요? 왼쪽 귀에 꽃 한 송이 꽂으면 시집가고 싶은 거래요."

아! 그렇구나!

한니발의 도시 카르타고

티레의 왕 벨루스의 딸 디도는 오빠 피그말리온이 왕위에 올라 사랑하는 남편 시카에우스를 숙청하자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올라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기원전 814년의 일이다.

현지 뱃사람들은 그녀를 엘리사-디도라 부르며 항해의 수호여신으로 받든다.

지중해 너머로 멀리 로마를 바라보고 있는 포에니 선착장만이 세계 제패를 꿈꾸며 진군했던 한니발의 영광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할 뿐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이다. 한니발은 보병과 기병, 그리고 40마리의 코끼리 부대와 함께 피레네산맥과 알프스를 넘는 과감한 행군을 택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파라다이스 함마메트

튀니지에 오면 가까운 지중해 해변 도시 함마메트도 빼놓을 수 없다. 수도 튀니스에서 자동차로 동남쪽 해변을 따라 1시간 거리에 있다. 함마메트는 ‘목욕’을 뜻하는 아랍어 함맘(Hammam)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시디부사이드를 예찬했던 앙드레 지드, 오스카 와일드, 조르주 베르나노스, 클레 같은 예술가들의 휴양지가 되면서 함마메트는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근대 아랍 도시로

알제리로 가는 여정은 그리 쉽지는 않다. 서울에서 11시간을 날아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다시 4시간을 더 가야 알제 공항에 닿는다.

처절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가진 순박한 사람들

끝없이 이어지는 인파 사이로 여기저기 골목길이 나 있었다. 각양각색의 물건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한 흥정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제리 독립을 위해 애쓰던 독립투사들이 1957년 프랑스의 공격을 받고 순교한 곳이라고 했다. 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잠시 묵념을 했다. 우리도 독립의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가를 떠올리며….

알제리는 8년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에 학살당한 희생자 수를 200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피해자 숫자가 다소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10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알제리 인구가 90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20세기 중후반에 인류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나는 프랑스가 인권과 자유를 지키는 톨레랑스의 나라라고 말하는 담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축구 영웅 지단, 소설가 알베르 카뮈,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도 알제리 출신 피에누아르였다.

독립 영웅 에미르 압둘 카디르 동상과 알제리대학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한 푼이라도 싸게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에미르 압둘 카디르(Emir Abdul Kadir) 동상이다. 19세기 알제리 서부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며 조국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투사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 튀니지는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고대 로마를 살찌운 젖줄로우리의 관심을 끈다. 2011년 거대한 민주화 물결과함성으로 지구촌을 울렸던 ‘아랍의 봄‘
민중 시위의 산실이기도 하다. 아직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민주화의 목적지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북아프리카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가장 민주화 열망이 강하고여성의 인권이나 사회참여 수준이 높으며, 개방성과 융합성이앞서 있는 매력적인 나라다. 아랍 시민혁명 이후에도대부분의 아랍 국가가 권위주의 군부정권으로 회귀하거나내전으로 고통받을 때, 튀니지에서는시민사회단체 4곳이 협력과 대화, 조정을 통해 사태를 수습해다원적 민주주의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바로 이 ‘튀니지 국민 4자 대화기구‘가201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서쪽에 위치한 알제리는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는 아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는잘 모르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고향이고,
《이방인》, 《페스트》의 배경이 된 땅이기 때문이리라.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지드는 알제리를 비롯한아프리카 일대를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소설과 시,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역사적인 대문호들의 활동 무대였던 알제리는 오늘날그리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1962년에 132년간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로,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국가 원수가 수시로 바뀌는 등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알제리는아프리카의 투명한 햇빛과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로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일어서기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씻어내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북아프리카 지중해의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사연이 진주처럼하나씩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거리를 지나 알제리대학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19세기 이전에 편찬된 귀중본만 100만 권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북아프리카 최대 도서관 중 하나다. 그러니 알제에 와서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운이 좋았는지 도서관장의 특별 배려로 전 세계에서 단 한 부만 남아 있다는 1936년 판 카뮈의 《형이상학, 기독교, 신플라톤주의Christian Metaphysics and Neoplatonism》라는 빨간 표지의 책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카뮈의 알제대학교 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그때의 짜릿한 기분이란, 정말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문화는 섞일수록 발전한다

물론 알제 주변에 이슬람 유적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유적도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고대 유적지가 티파사다. 티파사라면, 카뮈의 산문 <티파사에서의 결혼>이란 작품이 탄생한 무대가 아닌가.

알제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티파사로 가는 해안길은 풍요와 은총으로 가득했다. 흑갈색 땅에서는 옥수수가 자라고 그 사이로 푸른 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티파사에 도착했다.

카뮈가 거닐었을 길을 걸으며 단절된 역사의 향기에 취해본다.

알제에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알제리 남쪽 도시 타만라세트까지 2000킬로미터에 이르니, 알제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보다 길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사하라를 고향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토착 투아레그족이나 베르베르족의 전통과 관습보다 로마나 유럽의 해양 문화가 더 강하게, 더 빨리 스며들 수밖에 없는 북아프리카 문화의 특성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문화는 섞일수록 발달하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할수록 더 아름답게 빛난다는 사실을 북아프리카 최고의 해안 도시 알제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마라케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와닿은 느낌은여유로움과 독특한 문화의 향기였다.
괜히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근엄한 이슬람의 눈총도 없고,
사하라의 주인공인 베르베르의 자유분방함과사막 유목전사의 위엄이 넘치는 도시였다.
마라케시는 참으로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훌륭한 현대 박물관이나갤러리, 콘서트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이 넘치는나날을 경험할 수 있는지 마라케시는 직접 보여주었다.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아틀라스 산맥 기슭의 하우즈 분지에 있는오아시스에 들어선 도시가 바로 마라케시다.
예부터 끝없는 사하라 사막이 시작되는 관문이고,
지중해와 대서양으로 나아가는 낙타 대상의거점 도시였다. 마라케시의 흥망성쇠는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 바가 크다.

북아프리카 이슬람 왕조의 중심 도시였던 페즈에 도읍을 정한 이드리스 왕조가 거의 쇠망해갈 무렵, 11세기 초 마라케시를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알모라비드 왕조다. 사하라 사막의 여러 베르베르족이 연대하여 흥기한 알모라비드 왕조는 독실한 이슬람 지도자 압달라 빈 야신(Abdallah Bin Yassin)의 영도 아래 승승장구하여 남부 및 동부 모로코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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