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 생각할 거리가 있다. 설문대할망은 늘 바쁘다. 한라산 따위를 뚝딱 만드는 능력의 신이라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터였다. 그러나 설문대할망은 늘 무언가를 한다. 빨래를 하고, 자식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바느질을 한다. 한라산을 만든 것도 아수라발발타 주문을 외우거나 지팡이 한 번 휘두른 마법의 결과가 아니다. 맨손으로 직접 몸을 움직여 산을 쌓았다. 그리스의 신은 심심해서 인간을 만들었고 심심해서 인간 세상을 간섭했다. 패악질도 서슴지 않았다. 하나 우리의 설문대할망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종일 일만 한다. 인간에게 해코지한 적도 없다. 설문대할망이 일으킨 기적은 노동의 산물이다. 제주에서는 한라산을 만든 거대 신도 부지런히 몸을 써야 한다. 설문대할망은 근면과 성실의 신이다. - P72

"당제는 매인심방(신당의 전속 무당)이 진행하고 제주는 이장이 합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의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리면 대단합니다. 제물 올리는 할망만 250명이 되고 구경꾼까지 합치면 800명이 넘어요. 할망들이 제물 올리는 석단도 자리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백주또 할망 입으시라고옷도 올리고, 옥돔도 올리고, 떡이랑 삶은 달걀도 올려요. 네 발 짐승은 절대 안 올립니다. 백주또 할망이랑 소천국 할방이 갈라섰던 이유 아시죠? 소잡아먹었다고 쫓아냈잖아요." - P74

여기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우선 이형상 1653~1733년이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이형상은 제주 역사를 살피다 보면 수시로 마주치는 이름이다. 이 책의 단골 출연자이기도 하다. 이형상은 170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해 1년 남짓 근무했는데, 재임기간 동안 제주 구석구석을 순찰한 기록을 그림과 함께 남겼다. 18세기 초반 제주 모습을 가장 정확히 묘사했다는 탐라순력도」다. 이형상 말고도 목사 여러 명이 순력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만큼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형상은 오름을 보고 "한라산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오름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 이슬 구슬의 형국" (남환박물>이라고 묘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교조주의자였다. 유학자의 눈에는 섬 곳곳에 널린 신당과 사찰이 불온하게 비쳤다. 예부터 제주에는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이 있었다 - P76

추사는 위리안치받았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친 유배처에 가두는 형을 이른다(현재 말끔하게 복원해놓은 추사 유배지도 탱자나무 울타형을리를 두르고 있다). 형벌대로라면 추사는 가시나무 담을 쌓은 누옥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추사는 갇혀서만 살지 않았다. 앞서 적었듯이 향교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멀리 제주읍성까지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면회객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추사의 오랜 벗이었던 초의선사는 추사때문에 여섯 달을 제주에서 머물렀고, 추사의 양자는 꼬박 1년을 곁에서 머무르며 아비를 봉양했다. 서울에서의 일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제주에서도 추사는 사람 만나고 선물 받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름의 일상을 살았다. - P102

원악도遠惡島라는 낱말이 있다. 국어사전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가 어려운 섬‘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전이 담아내지 못한 뜻이 있다. 원악도는 한때 제주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최악의 유배지로서 제주를 이를 때 원악도라고 불렀다. 제주가 서울에서 제일 먼 섬이므로 제주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처벌이었다. 제주로 유배를 내려오는 죄목은 대부분 역모였다. 하여 제주 유배인은 대부분 정치범이었다. 한때 제주에서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금기어였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성공은 역모를 뜻할 수 있어서였다. 제주에서 성공을 대체한 단어는 자산이었다. 지금 작산은 다 큰어른을 가리킨다. - P103

조선시대 제주는 온 나라 죄인의 유형지였다.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요, 가장 두려운 것은 뱀과 지네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라." 왕조의핏줄이었으나 제주에 유배됐던 이건 1614∼1662년이 『제주풍토기」에서 남긴 말이다. 추사처럼 왕족도 밥 타령을 했다. - P103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제주에 유배된 인물은 230명이 넘는다. 성호 이익 1681~1763년은 광해군에 반대했다가 제주에서 위리안치 형을 받았고, 이익을 제주로 내쫓았던 광해군 1575~1641년도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뒤 제주에서 위리안치 형을 받았다. 광해군은 엄격히 통제된 삶을 살다 제주살이 3년 만에 죽었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1607 ~ 1689년은 제주 유배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여든세살에 제주로 유배 왔다. 쉰다섯 살의 추사는 견줄 바가 못 됐다. 일흔네 살에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1833~1906년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1861~1939년도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 P103

맛이 가장 좋을 때는 1~2월이다. 무게가 3킬로그램이 넘는 대방어도 한겨울에 올라온다. 그러나 모슬포 방어축제는 10~11월에 열린다. 아직 철이이른데 방어축제를 여는 이유를 모슬포 수협에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변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철에는 축제를 안 해도 잘 팔리니까 제철이아닐 때 축제를 해야지요." 모슬포 방어축제는 제주를 대표하는 특산물 축제다. 축제가 열리는 사나흘 동안 20만 명이 다녀간다. 그러고 보니 추자도참조기축제도 얼마 전까지 한여름에 열렸다. 그때도 "조기 철이 아닌데 어떻게 축제를 여느냐" 물었더니 "지난 겨울 잡아서 냉동한 조기를 판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특산물 축제가 이런 식이다. 모슬포에 가면 방어를 드시라. 대신 한겨울에 드시라. - P106

풍토가 사람을 낳는 것인지, 대정은 사람도 거칠다. ‘대정 동생이‘라는 말이 있다. 동생이는 망아지라는 뜻이다. 대정 사람이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이라는 뜻으로, 비하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바람도 모질고 땅도 모질고 바다도 모질어서 사람도 모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대정 땅이 겪은 기구한 사연을 돌아보면 팔자라는 걸 떠올릴 수밖에 없다. - P106

사람들은 송악산을 부남코지라고 부른다. - P107

송악산익숙한 이름이지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다. 이름처럼 소나무가 많지는 않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절울이오름이다. ‘절‘이 물결을 가리키므로, 물결 우는 오름이라는 의미다. 파도가 송악산 아랫도리 절벽과 부딪쳐 울리는 소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름과 파도는 어울리는 쌍이 아니지만 송악산은 예외다. 오름 남쪽 아랫도리가 그대로 해안절벽을 이룬다. 앞바다 가파도에서 바라보면 송악산은 거대한 절벽처럼 서 있다. 물결 우는 오름이라. 아마도 오름 중에서 가장 시적인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 해안절벽에 밴 역사를 알고 나면 ‘절울이‘라는 이름이 가슴에 못처럼 와서박힌다. - P107

대신 칠성판 위에 두개골 하나와 등뼈 하나씩 놓고 대충 짝을 맞췄다. 한 벌의 유골이 갖춰지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나씩 뼈를 맞춰 모두 132기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 공동묘지가 백조일손묘조상은 백 명, 그러나 자손은 하나인 무덤, 조상은 다르지만 한날다.
한시에 같이 죽었으니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도 피눈물이 난다. - P113

아름다운 풍경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고 했던가. 일제의 만행을 목격했을 때는 화가 치밀었고, 웅덩이만 덩그러니 남은 양민학살의 현장에서는 몸서리를 쳤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무덤 앞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슬픔을 품은 송악산 자락이 무너지고 있다. 파도만이 설움에 겨워 오늘도 운다. - P113

사려니라는 이름을 다시 보자. 사려니라는 낱말도 다른 제주 방언처럼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솔아니가 사려니로 변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솔아니는 ‘숲 안‘ 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숲의 안쪽 방향을 이르는 의미가 아니라 숲 안쪽에 있어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포개져 있다. 한라산 깊은 숲에서도 안쪽 숲이니 인간이 범하지 못하는 땅, 나아가 경계 너머의 세상을 가리킨다. 제주도 안내 책자에서 사려니숲길을 ‘신성한 숲길‘ 이라고 소개하는 까닭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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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오름은 어리목 코스와 영실 코스가 만나는 교차점이자 두 코스의 종점이다. 윗세오름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붉은오름(1,740미터), 누운오름(1,711미터), 족은오름(1,698미터) 세 오름이 윗세오름을 이룬다.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어서 윗세오름이다. 한라산 동쪽 자락 해발고도 1,100미터 지점의 삼형제오름이 기준이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까지는 4.7킬로미터 거리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어승생악과 달리 윗세오름은 한라산 안에서도한라산에 속한다. - P30

요즘에는 오름에도 산이 많다. 산방산, 영주산, 단산, 송악산, 군산, 고근산 등등 산이라 불리는 오름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산이었던 오름은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면서 산으로 개정된 오름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단산은 바굼지오름, 송악산은 절울이오름, 수월봉은 노꼬물오름이었다. - P42

실제로 산방산은 신의 영역이었다. 소 풀고 촐 비러(꼴 베러) 다니던 생활의 영역이 아니었다.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신성한 공간이었다. 오름을 신격화하는 여러 설화가 산방산에서 다 모인다. 군산과 고근산처럼 산방산도 금장지葬地다. 묘를 쓰면 화를 입는 땅이라는 뜻이다 - P43

굴사는 고려 말 혜일선사가 창건했고, 조선 후기에는 초의선사 1786~1866년가 굴사에서 수도했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 중이던 벗 추사 김정희1786~1856년 만나러 제주까지 내려와 여섯 달을 머물렀다. 천장 바위틈에서 똑똑 약수가 떨어지는데, 이 약수에 여신 산방덕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 P45

산방산 동굴에 살던 여신 산방덕은 마을청년 고성목의 품성에 반해 신의 지위를 버리고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여신을 탐낸 사또가 고성목에게 누명을씌워 죽인다. 남편을 잃은 산방덕은 동굴로 돌아와 바위로 변했고, 그때부터 바위에서는 물이 떨어졌다. 산방굴사 약수를 ‘산방덕이의 눈물‘이라 이르는 연유다. 약수 한 국자 떠 마시면 5년을 더 산다는데, 약수 핑계로 날마다 산방산을 오르면 5년은 더 살 것 같기도 하다. - P45

침식작용과 무관하다. 인간이 고의로 무너뜨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은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모슬포로 이전했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모슬포 일대는 최대 7만 명이 주둔하는 군부대였다. 그 시절 산방산은 대포사격 표적지로 전락했다. 육군은 주변에 마땅한 표적이 없다는 이유로산방산을 향해 대포를 쐈다.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당시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방산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다. - P45

제주도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고, 2007년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고, 2010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 P47

켈파르트Quelpart. 하멜은 제주도를 켈파르트라고 불렀다. 어디엔가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유럽에는제주도를 켈파르트라고 표기한 지도가 있단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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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은 미국이 자랑하는 발명품이다. 1872년 미국 연방정부가 옐로스톤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미국 최초, 아니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 탄생했다. 퓰리처상 수상작가 윌리스 스테그너 1909~1993년가 두고두고 인용되는 문장을 남겼다. "국립공원은 미국이 만들어낸 최고의 아이디어다." 국립공원은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 방법에 관한 최초의 고민이자 최선의 타협이다. - P22

미국은 지금도 국립공원에 불이 나도 일부러 끄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스스로 꺼질 때까지 내버려둔다. 타다 만 나무를 장작으로 쓰지도 않는다. 심지어 곰 몇 마리가 국립공원에 사는지도 파악하지 않는다. 300~500마리로 추산하는 정도다. 인위적으로 번식을 시키거나 보호구역을 정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나겠지만, 곰이 사람을 덮쳐도 일차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곰의 영역을 침범한 건 인간이어서다. 곰은 그래도 종종 시고를 일으켜 대충이라도 개체 수를 확인하고 있다. 사슴 같은 건 아예 신경도 안 쓴다. 그게 자연이어서다.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만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국립공원은 자연을 지키기 위해 인간 스스로 내건 최후의 선언이다. - P22

그렇다면 휠체어 장애인만 탈 수 있는 케이블카를 놓자. 그럼 나도 기꺼이 당신들 편에 서겠다. 장애인을 비롯한 노약자만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는 특별법이 만들어지면 국립공원 케이블카 설치를 찬성하겠다. - P22

아시다시피 한라산(1,950미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라산이라는 이름도 유례없는 높이에서 유래했다. 한라산은 은하수를 끌어당기는 산이라는 뜻이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에는 하늘과 맞닿은 거룩한 존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한라산과 지리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아시는지.
두 산 모두 여신이 주인이다. 한라산은 설문대할망이, 지리산은 천왕성모가 지켜준다. 차이점도 여기에 있다. 한라산에는 할머니가 계신데, 지리산에는 어머니가 있다. 우스개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할머니는 생명의 근본을 상징하고, 어머니는 생활의 터전을 의미한다. 한라산과 지리산(1,915미터)이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다. 두 산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다른 것이다.  - P22

한라산을 유랑한 기록이 많지 않은 것도 물리적 거리에 더해진 심리적 거리 때문이다. 바다 건너 제주에 들어야 하고, 제주에 들어서도 이 험한 산을 올라야 하니 여간한 마음가짐으로는 엄두도 못 냈으리라.
그렇다 보니 한라산은 자꾸 멀어지고 자꾸 높아져 은하수와 닿는 데까지 올라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거리 덕분에 제주도는 우리나라 유일의 세계자연유산이 될 수 있었다. 거리 두기의 역설이다. - P22

2017년 제주는 30년 만에 만세동산(1,608미터)에 말을 풀어놓았다. 6월부터 9월까지 300킬로그램 무게의 말 열 마리가 만세동산에서 조릿대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말 무게가 300킬로그램이라는 것은 말 한 마리가 하루에 조릿대 18킬로그램을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말은 보통 하루에 제 무게의 6퍼센트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는다. 언뜻 만화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가장 생태친화적인 방법이다. 만세동산에 말을 풀어놓던 시절에는 조릿대가 오늘처럼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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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말에는 여진 말이 많이 섞여있다
풍부한 어휘를 위해 자주 사용해야한다.

1. 주을온천: 주을은 뜨거운 물이란 뜻으로 말 자체에 온천이란 의미가 포함되어있는 여진 말이다.
2. 아오지탄광: 아오지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말로 불붙는 돌이란 뜻의 여진 말이다.
3. 성이 세 자인 동무도 있다. 먼지는 언급이 없다.

[187p]

혁명가는 마르크스 철학의 어떤 명제를 지키기 위해 운동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와 사회의 변혁을 위하여 한 시대의 사상을 수단으로 채용하는 것이지요.

[2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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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나서 내가 무대로 올라갔어요. 중·고등학생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한마디 했지요. "여러분들이 이렇게살고 있지만 남쪽의 우리 어린이들도 씩씩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다만여러분들이 자랐을 때 서로 증오하지 않고 서로 미워하지 않도록 하는 책임이 우리 어른들한테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여러분들한테 가서는 절대로 안되겠다는 것을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라고요. - P196

협동농장단위의 농촌 - P197

북한에서는 기술혁명 사상혁명 문화혁명을 3대혁명으로 꼽고 있고그중에서도 문화혁명을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P198

예술가는 비반복적 존재

아무튼 문화혁명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말한다죠.
그래요. 북에서는 예술가를 ‘비반복적 존재‘로 규정하죠. 모든 예술행위는 상투적이거나 반복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 P198

그러나 동시대문학임에는 틀림없고 그 1차목표가 분단현실의 극복에서 찾아져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남한의 현재의 문학은 ‘갈등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죠. 인간이 갖고 있는 복잡한 세계를 다양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남쪽문학의 강점이에요. 북의 문학은 혁명전통을 고수하는 맥락에서 유지되고 또 상당기간 그렇게 버텨나가겠죠 - P199

분단시대의 작가는 남이든 북이든 민족이익을 최우선에 놓고 창작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표현방식이나 주제, 구성이야 다양성의 차원으로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 P200

월북작가들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다 만났는데 다들 잘 살고 있어요. 이기영 선생네 가족은 7칸짜리 아파트에서, 글쎄 한 60여평되는 아파트지,  식구가 많으니까, 박태원씨 부인은 옛날식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고 계시드만. 거실 하나, 방 두개그리고 부엌이 있는 우리로 치면 약 20평 정도되는 아파트죠. 대부분의 작가들은 3칸짜리 아파트가 표준이에요. - P202

남북독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싶다 - P203

이때에는 서울을 떠나 전라남도의 벽지인 해남에서 농민들과 함께 일하다가 광주로 올라갔지요. 현장문화운동에 종사하면서전라도에서 10년을 살게 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장길산」을 완성했을뿐만 아니라 잊을 수 없는 동지적 인연들을 맺게 되었습니다. 내 문학의 큰 가지의 하나는 전라도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민족과 역사‘를 뚜렷이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 P246

네번째 시기가 광주항쟁이 일어나던 80년에서 89년의 방북하던 때까지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죽어간 벗들과 이름없는 민중들에 대한 피의 부채를 의식하고 스스로 급진적으로 변모해갔던 기간이었습니다. - P246

남과 북을 다 담는 작가가 되고 싶다 - P247

마침 그 소설을 읽은 일본 친구로부터 엽서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문장 중에 "간첩을 인간으로 환원시킨"이라던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간첩‘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통일꾼‘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전환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 P267

인류의 역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진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저는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자본주의는 실로 한 삼백 년 되었고 그에 대처했던 사회주의라고 해봤자 이제 겨우 칠십 년 됐지요?
사람이 생각해내고 제도화한 것들 가운데 우여곡절 없는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 P272

북의 도시와 농촌은 그들 표현대로 "호화롭지는 못해도" 소박하고 깨끗하게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북의 어려움은 ‘자력갱생의 한계‘에서 오는 어려움이지 식구들을 골고루 잘 보살피고 있습디다. 까놓고 말해서 아무리 ‘공산압제‘가 심하다고 한들 설마 제대로 살게 해주지 않는다면 북의 인민이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인민들보다 못해서 40여 년이 넘도록 전쟁도 치르고 복구도 하고 건설도 해오면서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물론 그 종주국 행세를 해오던 소련까지 못해 먹겠다고 나자빠지는 판에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고 버티고 있겠습니까. - P264

사회주의 책 안 읽은 민중이 정말 요새는 더 건강한 것 같습니다. 5월투쟁의 좌절이니, 위기니 하는데 언제 해방 이후 좌절과 위기를 한두 번 겪었나요. 내년에 보시고 내후년에 또 봅시다. 그러면 진짜 맑은물이 대지의 거죽이 아니라 땅 속에 대하처럼 흐르듯이, 숨어 있던
‘민중여론‘이 솟구쳐 나올 겁니다. - P264

가담하고 있는데요. 사실 40년대가 되면서는 일제의 토벌작전이 치열해져서 항일빨치산들은 소부대 활동을 주로 하게 됩니다. 해방 직전에미소는 동구와 아시아에서 해당 나라의 레지스탕스나 빨치산들과 연합부대를 편성하게 되지요. 유고의 빨치산들도 그러했고 베트남의 - P305

호지명과 디엔비엔푸의 명장 보우엔 지압도 미국 OSS의 훈련을 받고 연합군에 편성되어 항일전에 투입됩니다. 이것은 임시정부에 있었던 청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군사훈련이나 한반도 침투를 위한 OSS훈련을 받고 대기하다가 원폭투하로 해산된다는 것을 김준엽, 장준하선생의 수기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 P306

천연두는 남부 중국의 항구를 통하여 유입되어 전쟁과 함께 조선으로옮겨진 것으로 보아 서양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른바 외래의 오랑캐가 갖다준 우환이라는 말이죠. 이 흔적이 내 팔뚝의 우두자국처럼 민중들의 생활 속에는 ‘호구별성‘이라는 굿으로서 남아 있습니다. - P278

우리가 아직도 4·3이나 여순사건을 이념적인 좌우대립의 결과로보는 한, 6·25의 정확한 해명은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전쟁 중이북에서 일어난 어떤 참화에 대한 접근을 통하여 ‘반외세 굿판‘을 한판 벌여볼까 하는 것입니다. - P278

내가 오사까에서 있었던 어느 강연회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의 운명이다"라고 말했을 때에 아마도 조총련계가 분명한 늙은 재일동포 청중이 일어나 "그렇다면 당신은 반쪽짜리 운명에 짓눌린 채 살아갈 것인가?"
하며 항변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반쪽짜리 조국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의 영혼도 마음도 그리고 몸뚱아리도 반쪽일 수밖에 없다는 궁색한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지요. - P279

혁명가는 마르크스 철학의 어떤 명제를 지키기 위해 운동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와 사회의 변혁을 위하여 한 시대의 사상을 수단으로 채용하는 것이지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어떤 명제가 새로운 현실에 대하여 해답을 줄 때에는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혁명의 이론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 P282

마르크스주의의 여러가지 명제가 현실에 맞지 않아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혁명적 원칙과 입장을 포기하는 것을 수정주의라고 하지요.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명제에 대한 해석을 수정했기 때문에 수정주의로 비판되는 것이 아니라그 사상의 혁명적 입장을 포기하여 혁명을 배신했기 때문에 비판된다는 것입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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