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 생각할 거리가 있다. 설문대할망은 늘 바쁘다. 한라산 따위를 뚝딱 만드는 능력의 신이라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터였다. 그러나 설문대할망은 늘 무언가를 한다. 빨래를 하고, 자식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바느질을 한다. 한라산을 만든 것도 아수라발발타 주문을 외우거나 지팡이 한 번 휘두른 마법의 결과가 아니다. 맨손으로 직접 몸을 움직여 산을 쌓았다. 그리스의 신은 심심해서 인간을 만들었고 심심해서 인간 세상을 간섭했다. 패악질도 서슴지 않았다. 하나 우리의 설문대할망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종일 일만 한다. 인간에게 해코지한 적도 없다. 설문대할망이 일으킨 기적은 노동의 산물이다. 제주에서는 한라산을 만든 거대 신도 부지런히 몸을 써야 한다. 설문대할망은 근면과 성실의 신이다. - P72
"당제는 매인심방(신당의 전속 무당)이 진행하고 제주는 이장이 합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의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리면 대단합니다. 제물 올리는 할망만 250명이 되고 구경꾼까지 합치면 800명이 넘어요. 할망들이 제물 올리는 석단도 자리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백주또 할망 입으시라고옷도 올리고, 옥돔도 올리고, 떡이랑 삶은 달걀도 올려요. 네 발 짐승은 절대 안 올립니다. 백주또 할망이랑 소천국 할방이 갈라섰던 이유 아시죠? 소잡아먹었다고 쫓아냈잖아요." - P74
여기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우선 이형상 1653~1733년이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이형상은 제주 역사를 살피다 보면 수시로 마주치는 이름이다. 이 책의 단골 출연자이기도 하다. 이형상은 170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해 1년 남짓 근무했는데, 재임기간 동안 제주 구석구석을 순찰한 기록을 그림과 함께 남겼다. 18세기 초반 제주 모습을 가장 정확히 묘사했다는 탐라순력도」다. 이형상 말고도 목사 여러 명이 순력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만큼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형상은 오름을 보고 "한라산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오름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 이슬 구슬의 형국" (남환박물>이라고 묘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교조주의자였다. 유학자의 눈에는 섬 곳곳에 널린 신당과 사찰이 불온하게 비쳤다. 예부터 제주에는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이 있었다 - P76
추사는 위리안치받았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친 유배처에 가두는 형을 이른다(현재 말끔하게 복원해놓은 추사 유배지도 탱자나무 울타형을리를 두르고 있다). 형벌대로라면 추사는 가시나무 담을 쌓은 누옥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추사는 갇혀서만 살지 않았다. 앞서 적었듯이 향교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멀리 제주읍성까지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면회객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추사의 오랜 벗이었던 초의선사는 추사때문에 여섯 달을 제주에서 머물렀고, 추사의 양자는 꼬박 1년을 곁에서 머무르며 아비를 봉양했다. 서울에서의 일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제주에서도 추사는 사람 만나고 선물 받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름의 일상을 살았다. - P102
원악도遠惡島라는 낱말이 있다. 국어사전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가 어려운 섬‘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전이 담아내지 못한 뜻이 있다. 원악도는 한때 제주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최악의 유배지로서 제주를 이를 때 원악도라고 불렀다. 제주가 서울에서 제일 먼 섬이므로 제주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처벌이었다. 제주로 유배를 내려오는 죄목은 대부분 역모였다. 하여 제주 유배인은 대부분 정치범이었다. 한때 제주에서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금기어였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성공은 역모를 뜻할 수 있어서였다. 제주에서 성공을 대체한 단어는 자산이었다. 지금 작산은 다 큰어른을 가리킨다. - P103
조선시대 제주는 온 나라 죄인의 유형지였다.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요, 가장 두려운 것은 뱀과 지네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라." 왕조의핏줄이었으나 제주에 유배됐던 이건 1614∼1662년이 『제주풍토기」에서 남긴 말이다. 추사처럼 왕족도 밥 타령을 했다. - P103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제주에 유배된 인물은 230명이 넘는다. 성호 이익 1681~1763년은 광해군에 반대했다가 제주에서 위리안치 형을 받았고, 이익을 제주로 내쫓았던 광해군 1575~1641년도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뒤 제주에서 위리안치 형을 받았다. 광해군은 엄격히 통제된 삶을 살다 제주살이 3년 만에 죽었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1607 ~ 1689년은 제주 유배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여든세살에 제주로 유배 왔다. 쉰다섯 살의 추사는 견줄 바가 못 됐다. 일흔네 살에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1833~1906년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1861~1939년도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 P103
맛이 가장 좋을 때는 1~2월이다. 무게가 3킬로그램이 넘는 대방어도 한겨울에 올라온다. 그러나 모슬포 방어축제는 10~11월에 열린다. 아직 철이이른데 방어축제를 여는 이유를 모슬포 수협에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변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철에는 축제를 안 해도 잘 팔리니까 제철이아닐 때 축제를 해야지요." 모슬포 방어축제는 제주를 대표하는 특산물 축제다. 축제가 열리는 사나흘 동안 20만 명이 다녀간다. 그러고 보니 추자도참조기축제도 얼마 전까지 한여름에 열렸다. 그때도 "조기 철이 아닌데 어떻게 축제를 여느냐" 물었더니 "지난 겨울 잡아서 냉동한 조기를 판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특산물 축제가 이런 식이다. 모슬포에 가면 방어를 드시라. 대신 한겨울에 드시라. - P106
풍토가 사람을 낳는 것인지, 대정은 사람도 거칠다. ‘대정 동생이‘라는 말이 있다. 동생이는 망아지라는 뜻이다. 대정 사람이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이라는 뜻으로, 비하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바람도 모질고 땅도 모질고 바다도 모질어서 사람도 모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대정 땅이 겪은 기구한 사연을 돌아보면 팔자라는 걸 떠올릴 수밖에 없다. - P106
사람들은 송악산을 부남코지라고 부른다. - P107
송악산익숙한 이름이지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다. 이름처럼 소나무가 많지는 않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절울이오름이다. ‘절‘이 물결을 가리키므로, 물결 우는 오름이라는 의미다. 파도가 송악산 아랫도리 절벽과 부딪쳐 울리는 소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름과 파도는 어울리는 쌍이 아니지만 송악산은 예외다. 오름 남쪽 아랫도리가 그대로 해안절벽을 이룬다. 앞바다 가파도에서 바라보면 송악산은 거대한 절벽처럼 서 있다. 물결 우는 오름이라. 아마도 오름 중에서 가장 시적인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 해안절벽에 밴 역사를 알고 나면 ‘절울이‘라는 이름이 가슴에 못처럼 와서박힌다. - P107
대신 칠성판 위에 두개골 하나와 등뼈 하나씩 놓고 대충 짝을 맞췄다. 한 벌의 유골이 갖춰지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나씩 뼈를 맞춰 모두 132기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 공동묘지가 백조일손묘조상은 백 명, 그러나 자손은 하나인 무덤, 조상은 다르지만 한날다. 한시에 같이 죽었으니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도 피눈물이 난다. - P113
아름다운 풍경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고 했던가. 일제의 만행을 목격했을 때는 화가 치밀었고, 웅덩이만 덩그러니 남은 양민학살의 현장에서는 몸서리를 쳤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무덤 앞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슬픔을 품은 송악산 자락이 무너지고 있다. 파도만이 설움에 겨워 오늘도 운다. - P113
사려니라는 이름을 다시 보자. 사려니라는 낱말도 다른 제주 방언처럼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솔아니가 사려니로 변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솔아니는 ‘숲 안‘ 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숲의 안쪽 방향을 이르는 의미가 아니라 숲 안쪽에 있어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포개져 있다. 한라산 깊은 숲에서도 안쪽 숲이니 인간이 범하지 못하는 땅, 나아가 경계 너머의 세상을 가리킨다. 제주도 안내 책자에서 사려니숲길을 ‘신성한 숲길‘ 이라고 소개하는 까닭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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