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끝나고 나서 내가 무대로 올라갔어요. 중·고등학생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한마디 했지요. "여러분들이 이렇게살고 있지만 남쪽의 우리 어린이들도 씩씩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다만여러분들이 자랐을 때 서로 증오하지 않고 서로 미워하지 않도록 하는 책임이 우리 어른들한테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여러분들한테 가서는 절대로 안되겠다는 것을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라고요. - P196

협동농장단위의 농촌 - P197

북한에서는 기술혁명 사상혁명 문화혁명을 3대혁명으로 꼽고 있고그중에서도 문화혁명을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P198

예술가는 비반복적 존재

아무튼 문화혁명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말한다죠.
그래요. 북에서는 예술가를 ‘비반복적 존재‘로 규정하죠. 모든 예술행위는 상투적이거나 반복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 P198

그러나 동시대문학임에는 틀림없고 그 1차목표가 분단현실의 극복에서 찾아져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남한의 현재의 문학은 ‘갈등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죠. 인간이 갖고 있는 복잡한 세계를 다양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남쪽문학의 강점이에요. 북의 문학은 혁명전통을 고수하는 맥락에서 유지되고 또 상당기간 그렇게 버텨나가겠죠 - P199

분단시대의 작가는 남이든 북이든 민족이익을 최우선에 놓고 창작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표현방식이나 주제, 구성이야 다양성의 차원으로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 P200

월북작가들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다 만났는데 다들 잘 살고 있어요. 이기영 선생네 가족은 7칸짜리 아파트에서, 글쎄 한 60여평되는 아파트지,  식구가 많으니까, 박태원씨 부인은 옛날식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고 계시드만. 거실 하나, 방 두개그리고 부엌이 있는 우리로 치면 약 20평 정도되는 아파트죠. 대부분의 작가들은 3칸짜리 아파트가 표준이에요. - P202

남북독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싶다 - P203

이때에는 서울을 떠나 전라남도의 벽지인 해남에서 농민들과 함께 일하다가 광주로 올라갔지요. 현장문화운동에 종사하면서전라도에서 10년을 살게 되었는데 나는 여기서 「장길산」을 완성했을뿐만 아니라 잊을 수 없는 동지적 인연들을 맺게 되었습니다. 내 문학의 큰 가지의 하나는 전라도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민족과 역사‘를 뚜렷이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 P246

네번째 시기가 광주항쟁이 일어나던 80년에서 89년의 방북하던 때까지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죽어간 벗들과 이름없는 민중들에 대한 피의 부채를 의식하고 스스로 급진적으로 변모해갔던 기간이었습니다. - P246

남과 북을 다 담는 작가가 되고 싶다 - P247

마침 그 소설을 읽은 일본 친구로부터 엽서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문장 중에 "간첩을 인간으로 환원시킨"이라던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간첩‘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통일꾼‘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전환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 P267

인류의 역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결국은 진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저는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자본주의는 실로 한 삼백 년 되었고 그에 대처했던 사회주의라고 해봤자 이제 겨우 칠십 년 됐지요?
사람이 생각해내고 제도화한 것들 가운데 우여곡절 없는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 P272

북의 도시와 농촌은 그들 표현대로 "호화롭지는 못해도" 소박하고 깨끗하게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북의 어려움은 ‘자력갱생의 한계‘에서 오는 어려움이지 식구들을 골고루 잘 보살피고 있습디다. 까놓고 말해서 아무리 ‘공산압제‘가 심하다고 한들 설마 제대로 살게 해주지 않는다면 북의 인민이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인민들보다 못해서 40여 년이 넘도록 전쟁도 치르고 복구도 하고 건설도 해오면서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물론 그 종주국 행세를 해오던 소련까지 못해 먹겠다고 나자빠지는 판에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고 버티고 있겠습니까. - P264

사회주의 책 안 읽은 민중이 정말 요새는 더 건강한 것 같습니다. 5월투쟁의 좌절이니, 위기니 하는데 언제 해방 이후 좌절과 위기를 한두 번 겪었나요. 내년에 보시고 내후년에 또 봅시다. 그러면 진짜 맑은물이 대지의 거죽이 아니라 땅 속에 대하처럼 흐르듯이, 숨어 있던
‘민중여론‘이 솟구쳐 나올 겁니다. - P264

가담하고 있는데요. 사실 40년대가 되면서는 일제의 토벌작전이 치열해져서 항일빨치산들은 소부대 활동을 주로 하게 됩니다. 해방 직전에미소는 동구와 아시아에서 해당 나라의 레지스탕스나 빨치산들과 연합부대를 편성하게 되지요. 유고의 빨치산들도 그러했고 베트남의 - P305

호지명과 디엔비엔푸의 명장 보우엔 지압도 미국 OSS의 훈련을 받고 연합군에 편성되어 항일전에 투입됩니다. 이것은 임시정부에 있었던 청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군사훈련이나 한반도 침투를 위한 OSS훈련을 받고 대기하다가 원폭투하로 해산된다는 것을 김준엽, 장준하선생의 수기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 P306

천연두는 남부 중국의 항구를 통하여 유입되어 전쟁과 함께 조선으로옮겨진 것으로 보아 서양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른바 외래의 오랑캐가 갖다준 우환이라는 말이죠. 이 흔적이 내 팔뚝의 우두자국처럼 민중들의 생활 속에는 ‘호구별성‘이라는 굿으로서 남아 있습니다. - P278

우리가 아직도 4·3이나 여순사건을 이념적인 좌우대립의 결과로보는 한, 6·25의 정확한 해명은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전쟁 중이북에서 일어난 어떤 참화에 대한 접근을 통하여 ‘반외세 굿판‘을 한판 벌여볼까 하는 것입니다. - P278

내가 오사까에서 있었던 어느 강연회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의 운명이다"라고 말했을 때에 아마도 조총련계가 분명한 늙은 재일동포 청중이 일어나 "그렇다면 당신은 반쪽짜리 운명에 짓눌린 채 살아갈 것인가?"
하며 항변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반쪽짜리 조국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의 영혼도 마음도 그리고 몸뚱아리도 반쪽일 수밖에 없다는 궁색한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지요. - P279

혁명가는 마르크스 철학의 어떤 명제를 지키기 위해 운동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와 사회의 변혁을 위하여 한 시대의 사상을 수단으로 채용하는 것이지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어떤 명제가 새로운 현실에 대하여 해답을 줄 때에는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혁명의 이론과 방법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 P282

마르크스주의의 여러가지 명제가 현실에 맞지 않아서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혁명적 원칙과 입장을 포기하는 것을 수정주의라고 하지요.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명제에 대한 해석을 수정했기 때문에 수정주의로 비판되는 것이 아니라그 사상의 혁명적 입장을 포기하여 혁명을 배신했기 때문에 비판된다는 것입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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