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장터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이 사진집을 열심히뒤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 P258

어느 때였는지 모르겠다. 시골에 사는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타는주말에 전주 나들이를 했다. 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 P292

책을 사고 나면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 들렀다. 그날도 영화를 보고 나서 미술관을 들렀다. 전시된 작품은 그림이 아니고 사진이었다. 사진들을 가만히 보던 나는 ‘어디서 많이 본 장턴데‘ 하며 다시 자세히 보았다. 그림들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렇구나. 갈담장과 순창장이었다.  - P292

이웃 마을에 사는 아는 얼굴들이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사진 속에 있었고, 또사진이 이렇게 버젓한 작품이 되어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이다.  - P292

내가 어렸을 때부터 눈에 익은 순창장과 갈담장의 이런저런 풍경들이 전시된 사진의 전부였다. 흑백 사진이었다. 이홍재는 그렇게 나에게 장터 작가로다가왔다. - P292

사진은 순간의 포착이다. 사진은 빛이다. 빛은 상대적으로 어둠을 만든다. 시도, 그림도, 음악도, 영화도, 정치도 실은 빛과 어둠의 잔치다. - P292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그리하여 예술은 시각이다. 시각의 시작은 순간이며 순간의 연속이 역사다. 순간을 잡아내어 역사로 이어가는가장 이기적인(?) 예술이 사진이다. 사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앵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지 않는다. 자기가 본 것만 찍고 인화된 후에도 자기가 찍은 것만 찾아 확인한다. 그렇게 찍은 사진 속에는 놀랍게도 수많은 사물들이 혼재되어 있다. - P293

이홍재의 장날 풍경은 그냥 지나가다가 그것이 신기해서 우연히 들러 찍은 순간이 아니다. 그날 그곳의 장꾼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장날과한 몸이 되지 않으면 안 찍히는 사진들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장날을 찾아간 작가가 아니라 그 장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가다가 보니, 그도 장꾼이 된 사람만이 찍을 수 있는 사진이다. 사진과 한 몸이 되어 사진 속의한 사물이 되어 이흥재가 그 어떤 자리에 서 있을 때만 찍히는 사진이다. - P293

술이 아니다. 예술은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일이어서 작품 그 자체가세상을 받아들이는 힘이 있어야 한다.  - P294

세상을 받아들이는 힘이야말로 인문의 힘이며 인문을 완성시키려는 철학의 힘이며 그것을 넘는 예술의 힘인 것이다.  - P295

이홍재의 장날은 숨어서 몰래 한 자기만의 사랑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세상과 당당하게 대결한 사랑이다. 사진 속의 티끌 하나까지 잡아내어 순간을 일상으로 이어 주고 영원으로 잇는 사진이야말로 지울 수없는 업보를 담아낸 예술이다.  - P295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했든 이홍재의 장날은 그래서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 P295

남들이 이미 폐기 처분한 것들을 찾아다니며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대는사진작가 이흥재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 P298

그는 일찍부터 장터를 중심으로 스러져 가는 빛의 모퉁이를 채집하는일에 심취해 있었다. 사진작가로서 장터에 대한 그의 몰두는 소재주의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장날 풍경을 한낱 풍경으로만 받아들였다면 멀찍이 서서 셔터를 누르는 일에만 열중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 P298

제일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임실의 강진장. 내가 사는 전주에서 한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도착할 무렵에 시계는 오전10시 부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터는 한산한 편이었다. - P299

내가 보기에는 여느 장터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풍경들이 나른하게 펼쳐져 있었다. 아무리 장터의 규모가 작고 농촌에 사람이 없다지만 이건 너무 실망스러운 풍경이 아닌가. 닷새 만에 한 번 서는 장이라면 그래도 시끌벅적하고 흥청거리는 맛이 좀 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 P300

고추 좋다 영양장,
마늘 맵네 의성장,
쇠전 크다 영주장,
억지 춘향 춘양장,
고추 붉다 단촌장,
물맛 좋다 예천장,
양반 많다 풍산장,
쌀이 좋아 안계장,
끗발 좋다 구담장,
바람 세다 풍기장,
아이구 숨차 - P300

일육장 서는 안계장은 안계미 좋고
이칠장 서는 안동장은 안동포 좋고
삼팔장 서는 풍기장은 인삼이 좋고
사구장 서는 영양장은 고추가 좋고
오십장 서는 영주장 황소가 좋아

뭐 살꼬 뭐 살꼬
에라 몰라 다 사자꾸나

-경북 북부 지방의 장타령 - P301

"사람들은 말하지요. 이렇게 한산한 장터에 와서 카메라에 담을 게 무엇이 있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요즈음 장터는 원래 이래요."
작가가 말했다.
그는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가하지만...." - P303

우선, 국수 국물의 개운한 맛을 내는 양념부터 살펴보자. 양념이라고는 간장에다 파, 풋고추, 고춧가루, 깨소금을 넣은 양념간장이 전부다. 구운 김을 잘게 부숴 뿌리지도 않았고, 고기나 애호박볶음을 고명으로 얹지도 않은, 그 국수 한 그릇은 단순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다. 국수 한 그릇에 가해져야 할 일체의 겉치레를 외면한 그 담백함! 나는 그것을 감히 무기교의 기교라고 부르고자 한다. - P305

하지만 그 국수라든가 국물의 맛만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국숫집이라는 칭호를 받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아주머니의 손끝과 그 손끝을 움직이는 마음이다. - P305

손님이 보는 앞에서 손으로 오이를 쓱쓱 새로 무쳐서는, 새로 무친 게더 맛있다고 권하기도 하며, 국수를 먹으러 오는 노인 손님들에게는 막걸리나 소주 한 잔을 공짜로 대접한다. 노인을 잘 모셔야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한다는 게 이 국숫집 주인의 변하지 않는 지론인 것이다. - P306

우리나라 최고의 이 국숫집에서 그저 국수 한 그릇만 비우고 손을 탈탈털고 일어서는 손님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주문을 하고 국수 그릇을 다비우기까지 주인과 손님, 손님과 손님들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법이 없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숫집 안에서는 모두 국숫집 공동체의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  - P306

그리하여 작가는 이제 거의 장터 사람이 다 되어버린 듯하다.
"내가 장돌뱅이지요. 뭐."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P310

그는 그동안 장터를 찍은 게 아니라 장터 사람들을 사진 속에 담았던것이다. 그러니까 그 자신의 호흡을 장터 사람들의 호흡과 일치시키려는노력의 산물이 그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 P310

그를 따라다니다 보니, 장터 사람들도 그를 낯선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목점이든 씨앗을 파는 노점이든 그는 스스럼없이 쭈그려 앉아 말문을 튼다. - P310

‘모든 것은 다 새롭게 변해야 한다‘, ‘이런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물론 부정적인 요소들은 과감히 바꾸어야 하겠지만, 우리 삶의 본질을 이루는 근본은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이 부대낄 때 느끼는 훈훈하고 끈끈한 ‘정‘이다. 울컥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나 자신도 모르게주르르 흐르는 뜨거운 눈물은 바로 인간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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