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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탐관오리였을까?
— 『목민심서』를 읽고, 공조 치수사업담당 임 정랑의 수해 예방사업
들어가며
“廉者,牧之本務,萬善之源,諸德之根,不廉而能牧者,未之有也。”
“청렴은 수령의 본무로, 모든 선(善)의 근원이요 모든 덕(德)의 뿌리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廉者,天下之大賈也。故大貪必廉。人之所以不廉者,其智短也。”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그러므로 크게 탐하는 자는 반드시 청렴해야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않은 것은 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목민심서』 율기편(律己篇), 청심(淸心)
다산(茶山) 정약용은 청렴을 관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보았다. 특히 대탐필렴(大貪必廉)이라는 말이 눈길을 끈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더 큰 가치와 명예를 추구하려면 오히려 청렴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도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돌보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고 꾸짖었다.
그런데 내게는 공전편(工典篇)의 천택(川澤)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천과 못을 관리하는 일을 다룬 대목이다.
이 책 『정선 목민심서』는 다산연구회의 『역주 목민심서』 여섯 권을 한 권으로 줄인 발췌본이다. 천택에서 인용할 세 구절 가운데 첫 번째만 이 책에 실려 있어, 나머지 두 구절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원문과 번역을 확인했다.
“川澤者,農利之所本,川澤之政,聖王重焉。”
“천택(川澤)은 농리(農利)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천택에 대한 정사를 성왕(聖王)은 소중하게 여겼다.”
“土豪貴族,擅其水利,專漑其田者,嚴禁。”
“토호(土豪)와 귀족(貴族)이 수리(水利)를 멋대로 하여 자기의 전지에만 물 대기를 독점하는 것은 엄금하여야 한다.”
“池澤所產,魚ㆍ鼈ㆍ蓮ㆍ芡ㆍ茭ㆍ蒲之屬,爲之厲守,以補民役,不可自取以養己。”
“못에서 생산되는 물고기, 연마름, 마름줄, 부들 등속은 엄중하게 지켜서 그 수입으로 백성들의 요역에 보충해야 하고, 수령이 스스로 취득하여 사복을 채워서는 안 된다.”
— 『목민심서』 공전편(工典篇), 천택(川澤)
하천과 못은 백성의 생업을 위한 시설이며, 그 혜택을 특정인이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못에서 나는 물고기조차 사사로이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데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만하다.
다산이 그토록 경계한 목민관(牧民官)의 폐단은 과연 지금 공직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졌을까.
책장을 넘기다 문득,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나 공조(工曹)의 관리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지금의 5급 시설사무관은 조선시대로 치면 어느 정도 벼슬일까?
정5품 정도라면 공조 정랑(正郞)쯤 되었을 법하다. 공조는 오늘날 국토교통부와 비슷한 일을 맡았던 관청이니, 토목직인 내게도 제법 어울리는 자리다.
그런데 나는 과연 다산이 바랐던 청렴한 관리가 되었을까, 아니면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되었을까?
기왕 상상하는 김에 탐관오리가 되어보자.
1. 금의환향
때는 조선 어느 해 봄.
한양 공조의 정5품 정랑 임 아무개가 충청도 고향으로 내려왔다. 조정의 명을 받아 장마철을 앞두고 제방과 교량을 보수하는 공사를 감독하게 된 것이다.
고향 백성들은 중앙에서 높은 관리가 내려왔다며 반겼다.
그러나 임 정랑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고향집 뒤편의 낡은 석축이었다.
마침 나라에서 내려준 공사비가 은자 천 냥이었다.
‘기왕 내려온 김에 우리 집부터 손봐야겠구먼.’
임 정랑은 아전들을 불러 석축을 보수하도록 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자 욕심이 생겼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배수로도 널찍하게 내고 마당 물매도 잡았다. 내친김에 정원의 연못까지 근사하게 정비했다.
아전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리, 석축만 보수하시면 될 것을 어찌 배수로까지 새로 내시옵니까?”
“이놈아! 석축만 튼튼하면 무엇 하느냐? 물이 빠지지 않으면 수압이 높아져 석축이 무너질 것 아니냐!”
“허나 연못까지 정비하시는 까닭은 무엇이옵니까?”
“그것은 우수 저류시설이니라. 집중호우 때 빗물을 일시적으로 저장하여 하류의 홍수 부담을 줄이는 것이지.”
“그런데 연못에 비단잉어는 어찌 풀어놓으셨사옵니까?”
임 정랑이 혀를 찼다.
“쯧쯧,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수질 상태를 상시 확인하기 위한 생물학적 모니터링이니라!”
아전은 감탄했다.
역시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는 아는 것부터 달랐다.
2. 장마가 지나간 자리
그해 여름,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제방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졌다. 백성들의 초가집은 물에 잠기거나 통째로 떠내려갔다.
그런데 임 정랑의 고향집만은 멀쩡했다.
튼튼한 석축과 널찍한 배수로 덕분에 마당에는 물 한 방울 고이지 않았다. 연못에서는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며칠 뒤, 고을에 암행어사가 들이닥쳤다.
“암행어사 출두야!”
관아가 발칵 뒤집혔다.
“네가 공조에서 내려온 임 정랑이냐?”
“그러하옵니다.”
“나라에서 제방을 보수하라고 내려준 은자 천 냥은 어디에 썼느냐?”
“수해 예방사업에 집행하였사옵니다.”
“그렇다면 공사비 장부를 가져오너라!”
임 정랑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황공하오나, 지난 장마에 관아가 침수되어 장부가 모두 떠내려갔사옵니다.”
“뭐라? 장부가 떠내려갔다고?”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어찌 네놈의 집만 멀쩡하단 말이냐?”
임 정랑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소신이 평생 힘써 온 수해 예방사업의 성과이옵니다.”
3. 시범사업의 성과
“뭐라? 성과?”
암행어사가 눈을 부릅떴다.
“백성들의 집은 모두 떠내려갔는데 네놈의 집만 멀쩡한 것이 성과란 말이냐?”
“소신의 집은 시범사업 대상지였사옵니다.”
“시범사업?”
“새로운 수해 예방공법을 전면 시행하기에 앞서 한 곳에 먼저 적용하여 효과를 검증한 것이옵니다. 이번 장마로 그 성능이 확실하게 입증되었사옵니다.”
“그 한 곳이 하필 네놈의 집이란 말이냐?”
“사업 효과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려면 관리가 용이한 곳을 선정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의 집은 어찌할 것이냐?”
“내년도 본사업에 반영할 예정이옵니다.”
“내년도라니! 백성들은 당장 올겨울을 어디서 나란 말이냐!”
“그것은 소신의 소관이 아니옵고, 호조와 진휼청에서 검토할 사안인 줄 아뢰옵니다.”
“이놈! 그럼 네놈은 대체 무엇을 했느냐?”
“시범사업을 완료하고, 사업 효과를 검증하였으며, 향후 확대 시행을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였사옵니다.”
“그 기초자료는 어디 있느냐?”
“장부와 함께 떠내려갔사옵니다.”
암행어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냐?”
“시범사업 시설물은 온전히 남아 있사옵니다.”
“어디에?”
“소신의 집에 있사옵니다.”
4. 내년도 예산
“여봐라! 저놈을 당장 포박하라!”
역졸들이 달려들었다.
임 정랑이 다급히 외쳤다.
“어사또!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느냐!”
“소신을 잡아가시면 내년도 본사업 추진에 차질이 발생하옵니다!”
“뭐라?”
“시범사업을 수행한 담당자가 사라지면 사업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어렵사옵니다. 후임자가 오더라도 현장 여건을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옵니다.”
“그래서 네놈을 풀어달라는 것이냐?”
“그런 뜻은 아니옵니다. 다만 백성들의 안전을 생각하신다면 사업의 정상적인 추진을 우선 고려해 주십사 하는 것이옵니다.”
암행어사가 기가 막혀 물었다.
“그렇다면 내년도 본사업에는 얼마나 필요하겠느냐?”
“은자 만 냥 정도면 되겠사옵니다.”
“만 냥이나?”
“정확한 사업비는 실시설계를 거쳐 확정하여야 하옵니다. 다만 물가 상승과 현장 여건 변동에 따라 총사업비가 증액될 가능성은 있사옵니다.”
암행어사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끌고 가라!”
임 정랑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외쳤다.
“어사또! 소신은 나라에서 내려준 공사비를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집행하였사옵니다!”
“그 돈을 모두 어디에 썼느냐!”
“그 성과가 지금 소신의 집에 고스란히 남아 있사옵니다!”
5. 후일담
이렇게 공조 정랑 임 아무개는 포승줄에 묶여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나라에서 내려준 공사비로 자기 집을 고쳐놓고도 끝까지 시범사업의 성과라고 우겼으니, 참으로 뻔뻔한 탐관오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임 정랑에게도 억울한 점은 있었을 것이다.
석축은 무너지지 않았고, 배수로는 제 기능을 했으며, 연못의 비단잉어까지 무사했으니 말이다.
사업 효과만큼은 확실하게 입증된 셈이다. 다만 그 혜택을 본 사람이 자기 자신뿐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저런 관리가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임 정랑의 고향집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장마가 끝나고 연못의 물이 빠지자 비단잉어들이 하나둘 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식을 들은 임 정랑이 옥중에서 탄식했다.
“아이고, 이런! 수질 모니터링 체계에 문제가 있었구먼.”
그리고 옥졸에게 종이와 붓을 청했다.
“나리, 옥에 갇혀서까지 무엇을 그리 열심히 쓰시옵니까?”
임 정랑이 붓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년도 우리 집 수해 예방시설 유지관리 예산 요구서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