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판에 도의가 서라벌에 와서 그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 들은 도의선사의 외침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했다. 따지고 보면 도의선사의 주장은 해괴한 마귀의 소리라기보다는 위험한 사상, 불온한 사상이었다. 만약 통일신라에 국가보안법이나 불교보안법이 있었다면 도의는 영락없이 구속.처형감이었다. 그런 위험이 도의에게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의는 서라벌을 떠나멀고 먼 곳으로 가서 은신할 뜻을 세웠으며, 그가 당도한 곳이 설악산의진전사였다. 보림사(寶寺)의 보조선사비문에 의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한 것이라고 한다. - P148
‘동해의 동쪽‘에서 ‘북산의 북쪽‘으로도의선사가 북쪽으로 간 이유는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의 군대를 피해 갈댓잎을 꺾어 타고 양쯔강 건너 소림사로 간 이유와 같다는 비유도 있다. 그 사정을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현란한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 P148
이 때문에 달마가 중국의 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우리 스님(보조선사)이 3조다.
도의가 ‘아직 때가 되지 못해 감추었다는 빛은 그의 손자제자 되는시기에 와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P149
이와 같이 도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서라벌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佛)‘과 ‘일문일가(一家)‘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왕즉불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 호족들의 위치는 지배층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체제와 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침의 능력이 중요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은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에 호족들은 앞다투어 지방에 선종 사찰을 세운다. - P149
선종의 구산선문은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에 들어서 보령의 성주사, 강릉의 굴산사 등은 오늘날에도 폐사지로 남고 영월 법흥사·남원 실상사·곡성 태안사·문경 봉암사·장흥 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 하는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 P150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 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전사 폐사지에 서면 나는 항시 변혁의 계절을 살던 한 선각자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함께 새겨보게 된다(현재 조계종 종헌에서는 도의선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 P150
탑의 본질은 사리탑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은 불탑, 줄여서 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 것은 승탑이다. 승탑은 스님의 이름 뒤에탑을 붙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별도로 승탑 자체에 이름을 부여한 경우도 많다.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승탑이라 하고, 스님의 이름을 알 경우에는 아무개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며, ‘보조국사 창성탑‘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 승탑도 있다. - P151
발굴된 선림원의 범종은 돌볼 이 없는 이곳에 방치할 수 없어 오대산월정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오대산은 치열한 전투지로 변하였고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이 월정사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이 불리하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이르자 국군은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있는 양양 낙산사와 이곳 월정사에 불을 질렀다. 그때 낙산사와 월정사는 석탑들만 남긴채 폐허가 되었고 선림원의 범종은 불에 타 녹아버렸다(현재 선림원 범종의잔편들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 도면을 참고해 만든 복원품이 전시되어있다). - P160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않으리라. - P165
유한준의 원문은 "知卽爲眞愛 愛卽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며, 이는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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