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이 한적한 절집의 분위기에 척어울리는 저 소담하고 단정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것 같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극락보전은 나에게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학생들은 극락보전의 낮은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본래 단순한 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학생들을 법당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 P27

남도의 봄, 남도의 원색무위사 극락보전 뒤 언덕에는 해묵은 동백나무의 동백꽃이 윤기 나는 진초록 잎 사이로 점점이 선홍빛을 내뿜고,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벌어진 꽃송이들은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진읍 묵은 동네 토담 위로는 키 큰 살구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남도의 봄빛이었다. 한껏 끌어안고 싶은 남도의 봄빛은 조선의 원색을 보여준다. 산그늘마다 연분홍 진달래가 햇살을 받으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길가엔 개나리가 아직도 노란 꽃을 머금은 채연둣빛 새순을 피우고 있었다. - P29

한반도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하다는 강진의 하늘빛은 언제나 맑다.
강진만 구강포의 푸르름보다도 더 진한 하늘빛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청색의 원색이다. 색상표에서 제시하는바 사이언(C) 100퍼센트이다. 솔밭과 동백나무숲이 어우러지며 보리밭 물결이 자아내는 그 빛깔은 노란색과 청색 100퍼센트가 합쳐진 초록의 원색이다. 유채꽃장다리꽃, 개나리꽃은 100퍼센트 노랑(Y)의 원색이며, 선홍색 동백꽃잎은100퍼센트 마젠타(M)이다. 그 파랑, 그 초록, 그 노랑, 그 빨강의 원색을구사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남도의 봄 이외에 아무도 없다. 그 원색을 변주하여 흑갈색 황토와 연분홍 진달래, 누우런 바다갈대밭을 그려낸 화가도 남도의 봄 이외엔 아무도 없다. - P30

건진국시와 헛제삿밥
여행이건 답사건 집을 떠난 사람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어디 가서 잘것인가이고 그다음 문제는 무얼 먹는가이다. 그러나 이왕 맛있는 향토식을 맛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때론 큰 기대가 된다. 안동에는 향토식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이 지역 답사의 한차례 먹을거리가된다. - P31

안동은 내륙 중의 내륙인지라 뱃길이 닿지 않아 냉동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생선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고등어에 굵은 왕소금을 잔뜩뿌려 절여서 가져와야 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만든 자반고등어는 짜도 보통 짠 게 아니다. 그래도 이 간고등어는 안동 사람들의 밑반찬으로 애용되어 반의반 토막을 썰어놓고 온 식구가 밥을 먹기도 한다. 전라도 음식으로 치면 밥맛 돋우는 젓갈 구실도 하는 셈이다. 그간고등어 중에서도 뱃자반이라고 해서 배에서 금방 잡은 싱싱한 놈을 곧장 소금에 절인 것은 진짜 별미이다.(대구에서는 이를 제자리간이라 한다) - P33

바로 이 점 때문에 제비원 석불은 많고 많은 전설을 갖게 됐다. 임재해(林在海) 교수가 「성주의 본향, 제비원의 노래와 전설」(『한국 민속과 전통의 세계』, 지식산업사 1991)에서 조사·발표한 것을 보면, 제비원 석불이 불심많은 착한 연이伊) 아가씨의 화신이라는 설화로 인해 이 석불을 모신절 이름이 연미사(燕尾寺)가 되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 때 이여송이 우리 산천의 지맥을 끊고 다닐 때 이 불상의 목을 잘랐다는 설 등등이 주저리주저리 얽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 무가(巫중성주풀이」라는 성주님께 치성 드리는 성주굿 노래는 어느 지역이든 성주의 본향(本鄕)을 따지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이 제비원 석불을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주님 본향이 어디메냐/경상도 안동땅/제비원이 본일러라/제비원의 솔씨 받아 (...)그래서 안동은 불교 문화, 양반 문화의 본향임과 동시에 민속 문화의본향이라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35

안동은 언어생활에서도 전통을 고수하는 집념을 보여준다. 저전(田)을 모시밭이라고 하듯 천전(前)보다 내앞, 수곡(水谷)·박곡(谷)보다 무실(물실)·박실, 온혜(溫惠)보다 더운골 등이 입에 익숙하다. 언젠가 와룡면 일대를 누비고 다니는데 윗골, 고누골, 음지마, 양지마, 가장실, 가느실, 밤실, 짓실, 대밭골, 택골, 도장골, 잣골, 오리실, 건너나별, 고불고개 등 듣기만 하여도 향토적 서정이 물씬 일어나는 동네 이름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얼핏 생각하기에 안동 양반들은 한자어를많이 썼을 듯한데 이처럼 한글 이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한글이고 한자고 한번 접수한 것은 무조건 끝까지 지키고 보는 전통 고수의 저력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사람들은 일상에서는 순우리말을 많이 쓰다가품위와 권위를 찾을 때는 한자어를 많이 쓰는 독특함이 있다. 예를 들어평소에는 ‘더운골할배‘ ‘건네 아재‘ 하고 친숙하게 말하다가도 저전 장질(長), 춘양삼종숙(三從, 촌 아저씨) 하면서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 P37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풍산 읍내에 있던 풍산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岳書堂)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4년에는 정경세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존덕사(祠)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배향했으며 1863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건재했던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 P39

병산서원은 하회 입구에서 마을로 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십 리 (약 4킬로미터) 남짓 걸어가면 나온다. 옛날에는 시골 버스,
경운기나 다니는 비포장 흙길이어서 그것이 병산서원 보존의 큰 비결이었는데, 슬프게도 이 비책 아닌 비책은 곧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병산서원 답삿길에 나는 항시 이 십릿길을 걸어다녔다.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면 고갯마루까지만 차를 타고 가서는 거기부터 오릿길이라도걸었다. 병산서원은 반드시 걸어가야만 병산서원에 간 뜻과 건축적·원림적(園林的) 사고가 맞아떨어진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절집 입구의 진입로와 같아서 만약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내소사를 자동차를 타고 곧장 들어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할까를 생각해본다면 왜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질 것이다. - P39

"타고 온 자가 문명인이냐, 걸어온 자가 문명인이냐?"
이에 더 이상 못 참겠던지 차 타고 먼저 온 한 ‘노련한 동양철학자가느긋하게 답한다.
"편하게 타고 오면서도 걷는 맛까지 다 느낀 자가 문명인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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