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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ㅣ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평점 :
오늘 아침 블랙윙에 대한 단상(今朝黑翼斷想)
어제 직원이 내가 쓰는 연필을 보더니 부러워했다. 연필이야 집에 차고 넘치니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눠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집 책상 구석에 블랙윙 LAB 11.24.23 한 상자가 올라가 있기에 오늘 아침 출근하며 집어왔다.
사무실에 와서 상자를 열었다. 예전에 이 제품 가운데 희귀한 색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서였다. 혹시 내 상자에도 들어 있나 싶어 한 자루씩 살펴보는데, 열두 자리가 다 차지 않는다. 세어보니 열 자루다. 두 자루가 없다. 언제 꺼내 썼는지, 누구에게 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에 제 갈 길을 간 모양이다.
LAB 11.24.23은 블랙윙 랩 시리즈의 아홉 번째 제품이다. 블랙윙이 3년 넘게 모아둔 ‘미스핏 연필’을 열두 자루씩 담아 2023년 11월 24일 내놓았다. 기존 제품을 만들다가 색이 고르게 나오지 않았거나, 칠이 한 겹만 입혀졌거나, 표면에 작은 흠이 생기는 등 외관상 정식 제품의 규격에서 벗어난 연필들이다. 생김새는 제각각이지만 필기 성능에는 문제가 없다.
상자마다 연필의 색과 심이 다르며 상자 번호도 따로 붙어 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열어봐야 안다. 그냥 버렸으면 불량품이었을 것을, 블랙윙은 세상에 하나뿐인 조합으로 만들어 한정판으로 팔았다. 장사를 참 잘한다.
나도 이 LAB을 여섯 상자쯤 샀다. 그런데 오늘 찾던 쨍한 파란색은 한 자루도 보이지 않는다. 파란색이 귀하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블랙윙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산 여러 상자에는 없으니 적어도 내게는 희귀한 색이 맞다.
상자를 뒤지다 보니 2021년 마지막 날 북플에 올렸던 글이 생각났다. 그동안 사들인 연필을 한데 모아놓고 “몇 번을 태어나 죽어도 다 쓰지 못할 연필들”이라며 자랑했던 글이다. 그때 찍어둔 사진을 다시 펼쳐보니 수많은 연필 사이에 푸른색 블랙윙 한 자루가 보였다.
그 연필은 오늘 찾던 LAB의 파란색이 아니었다. 블랙윙 Volume 73, 레이크 타호였다.
레이크 타호는 2017년 6월에 나온 한정판이다. 연필 몸통에는 타호 블루 색을 입혔고, 표면에는 호수 주변의 지형을 본뜬 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은색 페룰과 흰색 지우개를 달았으며, 심은 진하고 부드러운 소프트 흑연이다.
숫자 73은 타호호의 투명도를 측정한 세키 깊이 73피트에서 따왔다. 한때 개발과 오염으로 맑은 물빛을 잃어가던 호수가 보전 노력으로 투명도를 회복한 것을 기념한 연필이다. 호수의 색과 지형, 환경보전의 의미까지 연필 한 자루에 담았다.
나는 이 연필이 나오기 전인 2016년 10월, 실제 레이크 타호에 갔었다.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넓고 푸른 호수와 그 뒤를 둘러싼 산을 직접 보았다. 이듬해 그 호수의 이름과 색을 담은 블랙윙이 나왔고, 지금 내게는 두 타스가 상자째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출시된 지 9년이 지난 지금은 온전한 한 상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연필이 되었다.
오늘 직원들에게 한 자루씩 나눠주려고 LAB 상자를 가져왔을 뿐인데, 두 자루가 없다는 것을 알차리고, 희귀하다는 파란색을 찾아보고, 5년 전 북플에 올린 글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 글의 사진 속에서 레이크 타호를 찾아내어, 10년 전 그 호수 앞에 서 있던 시간까지 돌아보았다.
LAB의 두 자루는 이미 어디론가 갔고, 찾던 쨍한 파란색은 애초부터 없었다. 대신 레이크 타호 두 타스가 여전히 내 연필 상자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연필은 쓰면 쓸수록 짧아진다. 하지만 연필 한 자루에 붙은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길어진다. 오늘 내 손을 떠나 직원들 손으로 건너갈 연필에도 또 하나의 이야기가 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