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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ㅣ 세계문학그림책
조은교 그림, 정아원 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원작 / 고래의숲 / 202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안나 카레니나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가 —
레프 톨스토이 원작 『안나 카레니나』 그림책을 읽고
세계문학의 걸작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안나 카레니나』를 그림책으로 만났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이자 인간의 사랑과 삶을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익히 들어왔기에 나름의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책을 덮은 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감동이나 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혹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일까.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위해 가정을 떠나며, 결국 자신의 삶마저 비극으로 끝내는 이야기. 나는 안나의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칭송하는데, 정작 책을 읽는 나는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작품이라고 해서 그 안의 인물에게 반드시 공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의문을 안고 안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1.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남편 카레닌과 아들을 둔 귀족 여성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환경이다. 물론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가정이라고 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까지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다. 안나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느꼈을 답답함과 외로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녀 앞에 젊은 장교 브론스키가 나타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결국 안나는 그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이성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안나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선택한다면 그 선택으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나는 브론스키를 향해 나아간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선택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부터 안나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몰라도, 그 사랑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누구에게 상처를 줄 것인지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2.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가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하기 위해 기존의 삶을 떠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동안 쌓아온 관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편 카레닌에게는 아내와의 관계가 무너지는 일이었고, 아들에게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안나 자신도 아들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묻고 싶었다.
그토록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면, 브론스키라는 남자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을까.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안나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브론스키 역시 그녀에게 남편과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선택한 사랑이었다면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도 두 사람이 함께 져야 한다. 사랑은 함께 시작했는데 그 대가가 한 사람에게만 돌아간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
사람마다 사랑의 크기와 방식이 다르니 내 기준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그 선택으로 상처받는 가족의 존재까지 지울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지켜야 할 것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 있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방법을 찾아 타협하기도 한다. 그것이 특별히 고결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안나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무조건 참고 견뎌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었다면 다른 선택과 방법을 고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랑이 자신의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무너뜨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점이다.
행복을 추구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세워질 때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3. 안나의 비극,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안나의 삶은 브론스키와 함께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사회적 비난과 고립이 깊어지고, 브론스키의 사랑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커진다. 자신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마저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가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도덕적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도 외면할 수 없다. 남성의 잘못에는 비교적 관대하면서 여성에게는 엄격했던 사회의 위선은 안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런 점에서 안나는 비난받아야 할 행동을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불공평한 사회적 관습으로 고통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마지막 선택만큼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안나는 결국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장면에서 안나의 절망과 비극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는 무슨 죄인가.
갑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사고를 마주해야 했던 기관사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사고를 수습해야 했던 철도 관계자들은 또 어떠했을까.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도 그날은 평범한 하루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안나가 그러한 피해를 의도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극심한 절망 속에 있던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까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 선택으로 영향을 받았을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서도 안 된다.
나는 안나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녀의 죽음을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한 사람의 비극을 이해하려는 마음과 그 비극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안나의 고통이 깊었다고 해서 그로 인해 발생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4. 감정과 원칙 사이에서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도로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현장에서는 공사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과 안전을 위해 작업을 멈춰야 한다는 판단이 충돌할 때가 있다. 공사를 진행하면 당장의 일정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서두르다 사고가 발생하면 그 피해는 작업자와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그렇기에 현장에서는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 판단할 원칙이 필요하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든 일이든 자신의 감정과 욕망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흔들 수 있다면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당장의 만족보다 오래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인문정신의 중요한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인문정신이란 어려운 철학책을 많이 읽거나 거창한 사상을 논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선택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피며,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제 생활에서 지켜가는 태도이기도 하다.
물론 안나에게 그런 기준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녀 역시 자신의 사랑이 진실하다고 믿었을 것이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감수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치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면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안나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가족에 대한 책임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함께 지킬 수 있었을지 묻고 싶다.
삶의 원칙은 평온할 때 말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무엇을 지킬 것인지 선택하는 데서 드러난다.
5. 그런데 왜 이 작품은 걸작이라고 불리는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처음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의 이야기가 어째서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이라는 것과 그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이 위대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행동을 모두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을 무조건 찬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관습, 가족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독자가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행동에 분노하는 것 역시 작품을 읽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오래전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도 떠올랐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에 빠져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며 달려든다. 독자인 나는 그의 터무니없는 행동을 보며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 보면 『돈키호테』가 단순히 어리석은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험만을 그린 작품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안나 카레니나』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안나의 행동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작품 전체의 가치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인간의 욕망과 책임, 삶의 의미를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읽은 것은 방대한 원작 소설을 그림으로 압축한 책이다. 원작의 복잡한 인물 관계와 사상적 깊이가 그림책에 모두 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독서에서 느낀 당혹감을 톨스토이의 원작 전체에 대한 최종 평가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독자가 반드시 감동해야 할 의무는 없다.
6. 내가 더 공감한 사람은 레빈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안나와 대조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있다. 바로 레빈이다.
레빈은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서 사랑과 욕망을 좇는 인물이 아니다. 농촌에서 땅을 일구고, 농민들과 함께 일하며, 결혼과 가족, 노동과 신앙의 의미를 고민한다. 물론 레빈의 삶도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 앞에서 망설이고, 결혼생활에서 갈등하며, 자신의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나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곳은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다. 나는 오히려 레빈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과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일을 시작하고, 맡은 일을 책임지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며, 때로는 다투고 화해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이다. 그 삶에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처럼 극적인 장면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삶의 가치가 작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맡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 하루의 일을 무사히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특별한 성취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평범함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해 보일지 모르는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이다.
레빈의 이야기는 그런 삶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안나가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행복을 새로운 사랑에서 찾으려 했다면, 레빈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과 의미를 발견하려 했다. 나는 후자의 삶에 더 마음이 갔다.
7.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안나의 사랑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 그녀와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젊은 날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끼는 설렘이 사랑인지, 보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사랑인지 선뜻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인생에서 여자는 아내 한 사람뿐이었다. 손목을 잡아본 여자도 아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고결하거나 남다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나 가슴이 뛰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생각이 다를 때는 양보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견디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것도 사랑이다.
나는 안나처럼 모든 것을 내던질 만큼 격정적인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아내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감정의 크기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서로를 지키며,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 역시 사랑의 중요한 모습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해도, 한 사람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8. 책을 덮으며 —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도 나는 여전히 안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가 브론스키에게 느꼈던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을 위해 가족과 기존의 삶을 무너뜨린 선택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생을 끝낸 일도 안타깝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았을 다른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무겁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작품을 읽은 시간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나에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과 책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레빈의 삶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문학의 가치는 독자를 반드시 감동시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만나고, 그 행동에 반감을 느끼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따져 묻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평소 **사와생보(死臥生步)**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간다.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있으니 걸어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그 말에 한 가지 생각을 더하고 싶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안나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향해 달려갔지만, 결국 삶을 지탱하던 많은 것들을 잃었다. 반면 레빈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갔다. 나는 어느 쪽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안나의 격정적인 사랑보다 레빈의 평범한 삶을 선택하고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선택한 사랑은 한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젊은 날 처음 손을 잡았던 그 사람과 세월을 함께 보내고, 서로의 주름이 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동안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분명히 안다.
내 아내다.